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

baromi 2006. 3. 31. 15:01

Archie Hui박사는 스코틀란드 에버딘대학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성령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리고 성령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워치만 니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역자: 홀리죠이).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

(The Pneumatology of Watchman Nee: A New Testament Perspective)

 

출처: Evangelical Quarterly, 75호 4권, 2003, 3-29

 

I. 서론

 

워치만 니(1903-72)는 중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아주 영향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는 "the Little Flock", 혹은 "the Local Church"라는 중국토종교회를 설립했는데, 계속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다. 공산당이 중국본토를 차지하게 되는 1949년에 이르러서는 이 운동은 7만명의 신도가 있었다. Leslie T.Lyall이 중국내지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에 있는 중국기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을 썼을 때, 세 인물을 뽑아서 그들을 다윗왕국의 세 장수들에게 비교하였다(Three of China's Mighty Men, London:OMF Books, 1973, 9-10).워치만는 이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통찰력의 인물"이라고 불리워졌다(다른 두 인물들은, '겸손의 인물'인 상해의 Yang Shao-t'ang of Shansi, '철의 인물'인 북경의 Wan g Ming-dao).

 

 

중국교회지도자들 중에서 워치만 니는 유별나게도 중국기독교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어떤 것들(특별히 The Normal Christian Life, Fort Washington: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1958 같은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서 수만부씩 팔렸다. Dana Roberts는 말하기를, '인쇄된 매체들을 통해서 그의 책들은 복음주의운동권 내에서 성경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Understanding Watchman Nee, Plainfield: Haven Books, 1980, ix). 니의 신학적 용어의 관점에서, 중국교회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의 면에서, 그리고 중국교회의 신학적 측면에서, 학자들은 지금까지 니의 인간론 혹은 교회론에 연구를 치중해 왔습니다. 그의 성령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본고에서는 신약연구의 관점에서 니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워치만 니의 성령론

 

니는 믿기를,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역사가 의미심장할 정도로(significantly) 차이가 있다고 한다(Nee, Collected Works, 21:17-19,28,32-33,105; Communion,49,79-83). 그는 구약에서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 강림한다고만 말하고 신약에서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upon', epi) 강림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들 속에('in', en) 거하시려고 오신다고도 말한다고 생각한다. 니에게 있어서 성령의 외적 강림은 능력과 사역에 관계되는 것이고, 성령의 내적 임재는 기독교인의 매일의 삶, 성화, 거룩과 관계된다. 그래서 성령의 두 가지 종류의 오심을 구별해야 한다고 한다. 내적인 오심은 새생명과 관계되고, 외적인 오심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관계된다.

 

니는 계속해서 이 두 가지 성령의 오심에 대해서 상술한다. 예수의 첫제자들의 예를 인용한다. 그 제자들은 두가지 종류의 성령의 선물들을 받는데, 하나는 예수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다른 것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다(Nee, Collected Works, 17:403-23,21:19,27-29,106-12,115-16; Communion,49-67,79-83;Life, 113-40). 첫번째 선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숨을 쉬시게 될 때 성령을 그들이 받은 그 선물이다(요20:22). 이것은 그가 이전에 보혜사가 오시리라고 했던 그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14:16-17, 15:26,16:13, cf.7:39). 성령의 두번째 선물은 오순절날에 주어지는 것인데(행2:1-42), 구약성경 요엘서2:28-32에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로서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니는 이 두가지 선물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요20:22는 요14-16장의 맥락에서 읽혀져야 하며, 행2:1-42는 눅24:49와 행1:4-8의 맥락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날의 선물은 신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외적 오심이라면, 부활절의 선물은 제자들의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한 성령의 내적 임재와 관계된다.

 

요한복음서의 부활 첫날 저녁시에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새로운 생명, 혹은 중생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니에게 있어서,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였고 새생명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적인 선물은 그러므로 새로운 생명이 아니고, 오히려 요한복음10:10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풍성한 생명의 종류이다. 이 풍성한 생명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성령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의 결과이며 우리들 삶의 주가 되도록 하는 것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니는 영향력으로서의 성령과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구분하고 있다(Nee, Collected Works, 17:416-17,21:24-26,32,124-25;Communion,37-43;Life,129-33). 어떤 사람이 중생할 때에 어떤 영향력으로서의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에, 신자는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죄와 육체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성령의 인격되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을 성령의 통제에 내어맡기지 못하는 한, 그들의 옛본성은 그들의 새로운 본성을 계속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영적인 생명이 아니라, 건강하고 지속적인 영적 생활이다. 이런 일은, 신자들이 성령이 인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성령이 그들의 삶에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통제에 자신을 맡기게 될 때에 가능하게된다. 니에 의하면, 신자들이 이런 결정적인 단계를 거치게 될 때,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며, 성숙하고 풍성한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는 또 다른 구분을 한다. 그는 우리가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with the Holy Spirit,눅1:15,41,67, 행2:4,4:8,31,9:17,13:9)와 "성령으로 충만한 것"(full of the Holy Spirit, 눅4:1, 행6:3,5,7:55,11:24,13:52, 엡5:18)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Nee, Collected Works, 21:30-32). 이 둘은 의미심장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한 편으로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은 단지 단기간에만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엘리자벳(눅1:41), 스가랴(1:67), 그리고 사도들(행2:4,4:8,31,9:17)은 예언, 증거,복음전도, 설교와 같은 사역의 특별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 단기간으로 능력을 덧입게 되었다. 반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좀 더 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나게 되는 그 무엇이다. 예수님(눅4:1), 스테판(행6:5), 바나바(11:24),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행13:52)은 짧은 기간 동안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보통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니는 (뭔가 웨슬리안-성결주의 펜타코스탈처럼, H.I.Lederle, Treasures Old and New: Interpretations of 'Spirit-Baptism' in the Charismatic Renewal Movement, Peabody: Hendrickson, 1988, p.16-17)  성령이 신자들의 삶 속에 세 가지 분명히 구분되는 방식으로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성령의 중생케하시는 역사, 곧 신자들에게 새생명을 주는 활동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일어난다. 둘째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서, 신자들을 더 풍성하고 부요한 영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활동이다. 이것은 신자가 성령을 인격으로(어떤 영향력으로서가 아니라) 간주하고 성령이 그들의 삶을 통제하고 주가 되도록 할 때에 일어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이다. 세째는 성령의 능력주시는 역사로서, 신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힘을 주고 기독교적 봉사를 가능케 하는 활동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 혹은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III. 니의 견해에 따라서 제기되는 문제점들

 

  니의 성령론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제기한다. 다음의 다섯가지가 그것들이다.

 

1.신약성경이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짧은 기간 혹은 장기간의) 지속시간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봉사와 영적 성숙과 삶이라는) 역할의 면에서 구분하고 있는가?

 

2.신약성경이 부어주시는 성령(어떤 사람 '위'에 오시는 성령)과 내주하시는 성령(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서 그 사람 '안'에 거하는 성령)을 구분하고 있는가? 이런 용어들은 성령의 다른 활동들(능력주심의 외적 사역과 개인의 갱생의 내적 사역)을 표현하기 위한 전문적인 용어인가?

 

3.신약성경에서는, 성령 안에서(in)의 세례를 봉사와 기독교인의 삶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으로(with)의 세례'가 어느 정도 동일한 것으로 보는가? 그리고 단지 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세례(Spirit-baptism)는 영단번에 주어지는 사건이며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은 신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진다는 그 차이뿐인가?

 

4. 성령의 두 가지 오심이 있는가? 하나는 부활절날 제자들에게 더 깊은 더욱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고(요20;22), 다른 하나는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봉사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시기 위한 것(행2:1-42) 그 두가지 오심이 있는 것인가?

 

5. 신약성경은 회심자들에게 새생명을 주는 영향으로서의 성령과 신자들을 더욱 깊은 더욱 성령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인격으로서의 성령으로 구분되는가?

 

이 문제점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A.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해짐'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거의 구별되어지는 그 두개의 어휘들에 대한 니의 이해(위의 섹션II을 보라)는 그가 그들을 다소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전문적 용어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은 봉사를 위한 능력을 의미하고 임시적이거나 시간상 한정적이고,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성숙한 영적 생활을 의미하며 영구적이고 지속시간이 긴 것을 의미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막스 터너(Max Turner)는 이 두 표현이 실제적으로 일반적 메타포들로 사용되어서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유사표현들, 곧 '분노로 채워져서'(4:28), '두려움으로 채워져서'(5:26), '분노로 채워져서'(6:11), '경이와 놀라움으로 채워져서'(행3:10), '질투로 채워져서'(5:17,13:45) 등의 표현들이나, '문둥병이 충만해서'(눅5:12),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행6:8), "선행과 사랑의 행위가 충만하여'(9:36), '사기와 악의과 충만하여'(13:10), '분노가 충만하여'(19:28) 등의 표현들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Max Turner, 'Spirit Enodwment in Luke/Acts: Some Linguistic Considerations', VoxEvang 12, 1979, 45-63). 다른 말로 하자면,'분노로 채워져서'와 '문둥병으로 충만해서"라는 말이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비유인 꼭 그것처럼, '성령으로 채워짐"과 '성령으로 충만함'라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비유라는 것이다.이 두 표현들은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현존을 "관찰할 수 있을 만하게 하는 그 충분한 정도나 강도"(to the observed rich degree or intensity)에 대해서 단지 우리들의 주의를 끄는 그런 역할을 한다.  그 사람이 예수님이든, 베드로이든, 스데반이든 바울이든 그렇다.

 

  그 표현들 자체는 우리들에게 그 성령의 현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그 성령의 효과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가 하는 것 등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고 있다.이것 때문에 우리들은 이 두 표현들이 있는 주변맥락들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스가랴의 경우에, 성령의 현존은 은사적 찬양과 예언을 의미한다(눅1:67-79). 유대인 공회 앞에서의 베드로의 경우에 성령의 현존은 담대한 은사적 선언을 의미한다(행4:8). 일곱 집사의 경우에, 성령의 현존은 은사적 지혜를 의미한다(6:3). 스데반과 바나바의 경우에, 성령의 현존은 역동적인 믿음을 의미한다(6:5,11:24).

 

  터너는 이 두 표현들을 기능(function)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기간(duration)의 관점에서 구분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란 표현은 어떤 특별하고 직접적인 영적 권능이 짧게 폭발하는 것(a short outbursts)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보통 긴 기간 동안 예외적일 정도로 성령께서 현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터너와 니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니 또한 기간의 관점에서 구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터너는 선명한 구분선을 두지 않고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포괄적인 취급은 Archie Hui, 'Spirit-Fullness in Luke-Acts: Technical and Prophetic?', JPT 17(2000), 24-38]. 그래서, 눅1:15(세례요한의 출생)과 행9:17(사도바울의 회심)은 '성령으로 채워짐'이 영적 권능의 순간적인 폭발을 의미한다는 관점에 일치되기가 무척 힘들다. 꼭같이, 행7:55(스데반의 천상비젼)과 19:28(바울에 대한 에베소사람들의 분노)는 '충만'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짧은 기간보다는 긴 기간의 사건을 기술한다는 관점에 일치되기 무척 힘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