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칼빈의 세르베투스화형에 관한 오해와 십자가마을의 예정론비판(이효종님글/샤로니에님퍼온글)

baromi 2005. 3. 22. 18:09

*아래의 글은 샤로니에님이 십자가마을에 올려져 있는 이효종님의 글을 저희 마을카페자유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입니다. 올려주신 샤로니에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진리만이 흥황하기를.....(홀리 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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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종님 글----

칼빈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언급에 대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인 것 같아서 제가 몇 말씀드립니다. 저는 자주 십자가마을에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 자신의 신학사상과 조금 다를 성 싶으면, 악마라는 섬뜩한 단어를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보고 조심성 있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님께서 질문하신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님의 주저 없는 비판에 대하여, 사실을 바로 잡아야 되었기에 몇 자 올립니다.

과연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까? 그리고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상황적 근거가 작용했을까?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 과연 누가 그 시대의 정확한 사정을 근거로 해서 명쾌하게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는 그리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 생각되어집니다.

저 자신도 한 때는 칼빈을 존경하면서도, 그가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키는 일에 주도적인 일을 감당했다는 이유만을 근거로 그를 배척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 소개된 칼빈에 관한 글들이 너무 편협한데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본인이 네달란드 자유대학 도서관에서 접한 칼빈의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읽은 책들은 오래되어서 기억은 안나지만, 폐의 혈액 순환기능을 발견한 과학자이자 ‘삼위일체의 오류(1531년)’의 저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1553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화형에 처해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인 것은 칼빈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칼빈은 그의 방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흠집처럼 따라다는 것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사건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교회사를 기록한 책들은 당시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칼빈이 참지 못해서 죽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단 몇 권의 책을 일고 명확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허구라는 것으로 즉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글들 속에는 당시 세르베투스의 화형 집행은 칼빈 개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5명으로 구성된 제네바 소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었는데, 이 소위원회의 결정은 칼빈이 아닌, 당시 다른 개혁파 목사들의 자문을 통하여 이미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칼빈은 재판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행위에 대하여 증인 역할을 하였으나, 재판이 진행되어지는 과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막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였고, 재판이 끝난 뒤에도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살리기 위해서, 세르베투스의 소신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소위원회가 화형을 결정하자 칼빈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떠난 결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세르베투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 참수형을 요구했지만, 재판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제네바 소위원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는 일부 교회사의 기록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것은 훗날 제나바에서의 칼빈의 종교개혁이 반대파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보여 졌고, 그들에 의해서 칼빈은 더욱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처럼 묘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미 수백년 지나간 역사를 한국에 알려진 몇 권의 책들만 가지고 과거의 일들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들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개혁파 교회임을 표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의 심오한 신학사상의 뒷받침 없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 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으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합니다. 근데 칼빈만큼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것은 의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대장간을 통하여 많은 글들을 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만큼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책을 써낸 사람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행7:58). 혹자는 바울이 스데반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설령 직접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죽어가는 스데반을 사울이라고하는 바울의 발 앞에 둔 것은 바울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데반을 죽인 바울에 대하여 비판을 합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특심하여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던 자신의 죄를,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고 단정할지라도 그의 모든 업적을 우리는 한 가지 사건으로 뒤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한 그였기에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때 엄청난 죄를 지은 고재봉이나 김대두 같은 인물들도 후에는 회개하고 죽었다는 사실 속에서 한 때 실수한 죄를 가지고 그들의 모든 삶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인류가 다 똑 같습니다. 단 인간들이 판단하는 경우에 따라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예정론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떠나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정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진행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가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깨어짐으로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 곧 죄가 침범하지 못하는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때를 따라 당신의 종들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역사를 따라 성취해가는 여정들이,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이를 언약적 구속사에 담긴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실현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원은 처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도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 다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약간의 차이는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내용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기복주의를 부추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오순절계통의 신학들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마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의 ‘성화적 삶’ 과연 가능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근호 목사님의 주관적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예수를 영접했다고 해서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한번 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착하게, 선하게, 도덕적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인간은 순식간에 사단의 꾀임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룩한 목사일지라도 자기 심령 속에 감추인 죄의 속성은 여전하다고 할 것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다 옳은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누리는 성도의 삶은, 그들 심령 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시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살아야 된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 모두 명령어로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들은 너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니까 그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괜찮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허공에만 메아리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을 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들로서의 당연한 삶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은 신자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거처를 삼고, 우리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는 이 세상은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역사가 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가 죄에 대하여 패배할 때 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도록 붙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들은 성도가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질 못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주님께서 직접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 간단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명령한 것들은, 너희들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한번 해본 소리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터인데.... 왜? 주님은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면서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았다.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알았지”이렇게 말씀하지지 않고 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하는 삶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십자가마을을 대표하는 모든 분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한 삶의 내용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이다”라고 너무 단편적인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의 내용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분명 여러분의 의지와 행함이 포함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에도,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기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를 할 터인데 그 삶 자체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마을에서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을 거부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을 때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져왔으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파괴되어져 왔고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값없이 주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하는 사단의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어서 주님은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며, 때로는 질책도 하시고, 때리기도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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