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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칼빈의 성도견인론은 중생교리로 세워져

baromi 2005. 3. 22. 18:23

김병구님은 윗글은 칼빈의 성도견인론과 중생교리를 너무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제가 토를 달겠습니다. 성경적인 선교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홀리죠이).

 

*   *    *    *

 

(김병구)

칼빈의 중생교리 인간의 자유의지 인정
구원보장론 발전적 수정해야…칼빈의 성도견인론은 중생교리로 무너져

(홀리죠이)

칼빈의 중생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 자유의지가 어떤 것이야는 것이 문제이지요. 김병구님은 구원보장론을 "발전적 수정"해야한다고 하면서 "퇴보적 파괴"를 조장하시는군요. 칼빈의 성도견인론이야말로 그의 중생교리로나 성경적인 중생교리로 더욱 견고해진답니다. 싱가폴장로교회의 '장로'는 이렇게 칼빈의 성도견인론이나 중생교리를 오해하고 파괴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까? 그 교회의 장로됨을 취소하시고 이런 주장을 하시든지....씁쓸합니다.

 

 

(김병구)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 기초를 두는 칼빈이즘은 △인간의 전적 타락 △무조건 선택 △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견인 등의 5대교리를 지주로 한다.

 

(홀리죠이)

 

바로 위에 열매님이 알미니안5대교리를 잘 올려두신 것 같네요. 칼빈주의5대교리가 먼저 생긴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들이 비성경적인 다섯가지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대응차원에서 칼빈주의 5대교리, 곧 튤립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아시겠지요?

 

(김병구)

칼빈이즘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려고 무조건 선택하신다면, 그리고 그 사람들의 구원이 분명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그들과 화해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그 사람들은 끝까지 견뎌 영생에 이르는 것은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교리 부정은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홀리죠이)

 

"무조건"이라는 말과 '조건없이"라는 말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김병구님의 "무조건"이라는 말 대신에 "조건없이"라는 말을 넣고 싶군요.ㅎㅎ

 

(김병구)


인간은 원죄성을 지닌 존재로 구원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한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성령으로 거듭난다면 거듭나기 이전의 불신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성을 갖게 될 것이다.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독특하게 회개가 곧 거듭남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닌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거듭남을 통해 인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온전하게 나타났으며 그것은 지식·순결·의로움·거룩함이다(Institutes, Book I, XV~4).

 

(홀리죠이)

 

"회개가 거듭남"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개념적으로 분명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지요. 칼빈이 "회개=거듭남"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어디지요?

 

(김병구)

칼빈에 의하면 거듭남으로 하나님 자녀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만 아직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며, 육신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자는 일생을 통하여 죽을 때까지 거듭나는 회개를 지속해야 한다(Institutes, Book III, III- 9, 10). 중요한 것은, 중생한 인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나님이 죄인을 회개케 하고 은총의 상태로 옮기실 때 그 죄인을 그 죄 아래 있던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시킨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로 하여금 영적 선을 원하고 행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도 부패가 남아 있어 온전하게 선한 것만을 원하고 행치 않고, 악도 원하고 행한다; 영화의 상태에서만 사람의 의지는 전적으로 변함 없이 선만을 원하는 자유를 갖는다(CF XI-4-5).

 

(홀리죠이)

 

so far so good

 

(김병구)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에 부음(롬 5: 5) 받는 것이야말로 거듭남의 핵심이며, 하나님 형상의 회복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자신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했던 인간이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심 받아 거듭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한 것이다.

 

(홀리죠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진 것이 거듭남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이라고 한다면, 거듭남이란, 김병구님의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이 그 마음에 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상에 상당히 문제가 있지만(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의도를 고려한다면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군요.ㅎㅎ 그 문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김병구)

이제까지 선행을 할 수 없었던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갖춘 것이다. 영화에 들어갈 때까지는 완전한 것일 수 없지만, 인간은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13).

"하나님의 사랑을 부음 받고 자유를 부여 받아 거듭난 신자는 육에 대항하는 성령님의 싸움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육신대로 사느냐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자유는 책임을 수반함으로, 육신대로 사는 인간은 반드시 영적으로 사망한다"(롬 8:13).

위와 같은 성경 말씀에 부합하여 중생한 인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고 가르치는 칼빈의 중생교리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 간의 충돌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 주권의 절대성을 훼손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근거로 하는 성도견인의 교리는 칼빈 자신의 성경에 충실한 중생 교리에 의하여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홀리죠이)

 

아하....이것을 오해하고 있었군요. 칼빈주의가 "자유의지"를 부인한다고 오해하셨군요. 웨신의 9장인 "자유의지"에 관한 항목을 살펴보셨습니까? "자유의지"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또한 사용되고 있는 지를 아십니까? 타락한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 혹은 선을 행할 자유의지"가 없다고 했는데, 그 "선"이란 단순한 "도덕적 선"이 아니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게 하는 선"을 말합니다. 그것을 웨신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도 타락한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자유의지로 행한 도덕적 선과 윤리적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단지 걸레같다고 여길 뿐입니다. 전혀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이 아니고 "악"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왜냐구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근원이 타락하고 부패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럴 듯해 보여도 모두 더러운 것 뿐이라는 뜻입니다.

 

김병구님, 제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자유의지를 부정적으로 혹은 부인하기까지 하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윤리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부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선을 행할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웨신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Man, by his fall into a state of sin, hath wholly lost all ability of will to any spiritual good accompaning salvation; so as a natural man, being altogether averse from that good, and dead in sin, is not able, by his own strength, to convert himself, or to prepare himself thereunto(9장3절).

 

"구원을 수반하는 어떠한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가 살림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요 은혜이지요. 그 절대주권과 은혜로 인하여 살림을 받은 자가 이제는 "구원을 수반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리입니까? 얼마나 절묘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교리입니까?

 

상충되다뇨? 모순이 되다뇨?

 

다시 웨신을 읽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장로교육을 불충분하게 받은 것 같아서 마음이 여간 쓰린 것이 아닙니다. 자꾸 씁쓸해집니다.

 

(김병구)


그러나 거듭남 이전의 사건인 무조건 선택·제한속죄·불가항력적 은총 등의 교리는 유효하다. 거듭난 후에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자유의지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 이전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정되어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 선택의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실패함 없이 주께로 와서 거듭남과 칭의구원을 받게 된다.

칭의구원을 받은 성도가 성화의 삶을 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를 가해서라도 그를 반드시 영생으로 이끄신다는 견인설은 사랑의 하나님을 반영하는 생각이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성도가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서 살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성경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최소한의 자유의지도 행사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인간은 로봇과 다름이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로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것인가?

 

(홀리죠이)

 

위와 같은 견해가 도대체 웨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말일까요? 웨신이 자유의지를 부인하고 있나요? 도대체 비판해야 할 것을 비판해야지요. 님께서 알고 있는 웨신이나 칼빈주의는 님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지, 역사적인 개혁교회 내에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의 비판은 허무맹랑한 것이고, 허수아비를 찌르는 것입니다. 공상속의 허수아비.

 

(김병구)

성도견인의 교리가 무너지면 인류 구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칭의구원까지만 절대적이고, 성화의 과정에서는 절대적일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주춧돌로 하는 칼빈이즘은 발전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칼빈의 구원보장론이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수정은 사도들의 서신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친언으로 된 복음서, 그 중에서도 주님의 완성된 율법이요 집약된 복음인 산상수훈을 기준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하신 구원론에 부합하도록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홀리죠이)

 

오해에 기초한 님의 칼빈주의 성도견인론과 구원보장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님의 이해가 잘못된 것이지, 그 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성경의 어느 부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윗글에서도, 사도들의 서신과 산상보훈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구약과 신약을 구별하고 모든 성경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님처럼 분리시킨다면, 성경의 교리들의 조화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님의 견해를 백분 인정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소금"이 되었고, 어떻게 "빛'이 되었습니까? 한번 소금이며 영원한 소금이 아니던가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소금이 소금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팔레스타인의 상황에서는 소금과 흙이 뒤섞임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곧 소금은 소금인 그대로 있는데, 흙이 뒤섞여짐으로 그 맛을 잃게 됩니다. 한 번 소금이면 영원히 소금입니다.

 

빛은 어떻습니까? 한 번 '빛"이 된 사람이, "어둠"이 되었다가 또 "빛"이 되었다가 그렇게 반복이 됩니까? 한 번 "빛"인 사람은 "영원한" 빛입니다. 그런데 왜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빛이 빛이 아니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빛을 "산위"에 두어야 하는데, "말아래" 두기 때문입니다.

 

님은 정말로 오해가 많습니다. 님이야말로 바로 '빛"을 지금 "말 아래'두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빛됨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교"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통촉하시옵소서~

 

홀리죠이 올림.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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