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트레일 목사(Rev. Robert Traill); 영국, 켄트주의 크란브르크 교구목사.]
성화(聖化)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보다 느끼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성화는 중생과 같은 것, 인간 전체의 갱신과 같은 것입니다. 성화란 새 피조물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쌍한 영혼에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고 새겨 넣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 4:19); "우리가 또한 하늘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닮은 사람은 꼭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닮았으면 이 사람을 닮은 대로, 저 사람을 닮았으면 저 사람을 닮은 대로, 그 닮은 사람과 함께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닮은 사람이란 바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입니다.
원래 사람은 첫째 아담과 닮았으며 또 사단을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타락한 첫째 아담은 서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그리고 첫째 아담은 "창세로부터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까요. 첫째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사단의 자녀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모든 자녀들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될 때, 그들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죄 중에서 비참하게 태어났으므로 땅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덤 속에서 썩는 것으로 보아 땅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의해 죄씻음을 받을 때, 하늘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가집니다. 우리가 정화(淨化)되어감에 따라 이 형상은 우리 속에서 점점 커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꼭 닮게 되었을 때, 하늘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완전하게 지니게 되며,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온전히 거룩하여집니다. 그 때는 바로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을 정복했을 때입니다.
성도들이 얼마큼 그리스도 예수와 닮은 것인지는, 부활 때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환하게 빛나는 수없이 많은 작은 태양들처럼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어떤 모습과 같을까요? 비록 물질계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토록 그의 것이며, 그의 특권일 것이지만 우리도 그 주님을 비슷하게 닮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비슷합니까?
여러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로, 그것들은 그 창시자가 같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의롭다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나는 너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흔히 있는 말씀입니다(출 31:13; 레 20:8).
둘째로, 둘 다 값없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기원과 발생에 있어 둘은 비슷합니다. 의롭다 하심은 값없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 5). 둘 다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셋째로, 둘 다 같은 한 사람을 향해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동시에 거룩함을 입습니다. 거룩함을 입은 사람은 동시에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 구속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 복이 기들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시간에 관해서도 서로 같은데, 시간상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말할 때,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항상 동시에 일어납니다. 거룩하게 되기 전에는 사람은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같은 은혜가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같은 수단,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작용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약속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판결을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같은 말씀의 능력으로 거룩하여졌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섯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는데 똑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순서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이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즉, 의롭다함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거룩함을 입지 아니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칭의를 받지 아니한 어떠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거룩해지지 아니한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둘 다 똑같이 필요합니다.
어떤 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다릅니까? 이것은 실천과 일상생활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데, 그 점에서 둘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둘은 많은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또 여러 면에서 다르기도 합니다.
첫째로, 칭의는 사람의 인격의 신분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화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칭의는 범죄자에게 사형선고를 면제해 주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렇지만 성화는 우리의 죽을 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법정에 나온 한 범죄자가 대역죄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동일한 범죄자가 죽을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범죄에 대해 비록 사형 선고를 내릴 재판관이 없다 할지라도 그는 그 병으로 인해 죽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그가 대역죄로 사형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으로 선고를 면제해 주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재판장이 사형선고를 전면적으로 사면해 주었어도 그 사람은 후에 곧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기를, 칭의란 은혜를 베푸는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이며, 성화는 인정 많은 의사로서의 하나님의 행위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둘을 결합시켰습니다. 시편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범죄행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죄악이 너희를 멸망케 아니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이것이 칭의입니다. 또 죄악의 권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 죄악이 너희를 멸망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성화입니다.
둘째로, 칭의는 사람의 의를 평가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 속에 한 의(義)를 주입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칭의와 성화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칭의는 의를 뒤집어 씌움으로 말미암고, 성화는 의를 주입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고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바쳐 죽으시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의는 범죄한 죄인에게는 사면으로 간주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가련한 죄인의 양심도, "예, 저는 그것을 수없이 많이 어겼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그대를 정죄하고 그대의 범죄 때문에 죽게 하지 않는가?" 그 사람은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의 법도 "예"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범한 영혼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소망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복음의 은혜가 이 희망을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이 죄를 지고 우리 죄 때문에 죽은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의는 불쌍한 죄인의 의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셨고 고난당하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우리 대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칭의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성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사람의 영혼 속에 거룩함을 집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의를 주입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구별하는 것보다 훨씬 분명하게 구별해서 의와 거룩함, 이 두 말을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의와 거룩함은 따로 취급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 밖에 있고,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 3:9). 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며, 거룩함은 우리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의는 우리 자신이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니요, 성화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으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함은, 원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우리의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구별했던 점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칭의는 완전하나 성화는 불완전합니다. 둘 사이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칭의는 완전해서, 어떤 정도를 용납지 않으며, 쇠퇴의 여지가 없으며, 중단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화는 이 모든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습니다. 제가 칭의는 완전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은 모두 똑같이 완전히 의로워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만큼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는 모두, 비록 앞으로 천년 후에라 할지라도 꼭 지금만큼 의로워진 것입니다. 칭의는 그 칭의를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완전한 것입니다. 칭의에는 어느 정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즉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이며,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은 것은 은혜를 베푸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조처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래서 칭의는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그렇지만 성화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며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성화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바로 그 시간에 사도 바울은, 오늘 이 시간에 살아있는 어떤 사람보다 더 성화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성화는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납니다. 또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자, 즉 진정으로 성화되어 가고 있는 사람은 그 전보다는 지금이 더 거룩하고 더 성화되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고후 7:1).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의로워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의를 이루어 주셨고 우리는 이 완전한 의 (義) 가운데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조심하고 힘써야 합니다. 천국에 가 있는 성도는 전에 이 세상에 있었을 때보다는 더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완전히 거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전보다 더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라고 해서 이 땅에 있는 성도보다 더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천국에 있는 성도는 그렇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비춰보고 있는 그 빛의 영광이 그것을 더 환하게 더 분명히 알게 해 줍니다.
'조직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우리는 기독교 강요를 읽어야 하는가? (0) | 2007.11.11 |
---|---|
[스크랩]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0) | 2007.10.29 |
[스크랩] Re:`에어훼 아쉐르 에어훼`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0) | 2007.10.09 |
[스크랩] 이광호목사님의 직분론을 읽고 (0) | 2007.10.09 |
[스크랩] 소명과 중생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는가? (0) | 2007.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