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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관
October 2003 김철수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계속)
(저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동아프리카 케냐 수도인 나이로비에 소재한 Nairobi Evangelic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NEGST)에 선교학부 교수로 작년 여름에 부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일년 이상 기고하지 못했음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KOSTA 편집위원들께서 계속 기고하도록 격려해 주심으로 다시 연재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5.2.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의 세계관의 핵심 비교 (계속)
지난 호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신앙고백이 형성해 주는 세계관의 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즉, 종교적 신앙고백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믿음의 전제(assumption)를 형성해주기 때문에 큰 힘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기독교의 신앙 고백의 구조와 이슬람의 그것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 신앙고백 되듯이 이슬람에서 역시 전능신 알라와 그의 마지막 선지자 무하마드가 고백된다(shahadah). 신과 중보자에 대한 이러한 고백들이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본 고에서는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현상적 및 심리적인 부분들만 다룸으로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문화를 보면 이러한 신앙고백은 어려서부터 이루어진다. 이미 앞의 2호에서 언급했듯이 동질문화권에서의 문화화 과정(enculturation)을 통하여 이러한 문화적 지식은 뇌에 각인되고, 따라서 그렇게 각인된 내용들은 당연한 것으로 믿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수학적인 공식을 믿는 것과 같은 그러한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신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무슬림 들과 같은 강한 세계관의 힘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믿는 것을 의심하면서 (cf. 고후 13:5) 자신이 과연 믿음 안에 있는지 확증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의심은 악이다. 절대로 알라와 무하마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슬림 들은 여간해서는 어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고백은 신학적 고민과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기보다는 문화화 과정을 통한 세계관 형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적 신념은 종교나 철학적 신념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슬람 문화권에서 문화화 과정(enculturation)을 통하여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 들의 사고에 형성된 세계관의 힘이 어떠한지 간단히 살펴보자. 그 세계관의 내용들은 알라(신)에 대한 내용들과 무하마드 선지자에 대한 내용을 축으로 하여 상당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는데, 본 고에서는 이슬람의 신조들을 모두 다룰 수가 없으므로 무슬림 들의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기본 골격 두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아랍어로 ‘타우히드’라고 하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며, 또 ‘리쌀라’라고 하는 무하마드의 선지자 됨에 대한 강한 신념과 충성이다. 신에 대한 개념이 어려서부터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의 신관과는 전혀 다르게 각인된 무슬림 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무슬림 전도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 어려운 것은, 무슬림 들이 믿는 무하마드에 대한 신념이다. 어떤 면에서 무하마드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충성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구세주이며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해 보일 때가 많다. 실제로 이슬람의 문화권에서 알라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멀리 있는 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일상 생활을 비롯하여 그들의 영적인 부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하마드의 언행이다. 무하마드의 행적을 기록한 ‘하디쓰(Hadith)’는 따라서 무슬림 들의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원인자(causality) 역할을 한다. 무슬림 들에게 무하마드는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하마드는 곧 이슬람의 대표이며 상징이다. 무슬림 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그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무하마드를 모독하는 것은 이슬람을 모욕하는 것이요 이슬람 문화와 사회 전체를 경멸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강한 집착으로 무하마드를 추종하고 충성하는 무슬림 들에게 우리가 진정 충성해야 할 대상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어떠한가? 앞에서 지적한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슬람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다분히 개인적인
일이다. 물론 집단적인 회심이 일어나며 가문 대대로 기독교가 전수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역시 구원의 개념은 개인적인 회심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지, 기독교 사회나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형성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성장과 성숙의 문제이며, 이미 자신의 문화권에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각인된 자신의 옛 세계관의 믿음의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과 충성(allegiance)의 대상들을
기독교의 믿음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으로 바꾸기 위하여서는 상당한 영적인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과 새사람 혹은 속
사람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렇듯 내면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고 계속하여 기독교적인 진리에 의하여 기존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이슬람의 가치관과는 근본적인 다른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 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계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5.3. 선교: 세계관의
충돌
위에서 이슬람권에서의 예를 들었듯이, 복음을 다른 종교 권이나 기독교를 모르는 사회에 가서 전할 때에 우리는 세계관의 충돌을 반드시 예상해야 한다. 선교는 다른 말로 하면 세계관을 바꾸도록 돕는 사역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의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각자의 의견은 자신의 성장배경에서 얻어진 문화화된 지식에 근거한다. 자신의 문화화된 지식에 의해서, 즉 자신이 지금까지 갖고 있는 세계관에 의해서, 신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등등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 내지는 신념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지 않고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기독교인들의 믿는 바를 긍정 해줄 수 있고 동의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동의를 해도 자신의 세계관이 복음의 진리로 바꿔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신을 구원시킬 만한 믿음은 아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남의 이야기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세계관의 내용인, 믿음의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이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성경적 진리의 세계관을 소개할 때 사람들은 세계관을 바꾸고 싶지 않은 일반적 성향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들의 세계관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바람직하다. 이것을 선교학에서는 상황화 과정(contextualizatio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차후에 더 설명하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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