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팔복과 그리스도 / 아더핑크

baromi 2008. 1. 23. 11:36

팔복과 그리스도

아더핑크 (씀)

 

    만약 팔복에 대한 묵상이 우리의 생각을 복되신 주님의 인격으로 돌리지 못한다면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위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는 체험적인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형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완전한 본(本)이신 분께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서 발견된 (희미하게 반영된) 다양한 영적 은혜들이 모두 그 분 안에서 가장 밝게 드러나며 가장 뛰어나게 예증(例證)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완전함은 모두 그분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아가서 5:16). 부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을 취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요 16:14,15).  

     

    첫째,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부요하셨으나, 자신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에 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보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고후 8:9) 주님께서 스스로 처하신 그 가난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셨으며 이 땅에서의 삶을 구유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청년기와 성년이 된 후 얼마동안 까지는 목수의 작업대에서 수고하셨습니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후,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음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눅 9:58). 대언의 영에 의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말씀을 찾아보면 주님께서 자신의 영의 가난을 반복해서 하나님께 고백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시 69:29, "오 주여, 주의 귀를 아래로 기울이사 내 말을 들으소서, 이는 내가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니이다"(시 86:1), "이는 내가 가난하고 궁핍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상처를 입었음이니이다"(시 109:22).

     

    둘째,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으뜸되는 애통하는 자(chief Mourner)이셨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는 주님을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로 생각했습니다(사 53:3). 안식일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에 관해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시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올바르게 깨닫도록 훈령(訓令)과 예(例)로 애써 가르치시면서, 주님은 "그들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슬퍼하셨습니다."(막 3:5). 주님께서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고치시기 전에 탄식하시는 것을 보십시오(막 7:34).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을 눈 여겨 보십시오(요 11:35).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슬퍼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 겟세마네의 어둠 속에서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아버지께 기도와 간구를 쏟아 부으시던 주님의 모습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십시오. 두려움과 경이함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애처롭게 청원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이 너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더냐? 내가 당한 슬픔 같은 슬픔이 있는지 보고 또 살펴보라"(애가 1:12)

     

    셋째,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복음서에서 우리는 성육신한 영광의 주님께서 사랑스러운 겸손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대사(大使)로 택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눈 여겨 보십시오. 주님은 지혜로운 자나 학식 있는 자나 큰 자나 고귀한 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중 적어도 네 명은 어부였고, 한 명은 로마 정부에 고용된 천한 세리였습니다. 무리들과 같이 다니시던 가운데 드러난 주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주님은 부유한 자와 명성있는 자를 찾으시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마 11:19).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주님은 고침을 받은 자에게 아무에게도 되어진 일을 말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겸손한 섬김 가운데 있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행하려 할 때 자기 앞에 나팔을 부는 위선자와는 달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를 구하시지 않고, 알려지는 것을 피하시며, 인기를 멀리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주님을 숭배하려고 하자 그들을 피하셨습니다(막 1:45)(막 7:2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와서 자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5) 형제들이 주님께 강권하여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말하자, 이를 거절하시고 은밀히 명절에 올라가셨습니다(요 7:2-10). 주님께서 대언을 성취하시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타내실 때,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슥 9:9)(요 12:14).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예증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내적 삶을 얼마나 잘 요약하고 있는지요! 성육신 전에 성령께서는 "의로 자기 허리의 띠로 삼고"라고 공표하셨습니다(사 11:5).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0:9). 열 두 살 난 소년이었을 때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물으셨으며(눅 2:49),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려 왔노라"라고 밝히 드러내셨습니다(마 5:17).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고 밝히 드러내셨습니다(요 4:34). 성령께서는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시 45:7). 우리는 주님을 마땅히 "주 우리의 의"라고 불러야 합니다(렘 23:6)

     

    다섯째,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이 인격화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하늘의 영광을 이 땅의 수치와 바꾸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바 된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긍휼이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로 데리고 가서 자기 백성을 위해 저주가 되게 한 것은 바로 이 비길 데 없는 놀라운 긍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딛 3:5). 주님은 지금도 "긍휼이 많고 신실하신 대성직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긍휼을 베풀고 계십니다(히 2:17). 따라서 우리도 계속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유 1:21). 왜냐하면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 긍휼을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1:18).

     

    여섯째,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체현(體現)되었습니다.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셨습니다(벧전 1:19). 주님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더럽혀지지 않으셨으며 어떠한 죄의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인성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완전히 거룩하십니다(눅 1:35). 주님은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며, 더럽혀지지 아니하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시고, 하늘들보다 높이 되신 분이십니다"(히 7:26).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요일 3:5). 그러므로 주님은 "죄를 짓지 아니하셨으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고후 5:21). 주님은 순결하십니다(요일 3:3). 주님께서는 본성에서 절대적으로 순결하셨기 때문에, 모든 동기와 행동도 늘 순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라고 하신 말씀은 이 땅에서의 전 생애를 요약한 것이었습니다(요 8:50).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의 복되신 구주(救主)께 더없이 적합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루신"분이십니다(골 1:20).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화해물로, 곧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며,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영광스럽게 하는 분으로 정하셨습니다(롬 3:25). 주님은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엡 2:11-18).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 존엄하심 가운데 다윗의 왕좌에 앉아 계시며(행 2:29-36), "평화의 통치자"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하여 그 왕국을 정비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사 9:6,7).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죄와 모든 타락의 결과로 피폐한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롬 8:19-23). 우리는 주 그리스도께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화평을 회복시키실 때를 확신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벧후 3:13).

     

    여덟째, "의로 인해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에 대해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계시록 12:4에서 볼 수 있듯이, 의로우신 분으로서 주님만큼 핍박을 받은 자는 없습니다. 주님은 대언의 영으로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을 각오가 되었사오며"라고 밝히 드러내셨습니다(시 88:15)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일어나 그분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어 그 도시가 건설된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곤두박질쳐 떨어뜨리려" 했습니다(눅 4:29). 성전 안에서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돌을 집어 치려" 했습니다(요 8:59). 주님의 사역 내내 대적들은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비난했습니다(요 8:59). 성문에 앉은 자들이 주님을 비방했으며, 술주정뱅이들은 주님을 노랫거리로 삼았습니다(시 69:12). 심문을 당할 때 사람들은 그분의 머리털을 뽑고, "그분의 얼굴에 침뱉으며 그분을 주먹으로 치고, 다른 이들은 손바닥으로 치기도"했습니다(사 50:6)(마 26:67). 군인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끌려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죽음에 처한 동안에도 주님은 평안 속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욕과 조롱으로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핍박과 비교할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받아야 할 핍박은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요!

     

    마찬가지로, 팔복에 속한 각 약속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이 가난했기 때문에 왕국은 그분의 것입니다. 이전에 애통해 하셨으나,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사 53:11). 이전에는 인격화한 온유이셨으나, 지금은 영광의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전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으나, 이제는 친히 이루어 놓으신 의(義)가 자기 백성에게 전가(轉嫁)된 것을 보시며 만족해하십니다. 마음이 순결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고 계십니다(마 11:27). 화평케 하는 자로서 주님은 피값을 주고 산 모든 자녀들에 의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계십니다. 핍박받은 자로서 주님이 받으실 보상은 너무도 큽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빌 2:9-11). 부디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더 아름다우신 주님으로 더욱 더 채워주시기를!(시 45:2).

 

- A. W. Pink 箸  [An Exposition of the Sermon on the Mount]에서 발췌 -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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