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4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미약하지만 분별력이 있다.
넷째로, 이 불은 성질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분해하며, 금과 찌끼를 분류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불은 영과 육을 나누고 자연에서 나온 것과 은혜에서 나온 것을 분별해 냅니다.
악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악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선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선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광석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성령께서는 광석과도 같은 우리 안에서 금을 찾아 내실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마치 깜깜한 지하 감옥과도 같아서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혼돈과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에게 비취면 우리는 하나님의 순결함과 우리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결과 분별력을 얻게 되고 겸손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표지 5 끄지 않으실 심지는 하나님의 빛을 즐거워한다.
다섯째로, 사람이 영적일수록 그 사람은 이 빛을 즐거워하며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잘못된 것을 열심히 찾고 그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봉사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실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발견한 빛을 거스르고 행동하게 된다하더라도 그는 곧 뉘우칩니다. 이것이 빛이 그 사람 속에 자신의 협력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다윗이 나발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곧 지혜를 얻게 되고 모든 악한 길에서 자신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삼상25:32)
반면에, 육적인 사람은 그 빛이 자기에게 갑자기 비추어질 때 그 빛이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입니다. 그는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성령께서 그 마음을 굴복시키기 전까지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빛을 거스르고 죄를 짓는 것뿐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는 풀릴 수 없는 적대감이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빛을 아예 거부하거나 그것을 천한 육욕 아래 가두어 둡니다. 이를테면 땅 속에 파묻어 두는 것입니다. 또는 빛을 오용해서 육을 위한 심부름꾼이나 도구로 삼아버려 육욕을 채우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이유들을 찾는데 사용합니다.
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양의 빛을 오용하여 더 크고 더 고결하며 더 많은 양의 천상의 빛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빛을 눈 먼 인도자로 삼아 결국은 전적인 어둠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육적인 사람들 속에는 이 빛이 의지할 만한 협력자가 없어서, 결국 영혼 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요소만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사악한 평안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빛은 늘 그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격정 어린 증오감을 품고 그 빛을 노려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태양이 사람들의 감정을 잔뜩 자극해 놓기만 하고 그것을 풀어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화병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안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둑처럼 들키지 않고 죄를 짓고 싶어서 그 등불을 아예 꺼뜨려 버리는 사악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영적인 빛은 아주 분명하고 그것은 영적인 선(善)을 알아보며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빛은 혼란스럽고 죄를 들추어 내지도 못합니다.
불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타오르는 곳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물질과 싸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빛과 어둠 사이에 풀릴 수 없는 적대감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 영과 육 사이에도 적대감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불이 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은혜는 죄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불은 반대되는 것과 결코 섞이는 법이 없으며 그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며 다른 원소들처럼 오염되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꾀를 내는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영과 육의 갈등을 겪을 때 자기에게는 은혜가 전혀 없다고 자주 불평하지만, 그들의 불평을 잘 들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불평은 시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는 볼 수 없다고 불평하거나 자기는 잠들어 있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은 싫은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기에 나는 것
사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그런 불평 자체는 죄를 싫어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 죄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불평할 수 있습니까?
연기 속에서도 약간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들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만 그 안에서도 약간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들은 약해 보이지만 겉보기에 선한 것들보다 오히려 더 선합니다.
악을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격정적인 것은 비록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냉냉함보다는 훨씬 더 나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예 흐르지 않는 물보다는 흙탕물이라도 흐르는 시내가 더 나은 법입니다. 겉으로 현명한 체하는 욥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온 몸에 병든 욥이 더 많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약점 때문에 흠집이 난 행동들이 보속행위(complemental preformances)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더 많이 입습니다.
표지 6 끄지 않으실 심지에도 미약하지만 활동력이 있다.
여섯 번째로, 불의 규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곳에는 어느 정도 활동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는 방식 때문에 자주 불에 비유됩니다.
육적인 사람들 안에서 시작된 죄는 결국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말지만 영적인 사람들의 경우, 부패말고는 활동이 전혀 없어 보이는 죄에 빠져 있을 때도 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죄의 세력을 깨뜨리는 반대 원칙이 그들 앞에 존재합니다.
표지 7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다.
일곱 번째로, 불이 강철을 부드럽고 유순하게 녹여 주는 것처럼 은혜 또한 그것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렇습니다. 은혜는 마음에 역사하여 그것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선한 생각을 위해 준비하게 합니다.
반면에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꺼져 가는 심지만도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표지 8 끄지 않으실 심지는 미약하지만 선을 행한다.
여덟 번째로, 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옮겨 붙어 그것을 불로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는 다른 사람들 속에 똑같은 인상을 남겨 주기 위해 애쓰며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선을 창출해 냅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조차 은혜롭게 사용하고 그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단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을 은혜를 입은 사람은 거룩하게 행합니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혹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또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부합되도록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