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14)
언약의 비무장지대(DMZ)
하나님과의 내재적 교제 속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된 어떤 개인 혼자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그의 몸에 참예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내재적 교제 속에 참예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이고, 그런 잔치의 공동체가 바로 신부처럼 단장한 “새예루살렘”이다. 이런 공동체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중생”으로 시작되고, 이 “중생”이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에 강조하는 표현이라면, 이런 주권의 역사를 통해서 죄인 편에서의 회개와 믿음의 결단의 측면을 표현한 것이 바로 “회심”이다. 이 회심이 개인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신인류(New Humanity)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문화”가 강조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중생하지 못한 타락한 세상의 문화는, 크게 나눠서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문화와 “통제”(control)를 지향하는 문화로 나눌 수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간사상의 두 가지 난제, 곧 하나(One)와 “여럿”(Many)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하게 되면, 본질과 이상의 세계, 불변의 원리로서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그것은 법이라는 수단에 의존하게 되어서 일종의 법치적 독재통치에 이르게 된다. 민주사회의 모양을 취하면서도 결국 그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모더니즘의 이상이 여기에 있었다고 이젠 그 폐해에 대해서 반발이 심한 요즘이다. 이에 반발하는 포스터모더니즘은, 유일무이한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특이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 “자유”가 극대화되어서 기형이 될 정도이다. 자유의 한계를 철폐하고 그 극단에까지 이르러 이젠 모든 것이 어떤 개인의 쾌락의 충족, 행복의 추구에 달렸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자아실현의 윤리가 강조된다. 문제는, 그 자아가 개인주의적 자아이고, 자기욕구와 욕망의 표출로서의 자아라는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던사회의 자아를 “표출적 자아”(expressive self)라고 부른다(찰스 테일러, The Source of the Self).
개인의 자유와 법에 의한 통치, 이 둘의 관계가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하나”와 “여럿”의 관계, 현상과 실재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 지가 중요하게 된다. 이 둘의 영역의 중간에 있어서 그 둘의 마찰을 상쇄시키고 일종의 완충역할을 했던 것이 사라져 버린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비무장지대(DMZ)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한쪽으로는 개인주의가 그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 남은 힘을 소진시켜서 기어이는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의 나락에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영원을 잊고 또한 시간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또 다른 편에서는 기회가 있는 대로, 이런 방자한 시대 속에서 그래도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꼬드기면서 지구촌의 대의와 이상의 기치를 내걸고 ‘나의 투쟁’을 외치는 히틀러들이 생긴다. 국가주의의 이상이 그것이다. 이전 사회에서는 이 공백을 명예(honour)와 덕(virtue), 내적 기질로서의 성품(character)을 강조하는 윤리가 차지하고 있어서 양극의 충돌을 완충시켜왔었다. 그런데, 이 덕의 윤리의 완충지대로서의 DMZ가 사라져 버려서 이 두 세력이 벌거벗은 채로 그 힘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쁘띠-브로쥬와(소시민)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셋이면서 하나인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꿈과 비젼이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다. 다양성의 이름으로 실재가 희생되어서도 안되고, 실재와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가 무시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자기현시이다. 그는 독재자도 아니고, 방관자도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삼위 안에서 사랑으로 언약을 체결하시며 그 체결한 언약을 사랑과 공의로 성실하게 성취해가시는 주권자이시다. 삼위(three persons)의 의미가 이렇게도 소중하다. 세 분(three persons)이면서도 한 하나님(one being)이시다.
그 영원 전에 체결한 언약을 시간과 역사 속에 반영하시면서 작정하신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언약을 통하여 기질과 습성으로서의 성품을 그 언약을 맺은 자에게 주시는 것은, 그 법을 내면화시켜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를 이뤄가시겠다는 뜻이다. 율법의 내면화, 이것이 바로 새언약이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아니라, 바로 마음의 심비에 새겨진 율법이 새언약인 셈이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롐31:33).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요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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