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 1-7; 로마서9:1-5
2006. 5. 21. 신반포교회, 손원영 목사
1.
지난 2월초
두산에서 새로운 소주를 하나 내놨는데, “처음처럼”입니다. 이 소주가 지금 소주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답니다. 벌써 출시 100일만에
6,300만병을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주시장 점유율이 5%를 밑돌던 두산은 ‘처음처럼’을 내놓고는 8%대를 넘어 이제는
10%대를 넘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이 ‘처음처럼’은 성공회대 신영복교수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르는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 날을
시작하고 있다
얼마 전 성공회대에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두산에서 신교수님에게 작명댓가로 돈을
건네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받으려 하지 않자, 두산측은 신교수가 재직하는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했다고 합니다. 좋은 시에,
좋은 기부에, 좋은 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처음처럼”이란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연애할 때 그 순수한 마음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사업을 시작할 때, 그 첫 마음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직장을 처음 가졌을 때, 그 설레는 첫 기분이 떠오릅니까?
좋습니다. 그 첫 마음, 그 처음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처음처럼”이란 말을 생각하면서, 제가 처음으로 교회당 문에 들어섰던 그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겠다고 결단했던 그 첫 결심, 그 첫 회심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처음처럼’은 곧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경험이요, 따라서 일종의 회심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처음처럼’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잊지 못할 회심경험이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회심이란 영어로 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어원적으로 두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conversio로서, “가던 길을 돌이킨다”, turning around를 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convertere로서,
“완전히 바꾼다, 변혁한다”라는 transform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회심이란 “가던 길을 다시 돌아섬으로써 얻게 되는 일종의 자기변혁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의 동기에 의해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거나 또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경험이나 과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대학캠퍼스를 거닐고 있는데, 어느 한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와 전도를 하며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받고 참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좀 찜찜한데가 있고, 또
“안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그래도 목사인데, 그렇게 말기도 좀 그렇고....참, 난처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가
그런 질문을 똑같이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와 유사한 질문을 여러분에게 한번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회심하셨습니까?” 아마, 이 질문을
받은 여러분들도 전에 제가 당황했던 것처럼, 무어라고 답해야할까 좀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그러나 너무 당황스러워하지 마시고, 한번 스스로 답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언제 회심하였는가? 신앙생활을 하기고 결단했던 그 첫 결단의 시간은 언제였는가? 혹 어떤 드라마틱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등등. 회심의 주제와 관련하여 한번 우리 자신을 돌보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은 이번 주가 웨슬리회심 268주년 되는 주간입니다. 따라서 오늘 그 기념으로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웨슬리가 1738년 5월24일 올더스게잇에서 회심한 것을 기념해서 우리 감리교회가 지금까지 그 회심사건을 기념하고 있는데, 회심사건을
기념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처음처럼” 다시 한번 회심을 해보자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웨슬리가 했던 그 회심경험을
“처음처럼” 다시 우리도 경험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좀 오늘 생각해 볼까 합니다.
2.
좀 오래된 통계이긴 한데, 1978년 프린스톤종교연구소에서 회심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000여명의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회심경험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33%가 회심을 경험했고, 그 회심자 중 약 18%가 위기의식을 동반한 ‘급격한 회심’을 했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82%가 ‘점진적 회심’을 경험한 것으로 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신자 중 대부분은 어떤 급격한 위기의식을 동반한
회심보다는 점진적인 회심이 대부분인 것이라는 통계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 복음주의신학교의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약50%정도가 급격한 회심을 하였다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일반 신도들과 회심의 유형이 좀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위기의식을 동반한 급격한 회심을 하였습니까? 아니면, 점진적인 회심을 하였습니까?
종교심리학자 메도우와 카호(Mary J. Meadow & R. D. Kahoe)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들이 회심의 유형을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한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우선 첫 번째 회심은 위기의식을 동반한
급격한 회심유형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의 복음주의계통의 신학생들이 주로 많이 경험한 회심유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전도집회나
부흥회를 통해 경험되는 회심의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형은 먼저 혼돈과 격한 심리적 갈등을 강하게 느끼면서 우울감과 공허감,
특히 심한 죄의식을 느끼면서 시작됩니다. 그런 다음 신비한 경험을 통해 갑작스런 통찰력이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결국에는 심리적 통일감과
균형감을 얻으면서 죄로부터의 해방과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느끼는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요한 웨슬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리교회가 다른 교파보다 더 부흥회를 많이 하는 전통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런 부흥회를 통해 회심을 하자는 것이지요.
두 번째 회심의 유형은 점진적 회심 유형입니다. 이 유형은 앞서 말씀드린 급격한 회심과 정 반대의 유형으로써,
오랫동안 지녀왔던 종교적 신념에 회의를 품게 된 사람들이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혹은 몇 년 후 주로 ‘지적인 차원의 깨달음’을 통하여 결정적인
전환에 이르게 되는 종교적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시절 가정교육을 통해 특정의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오던 사람이 점차 자신이
믿어온 종교적 교리에 실망을 느끼며 이를 다른 종교와 견주어 보던 어느 날, “나는 이제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점진적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기독교인 중에 급작스런 형태의 회심보다 점진적 회심의 형태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우리교회도 이런 유형의 교인들이 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 번째 유형의 회심은 무의식적 회심입니다. 기독교인 중 상당수는 일생동안 급격한 회심이나 점진적 회심 그
어느 것도 경험하지 못했으나, 기독교인으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일종의 무의식적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무의식적 회심이란 특정의 종교적 가치와 신앙체계를 수용하는 형태가 의식적인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받아들인 종교적 가치관을 점차 확대시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네 번째 유형의 회심은 재통합의 회심입니다. 이것은 앞의 두 경우와 달리 이미 과거에 수용했던 종교적 신념이나
삶의 양식으로부터 일정기간 분리되어 있다가 특정의 결정적 전환기를 통해 다시금 본래 소속되었던 종교에 강력하게 결속하게 하는 경험을 ‘재통합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한국남자들의 경우가 아마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남자들은 주로 군대에게 가서 신자가
됩니다. 어려운 군대생활을 보낼 때, 신앙을 통해 많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세례 받고 신자로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면, 세상일에 바빠 신앙 생활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부인에게 이끌리어 억지로 교회에 다시 나오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옛날 자신이 군대에서 신앙생활하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 그 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군대시절 가졌던 신앙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재통합의 회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유형의 회심은 인위적 계획에 의한 회심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네 가지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써,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집회나 수련회를 통해 특정 형태의 회심을 경험하도록 자극하는 인위적인 경험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유형인 급격한 회심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급격한 회심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뜻밖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회심이라면, 인위적인 계획에 의한 회심은 주로 집단적 차원에서 그리고 대중적인 성격의 회심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경험되는 회심의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형은 이른바 사이비종교의 예배나 기도회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적절한 형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상 다섯 가지의 회심의 형태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급격한 회심입니까? 아니면
점진적 형태의 회심입니까? 아니면 무의식적 회심입니까? 아니면 재통합적인 회심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은 어떤 형태의 회심이든,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회심의 유형이 이처럼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급격한 회심을
하였으니, 당신도 꼭 그런 회심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회심의 유형이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관용 있는 신앙인에 자세입니다.
그런데, 회심의 종류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꼭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형태의 회심을 했든, 그 종류에 상관없이 회심을 한 후 나타난 모습은 거의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는 저는 바울의 회심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
벨기에의 역동주의 심리학자인 고댕(Andre Godin)이란 분이 <종교적 경험의 심리학적 역동성, The
Psychological Dynamics of Religious Experience>(1985)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바울의
회심경험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소개한 회심경험의 특징은 우리가 회심한 후에 어떤 형태의 신앙인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에게서 공격성, 적개심이 뽀얗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모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의식 속에 공격적 성향,
혹은 방어기제 같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 그런 부적절한 수단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였을 때, 그러한 방어기제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읽은 사도행전 9장의 내용처럼, 회심전의 사울은 유대교를 충실히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지나쳐 유대교에 위배되는 종교단체를 매우 싫어하는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원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반유대적 종교집단을 잡아올 수 있도록 구속영장을 얻어낸 뒤, 다메섹지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적개심과 공격적 성향을
지녔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정말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이고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말에서 떨어져 엎드려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5). 여러분, 이 사건 이후, 사도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회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심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심이후,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그의 공격적 성향에 큰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과거 유대교인이었을
때는 그렇게 살기가 넘쳤는데, 이제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에게 그런 살기가 사라진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버러진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우선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진짜로 회심했는지
의심하면서 여전히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신의 종교를 배신했다고 해서 ‘배신자’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미움은 과거 바울이 기독교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증오의 마음,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쫒아 와서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돌을 던지고, 그를 데려다가 수없이 채찍으로 때리고, 감옥엘 가두고, 심지어는 로마에 죄수로 넘겨주는 일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사람이라면, 이러한 미움을 받게 되면 일종의 방어기제가 발동해서 어떤 미움과 분노가 생기게 마렵니다. 하지만 바울은
회심이후,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중략)...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9:1-4; 10:1)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같은 왜곡된 방어기제를 발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한 자의 참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저주를 퍼붓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바울의 모습,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회심한 자의 바람직한 모습인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에 경우에서, 회심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회심한 이후, 새로운 종교집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그 새로운 종교집단에 가입한 이후, 자신의 종교적인 회심경험과 새로 가입한 종교집단의 신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경우,
그는 자신의 회심경험에 따라 새로 가입된 공동체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갖는 것을 감수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회심 한 후 사도 바울은
기존의 기독교 공동체의 주장과 그 자신이 회심경험을 통해 얻게 된 예수의 뜻 사이에서, 괄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갈등을 느낍니다.
이 때 바울은 자신의 입장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주장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회심경험을 통해 얻은 예수의 뜻을 따랐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는 유대인들을 저주하고,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은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주장에 무조건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공동체의 주장 대신 “예수의 뜻”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그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인용한 것처럼, 로마서를
통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롬9:1-5;
11:1-2)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2장 11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나무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즉, 베드로가 이방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피해 자리를
뜬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안 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전통이 자연스럽게 초대교회에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옳지 않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사람인데도 유대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사람더러 유대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갈2:14)
여기서 우리는 회심한 이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신반포교회의 전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 경험한 하나님 체험을 통해서 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얻어진 그 확신, 그 하나님의
뜻,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나의 신앙체험과 신앙공동체의 전통 사이에 갈등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회심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회심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회심사건은 회심 이후, 그의 내적인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회심을 경험한 이후에는 심각한 내적 고민을 느끼지 않고, 안정과 기쁨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회심사건 이후의 모습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 바울은 내적으로 끊임없이 과거보다 더
자기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신과 내적으로 갈등을 겪으며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해, 회심후의
모습이 항상 안정이나 기쁨으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층심리에서 작용하는 여러 가지의 방어기제와 본능,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생기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심사건은 오히려 내적인 평화를 얻는 사건이 아니라, 세상적인 가치와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더욱
치열하게 싸움하는 사건이요, 갈등 가운데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렇습니다. 회심은 곧 마음의 평화가 아니요, 오히려 마음에 갈등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회심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세상적인 꿈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사이에서, 과거보다 더 치열한
내적인 싸움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하나님의 경험, 곧 회심의 경험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회심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세상적인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좀 어색하지만, 다시 질문하겠습니까? “여러분, 회심하셨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회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알았던 그 “처음처럼” 다시 그 처음으로 돌아가십시다. 모쪼록 회심의 계절을 맞아 다시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고,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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