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간혹 공개적으로 시행되는 죄고백의 위험성에 대해서..

baromi 2006. 9. 4. 13:27
8월 29일 논의 자료 김교신의 '고백의 효과'
번호 : 3   글쓴이 : 권호덕 Herman
조회 : 4   스크랩 : 0   날짜 : 2006.08.29 17:04
 

고백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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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第 136 號 (1940年 5月)

  

죄를 범한 자가 홀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또는 신앙의 동지와 함께 모여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일은 확실히 진실한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이로 인하여 몸부림 치고, 죄에서 멀리 떠나기를 결심하며, 선을 향하여 결단하고 돌진하려는 커다란 용기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신앙의 단계로 보더라도 먼저 그 죄를 고백하여 청산하는 것이 없이는 성령이 임할 수 없으며,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참다운 의미로 예수를 주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를 수 없다.

그러나 ‘고백’에는 여러 가지 폐해가 따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주교도가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해서 사회적 폐해를 일으켰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신교 중에서도 공중 회석에서 고백하는 일을 주된 행사로 하는 교단에서는 적지 않은 폐해와 과오가 섞여 있다.


고백은 진실에서부터 나오는 일이기 때문에 그 시작에는 매우 뜨거운 것이 특징이지만, 냉각하는 속도 또한 그에 비례해서 빠르고, 식고 난 뒤의 쓴 맛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고백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 적나라한 맛을 귀하게 여기며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그 ‘적나라’한 것을 미덕이라고 찬양하거나 실천해 보고자 한다면, 그 어떤 종교 단체라도 술꾼들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술꾼들이 예수쟁이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들처럼 적나라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취중에 모든 추태를 서로서로 그대로 다 드러내는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도 될 수 있고 참다운 인간 노릇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稻戶稻造) 박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친구 사이건, 부부 사이건 추태를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일은 결코 친밀함을 키우는 방법이 될 수 없다고.    귀 있어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고집 부리는 자는 스스로 끝까지 실험해 보라.


또 고백이 종교인만의 능사인 줄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믿음이 없거나 또는 믿음을 버린 문인들의 참회록을 보라.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보아도 그 적나라한 깊이나 표현 기술의 담대함에 있어서 확실히 종교를 가진 신도들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담대하게 다 드러내고 육신의 자아를 고백한 소설가가 구원받았다는 소식은 우리가 듣지 못했다.

성령 때문에 고백하고, 숨김없이 다 드러낸 다음에 성령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야 쓸모 있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적나라한 고백이란 것은 대개는 마귀 하나를 쫓아낸 후에 일곱 마귀가 도로 들어와 사는 것과 다름없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고백이란 일종의 심령적 외과 수술이다.    또는 극약처방에 견줄만한 일이다.    이것을 적당한 시기에 적당하게 시행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절개한 수술 부위를 날마다 다시 절개하듯이 하고, 극약을 상용하듯이 한다면 그 결과는 쉽게 추리할 수 있다.

고백은 무릇 심각해야 하며 끊어질 듯한 아픔이 있어야 될 터인데, 매끄러운 돌이 표면을 미끄러지듯이 하고 마는 것은 벌써 하나의 예술로 변해버린 까닭이다.    고백을 일상 생활에서 너무 쉽게 취급한 결과이다.


고백이란 반성의 결과이기에 물론 반성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성은 윤리 도덕의 세계에서는 중대한 것일지 몰라도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기초 중의 기초요, 초보 중의 초보다.    반성은 어린아이 수준일 뿐이다.

반성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옛날 누구처럼 ‘나는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한다, 吾日三省吾身’ 라고 하면 매우 거룩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크지 않은 몸뚱이 창자까지 뚫어지게 들여다 보아야 거기서 신통한 것이 나올 수는 없다.

일찍이 어떤 진지한 청년이 반성에 대한 고민을 못 견디고 그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때에 독실한 믿음을 가진 어떤 대학 총장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군의 신앙 태도는 마치 어린 아이가 분재를 심어 놓고서 얼마씩이나 자랐는지 궁금해서 매일 그 분재의 뿌리를 빼어 보는 일과 꼭 같다.    그렇게 해서는 분재가 자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살 수도 없으니, 이제부터는 자기 몸뚱이의 창자만 들여다 보지 말고 주 그리스도를 우러러 보라’ .

여럿이 모여서 반성과 고백을 주로 하는 행사가 있다고 하자.    이 모임은 그 대학 총장의 말을 빌어서 하자면 각자의 분재를 가지고 모여서 ‘뿌리 품평회’를 하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도 나름대로 소득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다고 별로 신기하다고 할 것도 없는 일이다.


반성도 좋고 고백도 좋다.    그러나 우리 심령의 간절한 욕구는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서고, 가지와 잎사귀가 풍성한 낙락장송이다.    깊음이 있고, 안정함이 있고, 숭고함이 있는 신앙이 아닌가.

각자 구하는 목표에 따라 아래를 볼 이는 아래를 보고, 우러러 볼 이는 우러러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