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3)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 속으로의 교제에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에 대해서 유한한 인생이 바늘구멍만큼도 탐구할 수 없다고 한다. 단지, 그 하나님이 어떠어떠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한다. 동방교회신학의 특징이다. Gregory Palamas(AD 1296-1359) 같은 이에게서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essence or nature)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단지 그 분의 활동들(energies)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계시된 것에 집중하고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는 동기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의 문제점은 분명하다. 하나님 당신께서 삼위 안의 내재적 관계를 계시하였는데도 그것에 대해서조차 무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나 삼위의 역사 내에서의 경륜적 관계가 영원한 삼위의 내재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칼 라너의 기본명제)이라고 본다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성자의 낳으심과 성령의 나오심, 그리고 성령의 영광돌리심은 시간과 역사 속의 사건이기 이전에 영원 속에서의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구속경륜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보다는,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 당신의 삼위 안에서의 내적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당신의 모든 본질(essence)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계시하신 그 본질만은 알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시된 본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옷깃을 여미는 경건함과 조심스러움으로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된 부분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또한 묵상하는 중에 그 계시된 것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시켜가야 한다. 동방교회의 부정의 신학을 반대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성자의 낳으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경건에 어떤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내재적본질의 계시인가? 성령의 나오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경건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계시인가? 그리고 성령의 영광돌리심은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어떤 도전을 던져주는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계시인가? 새로운 기질이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중생, 사명적 삶,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그것이라고 간단히 스케취하였다.
그 중에 성자의 “낳으심”(generation)과 그리스도인의 중생(regeneration)의 관계에 대해서만 약간 더 살펴보자. 나머지의 것에 대해서는 각자가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자의 “낳으심”과 그리스도인의 “중생”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독생자”(monogenes)로 불리워지는 그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가장 잘 아는 성경구절을 예로 든다면, 바로 요한복음3장16절에 나오는 “독생자”와 그 맥락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이 구절은, 바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더불어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겠노라”고 하시는 말씀 중에 기록된 것이다(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사도요한의 말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구구하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1장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monogenes)의 영광”에 대한 언급은 바로 그 앞에 기록된 1장12절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나님께로서 난(egennethesan) 자들이니라”는 선언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들의 “유일하게 낳으신 바 된 것”(독생자)과 죄인들의 “다시 낳아짐”(중생)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로서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관계가 “낳으심”으로 표현된 것일까? “중생”없이는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은, 그저 어떤 하늘공간에 있는 “하늘나라”에 가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그 첫번째 편지 서두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한 그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사귐은 하나님의 경륜적 활동을 통해서 계시된 그 역사를 통해서 혜택을 누리는 차원에서만 아니고, 바로 그 내재적 본질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이다. “중생”없이는 바로 이런 것을 알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바로 이런 영광 속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성자의 “낳으심”이 성도의 “다시 낳으심”을 가르킴으로 인하여 바로 하나님의 내적 본질 속으로의 교제에 참여케하는 바로 그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초청인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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