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성화의 과정과 중생 전후의 죄와의 싸움 | |
번호 : 2914
글쓴이 : Horace |
조회 : 1 스크랩 : 0 날짜 : 2006.04.29 01:43 |
rlaalrk님께, 곧 답변을 해 드린다고 했는데, 계속 분주한 일들로 인해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제가 문제인 만큼(저로서는 이 문제가 참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좀 자세히 답변할려고 마음먹었는데, 계속 다가오는 일들 때문에, 도저히 그런 시간을 내지 못하고 이러다가는 영 아무런 답변도 못하겠다는 생각에, 만사를 제쳐두고 잠시 시간을 내었습니다. 아마도 저로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담고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질문하신 것을 보면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성화의 과정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중생이전과 중생 이후에 있어서 죄와의 싸움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첫째,
성화의 과정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칭의와 중생 이후에 곧장 시작되는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인 것은 아마 아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칭의의 시작과 성화의 시작은 일치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는 그
“순간”을 묘사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성화는 그렇게 의롭게 되는 “순간”을 포함해서 그 “순간”
이후의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화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는 것은, 신앙의 선진들은 두 가지 용어로 설명해 왔습니다. 하나는
“생화”(生化,vivification)혹은 “살림”, 또 하나는 “사화”(死化, mortification) 혹은 “죽임”입니다.
생화 혹은 살림의 과정(vivification)은 중생의 과정에서 주어진 새생명의 기운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강화시키는 활동입니다. 여기서 새생명의 기운이란, 새로운 영적 감각(new spiritual sense)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새로운 본성(new nature)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중생 이전에는 전혀 갖지 않았던 새로운 기질이고,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새 기질인 셈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기질과 성품, 혹은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될 때에 그 사람을 “새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고 있는 한글의 언어구조때문이기도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나 히브리어에는 ‘새롭다’는 개념을 한 단어로만 아니라,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단어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히브리어에서는 “아헤르”라는 단어와, “하다쉬”라는 단어가 “새롭다”는 개념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헬라어에서는 “네아”라는 단어와 “카이네”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새롭다”는 개념에 있어서 최소한 질적인 새로움과 양적인 새로움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어떤 단어들이 질적인 새로움을 나타내고 다른 단어들은 양적인 새로움을 나타내느냐 하는 문제는, 좀 더 본격적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단어분석이 시도되어야 하겠기 때문에, “새롭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한글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지적만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고린도후서5장17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때의 “새로운”은 “카이네”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피조물로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휘시오스, physis, or nature)에 “새로운 본성”(카이네 휘시오스)을 부여받은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카이네) 본성”을 부여받는 것 없이는 “새로운(카이네)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성경 속에 깊이 들어가서 묵상하였던 영국의 청교도들의 글 속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스테판 차르녹(Stephen Charnock)의 <중생 New Birth>라는 책 속에서 이것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다섯부분으로 나눠서 그 첫번째 부분을 지평서원에서 번역출간한 줄 알고 있습니다. 두번째 부분이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인데, 곧 번역되어 나올 줄 알고 있습니다. 나오면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생화, 혹은 살림(Vivification)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 부여받은 새로운 기질, 새로운 성품, 새로운 본성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는 것도 하나의 거룩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것도 그러한 성품들 중의 하나입니다. 경건에 속한 것들을 즐거워하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멀리하려고 하는 성향도 그런 것입니다. 생화, 혹은 살림이란 바로 이런 경향들을 더욱 강화시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사화, 혹은 죽임(mortific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본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생활 속에 속한 부분이 남아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죽여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들으면 의아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전의 생활 속에 속한 부분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는 것을 죄와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천사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중생함으로 인하여 새로운 본성과 기질을 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나 자신”으로서입니다. 이 “나 자신”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전에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습관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중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이전에 살아왔던 삶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물리적 환경과 심리적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환경들 속에서 익숙해져 있는 이전의 삶의 습관과 버릇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군생활을 하면서 이전에 마시지 못했던 술을 자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생활을 마치고 나서는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맛있는 반찬이나 안주감을 보면, 술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군생활을 마친지 지금 20여년이 넘는 싯점에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우리들에게 미치고 있는 지를 저는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이전에 거짓말했던 “내”가, 이전에 도둑질했던 “내”가, 이전에 음란했던 “내”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거짓말하고 이전에 도둑질하고 이전에 음란했던 그 이전의 삶의 방식과 습관에 속하였던 일들이 지금 새로운 피조물되어 있는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임 혹은 사화(Vivification)란, 바로 이런 이전 생활에 속한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마다 그런 영향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지니라(고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 이상의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성화의 과정이란, 바로 이런 생화와 사화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Imitatio Christus)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이며 과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강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무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지,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통하여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채로, 생화와 사화의 과정을 강조하게 되면, 새로운 율법주의에 빠지기 싶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강조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입니다. rlaalrk 형제도 성화을 추구해 가시면서도 주안에서의 성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화나 사화, 살림과 죽임, Vivification과 mortification의 과정은 모두, 우리 주님과의 이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성화를 통하여 이룬 그 삶이 자신의 의를 이루어 자기자랑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소망하면서, 이런 성화를 추구해 가게 된다면, 이 성화의 과정, 살림과 죽임, 생화와 사화의 이 모든 과정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즐기게 되고, 주님의 성품과 그 하신 일들, 하시는 일들에 대한 체험들이 이 과정에 있는 모든 이들로 말미암아 참으로 기쁨 중에 천성을 향해서 순례길을 가는 순례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형제의 삶에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II. 중생 전후의 죄와의 싸움의 비교 이제 두번째 질문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앞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나마 답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중생시에 주어지는 새로운 본성에 대한 이해를 철저하게 하게 되면, 중생 전후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비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싸움의 성격과 결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중생 전후의 죄와의 싸움의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생 전의 죄와의 싸움은, 죄에 대하여 아직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더불어 싸운다고 하나 실상은 허공을 치고 있는 셈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운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회심할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에 하셨던 말은, 회심 이전에 바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바울은 중생이전에 “가시채를 뒤발질”하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싸웠던 중생이전의 죄와의 싸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은, 바리새인의 기준으로 보면 율법에 완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시채를 뒤발질하는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생 이전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었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삶에는 죄와의 싸움을 하면서도 그런 죄와의 싸움 속에는 은밀히는 오히려 죄를 즐기는 마음도 뒤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르는 죄를 싫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죄를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이 죄를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이 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서 자신이 죄를 싫어하고 죄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죄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서의 죄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런 자아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의 싸움이라는 면에서, 이런 자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꿔진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의 죄와의 싸움에서는, 죄를 단순히 어떤 조항을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면에서 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측면에서 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과녁을 빗나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녁이 하나님의 인격과 뜻에 어떤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중생 이전에는 “거짓증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과녁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그런 목표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도덕적, 윤리적 목표를 세워둔 셈입니다. 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그런 도덕적, 윤리적 목표로서의 율법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물론, 이 말은 그것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곧, 거짓증거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어겼다는 것만 아니라, 그런 율법과 명령을 세우신 하나님의 인격을 침해하고 그 분의 권위와 영광을 손상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에 더욱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런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관계해서 죄와 더불어 싸워가는 것에 대해서 더욱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중생 전후의 죄와의 싸움의 결과에 대해서입니다. 아마도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중생 전의 죄와의 싸움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아직 중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중생치 못한 사람의 상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워간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바로 앞의 중생 전후의 죄와의 싸움의 성격을 음미하시면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중생한 사람의 죄와의 싸움은, 한 마디로, 승리하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생 이전에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중생 이전에는, 나 혼자서만 죄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하지만, 중생 이후에는 나와 더불어서 성령님도 죄와 싸워주십니다. 이 말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함께 하셔서 나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한 마디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생한 자들을 위하여 지금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히브리서7:25) 이 싸움은 이전의 싸움과는 다르고, 그래서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도우시고, 성자 하나님이 기도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들의 싸움에 있어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는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중생한 자들이 “견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당신께서 “견인”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중생 이전에는 나 혼자서 싸우는 것이고, 중생 이전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나와 더불어서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여기서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더불어 싸우신다는 것이 나로서는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대신에 죄와 싸워주신다는 의미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싸우는 싸움은 중생한 나 자신이 치뤄야 할 싸움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싸움이면서도 그 싸움을 바로 나 자신을 통하여서 치루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들의 죄와의 싸움은, “거룩한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전쟁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사도가 이것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영적인 씨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해 가야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서둘러 간단히 표현한 바가 없쟎아 있지만, 아마도 질문해 주신 것에 대해 간단히나마 답변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성화의 주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다양한 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 면도 있으리라고 여기면서도 저의 분주한 중에 쓴 답변임을 이해해 주시고, 주님 안에서 더욱 정진이 있으시길 기원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주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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