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스크랩] Re:뽁음과 복음의 제대로 된 구분-제대로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3)

baromi 2006. 11. 27. 10:52
계속해서 정낙원님의 글의 모순과 비성경적인 주장을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리만이 이길 것입니다.

(정낙원님)
단언코 말하지만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자들이오.
악령이 성령으로 가장하여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끝까지 예수가 다 이루신 것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육신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이요.

(양무리의 반박)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다"고 정낙원님은 말하고 있다.
"말씀"이 무엇인가? "말씀"은 바로 성령님이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자증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한다(딤후3:16-17).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한다. "기록된 말씀"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 곧 성령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된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정낙원님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적반하장이다.

바울사도는, 말씀이 기록된 것은, 모든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려 함이라고 하는데, 정낙원님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성령이 그 속에 없다고 한다. 도대체 정낙원님은 바울사도보다 더 뛰어난 계시를 받았는가? 아니면 바울사도의 말에 순종치 않으려는 교만의 영을 받았는가? 그가 '성령'을 말하지만, 과연 그가 '성령'을 아는가?

성령의 기록하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을 악령이라고 하니, 성령을 악령이라고 하는 이가 바로 정낙원님같은 분이 아닌가? 참으로 성령을 악령이라고 하고 악령을 성령이라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다.

(정낙원님)

예수의 영인 성령은 오로지 예수를 붙잡게 하지 인간들더러 말씀을 지키라고 하지 않소.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들은 즉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들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하는 육신의 법으로 살지 않고, 내 대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지키셨구나 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요.
그런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거듭나지 못한 자는 즉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자는 자꾸만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요.

(양무리의 반박)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지켜서 온전케되고 온전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디모데를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면서 권면한다.

과연 정낙원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아실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을 자기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하면서,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그 말씀 속에 행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핑계인가? 얼마나 자신의 영적 무지와 게으름을 합리화시키고 있는가?
예수님을 핑계대면서 성령님의 말씀을 부인하다니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싸우기라도 하더란 말인가?

보라, 정석원님아, 여기 성령님의 기록케 하신 말씀을 들으라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2:12)

바울사도가 말하기를, "합당히 행하게 하려고" 성도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성도가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멍청한 주시"로 끝난다고 보는 것은, 참으로 멍청한 해석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그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바로 예수를 올바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함이다. 그렇지 않는가?

(정석원님)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지 라는 믿음 즉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런데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예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양무리의 반박)

참으로 괴이한 해석이다. 바울사도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석원님은, 기이하게도,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지 라는 믿음 즉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할 때의 "영의 일"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지 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을 강조하니, 옳은 듯 하면서도 믿음만을 강조하니, 그릇되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8장5절에서 말하는 "영의 일"이란, 8장의 전체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4절에서 말하는 "율법의 요구"라고 해야 한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법"이 나오는데, 그 "하나님의 법'이 "영의 일"이다. 육신에 속한 자들로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영에 속한 자들 된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할 때에 그 요구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그런데, 정낙원님은 "영의 일"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지 라는 믿음'이라고 한다. 이근호목사의 신학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고, 그 독에 변질되어도 한참 변질되었다. 그냥 변질되는 것은 문제인데, 그 변질된 "뽁음"으로 '복음"을 호도하니 그것이 문제이다.

성경말씀을 비틀고 뒤틀어서 자기신학을 끼워넣고 있다. 참으로 못된 짓이다.

(정낙원님)

그럼에도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육에 속한 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원수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이 연약하여(즉 죄인들이 지킬 수가 없어서), 예수님에게 대신 지키라고 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오.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양무리의 반박)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 그래서 그 법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왜 간과하는 것이지요? 한쪽만 보지 말고 양쪽 다 보세요.

(정낙원님)

그러니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 무슨 짓거리를 하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설령 말씀을 지켰다고 할지라도,,,,,

(양무리의 반박)

"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면 님의 말씀이 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입니까? 어찌 긁어도 긁을 곳을 긁어야 하지 않겠소? 쳐도 향방을 정해서 쳐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허수아비를 쳐본들 그 허수아비가 님을 향해서 허허 웃고 있을 뿐이겠소. 친다고 수고했소이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 그러하다면, "성령에 속한 자들"은 어떠하오? 성령에 속한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기록된 그 말씀을 따라서 행할 때에, 그것을 행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보는 님의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어떻게 장담하시오?

육신에 속한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옳소만, 지금 손무성목사나 제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에 속한 자가 행하는 바,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고 한 말씀을 님은 또 어떻게 왜곡하려고 그러는 것이요? 이 구절을 찢어버리고 싶은 것이요?

이근호성경이라도 만들고 싶은 것입니까?
정낙원성경이라도 만들고 싶은 것입니까?

(정낙원님)

왜? 인줄 아시오. 하나님은 죄인걸 받지 않으니 죄인이 아무리 하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양무리의 반박)

다시 말하거니와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님은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령에 속한 자들도조차도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무성목사가 인용한 스바냐서의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적 제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뻐하시는 제사를 설명하면서, 바울사도는, 성도의 어떻게 행하여야 할 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장1절부터 21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그 중에 한가지만 듭니다. 제일 마지막절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하는 그는 바로 앞에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은 다 내가 지킨 것임을 믿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권하고 있습니까?

이런 권면을 무시하는 님은 바울사도보다 더 영감이 있는 자입니까?

바울의 교훈을 변개하여 그가 선언했던 저주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낙원님)

그래서 이젠 내가 지켜야 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지켰다는 것을 믿게 해주는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고 아직도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귀새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동일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되오. 끝까지 예수가 다 하셨다는 것을 붙잡는 게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이란 말이요.)"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양무리의 반박)

님은 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마귀새끼"라고 단죄하지만, 나는 오직 판단을 주님께 맡길 것이오. 단지, 9절말씀은, 님의 "끝까지 예수가 다 하셨다는 것을 붙잡는 것이 새언약 안에서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이상한 주장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점을 말해 둡니다. "새언약"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자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언약이 돌비가 아니라 심비에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심비에 새겨지는 자들이 참된 마음, 진실된 마음,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또한 그 사랑을 입술과 말로만 아니하 행함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지요.

새언약도 오해하고 있으니, 어떻게 어찌 영을 말하나, 그 영이 님의 영 속에 있다고 하겠소이까?

(정낙원님)

그렇다면 이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말씀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해주는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자는 비록 육신의 몸이라는 사망을 갖고 잇지만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라는 것이요. (이걸 손무성 목사가 이해를 못하고 있어서,,,,,,)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양무리의 반박)

말씀 잘 하셨오.

그렇게 성도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있는 자입니다. 문제는, 님이 말하는 "예수님이 지킨 것을 나도 다 지켰다고 믿기 때문에 나로서는 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믿는 그 게으른 믿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지켜주신 그 공로가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와서 구원받은 자에게 명하시는 그 명령을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 믿음"을 성도가 가진 자로서 살아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 중에는 죽어 있지만 이제는 살림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된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왕의 자녀를 무시하면 그 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을 무시하면 이들을 그렇게 되게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성도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그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요, 십자가의 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변조하여서 자학의 십자가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부인과 자기학대를 혼동하지 마십시오.이것에 대해서 할 말이 많으나 그냥 둡니다.

(정낙원님)

잘 들으시오. 굉장히 중요하니 단단히 새겨 들으시오.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하면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육신의 법에 속한 옛 사람은 날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이게 하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지켜 주셨다고 믿게 하는 생명의 법에 속한 새 사람은 성령께서 날마다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그렇게 날마다 살아나게 하는 자들이 '믿는 것' 외에 하는 일이 뭡니까? 님이 말하는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는다는 것을 핑계대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정낙원님)

그러니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보고자 하는 아담의 속성은 날마다 때려잡고, 예수님께서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다는 것을 믿는 새사람으로 살려낸다는 말이요.

(양무리의 반박)

살아나서 그 살아난 생명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요? 호흡하고, 그리고 믿고, 그리고 또 무엇을 하는 것이요? 믿는 것이 행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살아나서 무엇을 행하는 것입니까?

(정낙원님)

그러니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놈이 살아나면, 예수가 말씀을 내 대신 다 지켜주셨습니다 라고 믿는 새 사람이 죽게 되고,반대로 예수님이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믿는 놈이 살아나면, 내가 말씀을 지켜야한다고 하는 옛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에 빚을 진자들이므로 육신의 법대로 살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요.그러니 이제부턴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니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옛날 방식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구나 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양무리의 반박)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구나 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함"이 없는 것입니까? "살아가는 것"이 이미 "행함"이 아닙니까? "살아가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까?

생각 좀 하시면서 글을 쓰시면 좋겠습니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행함"입니다. 님은 벌써 "행함"을 인정하고 강조하고 있는 자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님이 지금 무슨 말을 주절대고 있는 지를 모르고 있거나, 님의 고집스러움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낙원님)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하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다 지켜주셨다고 믿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구조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면 믿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해 주셨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이렇게 안 믿어지는 것을 성령께서 믿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성령께서 믿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여기서 종의 영이 있고 양자의 영이 있다고 하지요.종과 아들의 차이는 종놈은 평생 뼈빠지게 일을 해야만 먹고 살수가 있는 자이고 아들은 아버지가 주는 것으로 사는자이요. 그러니 종의 영을 받은 자는 항상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설쳐대고,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얻어 먹는 것입니다.

(양무리의 반박)

종의 일과 아들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것은 집안일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환으로서 일하였으나, 예수님은 집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종의 일이 있고, 아들의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도 일이 주어집니다. 그냥 호의호식하도록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히4:11). 뒤이어 히브리기자는 말하기를,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이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온 것처럼 게으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님의 말은, 마치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안식에 다 들어간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만을 말합니다. 일면 그것은 옳은 주장입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안식하면서도 그 안식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히브리서기자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4:10)고 한 바로  그 뒤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찌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4:11)고 하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안에서 안식이 "성취"되었지만, 그 안식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그렇기 때문에, 성취된 안식을 누리면서도 완성될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서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지도로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낙원님)

그런데 세상에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법칙과 충돌하기 때문이지요.(마귀는 항상 인간의 행위로 예수님의 행위를 가리고자 하기 때문이요.)즉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을 벗겨내고, 죄인이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도록 하기 때문이오. 무화과나무 옷과 가죽옷에 의미는 알겠지요,,,이것도 가르쳐 줘야 합니까? 바울은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가죽옷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양무리의 반박)

이 어리석은 "풍유"을 대하면서 헛웃음만 나옵니다. 오리겐처럼 자기 생식기라도 자르면 들을만 하지만, 어이, 정낙원님, 그렇게 하셨소이까? 그 쓸데없는 풍유적 해석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시오! 그러면서 제법 아는 척..."이것도 가르쳐 줘야 합니까?"라고 말하니, 쓴 웃음만 돕니다.

(정낙원님)

왜? 믿음으로 살면 고난을 받습니까?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겠다는 육에 속한 종놈들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님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라고 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 "경건하게 행하는 것'이 바로 핍박의 원인입니다. 님처럼 바울사도는 말하지 않습니다. 님께서 바울사도의 말을 흉내내면서도 그 말을 변개시키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은, 님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겠다는 육에 속한 종놈들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성도가 성도답게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경건하게 행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님들의 복음이 복음이 아니라, 뽁음임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혹시, 님들이 어떤 형태의 핍박을 받으면서 그것을 성경대로 믿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믿기 때문이요, 혹은 잘못 행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핍박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의롭게 행함으로 오는 핍박과 잘못 믿고 그래서 잘못 행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 핍박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 어리석음의 크기가 어떠한지 알 만 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낙원님)

왜? 육에 속한 종놈들이 가만 두지 않습니까?
그건 자신들 속에 있는 육신의 법칙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육신에 속한 종놈들 속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없으니까 자꾸만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법이 그들 속에서 충동을 하는데,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이 그게 아니라 말씀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지켰으니 이제는 행함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으라 고 하니,
육신에 속한 종놈들은 그 속에 믿음이 없으므로 믿는 것이 어떤 것인줄 모르니, 너희들 자꾸만 엉뚱한 소리할래 하면서 핍박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걸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란다고 하는 것이요.
무식한 놈이 깨닫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지 않고 가르치는 스승을 나무란다고 하지요.)

(양무리의 반박)

지금까지 저의 반박을 듣는 이는 님의 이 말을 듣고는 정낙원님이 지금 '사돈이 남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경건하게 행함이 참된 핍박, 성도로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핍박이지, 잘못된 신학과 변개된 가르침에 의해서 받게 되는 핍박은, 님들이 언급해야 될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참된 핍박을 받으십시오.
경건하게 삶으로 인해서 오는 핍박을 받으십시오. 성도의 마땅한 그 행함을 부인하고 거짓된 믿음을 주장함으로 인하여 오는 핍박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핍박이지, 성도의 참된 경건한 삶에서 오는 핍박이 아닙니다.

그런 핍박은 주님께서 인정해 주지도 않지요.
물론 님들이 주님의 인정같은 것을 중요시 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도취요, 자기환각에 빠져서, 거짓된 핍박을 받으면서도, 참 핍박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오, 애재라.

(정낙원님)

이러한 사상은 신약시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항상 이어져 온 일들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속에도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가 있었고, 육신의 사망의 법에 속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에서 찾는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12지파 족장들을 가나안 땅에 정탐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가보니 장대 같은 아낙 자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정탐하러 갔던 족장들이 기겁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는 말이 자기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희들 왜? 그러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메뚜기 같이 작은데 저런 거인들하고 싸우느냐?
그러니 맞아 죽느니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면서 하는 말이,,
야! 이 사람들아!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어디 우리 방식으로 왔느냐?
하나님이 다 인도해 오시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 주신다고 믿고 들어가야지
여기 와서 거인들이 있다고 돌아가자 하면 되겠느냐 라고 하니,,,,

백성들이 그래 옳소 한 것이 아니고,,, 저 놈! 때려 죽여라! 했습니다.
왜?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때려죽이라고 했겠소.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자기 주먹을 믿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고, 나머지 열 지파 족장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 보겠다고 하는 육신의 사망의 법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항상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육에 속한 가인이, 믿음으로 산 아벨을 핍박하였고, (히 11장에서 아벨의 제사를 믿음으로)
육에 속한 이스마엘이, 약속으로 난 이삭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11형제들이, 약속(꿈)을 받은 요셉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에서가, 약속을 받은 야곱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사울이, 약속을다윗을 핍박하였고,
아가서에 보면 왕의 약속을 받은 술람미 여자를 약속을 받지 않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성경 전체가 다 육과 영의 싸움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요.

예수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이 핍박하였듯이, 지금도 믿는 자들을 불신자들이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같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것이요.
이 사실을 성령에 의해 알게 된 베드로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산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모두가 성령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던 것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완전히 자기도취에 빠져계시는군요. 님외에 다른 사람들, 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고, 님이야말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 말이요.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했던 사람들이 핍박당했던 것처럼, 님도 또한 그렇게 핍박을 받는다고 위로받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면 깨어날 수록 유익할 것이외다.

보시요.

바로 구약의 사람들, 그렇게 님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행하면서 살았었던 것이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산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나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살았으면서"도 아무 것도 "행했던 것이 없었던 것"입니까? 그들이 밥먹고 똥싸고, 숨쉬고, 그리고.....무엇을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까? 그들이 설교했었고, 그들이 책망하고, 그들이 예언하고 그들이 그 예언한 것들을 기록하고....이 모든 것이 "행한 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라고 하겠소?

님의 말은 님의 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색맹일 뿐만 아니라, 까막눈이거늘
아하, 나의 이 수고가 헛수고로 끝날까 싶어서, 그만 둘까 하외다.

(정낙원님)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및 선지자들과, 시편과,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쉽게 말해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그들의 모든 삶을 몽땅 한데 묶으면 예수님의 삶이 나타난다는 말이요.
그러니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를 들어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성령이 그렇게 끌고 간 것이지요.
그러나 보니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사람들이 너희들을 핍박하고 욕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너희 앞에 선지자들도 다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으니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라고 하면
아니야! 성도라면 당연히 말씀을 지켜야 돼! 라고 하는 육신의 법에 속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십자가 마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에 속한 자로부터 쫓겨나고 만 것이요.
이렇게 진리에 속한 자들이 비 진리에 속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현상을 일컬어 역리현상이라고 하고 곧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즉 생명이 사망에 삼키운 바 된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을 마감하면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어떤 말을 하고 핍박을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양무리의 반박)

참으로 간사하기까지 하군요.

이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강퇴시키고 삭제한 것이 바로 이근호목사였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쫓아내었던 사람들은 왜 이근호목사에게 핍박당했던 자들이었노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젠 님들이 쫓겨나니 그것이 핍박이라고 하는군요.

쉽게 말해서 남이 하면 불륜이고, 님이 하면 로맨스라 이말이지요?

참, 삼척동자도 웃습니다. 낄낄낄~

저는 어떻게 웃어봐 드릴까요?

(정낙원님)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도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오직 약속 하나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핍박으로도 믿음은 빼앗을 수가 없고, 가난으로도 믿음은 빼앗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가난이나 핍박이나 그 어떤 이유에서 믿음을 버린다고 한다면 그는 애초부터 선택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뽑아 내시려고 갖가지 어려운 일들을 발생시켜 좇아내는 것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성도가 그 어떤 것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성도의 행함이 무시되고 부인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님은 그렇게 성도의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되면서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을 좇아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함으로 인해서 바울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바를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고후4:10)

바울은 성도의 행함을 강조하는데, 정낙원님은 성도의 행함을 부인합니다. 무시합니다. 조롱합니다. 도대체 바울사도가 님을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각 사람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무시하고 싶으시겠지요?
님의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없습니까?

성도들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했을 때 입게 될 것이 무엇인 줄 모르십니까?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8)

님이 지금 이근호목사와 더불어서 무엇을 부인하는지 아십니까?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 그 행함을 무시함으로 인하여, 성도가 입게 될 그 세마포를 더럽히고 찢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다시 말씀 앞에서 경건히 님의 옷깃을 여미면서 겸손히 머리를 조아려 보십시오.

혹이라도 주의 영이 역사하셔서 님의 눈에 있는 비늘을 벗겨주실지....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리다. 이렇게 긴글에 일일이 답을 해가는 나의 마음이 그것이라오.

(정낙원님)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아 주는 성도는 죽더라도 믿음을 버릴 수가 없지요.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양무리의 반박)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십시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바울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간 뒤에 말하기를,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하반부)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낙원님은, 성도의 행함을 부인합니다. 바울사도의 강변을 무시합니다. 성령의 권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으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리라"(롬3:31).

성경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이 성경을 기록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마십시오.
그 성령의 주님을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

두려운 일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빙자하여 주님의 노하심을 무시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정낙원님)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켜 주어서 끊어지지 않는 자들을 일컬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이라고 합니다.
좋은 밭이란? 농부가 관리를 하는 밭이란 말입니다.
농부는 자기가 씨앗을 뿌린 밭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가꾸지요.
왜냐하면! 자기 흔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오..
농부가 때를 따라 김도 매고 물도 주고 하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밭들은 농부가 믿음을 지켜주지 않고 자기가 믿으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이 닥치면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지금까지 대충 로마서 8장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을 좇는 삶과, 육신을 좇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소.

(양무리의 반박)

완전히 횡설수설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로 로마서8장설명을 마무리하는 것도 가관입니다. 인간의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비록 필요하지만 그런 구분때문에, 성도의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그 씨뿌리는 비유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끊어지지 않음을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성도의 행함이 필요없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유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행함을 암시하고 있다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마13:23)라고 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곧 이어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결실하여"라고 말합니다. 땅이 결실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어떤 열매를 결실하는 것일까요? 혹 백배, 육십배, 삼십배로 '결실"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 안에서 맺히게 되는 열매들일 것입니다. 좋은 밭인 성도들이 성령을 좇아서 행하게 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그 열매들일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성도의 행함과 무관합니까?

성도의 행함이 없이 어떻게 성도가 되는 그 좋은 땅이 "결실"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귀기울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님의 성경에는 도대체 이 구절이 없는 모양이군요.

바로 그 뒤에 있는 말씀이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17절).

그런데, 정낙원님은, 율법을 폐지시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과도 같습니다. 그 당시 소위 가르친다 하였던 거짓교사들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완전케하려 하셨지 폐지시키려 하심이 아니었노라고 하는데도 빠락빠락 폐지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가 바로 정낙원님입니다. 누구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에게 영향을 입었습니까? 십자가신학이란 위조십자가를 선전하는 이근호목사에게 영향을 입은 것입니까?

돌아서십시오.

그리하여, 제 2의 손무성목사가 되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정낙원님)

여기까지 훑어 오면서 무엇을 느꼈소.
그대와 내가 무엇이 다른지,,,
(그대의 설교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 자녀답게 거룩해 지고, 착하고 깨끗하게 살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광 돌립시다..) 이고
(제 설교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면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몸이 하나님의 듯대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에게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가 지켜야 할 그 말씀들을 다 지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깨닫도록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내가 죽을 그 자리에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라고 역사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자기 자신을 보지말고 예수님을 보시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입니다

그대와 나의 설교가 전혀 다른 것은 그대는 육신에 있고, 나는 영에 있기 때문이요.

(양무리의 반박)

그냥 허허 웃읍시다. 제가 특별히 윗말에 토를 붙이지 않아도,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정낙원님)

이런 찬송가를 들어 보셨소!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만 찬송하리로다"
이 얼마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요.
이 찬송가 가사를 적은 분은 오직 구주만 찬송하고 살겠다고 합니다.
왜? 구주만 찬송하고 살겠다고 합니까?
모든 것을 주께서 다 하셨기 때문인 걸 알았기 때문 아니겠소.
어째! 이 찬송가 많이 안 불러 보았소.
부르면서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불렀소,

(양무리의 반박)

크로스비의 찬송곡을 소개해 줘서 고맙소이다. 그 가사 내용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찬송 하나가 성도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활동했던 시대는 19세기 말엽, 기독교의 복음이 참으로 변질되어가던 그 와중에 있었던 것을 모릅니까? 그와 함께 사역하였던 무디의 신학이 뭔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님은 아직도 모르고 있더란 말인가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화니 제인 크로스비의 찬양가사에 문제가 없다고 칩시다. 어디 그녀가 불렀던 찬양곡이 어디 그것 하나 뿐이던가요?

그녀는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보구려.

찬송가163장 3절, "주 예수님 맡겨 주신 일에 모두 충성 다했나"
찬송가231장1절,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찬송가385장1절,"군기를 손에 높이 들고 다 빨리 나아가세 진리의 검을 앞세우고 힘차게 싸워보세"
찬송가446장후렴,"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이 찬송구절들은 그녀가 결코 성도의 행함을 부인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비록, 소경으로서, 피안적 신앙형태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처럼, 성도의 행함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님이 크로스비의 찬송가사를 인용하는 것은, 님이 "좋아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이근호목사의 신학이 그렇게 한 면만 보고, 양면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제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여서 그것 위에 공중누각을 쌓지 말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뽁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정낙원님)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내린 결론은 그대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고 하는 것이요.

스스로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육신에 속한 자란 말이요.
세상에 난 살다가 살다가 로마서 8장을 그대 같이 푸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하였소.
그대가 정영균님을 그렇게 저주와 같은 독설로 타박하고도 부끄럽지가 않소.

(양무리의 반박)

이제 처음 보셨다면, 제대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조언입니다. 세상에 이런 해석이 지천에 깔려있는데 처음으로 이런 해석을 들어보았다고 하니, 참으로 님이 얼마나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는다면 님의 독서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간증하는 것 같군요.

(정낙원님)

그리고 무엇이 숨길게 많아서 가명을 쓰시오.
원래 가명을 쓰는 자들은 속이 어둡기 때문에 자기를 밝히길 꺼려하는 것이지요.
난 그대의 뻔뻔스러움이 참으로 놀랍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져 놀랍기만 하오.

(양무리의 반박)

왜 님은 "손삼손"이라는 가명으로 윗글 올렸나요? 그러면서 제가 익명을 쓰는 것을 탓하다니...
참으로 위선적이군요, 정낙원님? 그죠?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쌀쌀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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