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건전한 마음의 법칙: 깨어있는 이성적 마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근본적인 법칙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법칙은 우리들의 이성적인 마음(rational minds)이 언제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들의 마음(mind)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적인 가르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적 혁신은 우리들이 건전한 마음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법칙을 마음껏 비웃고 있습니다 실상 이 법칙의 이름은 바울의 디모데후서1장7절에서 따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여기서 ‘근신하는’이라는 한글은 헬라어로는 soponismou인데, 이것을 흠정역[2]에서는 sound mind로 번역하였습니다. 원래 헬라어는 '자기조절' 등의 뜻을 가지는 말인데, 여기서는 흠정역을 따라서 '건전한 마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역주).
은사주의자들은 마음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예배하고 봉사할 때 직접적인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를 열어두도록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통제를 반드시 포기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존 윔버는 "통제를 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고 염려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터져나올 때나 예배 중에 느껴질 수 있는 황홀경, 마음으로 직접 주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게 될 때, 기적적인 치료같이 엄청난 일들이 생기게 될 때 이런 이성적 통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유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신유은사를 받은 치료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들'이나 마음 속에 일어나는 'TV'화면같은 것에 열려 있기 위해서 냉정하고 이성적인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로 질병들을 진단하고 하나님께서 각각의 환자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 지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치료사들이 앓고 있는 사람들을 최면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기법들을 사용해서는 이성적인 통제의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치료사들 뿐만 아니라 환자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생각되는 복을 얻기 위해서 이성적인 기능요소를 포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적 치료집회는 힘을 다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이성적인 통제를 포기하고 완전히 아무 것도 금지될 것이 없는 대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 목표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예배 중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든, 납득이 되든지 안되든지,그리고 얼마나 이상한지 개의치 말고,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시끄럽고 율동적인 음악이 예배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팔을 높이 들어올리고 몸을 흔들면서 발을 구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합니다. 이성적 통제는 어쨌든 제쳐 두어야 합니다.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지적인 마음으로 방해되거나 조사받고 평가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마음의 법칙을 내팽개쳐 버림으로(그것은 추론하는 정신능력에 의하여 제공되는 방어막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거짓된 가르침과 과장, 거짓에 직면했을 때 대단히 속기 쉬워 집니다. 그들은 특별히 종교적 협잡꾼과 불량배들에게 당하기 쉽상입니다. 1987년 미국의 기독교방송(주로 은사주의계통입니다)에서 보여주었던 위기에서처럼 말입니다.감정주의가 난무하고 자기들 눈에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심각한 영적 무법주의가 활개를 쳤습니다. 이런 일은 객관적인 표준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그리고 판단의 기능요소와 자기통제의 능력을 제쳐 두었기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이런 기능과 능력은 안정된 마음(safe mind)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성적인 정신능력이 일상적인 모든 활동 중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가르침이 성경적인 것이라면 은사주의적 전체 사역은 심각하게 혼동스러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당신의 뜻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통적인 표준이 성경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와 영적 봉사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확고하게 통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의무임을 단언적으로 보여주는 성경구절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구절들이 대단히 많고 또한 분명하기 때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은사주의 계통으로 빠져들어가 이성적인 통제는 성령충만한 생활에 있어서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마음의 법칙을 옹호해주는 '비판의 여지가 없는' 많은 구절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안전한, 이성적인 마음이 성경에서 왜 그렇게도 강하게 지속적으로 명령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안정된 마음(Safe- Minded)을 나타내는 단어들
첫 번째 그룹의 본문들은 헬라어 sophron을 담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단어는 흠정역에서 보통 sober<깨어있는>, 때때로는 temperate<온건한, 적당한>, 그리고 한 번은 discreet<신중한>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sozo<구원하다>와 phren<마음>이라는 말을 합성한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마음이 안정된(safe in mind)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흠정역에서 사용되는) sober<깨어있는>란 말은, 안전한 마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이성적인, 그리고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은사주의적 사고의 중심강령, 곧 영적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이성적 통제는 간혹 포기되어야 한다는 강령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디모데전서3장2절에서 바울은 장로들은 언제나 이성적인 정신능력이 깨어있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독은.....근신하며(흠정역으로는 sober로서 마음이 안정된, 자기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 우리말로 근신한다는 것은, 언행을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임:역주) 아담하며”(흠정역으로 of good behaviour로서 질서있는 행동을 한다는 뜻.우리말 아담하며라는 말은 고상하며 깔끔하다, 혹은 조촐하고 산뜻하다는 뜻임: 역자주). 여기서 장로들에게 요구되는 안정된 마음은 헬라어, 이 말 곧 질서있는 행동을 (잘) 한다는 말 sophron에 강조되고 있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on)은 장로들이 언제나 온화하며 균형이 잘 잡혀있고, 침착하며, 조심스럽고, 안정되며 건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 단어들이 보여주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충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성적 통제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NIV성경은 temperate<온화하며>, self-controlled<절제하며>, respectable<존경할 만하며>하다고 번역하고, NASB성경은, prudent<신중한>란 말을 첨가합니다. 장로들은 명민한 사람이어야 하고, 빈틈이 없고, 생각하는 것이 명확하며, 분별력과 정신적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디도서1장8절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을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그는 헬라어로 마음이 안정된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흠정역로는 sober<깨어있는>, NIV[3]는 self-controlled<절제하는>, 그리고 NASB[4]는 sensible<분별력이 있는>). 디도서2장2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모든 나이든 남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깨어있고, 안정된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안정된 마음이 반드시 직분자들이나 나이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이 단어를 젊은 여자들에게도 적용시킵니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근신하며(2장4절). 젊은 여자들이 안정된 마음을 가지도록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흠정역으로는 discreet<신중한>). 그들도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디도서2장6절에서 바울은 이 기준을 더 확대해서 적용합니다. 디도에게 말하면서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sober) 하라고 합니다. 여기 sober<근신하다>는 말이 self-controlled<절제하며>, sensible<분별력이 있는>, prudent<신중한>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헬라어는 sophroneo인데,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성적이며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이 언어의 통제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며 혹은 최면상태로 빠져들어가도록 자신자신을 방기해 버리는, 자기도취적인 정서적 황홀경의 짧은 은사주의식의 여행과 일치될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똑 같은 단어를 베드로가 참된 기도에 관하여 교훈하는 중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안정된 정신으로,이성적으로) 기도하라(베드로전서4장7절). NIV번역은 이렇습니다: Therefore be clear minded and self-controlled so that you can pray(이러므로 맑은 정신을 갖고 자기자신을 통제하면서 그렇게 기도하라). 이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혹은 마음 속으로 확 전기불 켜지는 것처럼 받게 되는 이상한 메시지나 거친 환상에 반응하여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성경에 따르면, 기도란 믿음으로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되 통제된 그리고 이성적인 마음의 활동입니다.
안정된 마음이란 말의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또 다른 구절은 디도서2장12절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soberly)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서 soberly<근신함으로>나, 안정된 마음으로라는 헬라어(sophronos)는 자기억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성적 정신능력은 우리의 모든 정념, 사고 그리고 욕구에 대하여 통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백성들이 당신께 예배하려 나아올 때 자기들의 정신능력과 감정들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당신의 존전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히 우리들을 신령한 사랑과 예배의 높이로 우리들을 올려주시겠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기통제를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soberly<근신함으로>라는 말은 sensibly<분별력있게>, in a self-controlled way<자기를 통제하면서>, with self-mastery<자기를 지배함으로> 등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sophron이란 단어군은 모두 다 똑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안정되었다(혹은 통제되었다, 억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용된 모든 구절들은 신자의 생활에서, 계속적으로 의식을 지니고, 능동적이면서 이성적인 정신능력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 phroneo(신중하게 생각하다)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 마음의 통제하는 역할에 대하여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논리도 없는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심이나 숙고함’을 함축합니다 [Vine신약성경주석어휘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이 단어는 단순히 정보나 인상을 받기 위하여 수동적인 수용기구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기 보다는 통제된(directed)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동사 phroneo는 바울이 우리들에게 명령하여 영적인 목표를 위해서 활동적이고 조심스러우면서 통제하는 마음의 활동을 적용하라고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한 가지 예만 살펴봅시다. 골로새서3장2절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흠정역:Set your affection, '너의 정동을 결정하고'라고 번역가능함:역자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NIV와 NASB는 affection<정동>이란 단어대신에 mind<마음>를 사용해서 번역합니다. MLB[5]는 '너의 마음을 적용하라'(apply your minds)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적용하다'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을 나타냅니다.[6]
신자들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자기들을 공략하고 있는 영향들을 평가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계속 활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말들과 행동들을 결정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의 규칙은 포기하거나 내버려 둔 마음이 아니라, 성화되어서 언제나 활동하고 그래서 안정되어 있는 마음입니다.][7]
2. 자기통제(Self-Controlled)를 나타내는 단어들
또 다른 매우 중요한 헬라어 단어군이 신자들이 자신들의 사고와 말과 행동에 대하여 의식적이면서 이성적인 통제를 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 단어군은 kratos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동사, 형용사, 명사들인데, 그 뜻은 힘, 능력, 지배 등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단어들은 자기통제를 나타냅니다.
동사 enkrateuo는 바울이 고린도전서9장25절에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적인 엄격한 자기통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흠정역은 temperate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통제를 나타냅니다. NASB는 모든 일에 자기를 통제한다(exercises self-controlled in all things)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완벽한 묘사를 제공해줍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인 자기절제를 음식이나 여가생활에 대한 충동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심사숙고한 훈련프로그램을 저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태가 성화에 대하여 말하는 두 개의 중심구절에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5장23절에는 이러한 이성적 힘이나 자기통제가 성령의 열매인 절제(temperance)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현대의 번역성경들은 대부분 self-control(자기통제)로 번역합니다.
베드로후서1장5-6절에서는 경건한 생활을 위한 잘 알려진 연쇄적인 권면의 사슬 속에 자기통제가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temperate,self-control)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공급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확증됩니다. 견고한 이성적 통제는 결코 (전기불이 꺼지는 것처럼) 꺼져버려서는 안되고 무시되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에 필수적입니다.
이 단어의 형용사형태가 디도서1장8-9절에 나타납니다. 감독자들은 근신해야하고(sober) 안정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감독자들이 절제(temperate)해야 하며, 그래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져들지 않아야 하고, 지혜나 지식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직접적인 메시지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추리과정, 이성적인 마음을 계속 통제할 수 있고, 사도들의 세대가 자기들에게 전수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에 아무 것도 더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그것을 가르치기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교리로 그런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극단적이며 성경에도 없는 교리들을 소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교리들을 환상이나 꿈, 그리고 황홀경의 체험을 통해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이성적 기능들을 잠시 제껴두고 있는 것입니다.
3. 근신하는 마음(Alert-Minded)을 나타내는 단어들
이성적 마음의 우위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어는 nepho입니다. 이 단어는 보통 흠정역에서 sober<근신하는, 깨어있는>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알코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것이 주로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마음이 맑고 깨어있어서 유혹이나 거짓 가르침을 탐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5장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흠정역으로는 sober인데, alert<방심치 않는>로도 번역됨)고 합니다. 분명 sober가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경계를 하고 우리의 이성적 정신능력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함을 주장한다는 것이 우리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장13절에서도 그 단어가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장8,9절에서도 그렇습니다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성경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표준은 이성적, 생각하는, 분별하는 정신능력을 결코 꺼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4. 생각하고, 분별하며, 지시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들
마음이나 이해력에 대하여 나타내는 또 다른 헬라어가 dianoia인데, 이 단어는 특별히 생각하고 실행되는 마음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 단어는 엄격하게 숙고함이나 철저하게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이 생각하는 마음이란 말이 베드로서신에 두 번 나타납니다. 베드로전서1장13,14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생각하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3장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생각하는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우리들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환상이나 지식의 말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영적 진보는 선지자들과 주님의 사도들이 남긴 영감된 말씀을 심사숙고하면서 연구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원리는 분명합니다 - 성경이 우리의 이성적 마음 속으로 전달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교제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깨어 있으면서 그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선언합니다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생각하는 마음)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니(요한일서5장20절).
누가는 주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에 어떻게 제자들에게 교훈하였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누가복음24장45절). 이것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 신적 진리를 전달받는 패턴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나타내는 이 단어(nous)는 바인(Vine)에 의하면, '지각과 이해의 능력을 구성하며, 감각, 판단, 그리고 결정을 하는, 반성적 의식의 좌소'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린도전서14장15절)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정신능력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영(곧, 영적 생명)이 이 정신능력을 통해서 기능하고 자기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성적 마음이 전등스위치가 꺼져버리듯이 꺼져버리면, 그것 자체를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이 아니라 단지 감정이기 때문입니다.[8]
헬라어 logizomai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일일이 세다, 측정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13장1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간주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성숙한 그리스인들에게 이성적 정신능력은 오직 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언제나 모든 것을 평가하고 측정합니다. 만일 우리가 은사주의 집회에서 유도된 분위기로 최면이 걸려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을 그쳐 버리고 비성경적인 개념과 주장의 물결을 따라 떠다닌다면 그것은 주님께 불복종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suniemi는 소집하다,모으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영적인 이해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비유의 의미를 간파하고 깨닫게 되면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13장5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suniemi)며 질문을 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이런 성질의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영감된 말씀(바울 자신의 말과 같은)을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2장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sunesin)을 주시리라. 디모데는 신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범사에 유익한, 영감된 기록에 적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골로새서2장2절에서 바울은 구원이 말씀의 깊은 이해를 통해서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표적과 기사, 그리고 이상한 체험들을 통해서 얻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원만한 이해(sunesews)의 모든 부요에 이르라(unto all riches of the full assurance of understanding) 고 합니다. 골로새서1장9-10절에서 바울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신령한 지혜(sunesei)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합니다.
언제나 통제됨
신약성경은 건전한 마음가짐에 대한 권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제한된 지면으로 그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12장2절도 들 수 있겠습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적이고 안정되며 건전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신령한 모든 일들을 평가하고 또한 분별하게 됩니다.
빌립보서4장7-9절에서 신자들의 마음(또한 그들의 생각)이, 그들이 깨어있고 모든 일들을 검사해 볼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명합니다 -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계속 깨어있어야 할 이성의 정신능력의 역할이 계속 고린도후서10장5절에서 옹호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은사주의 실험에서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통제된 마음을 금하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는 것을 전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론(흠정역에서는 imagination<상상>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역주)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 표준은 참된 신자들을 위하여 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윗의 시편32편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찌어다 (흠정역에는 이 말 뒤에 '그것들은 이해력<understanding>이 없다'는 말이 있음: 역주)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로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이해력<understanding>이란 말은, 정신적으로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 기술적으로 생각하는 것, 신중하고 지혜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건전한 마음: 역자주)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건전한 마음(sophronismos)은, 자기를 통제하는, 훈련된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분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 사랑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우리들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안정된 마음 이 세 가지 기질들은 모두 다 우리들 신자들에게 결정적이고 값진 것들입니다. 오늘날의 은사주의적 치료방법을 산출해 낸 기질과 태도는, 성경에서 요구되는 건전한 마음의 정신이 아니라, 영적 포기와 모험의 정신입니다. 유일한 권위로서의 성경을 포기함으로써, 은사주의 치료사들은 수많은 다른 영향력의 위험 아래에 자신들을 두고 있습니다. 순수한 인간의 상상력에서부터 시작해서 귀신의 암시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짐
이성적 통제의 신성함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가장 첫 번째 성경적 이유는 추리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로서 인간을 나타내는 특징들 중에 가장 우선되는 정신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창세기1장26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르리게 하자 하시고. 이성의 은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그리고 가장 고상한 정신능력입니다 -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분별력있게 논리적으로 조직화시키는 이성적 방식으로 사물들을 분별하고 무게를 달아보는 능력이 그렇습니다. 분명히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지금도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입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원래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또한 주님과 더불어 영적으로 적합하게 교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첫부모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간에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은 창조자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잘잘못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고, 영원한 영혼, 그리고 이성적이며 추리할 수 있는 정신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거친 짐승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당신의 속성들을 인식하고, 모든 마음과 생각을 다 바쳐 당신을 섬기도록 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특권적이며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당신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자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생각하며 이성적인 정신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해서 감사와 사랑과 찬양을 진지하게 표현하도록 고안할 사람들을 그 분은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이 가장 뛰어난 자연적 은사를 자주 억제하려고 하며 기본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의 세계로 잠시 동안이라도 도피하려고 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고등감각기관이 마비되고 둔해집니다. 그래서 저급한 욕구들이 우세해집니다. 술취하는 것은 단기간적으로 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위치를 저버리고 당분간만이라도 이성적 정신능력을 제껴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술취함의 현상을 통해서 볼 때, 은사주의 개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보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자기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감정과 황홀경,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채 지껄이는 것, 우연스러운 인상, 환상, 환각,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메시지, 가공적인 상상 등등의 물결을 타기 시작할 때, 은사주의자들 자신도 모르는 채 술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는 바로 그 목적과 동일한 것을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순전한 영적 활동은 술취하는 것과 바로 정반대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5장18절에 그것을 말했습니다 -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은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서도 무언가에 취해있는 대안적인 형태의 정서적 술취함을 낳는 것이 아닙니다! 고등감각기관(마음과 이성)이 한시라도 둔해지거나 희미해져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억압되거나 비껴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반대입니다. 성령님의 축복으로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더 지혜롭게 되어서 모든 지각에 넘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넒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찬양은 모든 감각이 완전히 살아있는 가운데 터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깊히 체험되어지는 감격적인 예배를 왕이신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이성적 마음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 어느 때나 활동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22장37절).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사랑한다면 또한 우리의 마음의 생각하는 기능, 통제하는 활동을 더 이상 꺼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혐오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상의 담지자이고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 정신능력을 제쳐 두고 현실과 접촉을 잃어 버려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 값진 정신능력의 활동을 방해하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정신능력이 술이나 환각제나 횡설수설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항복하는 등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 무감각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정서적 황홀여행(이것이 예배라고 잘못 명명되어 있지만)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성적 정신능력을 전기불 끄듯이 꺼버려서는 안됩니다. 혹은 록음악에 맞춘 복음송에 '도취되도록' 해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헛된 이야기들을 비판없이 받아들여서도 안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의 그들의 이성적 능력을 잠시 제쳐 두고는 중세의 로마교회의 꾸며낸 이야기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경향이 은사주의 복음주의 가운데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복종의 기관으로서의 마음
이성적 마음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복종하게 되는 기관이라는 사실로부터 명백해집니다. 회심 때 마음이 성령님에 의해서 새롭게 되고 조명을 받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벌코프(Berkhof)는 말합니다, "그때 그렇게 성화된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함으로써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계속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게 됩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완성된 계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영적 필요를 채우기에 온전히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시를 사도들의 세대에 주셨습니다(요한복음14장26절과 16장13-15절). 성경이 완성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주어져 성경에 없는 교리나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3장16-17절).
성경을 우리의 이성적 마음으로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들에게 권위적으로 말씀해주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만지시는 우연적인, 보충적인 방법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적인 인도하심과 교훈은 언제나 성경으로부터만 옵니다. 어딘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간혹 우리들의 양심을 쿡쿡 찌르고 기억을 자극해서 우리의 죄를 자각하게 하고 무시했던 일을 다시금 실행하게도 하십니다.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명확하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하는 어떤 계시를 우리들에게 결코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떤 치료자가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향받기 쉬운 사람들이 신유집회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느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리적인 마음이 해야 할 유일한 역할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의도는 좋으나 실수를 해서 고침을 받아야 할 어떤 사람의 심각한 실수일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자기영광을 좇으며 경건치 않은 어떤 사람의 악의적인 고안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예배시에 그리고 기독교인의 봉사생활에 최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성적 통제를 꺼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의사소통의 (전화)선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궁전으로서의 마음
마음이나 이성적 정신능력은, 그것이 또한 믿음의 거처이며 궁전이기 때문에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분히 납득이 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기록과 가르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믿습니다. 그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그 약속들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밝혀주시고 그 말씀으로 납득된, 이성적 정신능력에 의존합니다. 믿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어는 설득된<persuaded>, 납득된<convinced> 이란 뜻과 연관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기능하고 열려 있을 때에야만 우리는 설득되고 또한 납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전깃불 끄듯이 꺼버리는 것은 믿음을 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없이 비성경적인 이야기와 일상처럼 일어나는 기적에 관한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에 우리의 마음을 열게 된다면, 믿음의 궁전에 어떤 가구들이 남아있게 될까요? 믿음의 방에 무엇이 채워지게 되겠습니까? 무엇에 대하여 우리가 설득이 되며 납득이 되는 것일까요? 마음은 그 입구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으면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을 물품들을 조심스럽게 꼬리표를 붙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이 최상의 방으로 안내되어야 하고 믿음은 이런 저장품들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다른 정보들은, (앞으로 기회있는 대로) 검사를 받고, 평가되어지며 또한 기억되어야 할 물품들로 꼬리표가 붙어서 마음 속에 있는 잡다한 곁방과 곁길들로 들어서서 저장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있는 어떤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거나 믿을 만하다는 꼬리표가 붙여져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현대의 은사주의 치료방법에서, 신유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치료자의 주장과 강조하는 바에 놓여 있습니다. 신유집회에서 유명인사가 된 치료사는 말합니다. 당신이 치료될 것이라고. 자기는 언제나 이렇게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아니라, 바로 그가 당신에게 치료를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당신에 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한 마디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잘못된 것인 지, 그리고 곧 치료받을 것이라는 말을 말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은사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을 만질 때에 사람들이 뒤로 덜렁 넘어져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집회가 계속되면서 홀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들이 치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주저함과 불안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설득을 당한 채 집회장소에 나갔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인 이성적 정신능력을 잠시 제쳐 두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 가능한 한 자신을 많이 열어 두고, 민감해지도록, 그리고 영향을 받기 쉽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믿으라고 극성스럽게 외쳐대는 비성경적 정보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치료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보, 그의 주장, 그의 약속, 그의 능력, 이 모든 것들이, 모두 다 그가 발설하고 있는, 그럴 듯하게 들리는 '지식의 말씀'들에 의해서 강화되어집니다. 당신의 믿음을 이제 어디에 두겠습니까? 그런 집회를 통해서 치료받기 원할 때, 당신의 믿음은 순전히 인간이 주장하는 바와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뒤범벅되어 있는 것 위에 놓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가 아니고 말입니다. 마음은 믿음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가르침이나 개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사해야 할 의무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성적 정신능력은 은사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결코 한시라도 의무를 태만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행하는 실수와 사탄의 교묘한 전략 때문에 계속해서 상처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함이 우리의 목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에베소서4장1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성품을 계발하고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며 사랑과 지식이 증가하고 또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좋아지도록 애를 씁니다. 우리는 영적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도록 자라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만 하겠습니다. 은사주의의 이상은 성숙함을 포기하고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율동적인 음악과 춤, 손뼉을 쳐대는 것, 자유스러운 분위기, 금지되지도 않는 우스꽝스러운 몸짓, 마음은 잠시 제쳐 두기를 바라는 요구 등 이 모든 것이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즐겁게 해주는 행위긴 하겠지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일에 성숙한 사람이 불편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성령님께서 생활 속에 역사하시기를 꺼리기 때문이 아니라(은사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런 절차나 예배가 영적 성숙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려 하면서 또 그 분을 닮아가려고 하면서, 우리들은 물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행동하실 때에 자포자기하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닥에 구르면서 춤을 추고 펄쩍펄쩍 뛰도록 고무시키셨던가요? 오늘날 몇몇 치료사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금지가, 해제된 듯한 신체적인 제스쳐를 보이셨던가요? 신자들이 황홀경에 빠지게 하거나 갑자기 외치게 하거나,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거나 깜작 놀랄 정도로 웃어대도록 하셨던가요?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향하여 가는 노정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른스러운 마음들을 사용하고 어린아이들처럼 행하지 않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때로는 마음을 사용하지만 어떤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행동은 언제나 마음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하고 또한 이 점에 있어서 신실하며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인되신 분께 값진 것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가면극이나 연극을 좋아합니다. 또한 이야기나 깜작 놀랄 일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속임을 당하기 십상이고, 무엇에나 개방적이고 믿기를 잘하고 그래서 쉽게 잘못 다른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스인의 성숙을 향한 우리들의 여행에 있어서 행해야 할 의무는 바울의 다음 말에서 분명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13장11절).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은사가 있는' 치료자들에 의해서 나음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은사주의적 사고에 젖어 들면서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슬프게도 이것이 어린이와 성인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은 마술사가 하는 일에 멍해지지만 어른들은 사물이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어떤 법칙을 그 상황에다 적용시키곤 합니다.
목사들조차 은사주의적 목회자모임이나 회합에 빠져 들어가 성숙의 옷을 벗어 제쳐 버리고는 억제에서 해방된 행동이야말로 바로 성령님의 축복을 받게 해준다는 주장을 실험해 본다고 합니다. 부추겨진 감정적 흥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능력과 축복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위를 향하는 것이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숙한 행동, 이성적 통제와 분별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다른 모든 목적들과 함께 말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장성한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4장20절).
영적 성숙의 의무와 건전한 마음의 법칙을 저버리고, 은사주의 교사들은 수많은 신자들을, 참된 기독교가 그곳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온 바로 그 유아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의 진구렁창 속으로 다시 쳐놓고 있습니다. 소위 고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열광적인 은사주의자들은 성숙의 과정을 뒤바꿔 버려서 그리스도인들을 유치한 어린아이들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다음의 교훈에 지적되고 있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장14절).
[1] 원래 이 장은 10장에 있는 것이지만, 이 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법칙’의 성경적인 기초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계속 이어지는 저자의 은사주의운동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 한글번역판에서는 3장에 번역해 놓습니다(역주).
[2] King James Version(KJV)을 말하는데, 한글로 “흠정”(흠정)이라는 말은 황제가 친히 제정하거나 제정을 명령한 것을 의미합니다(역주).
[3] New International Version의 약자. 1973년도 번역(역주)
[4] New American Standard Bible의 약자. 1963년도 번역(역주).
[5] Modern Language Bible의 약자. 1959년 번역(역주).
[6] '너의 정동을 결정하고'(Set your affection)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는 한 단어(phroneo)입니다. 안트와 깅그리히(Arndt & Gingrich)는 이것을 '마음을 두다. 의도하다'(set one’s mind on; be intent on)라고 번역합니다. 고데(Godet)는 phroneo라는 말을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빈센트(Vincent)는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그래서 마음을 어딘가에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Earle의 신약성경단어사전Word Meaning in the New Testament]에서].
[7] [ ]안에 든 내용은 원본에는 <2.자기통제를 나타내는 단어들>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는데, 헬라어의 sophron과 phreneo가 오히려 동일한 어군에 속한 단어들이기 때문에,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 이해를 더 쉽게 도울 수 있다는 판단에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역주).
[8] .안트와 깅그리히는 nous(마음)가 물체적 지적인 지각의 정신능력을 나타내며 또한 도덕적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와 찬송할 때 그 사람의 영과 함께 협력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정신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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