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시편찬송의 중요성

baromi 2006. 12. 28. 06:47
출처 블로그 > 신학
원본 http://blog.naver.com/pleeq/80018182513
[기독교보 2001년 4월 18일자에 게재 되었음]

지금 “21세기 찬송가”의 발행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찬송없는 신앙생활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찬송을 해야 한다는 자체에는 어떤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떤 찬송가를 공예배에 부를 것인가”이다. 저마다 다 취향이 다르고 교단마다 정서가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고신교단은 어떤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본인은 시편 찬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에서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엡 5: 19).” 찬송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이 부르라는 찬송은 부르지 않고, 인간들이 만든 찬송을 더 좋아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시편이 인간이 지은 다른 노래와 명백히 다른 점은 시편은 신령한 혹은 영감을 받은 노래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은 많은 노래도 영감이 있는 노래이기는 하지만 시편은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노래라는 점에서 다른 노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둘째, 개혁주의 전통이 이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만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었던 신앙인들이었다. 찬송에 있어서 성경은 분명히 시편찬송을 명하고 있기에, 그들은 시편찬송을 온 성도들에게 회복시켜주었다. 물론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국어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였다.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시편 찬송을 들었던 자들이 바로 개혁주의자들이었고, 칼빈주의자와 “시편을 부르는 사람들”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설교와 더불어 “시편찬송”은 예배갱신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 소중한 개혁주의 전통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하게 되었다. 19세기부터 인본주의에 근거한 다른 찬송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시편찬송의 자리를 다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찬송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558장이나 되는 찬송 중에 시편찬송은 단 6개뿐이다(17, 24, 73, 433, 437, 479). 겨우 1%를 넘길 정도이다. 더구나 17장은 시편 138편에 근거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율로 작곡된 것인데도 대부분의 찬송가 해설서들은 여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찬송에 대한 신학적 빈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한 예라 하겠다.

새로 제정될 “21세기 찬송가”에는 아름다운 시편 찬송이 지금 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해서 개혁주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는 고신 교단이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찬송가 위원회에 소속된 우리 교단의 회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더욱 큰 책임을 갖는다고 하겠다.

비록 “찬송가”는 우리 교단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개혁주의 입장에서 통일된 찬송가를 만들어지지는 못하더라도, SFC가 발행하고 있는 “시와 찬미”는, 개혁주의 정신에 맞게, 제목도 “시편과 찬미”로 바꾸고[“시와 찬미”라는 표현은 성경의 불분명한 번역에 근거하고 있다], 바꾼 제목에 걸맞게 좋은 시편찬송을 발굴하여 자라나는 학생 신앙 운동원들이 부를 수 있도록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롭게 개정된 “시편과 찬송”을 “찬송가”와 병행하여 사용하기를 제안해 본다. 그렇게 된다면, 찬송에 있어서 세대간의 간격을 극복하고 어른과 젊은 세대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혁주의는 이론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