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대안(II):영문밖
히브리서13장10-16절/350장(우리들이 싸울 것은),341장(십자가를 내가 지고)
지난 주일 부산남녀전도회연합회에서 고신,합동,통합총회연합으로 31절기념집회를 가졌습니다. 강사는 김진홍목사였고, 수요일 집회장소가 저희 교회당이었습니다. 제가 축도를 했는데, 축도를 마치자 마자 김진홍목사님이 저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몸살기가 있으시다고 하더니, 좀 힘드셨나 싶었습니다. 예배순서에도 제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예배시간 전에도 소개를 했었고, 축도는 삼일교회 손성은목사가 하겠습니다고 인도자가 안내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축도전 기도할 때, 통합,합동,고신이 이렇게 함께 모이는데,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는 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했었거든요. ‘진홍’이라는 자기 이름을 언급하니까 아마도 정신이 번쩍 들으셨는가 싶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가 됩니까? 우리가 뭐 같아도 그렇습니까? 그렇게 흰눈같이 용서함 받으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참 떡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렇게 용서함받고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영문밖으로 나가신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대안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대안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원리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약제사법을 통해서 영문 밖으로 나아간다는 말의 뜻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10절부터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제사법을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는" 그런 제단이 있다고 합니다. 제단은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구약에는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그 제물의 일부를 취하여 먹을 수 있는 제사가 있고 전혀 먹을 수 없는 제사가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번제(승제)는 제사장이 전혀 먹을 수 없습니다. 짐승된 제물의 그 가죽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고기는 먹어서는 안되고 성막 안, 혹은 성전 안의 번제단 위에서 모두 태워야 했습니다. 다른 제사들, 소제나 화목제, 속제죄, 속건제 모두 제물들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속제죄 중에서도, 제사장이 범죄하였거나 회중들 전체가 범죄하여서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에는 제물된 고기를 절대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 규례가 바로 레위기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2절까지가 제사장의 경우이고, 13-21절까지가 온 회중의 경우입니다.
번제(승제)와 비교해서 그 절차상 똑같은 점과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안수하는 것, 각을 뜨는 것, 피를 받아서 제단에 뿌리는 것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속죄제의 경우, 가죽을 제사장이 갖지 못합니다. 이것도 태워야 했습니다(4장11절). 피를 뿌리는데, 번제의 경우에는 번제단의 사면에만 뿌리는데, 속죄제의 경우에는 성소 안에 들어가서 휘장에 일곱 번, 향단뿔에 바르고 성소밖의 번제단 밑에 다 붓습니다(5-7절). 오늘 히브리서본문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차이는, 바로 각을 뜬 고기를 태우는 방식입니다. 번제의 경우에는 성막 안, 그리고 성소밖인 번제단에서 모두 태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속죄제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장에 붙어있는 기름과 콩팥에 붙어있는 기름 그리고 콩팥은 떼어내어서 번제단에서 태웁니다(8-10절). 하지만, 11-12절을 보면,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태워야 했습니다. 곧 성소 밖, 그것도 진영 밖에서 태워야 했던 것입니다. 21절 말씀도 보십시오. 회중이 범죄한 경우에도 진영 밖에서 제물을 태우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속죄제에서 처리하게 되는 너무 더럽고 추해서 성소 안에서 심지어는 진중에서조차도 태워져서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성소나 진중이 불결해질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약제사법의 배경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성 밖, 골고다에서의 죽음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더럽게 여겨졌었다는 것입니다. 불결하게 여겨졌었습니다. 수치스럽게 여겨졌었습니다. 성문 안에서는 죽을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렇게 죄인 취급당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구약의 이 제사법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고, 히브리서13장12절 말씀대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레위기4장으로 돌아가서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진영 바깥 재버리는 곳"은 더러운 곳입니까? 깨끗한 곳입니까? 1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까? "정결한 곳"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재를 버리는 곳인데, "정결한 곳"이 될 수 있습니까? 재를 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정결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재가 닿는 곳, 곧 그 희생의 의미가 적용되는 곳에 정결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을 때에 그 죽음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닿게 되면 눈과 같이 희어집니다. 이것을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서 죄로 여겨지시는 수치와 능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성 안에서조차 죽임을 당하실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지셨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바로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히브리서13장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셨으므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합니다. "그의 치욕(능욕)"이란, 그가 당한 것과 같은 치욕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나아가자는 것은, 그가 받았던 그 치욕을 받기까지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참으로 진지하게 우리들의 생활 속에 적용시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더럽습니다. 추합니다. 부정하고 불결합니다. 하지만, 영문밖으로 버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재로 말미암아 그곳이 정결한 곳이 되듯이, 우리가 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버려질 때에 세상이 정결한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변혁됩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대안"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어서 ‘영문안’이 ‘이 세상’인 것처럼 말합니다. 앞에서는 분명히 '영문안‘이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구한 도성‘이 없는 곳입니다. ’
‘장차 올 것’이 ‘영문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문밖’에 있으니, 영문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문안이나 밖이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보혈의 은혜가 없으면 저주받은 곳입니다. 그곳을 우리가 변화시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한 도성’이고, ‘장차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동된 자들에 의하여 능욕을 지면서 변화시킨 세상 바로 그 세상이 그 축복이 ‘장차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합니다. 이 찬송은 그냥 입술로 부르는 찬송이 아닙니다. 봄날이 다가오니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게 되는 찬송입니다. 이 세상 재미로 하는 노랫가락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될 세상을 소망하면서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니,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찬송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 증거하는 말이 찬송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는 말이 찬송입니다. 한생명축제주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주연속 진행됩니다. 예쁜 초청장도 만들었습니다. 전도부에서는 정성껏 선물과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치욕을 지면서 영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진정 이 일에 필요합니다. 초청하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능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죽을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능욕을 질 마음을 가지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본문 16절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저희 교회에서 일 년에 네 번씩 갖는 '사랑주일'에 묵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적절합니다. 전도하는 것과 사랑으로 구제하는 것은 언제나 병행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사랑의 헌금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우리의 참된 제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합니다. 마음을 드려 정성으로 헌금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다음주일에는 성찬식도 있습니다. 능욕이나 치욕을 지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한 끼 정도의 금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문화금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소한 이 기간 중에는 신문 보는 것, 티브보는 것, 컴퓨터사용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나를 향하신 은혜를 상고하고 깊은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힘을 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치욕을 질 능력을 받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설문지를 주보사이에 넣어두었습니다. 자기가 나올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을 표시해 보십시오. 적당한 시간이 없으면 그 옆에 그 시간을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어떻게 능욕을 지겠습니까? 능욕을 지셨던 것이 하나님의 대안이셨던 그리스도의 삶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삶, 나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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