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스크랩] 도올은 도올이되, 썩돌일 뿐이다

baromi 2007. 5. 14. 09:19

역시 무식한 도올 김용옥이가 그 무식함을 드러내었다. 그 무식함의 전모를 아래에 옮겨 놓는다. 참으로 그는 무식하다. 간단하게 그의 무식함을 지적해 보겠다. 푸른 색의 글이 나의 것이다(홀리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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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발제문 전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홀리죠이)도올의 전제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 일반을 비판하는 그의 비판은, 일종의 강요이고, 이해없는 신앙적 강요이다. 그 강요를 좀 자세히 살펴보자.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홀리죠이). 기독교신앙이 다른 신앙과 다른 것은, 결코, 기독교신앙이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며, 내면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오해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신앙은 보편적,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면적, 개인적 차원을 포괄하는, 전사회적이고, 전우주적이며, 전일적인 것이다. 그것을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으로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개인이 합해져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우선되면서 개인적 신앙이 강조되는 것이 바로 성경과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이다. 도올의 말은 요란한 자갈소리일 뿐이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홀리죠이). 도올의 실존적 사실은, 원자적이다. 원자적 실존은, 이기적이다. 그런 이기적 원자적 실존으로는 국가의 구원을 논할 자격도 없고, 의미도 없다. 그런 구원은 결국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원자적이고, 실존적이며, 이기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참된 진리와 종교가 없다면, 대한민국에는 가능성이 없다. 성경은 선포한다:"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이 구절이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백성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신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신앙에 대한 비판(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이해를 빙자한)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어찌 한국교회는 이런 어리석은 자와 한 판 대담의 기회를 주었을까? 인간개인을 존엄의 지상으로 삼는 그런 시민사회의 비극과 멸망을 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신앙을 논하는 자리에 섰을까?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하는 제도적 법적 권위"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개인이 신이라는 진리 자체에 복속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도올은 지금, 진리의 진리 자체 되시는 신과 제도적 법적 제도를 혼동하고 있다. 어리석은 인생이여. 돌은 역시 돌일 뿐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홀리죠이). 도올의 실존이 만나는 하나님은 도올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그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가족의 하나님이고, 어떤 민족의 하나님이고, 어떤 나라의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개인, 어떤 단독자, 어떤 실존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기도는, 실존적 고뇌의 기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였었다. 어찌, "아버지"를 모르는 자가 "우리"를 알랴!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를 제대로 알 지 못하니, 아, 애재라, 통곡이라. 꽉 차지 않은 깡통이 요란만 하니, 공자도 웃을 일이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홀리죠이). 누가 기독교를 민족종교라고 했는가? 도올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찌르는 짓과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가 이제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니....도대체 어떤 기독교를 말하는가? 그의 모친이 권사라고 하더니, 그의 모친의 기독교가 그러한가? 유대교의 아류로서의 기독교만 비판하는 것은, 참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개독교를 기독교로 알고 비판하는 것은, 개독교비판자들의 그 혓바닥에 침샘만도 못한 짓이다. 오 그대여, 그대 모친의 가슴에 못을 박은 자여, 그대 모친이 아마도 그 가슴에 못박힌 것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그대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로다! 기독교를 알아도 제대로 알고 비판하라. 그리하면, 아마도 그대는 한국교회에서 존경을 받을 것이니라.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홀리죠이). 한신대학 신학부 학부실력이 드러난다. 그의 주장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이미 했던 바이다. 구닥다리주장이라는 셈이다. 도올이 말하고 있는,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라는 그 주장 자체가 '교리"이다. 그는 지금 교리적 주장을 하면서 교리를 부정하고 있다. 도덕경의 첫머리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고, 그 첫머리의 주장이 허구인 줄 아는 이는, 도올의 말도 허구인줄 담박 알게 된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배타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교회운동 밖에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교회운동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주장한다. 제외될 사람 없이 포괄성(inclusiveness)을 갖고 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로새서3:11). 도올같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임을 선포하는 운동이 바로 기독교의 교회운동이다. 기독교를 폄하치 말라. 그대 마음의 편협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교회공동체운동은,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보편적 정서 뿐만 아니라, 교리도 포함한다.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지 말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로 궁하여 통하라!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홀리죠이). 참으로 가관이다. 누가 그대의 에너지를 할애해 달라고 했는가? 그대를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생각에 그대의 에너지를 집중하라. 하지만,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 그대는 마귀의 자녀임을 예수님이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예수는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생각하던 자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하였다(그대의 요한복음8:44). 그러한 예수를 욕하라. 편협하고 독선적이라고 비판하라. 나는 그런 예수의 솔직함을 좋아한다. 예수를 나의 스승이라고 적당히 존경해 주는 척 하면서, 그의 뒷통수를 까는 짓거리에 역겨움이 있을 뿐이다. 모든 종교의 공존을 주장하는 그 주장은 바로 얼마나 독선적인 주장인가! 참으로 공존을 그대가 주장하고 싶다면, 잠잠하라. 그대의 잠잠함으로 그대의 공존을 주장하는 그 주장에 힘을 더하라. 누구와의 공존인가? 거짓과의 공존을 주장하는가? 모든 종교인들과 더불어서 공존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와는 공존할 수 없다. 그대가 지금 역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 아닌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스스로의 말에 가증함을 더하지 말라.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홀리죠이). 도올의 인간이해는 참으로 천박하다. 무종교 자체가 종교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앞의 모든 종교가 공존해야 한다고 한다면, 나쁜 종교와도 공존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종교가 나쁜 경우도 있다. 인민의 아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잘 알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성을 관성이라고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그 관성으로서의 종교성은 그대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그대를 부인하는 짓이다. 어차피 종교가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다는 도올의 관찰 자체가 30,40년 전의 얘기이다. 사회학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그렇게 죽어가는 것 같던 서구의 기독교가 다시 탄력을 얻고 있는 것을 관찰하면서, 사회학자들은 경이로움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알고 있는 흐름 가운데서 살면서 망하고 싶다면 망하라. 그대는 진화하여, 종교없는 신이 되어서, 영원히 자존하라. 스스로의 세계에서...어찌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이라고 폄하하는 것일까? 꼭 기독교가 식민지종교인 것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한국기독교회사를 아는가? 일제의 식민지세력에 저항했던 그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홀리죠이). 도올의 할아버지와 도올은 모두 사람이라는 면에서는 동등하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상투끝을 잡고 도올이 흔들 수가 있을까? 도올은 말장난을 잘한다. 나무에 있어서도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잎이 있으며, 꽃이 있고, 열매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동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동등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뿌리가 없으면 줄기가 없고, 줄기가 없으면, 잎이 없고, 꽃이 없고, 열매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와 열매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교회가 성경을 존재케하였다는 발상이 도올의 발언 뒤에 있다. 교회는 성경을 인정했던 것이지, 창조했던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을 창조했다면, 그 교회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교회는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였을 뿐이다. 교회의 뿌리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기록하였던 선지자와 사도들이 바로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 뿌리에서 나온 사본들이 어떻게 뿌리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뿌리가 감춰져 있다고 해서, 뿌리가 없다고 해야 할까? 나무가지만 보고, 잎만 보고, 열매만 보고, 뿌리를 보지 않으려는 자세나, 그 잎과 뿌리를 동등하게 보려는 자세는, 참으로 어린애라도 웃고, 지나가는 똥개도 웃는다. 아마도 도올네 동네의 똥개들은 웃지를 않는 모양이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홀리죠이). "이해"를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다. 문제는, 거짓된 이해를 참된 이해인 양 오해(misunderstanding)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오해로서의 이해가 무엇인가? 바로 모든 종교가 제식에서 출발되었다는 오해이다. 만일 모든 종교가 제식에서 출발되었다면, 그 제식은 어디에서 출발되었는가? 도올의 이해는 그것에서 멈춰버렸다. 마치 제식이 빅뱅(big bang)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어린애라도 질문한다. What did cause the big bang to be big-banged? 그런 이해가 없는 도올의 이해는 오해이다. 자신의 오해를 이해라고 강요하니, 얼마나 독단인가? 자신의 오해를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오, 이 오만한 횡포여, 이 현대시민사회에 있는 독단적인 도그마티스트인 도올이여, 그대는 지금 어떤 사기를 벌이고 있는가!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홀리죠이). 자신의 "오해"를 '이해"라고 보는 이 무지와 오만의 실체는 무엇일까?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면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 무지막지한 발언의 동기는 무엇일까? 그대의 '이해'가 '오해'일 뿐이라는 나의 비판을 받아들일 때, 도올은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올은 자신이 비판하는 그 비판에 빠져들 것이다. 남을 향하는 손가락이 하나이면 자신을 향하는 손가락이 네 개라는 흔한 말이 여기에 적당하다. "이해있는 신앙"이 필요하지만, "오해있는 신앙"은 사양한다. 그대의 또 다른 오해는 바로 윗글에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고 하는 말 자체가 도올 그대의 "믿음"이다.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아는 것의 대상에 대한 선험적 경험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경험들에 의해서 지식 이전에 이미 감정이나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지식에는 그 지식의 전제로서의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그대가 철학을 했다면, 이미 오래된 정설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보라, 그대가 존경하는 화이트헤드의 글을 보라. 도올 그대의 그런 주장은 바로 오해인 것이다. 오해가 아니라면, 편견인 것이다. 선입견이다. 그디가 참으로 정직한 지식인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것이 아니며, 이해의 대상이다.' 곧, 성서는 믿음의 대상이고, 또한 이해의 대상이다. 그대가 "이해있는 신앙"을 주장하려면, 참으로 "이해"하라. 그대의 "오해"를 "이해"라고 착각하지 말고 또한 강요하지 말라. 그것을 일러 독단이라 하고, 위선이라고 한다.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
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홀리죠이). 그가 말하는 "핵심인사이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가 몇 번 교회당을 들락거렸고, 소위 권사직분을 가지고 있는 모친을 두고 있다고 해서,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한국기독교의 "핵심인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일까? 신학대학 학부 몇년 다녔다고 "핵심인사이더"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홀리죠이는, 한국에 있는 교회당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핵심인사이더"인가? 그는 말장난이 심하다. 이런 말장난으로 어떻게 그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거짓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같은 말장난이다.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운동의 건전성을 염려하고 있는가? 그가 과연 진정한 담론을 소망하고 있는가?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절단시켜 놓고 있는 그대가 말하는 그 "자유"는 무엇인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자유"인가? 신학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님이 "핵심인사이더"라고 주장하는 그 거짓된 "교회"는 파괴하라. 그리고 홀로 즐거워하라. 하지만, 이것을 알라. 님의 신학으로는, 아니, 그대의 그 말장난으로는, 그대가 결코 "핵심인사이더"가 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유가 통일되고 하나가 되는, 참된 교회에 대해서는 티끌을 날리는 것도 아니된다는 것을.

 

산도올 홀리죠이

주후 2007년 5월 12일.

量霧裏에서 탈고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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