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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Ⅲ

baromi 2006. 8. 20. 18:02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3 | 신약신학 2004/12/2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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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정훈택  

3. 무엇이 상(상급)인가?

 

 상급론에서 주장하는 상은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핍박당한 자의 상,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전도자의 상, 유업의 상, 큰 상, 일한 대로의 상,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태의 열매,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적인 축복의 향유(enjoyment),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칭찬, 생명과 의식주 등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 명칭만을 구분하였을 뿐 무엇이 천국 안에서 주어지는 상인지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상급론이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다른 신학 주제와 결합하여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구체적인 상급 항목의 확대나 다변화는 별 경각심 없이 교인들에게 감동을 불어넣으려는 설교자들이나 부흥사들을 통하여 더욱 강하게 자극된다.

 

 예를 들어,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현세적 상으로 구분된 “기도의 응답”, “생명과 의식주” 혹은 세상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할 경우, 더욱이 현세 기복적 축복관과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잘 되는 삼박자 구원론’과 상급론을 결합할 경우, 물질, 건강, 장수(長壽),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출세와 명예 등 소위 번영신학이 선호하는 모든 개념들을 하나님의 상으로 정의(定意)하고 이런 것들을 기독교인의 삶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선하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교훈을 통해 성취/완성된 것으로 읽지 않고 그 대부분의 내용을 신약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로 읽으며 상급론과 결합할 경우 무엇이 상(상급)으로 고려되고 추구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된다. 돈과 땅과 재물, 재산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는 것 등 행복한 삶의 모든 요소나 조건들이 상(상급)의 범주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에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될 수밖에 없다.

 

 신학 연구, 신학 토론, 혹은 후학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학적 세계에서 상급론은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적은 아직 없다. 즉 상급론은 아직 신학적 인기를 얻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실생활의 세계에서 상급론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허황된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기독교인들이 성실한 삶이 아니라 꿈을 따라가고, 뜬 구름을 잡으며, 한탕주의식 삶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 상급론이 보장하는 ‘상의 범위’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상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하늘의 나라에서 땅의 나라로,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상으로, 그리고 영적 축복의 영역에서 육적, 물질적 축복의 영역으로 마구 이동, 확대하고 다양화, 다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사람들에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 적당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여 -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상급, 하나님에게 받은 상/상급으로 규정하고 추구할 수 있다. 흔히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이름 하에 부정적이고 비평적으로 거론되는 현실적, 물질적, 사회적 영역의 모든 행복의 요소가 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4. 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상급론이 하나를 심어 하나를 가꾸는 성실한 삶이 아니라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려 하고 인생의 대박을 터뜨리려고 하는 허황된 삶을 만들어 낸다는 가정을 위에서 제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단순한 가능성이나 기우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 교회에서 만나는 실제 상황임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왜 그런가? 상급론이 어떻게 허황된 삶의 근거나 자극제가 될 수 있는가?

 

 “상” 개념 자체가 그런 불씨를 품고 있다. 즉 심은 것 이상의 과다한 열매를 주는 것, 받는 것, 기대하는 것, 그리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상”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나 귀결에 붙어 오는 것, 더 주는 것이 “상”이다. 그래서 상급론을 추종하는 사람은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둔다는 생각, 일종의 투자심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작은 것을 뿌려 그 결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덤으로 벌어들인다는 “상”의 기본 의미가 상급론에서는 유한을 들여 무한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상” 개념을 분석해 보자. 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주어지는 칭찬, 물건, 돈 등 그 대가(代價)이다.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잘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는 표식,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다. 돈으로 주는 것을 “상금(賞金)”, 물건으로 주는 것을 “상품(賞品)”, 증서를 주는 것을 “상장(賞狀)”이라고 부른다. “상급(賞給)”이란 무엇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상으로 주는 돈이나 가치 있는 물건”을 뜻한다. 동사로 사용할 때 “상받다” 즉 “수상(受賞)”이나 “상주다” 즉 “수상(授賞)”이 된다. “상타다”, “포상(褒賞)”이라는 용어도 있다.

 

 “상”은 어떤 원인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좋은 일이거나 잘한 일이라는 가치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상이 주어지거나 상을 탄다. 원인으로서의 잘한 일, 착한 일과 결과로서의 상 줌, 상 받음이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설명해도 좋다. 원인이 될 아무런 일이 없으면 물론 상도 없다. 잘못한 일에는 벌이 따른다. 잘한 일에만 상이 있다. 상급론은, 따라서 “상선벌악(賞善罰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벌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상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원인과 결과, 잘한 일과 상의 인과관계는 일의 자연스런 진행에, 다른 한 외부적 요소가 개입하여 만들어진다. 그것이 잘 한 일임을 널리 알리고 모두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잘한 것임을 확신시키며, 계속 그렇게 잘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을 본받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상을 준다. 칭찬, 권장이라는 미래를 향한 의도성이 없다면, 즉 과거에 잘한 일에 대한 단순한 보답일 뿐이라면 대체로 상은 주어지지 않거나 질이나 양에 있어서 훨씬 축소된다. 반대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리려는 광고성,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경고성,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본받지 않게 하려는 경계성이 개입하여 벌이 주어진다. 미래를 향한 이러한 의도가 없다면 즉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면 대개 벌은 축소되거나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징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권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따라서 상은 앞 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그들의 의도대로 키워나가는 수단의 하나다.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에서 그 긍정적 부분만을 다루도록 변형하며, 앞 세대 대신에 창조주 하나님을, 새로운 세대 대신에 기독교 신자들을 대입한 것이 상급론이다. 상급론은 현실적 천국과 내세적 천국 이후의 문제만을 그 내용으로 삼음으로써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이 (한 사회의) 모두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바꾸었고, 그렇게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적 동기가 되도록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원인의 자연스런 진행과 그 결과에 개입하는 외부적 요소 즉  미래와 다른 사람을 향한 교육적 의도나 사회 선도적 목적이 일과 상의 인과관계를 자연적인 가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이다. 즉 좋은 일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자연적인 가치에 칭찬, 권고라는 인위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전혀 새로운 가치를 가진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나 잘한 일에 대한 보답 내지 보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상”은 - 칭찬과 권고라는 사회적, 교육적 의도 때문에 - “더 주는 것”, “더 받는 것”이다. 이 때 미래를 향한 의도성의 강도(强度)나 고려되고 있는 사회의 범위에 따라 “상”에 첨가되는 가치나 상의 규모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상이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익혀왔다. 우유를 잘 마셨다고, 혹은 젖을 잘 빨았다고 엄마는 아기에게 칭찬을 하고 쓰다듬어 주거나 꼭 껴안아 준다. 아기가 음식을 먹는 것은 - 아기의 성장과 발육이라는 관점에서 - 잘한 일이다. 음식을 먹는 착한 일은 그 자체로 아이의 성장, 발육이라는 인과관계의 결과 혹은 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이에게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한다. 언제라도 우유를 잘 마셔야 하고 젖을 잘 빨아야 한다는 교육적 가치를 첨가한 결과이다. 엄마의 의도는 그 아기만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상은 아기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제한된다. 유치원, 초등학생이 되면서 상은 조금씩 커진다. 성인이 되면 과거에 상이라고 부르던 것은 더 이상 “상”의 가치를 가지기 어렵게 된다. 웬만한 상급으로는 착한 일, 잘하는 일이란 확신을 심어주고, 그러한 일을 늘 반복하도록 자극하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성인의 입장에서 “더 생기는 것”, “더 주는 것”이라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야 “상”의 효과를 가지게 된다.

 

 껑충 뛰어 현대 사회에서 “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눈을 돌려 보자. 인생을 열심히 살며,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하여 얻어낸 결과물에도 수 억, 수 십 억원 상당의 상금이 주어진다. 인과관계가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까맣게 높은 것으로 더 주는 것이 - 현대의 - 상이다. 한국에 상륙한 로또 복권은 “상”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천 원을 주고 번호만 잘 고르면 수 십 억, 때로는 수 백 억 원이 “상”으로 주어진다. 더 많은 사람들을 로또 시장에 끌어들여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려는 의도성 때문에 자연스런 인과관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상으로 얹어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상이다. 상 개념은 자연스럽거나 성실한 삶을 자극하기보다는 “상”을 마련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미래를 향한’ 의도가 개입한 때문에 과대하게 확대된 “허황된 삶”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성경에서 정리했다는 기독교 상급론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을 거론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상급론에는 “잘한 일”과 이 일에 대해 “상으로 주어지는 것”, “한 일”과 이 일 때문에 “상으로 받는 것” 사이의 가치 불균형이 똑같은 원리로 흐르고 있다. 이 불균형은 상을 주는 분에 의해서 발생한 것인데, 상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신적 무엇이 상으로 내 걸린다.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 선한 삶이든, 순종의 행위이든, 아니면 고통의 십자가이든 - 인간적인 삶으로 신적인 것을 벌어들인다. 유한을 사용하여 무한을 소유하는 것이다. 앞의 3)항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신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라면 기독교적 삶이야말로 정말 멋진 투자이다. 투자! 작은 것을 내고 큰 것을 희망하는 것. 신적인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나의 작은 유한한 인생을 영적 모험에 내맡기는 것.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이런 투자로, 모험으로, 하나님의 상을 소유하는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십일조를 바치면 더 큰 물질적 축복을 받는다!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모두 투자이다. 신앙생활의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면, 지킴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 결론, 보상, 보답 이외에 하나님의 현세적 축복과 미래적 축복을 덤으로 더 소유하게 된다! 건강과 장수와 부와 성공과 출세와 권력과 평안과 안전, 그리고 내세의 화려한 면류관들이 모두 하나님의 상으로 내걸려 있다. 그러니 인생을 투자하라!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바르게 살아가라! 이것이 상급론이 만들어내는 현실적 결과들이다. 잠시를 투자하여 영원을 손에 쥐는 것. 영원을 손에 넣기 위하여 잠시를 바치는 것.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은혜를, 선물을 상으로 내거시고 실제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상으로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상급론이며 상의 신학이다.

 

출처 : 목회와 신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