고난주간을 앞두고 생각하는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요즘 기독교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늘 들어있는 책 중의 하나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이다. 이런 책이 교인들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비단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지만 작금의 현실은 훨씬 그 정도가 심하므로 가히 기독교 신앙의 독약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심정이다.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는 분명히 듣기에 좋은 달콤한 소리이지만 복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소리와 세상의 소리에 불과하다. 이런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독이 퍼져 온 몸이 마비되고 죽어가는 것처럼 성경적인 신앙이 마비되고 순전한 영적생명이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독약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의 방치아래 이와 같은 책들이 교인들의 끊임없는 환호를 받고 있는 현실은 현금의 기독교가 성경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례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이 주장하는 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면 잘되는 내가 보장되는가? 과연 기독교의 믿음은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신념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벼운 내용에 불과한가? 조금만 성경을 정직하게 읽는 사람이면 금방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종한 인간의 죄를 말하고 그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그 믿음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따라가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자기 십자가와 자기죽음과 자기 부인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설득하시고 역사하시고 강권하시는 분이지 자기욕심의 길을 믿음이란 이름으로 걸어가도록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성경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막연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는가?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을 외치는 부류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빌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구절도 긍정의 힘을 말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데 인용되어야 할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감옥까지도 갈 수 있다는 성도의 자세를 말하는 구절이다. 이 고백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그렇게 살면 잘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한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 갈 죄도 없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지만 잘 되는 자신을 포기하고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감옥까지 가 있는 믿음의 사람 바울이 하는 고백이다. 잘되는 나가 아니라 주를 위해 죽고 고난당하는 나를 말하는 구절이다. 앞 뒤 문맥을 조금만 보면 금방 그런 뜻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면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게 주를 믿고 살면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3:20-22),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요15: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이렇게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살면 오히려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미움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앞에 가는 그날까지 언제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히12:2). 그러나 그러한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허락되는 샘솟는 기쁨은 잘되는 나 정도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요 만족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감옥의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바울이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한 것이 그 기쁨이지 않나? 다윗의 고백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고, 내 잔이 넘친다고(시23:1,6) 감격할 수 있는 것이 긍정의 힘으로 잘되는 나가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이 주는 노래이며 감격적인 고백이지 않겠는가? 이 기쁨과 이 감격이야말로 긍정의 힘이 보장하는 이 땅의 곡식의 풍성함과 포도주의 풍성함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지 않겠는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의 풍성함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주는 기쁨보다 더하나이다”(시4:7). 과연 긍정의 힘을 믿고 잘되는 나를 꿈꾸는 자들이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잘 안될 때에도 이와 같은 기쁨과 감격의 고백들을 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막연히 자신의 욕심을 좇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사이비 믿음이며 인간의 신념 중에도 저급한 신념에 불과하다. 인간의 신념도 고급한 신념은 자기긍정과 잘되는 나가 아니라 자기희생을 말하는데 어찌 십자가를 통해서 부어진 기독교의 믿음이 그런 저급한 신념과 동일시 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긍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 늘 부정하는 요소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긍정의 힘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향한 긍정을 죄악 된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향한 긍정으로 함께 묶어버린다. 거기에는 자기부정과 자기죽음과 자기 십자가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너무나 분명한 탐욕이고 죄에 속한 내용이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저질 기독교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히 신학의 실종이요 윤리의 실종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고난주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의 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자기죽음과 자기 십자가와 자기부인을 말씀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이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오스틴이 예수 믿지 않아도 지옥가지 않는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그 죽음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자기부정과 고난당하는 성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고난마저도 왜곡시키고 있는 번영신앙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기독교이며 나아가 기독교의 독약임을 분명히 깨닫는 은혜가 고난주간을 맞아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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