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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5):주여,주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baromi 2006. 12. 21. 09:15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5)

주여, 주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언약적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다. 언약은 세 분 사이에서 맺으셨으되 한 하나님이시기에 어김없이 성취하신다. 그 성취의 과정이 창조언약,아담언약,노아언약,아브라함언약,모세언약, 다윗언약을 통해서 예언되어 왔고, 새언약에서 성취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 성취된 언약이 마지막으로 대완성될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대완성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재림때이다. 만물이 목을 빼고 그 절정의 때에 일어날 무대속의 주인공을 주목하고 있다. 왜 삼위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오랫도록(주께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습니다만!) 구속의 드라마를 계획하시며 작정하시고 또한 집행하시고 적용시켜오시는가? 삼위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는 인생들을 보면서, 천사들이 궁금해 하고(벧전1:12), 또한 만물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8:19-22). 주님께서 과연 무슨 일을 이루실 것인가? 어떻게 그 일을 완성시키실 것인가?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에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그를 히브리서에서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했는데(1:3), 형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카락테르인 것이 흥미롭다. 이 말에서 영어의 character라는 단어가 나왔다. Character가 무엇일까? 원래는 scratching, 혹은 engraving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진흙 같은 것에 도장을 새겨서(scratching, engraving) 찍어내면 그 도장에 있는 글자나 그림이 그대로 찍혀서 나오는 것에 유래했다. 타이프라이터에 A라는 글자를 치게 되면 종이에 찍혀 나오는 글자가 A이다. 그렇게 찍혀져 나오는 그 그림이나 글자가 바로 character이다. 히브리서13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동일본질이시라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참으로 많이 전화(轉化)되어서, 연극이나 영화의 출연인물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또한 어떤 사람의 도덕적 특질을 나타내는 성품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이런 개념들 간에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일까? 단어들마다 들여다 보면, 그 밑에 엄청난 역사와 사건들이 숨쉬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파고 들어가 보는 것이 일종의 지식고고학 (archeology of knowledge)이다. 이런 고고학적 작업이 갖는 문제점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구원의 무대에 주인공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것처럼, 이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참으로 무시되어서 안되는 것은 성품의 윤리’(ethics of character)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의 성품(character)을 닮아감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퓌세오스)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다고 한다(벧후1:5). 베드로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이 퓌세오스라는 단어는 physics라는 영어로 바꿨지만, 같은 의미를 가진 라틴어와 관련해서 자연본성을 의미하는 ‘nature’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성품이라고 번역하였으니, 우리 말의 이 성품이라는 말 속에는 동일본질이라는 말이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라는 의미와는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하여 그 영광에 이르게 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이 그 몸을 순결케 하고 깨끗케하여 주를 바라보면서 닮아져서 그와 같아졌다고 할 그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지만, 하여튼 놀라운 변화이고 영광스러운 변화임에 분명할 것이다.

 

영광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중생하여, 새로운 본성과 기질을 갖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보내심을 받게 되는 일이 있고, 그 일을 위하여 성령도 보내심을 받았고 그 성령께서 또한 성부와 성자의 파송명령을 우리들에게 마음의 심비에 각인시키신다. 그런 자들은 살아가는 곳마다 선교현장이고, 하나님의 일터이다. 성과 속이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날과 절기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현재 발을 딛고 있는 그 땅이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지배와 통치가운데 들어가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할 가나안땅이다. 그 땅이 바로 성도들에게 물려질 기업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공동상속자로 임명된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어떻게 그 소유권을 확인할 수 있을까? 바로 온유함으로서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5:5)라고 지상에서 가장 온유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구속의 대드라마의 인물들(characters) 중에서 주인공들 중에서 주인공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character)를 닮아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땅과 이 기업의 소유권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내가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나를 제사장 삼으시고, 선지자 삼으시고, 왕 삼으셔서, 나를 통하여 이뤄가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드라마 가운데에 한 인물(character)로서 발탁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성품(character)이 어떠해야 할까?

 

나의 성품(character)는 나의 기질 속에 형성되고 또한 자라가는 덕(virtue)에 의해서 결정된다. 드라마의 인물(character)이 그 드라마 속에서의 역할’(role)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또한, 이 덕(virtue)라는 것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행동과 관계된다. 덕은 삶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기질(disposition)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 기질로서의 성품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도록 자라게 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과도 같다.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도시를 세워가실 것이다. 거듭난 자는 바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11:10) 이 성을 바라본다. 한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바로 그곳이 그의 본향이다.만물이 새로워질 때에 모든 문화도 새로와 질 것이다. 이전의 문화들 속에서 어그러지고 거스려져 있는 못된 성품들이 흠없고 점없이 변화될 것이다. 그렇게 변화될 새로운 존재, 새로운 문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류가 완성되는 그 날을 약속하셔서, 우리에게 언약하시되, 우리의 기질 속에 그 언약을 새겨놓으신 것이다.

성품과 기질이 변화된 것이 없이 이 땅을 볼 수 없다. 또한 들어갈 수 없다. 성품과 기질이 바뀌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문화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언약의 문제는, 오히려, 이렇게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가? 맺지 못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맺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기도하게 될 것이다.

 

주여, 주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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