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보존
창세기 1장 1-31절
송영찬 목사
이 시대의 교회는 다시금 종교 개혁의 정통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의 합당한 대상이 되어 거기에 뒤따르는 참다운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죄를 이기는 능력의 발휘인 것이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명령을 감심으로 복종하는 삶에 성립되어지는 일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중보자로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재창조 사역에 있어서도 능히 중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1. 사단의 회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림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심으로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파괴하였습니다. 죄는 온갖 혼란스러운 것들을 창조 세계에 초래시켰습니다. 어두움, 터널, 음침함, 불화, 다툼, 질병, 악독 등등. 무엇보다도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속사를 진행하심으로 처음의 창조 역사를 완성하시는 재창조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장구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발전되어져 나왔고,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완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지금의 역사 속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고, 영원한 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재창조 역사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아름다움이 이 교회를 통하여 반영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교회 형편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운 생명력을 발휘함으로 그 아름다움을 반영해 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말씀주의로의 복귀가 여기에 대한 유일한 답변입니다.
말씀주의가 개혁주의 교회의 생명인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들을 세워나감에 있어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말씀을 증거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미사와 같은 예배 의식이 아니요, 오직 말씀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이런 원리에 따라 바울은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가리켜 '구원의 말씀'(행 13:26), '은혜의 말씀'(행 14:3) 등등으로 지칭합니다. 그는 심지어 교회를 이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행 20:32). 이런 원칙 하에서 바울은 어느 날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말씀을 증거해 나가던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여기 데살로니가전서 2:13 본문을 통하여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말씀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말씀주의는 개혁파 교회가 거짓 교회인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돌아섬에 있어서 생명처럼 강조한 명분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표식인 이 말씀주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이 개혁파 교회 안에서 왕성하게 역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절대적인 권세를 발휘하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교회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요, 단순히 기독교적인 종교 행위만이 전개될 뿐입니다.
2. 죽은 교회의 문제
교회가 제아무리 많은 청중들로 구성되었고, 맘모스적인 위용을 갖춘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씀주의를 생명처럼 전개해 나가지 아니하면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기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A. D. 1643,7-1649,2)에서 오랜 토의 끝에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작성되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the Faith) 제 25장 5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과 과오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
본 고백에서 우리를 가슴 섬뜩하게 하는 부분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들 가운데는 사실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 '가짜 교회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말미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이나 그 실제에 있어서는 '사단의 공회'라니 이 얼마나 가슴 철렁하는 놀라운 진술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이 갖는 미묘한 성격상 이런 경우가 이 지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우리는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신 경계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를 성찰해 보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던 당시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었던 어처구니없는 자세를 통하여 나타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백성이 어이없게도 자기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모순의 주인공이었듯이,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극심하게 배척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상에는 가짜 교회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로마 카톨릭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법적으로 가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분명한 가짜로 입증되었던 저들은 개혁주의자들을 도리어 이단으로 내몰았고,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죽음에로 몰아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저들의 핍박에 의하여 그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이미 구속사가 시작되던 초기부터 발생하였습니다. 죄인(罪人)인 가인이 의인(義人) 아벨을 죽음에로 내모는 어처구니없는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를 도리어 가짜로 몰아서 생명까지 빼앗아 가는 이 기가 막힌 모순은 세상이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속에서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에 의하여 자기들 식의 신앙이 전개되게 되면 거짓 교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사데 교회는 그 교회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운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주님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능히 감찰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사데 교회는 사실상 살아 있지 아니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안목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실 때에 이처럼 죽은 교회가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자신을 교회로 나타내 보일만한 외적인 요소들을 그럴듯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 비추인 것은 사실상 죽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혹독한 책망으로만 그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사데 교회를 위로하십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 3:2).
지금 사데 교회의 모습은 약간의 숨만 겨우 헐떡이는 위급한 환자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유능한 의사는 위급한 환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이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은 스스로 죽어 가는 이 절박한 죽음의 때를 모면하라고 사데 교회를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고는 이 시대에 사데 교회의 전철에 빠져버린 자칭 교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3. 죽음을 모면하는 교회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반드시 죽습니다. 여기서 잠깐 교회의 수명(壽命)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통상 생각하기를 교회가 어느 한 지역에 유형적으로 출현하면 이후부터는 간판을 내리거나 흩어지지 않는 한에는 영원불멸토록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교회가 그 역사적 전통을 길게 가졌으면 가졌을수록 상당한 위엄이 있는 교회인 듯이 평가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지역 교회는 영원히 그 생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각기 나름대로 저마다의 수명이 있습니다. 지상의 어느 한 지역 교회는 일정한 자기 수명을 살고 나면 필연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죽음이란 것이 지역 교회가 간판을 내리거나 건물을 철거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적으로는 교회인 듯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도리어 어떻게 보면 외적으로 상당한 부흥(?)에 이르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경우 컴퓨터로 관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교인들로 구성된 가운데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짓고, 각처에 기도원을 세우고, 심지어 교회 묘지까지도 갖추었을 수 있습니다.
11시 예배 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도처에서 사람들을 실어 날라야 하는 대형 버스들을 수십 대씩 운영할만한 재력이 있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이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단체가 교회로서의 표식(標識)과 속성(屬性)을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은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교회는 그 생명력이 유기체적인 성격에서 찾아지는 특성상 정도 이상의 덩치로 부흥하면 필연적으로 변질되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은 교회' 혹은 '교회의 수명'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다'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 안에도 여전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핵심인 즉은 그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상호 성령님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합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다운 교회적 속성들을 구현해 낼 수 있어야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 죽은 교회들이 많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네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였지만, 개혁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회였지 결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 안에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처럼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교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적 생명이 없는, 경건의 능력이 없이 다만 그 모양만 갖춘 바, '살았다 이름하나 사실상 죽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개혁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혁 운동을 위한 명분을 제공하였습니다.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외경이라고 하는 괴이한 문서가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고, 역사적으로 전달되는 교회의 전통과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연옥설이라고 하는 괴상한 교리가 가르쳐졌고, 교황이 전 세계의 정치 권력을 지배하고 높임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온갖 말로 다할 수 없는 부패로 얼룩져 버렸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까? 과연 어떤 교회가 살았다 이름하나 실상은 죽은 교회로 나타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여 이러한 모순을 답습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은 "그러면 교회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의해서 그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교회의 표지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얻게 됩니다.
교회의 표지를 제시함에 있어서 개혁파 교회 안에서도 간혹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을 답습하는 잘못된 경우가 있어서,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통일성 등등의 교회의 속성들을 교회의 표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혁파 교회는 ① 말씀의 선포 ② 성례의 신실한 집행 ③ 권징의 시행 등 이 세 가지를 교회의 표식으로 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다시금 종교 개혁의 정통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의 합당한 대상이 되어 거기에 뒤따르는 참다운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죄를 이기는 능력의 발휘인 것이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명령을 감심으로 복종하는 삶에 성립되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중보자로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재창조 사역에 있어서도 능히 중보자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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