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자료

구약의 경건-박동현

baromi 2005. 8. 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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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구원 경험에 동참하는 <하시딤>:

30편 4{5}절에서는 “주의 성도들(<하시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할찌어다[감사하라]”고 하면서 <하시딤>에게 야훼를 찬송할 것을 촉구합니다. 곧 시인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경우 <하시딤>은 감사 예배를 드리러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편 구절은 오늘 우리의 경건 이해에 중요한 한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어려움에 벗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 그것은 그저 혼자 감사 기도하고 감사 헌금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예배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곧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예배 공동체 전체가 함께 나누게 됩니다. 경건은 이처럼 개인과 공동체가 한데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찬양하는 모습을 띱니다.

이와 비슷하게 52편 9{11}절에서는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선하시므로] 주의 성도(<하시딤>)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사모]하리이다”고 함으로써 시인은 <하시딤>, 곧 예배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공동체인 <하시딤>:

79편 2절에서 시인은 “저희가[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밥으로,] 주의 성도들(<하시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라고 탄식함으로써, <하시딤>을 야훼의 ‘종들’과 같이 보는데,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9절을 보면, 이  <하시딤>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뜻하지, 그 가운데 일부 경건한 자들을 뜻한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러고 보면, 경건의 못자리가 되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큰 재난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관계의 표현입니다


형용사 <하시드>가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로 쓰이는 30번 가운데서 18번은 그 뒤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접미어를 붙여씁니다. 곧 <하시드> 뒤에 ‘그의’가 10번(삼상2:9; 시30:4{5}; 31:23{24}; 37:28; 85:8{9}; 97:10; 116:15; 148:14; 149:9; 잠2:8), ‘당신의’가 8 번(신33:8; 대하6:41; 시16:10; 52:9{11}; 79:2; 89:19{20}; 132:9; 145:10), ‘나의’가 1번(시50:5) 붙어 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중요하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시딤>은 자신과 야훼 하나님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시딤>이 야훼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시딤>의 지위와 신분:

<하시딤>이 하나님의 백성(85:8{9})이요, 예배 공동체(시149:1)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알아본 바 있습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하시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도 한다는 점을 79편 2절을 살펴볼 때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그에 대한 다른 보기를 몇 가지 더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시편 86편 2절에서 시인은 “나는 경건하오니(<하시드>)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곧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주(=당신)을 의지하는 종’이라고 하면서, 그런 자기는 <하시드>이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은 ‘곤고[가난]하고 궁핍’한 자인데(1절) 그의 대적자들은 교만하고 강포[포악]한 자들입니다(14절). 개역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이 경우 <하시드>를 ‘주께서 은혜를 주신 자’로도 옮길 수 있다는 점을 난하주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16편 15절에서 “[그의] 성도[경건한 자들](<하시딤>)의 ‘죽는 것을’[죽음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도다’[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고 할 때, 그 다음절에서 시인이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 바로 이 <하시드>임을 암시합니다. 이 시편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3,8절) 사람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16편 10절에서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성도를](<하시드>) ‘썩지 않게 하실’[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라”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의 <하시드>가 죽지 않으리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이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말은 나오지 않으나, 다른 신들을 철저히 배격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모습을 4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딤>에게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은 <하시딤>에게 이상[환상] 중에 말씀하시고(89:19{20}),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삼하22:26=시18:25{26}),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32:5-6). 그들의 발을 지키시고(삼상2:9),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영영히 지키시며(시37:28), 그들의 목숨을 지키시고 그들을 도우시며(시86:2), 그들의 목숨을 지키시고 그들을 악인들에게서 건져내시며(시97:10), 그들의 길을 지키십니다(잠2:8). 하나님은 그들이 죽게 내버려두지 아니하시지만(시16:10), 그들이 죽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시116:15. 79:2와 견주어 볼 것).


하나님에 대한 <하시딤>의 태도:

<하시딤>은 하나님을 친근히[가까이] 하고(시148:14) 의지하고(시86:2) 사랑하며(시31:23{24}), 만날 기회를 타서[얻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시32:6). 하나님을 찬송하고(30:4{5}) 송축하며(145:10) 찬양합니다(148:14).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기뻐하며(대하6:41), 하나님의 성소에서 즐거이 외칩니다(132:9,16).



5. 경건은 품성이기보다는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시드>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므로 ‘경건’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을 어떤 품성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겠습니까? 이 점에 유의하면서 앞서 살펴본 <하시드> 본문 가운데서 몇 군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다.


거짓과 불의와 무관한 <하시드>:

시편 43편1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경건하지](<하시드>) 아니한 나라에 향[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하는 기도에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이기도 합니다. 곧 속임수와 악함이 가득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로 보면, 경건은 거짓과 불의와는 반대되는 속성으로 볼 만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뜻의 <하시드>:

미가서 7장 2-4절에서 예언자는 “선인[경건한 자](<하시드>)이 세상에서 끊쳤고[끊어졌고] 정직자[정직한 자]가 인간에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여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지도자와] 재판자는[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욕심을 말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라고 탄식합니다. 여기서 <하시드>는 정직함과 통하는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온갖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므로, 이 경우 <하시드>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기 위해 한 개인이 지는 의무를 수행한다는 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시편 12편 1{2}절에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하시드>)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없어지나이다]”라고 할 때, <하시드>는 ‘충실함’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뒤이어 나오는 2{3}절, “저희가[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와 4{5}절, “저희가[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를 보면, 앞의 탄식과 기도는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하시드>는 개인의 속성이라는 면보다는 공동체 및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도록 언어 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의 <하시드>:

사무엘하 22장 26-27절(≒시18:25{26}-26{27})에서는“자비한 자(<하시드>)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라고 함으로써, <하시드>가 한편으로는 ‘완전함’, ‘깨끗함’과 비슷한 뜻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특[사악]한 자’와는 반대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곧 경건한 자는 완전하고 깨끗한 자이지 사악한 자, 구부러지고 거짓된 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경건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좋은 속성으로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완전함’과 ‘깨끗함’도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흐트러짐이나 어지러움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 시편 97편 10절에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하시딤>)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리라” 할 때, <하시딤>은 악인들과 반대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 구절에 따르면,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무엘상 2장 9절에서는 한나가 감사 기도를 하면서 “그가 거룩한 자들(<하시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잠잠하게] 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 <하시딤>은 ‘악인’의 반대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보호받는 존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잠언 2장 8-9절에서 “대저 그는 공평[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하시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시딤>의 길이 ‘공평[정의]의 길’이요, ‘공의와 공평과[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이라 함으로써, <하시드>의 속성으로 ‘공평’, ‘공의’, ‘정직’, 선함‘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독립적인 속성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공의‘와 ’공평[정의]‘로 옮긴 히브리 낱말 <체덱>과 <미쉬팟>도 많은 경우에 관계 개념이라는 사실도 지적해둘 만 합니다.


결국 구약 성경의 <하시드> 본문에서 경건을 어떤 속성으로 파악하는 근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하시드>가 일단은 하나님을 중심한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와 모습을 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나오는 말


‘경건한’을 뜻할 수 있는 히브리 낱말로 가장 중요한 <하시드>가 사람에게 적용되는 서른 군데 본문에서 찾아본 교훈을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본다면,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관계에 근거하여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특히 예배 공동체 안에 살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다하는 삶의 태도와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몇 가지 요소로 나누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경건은 일단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삶의 태도와 모습입니다.

둘째, 경건의 중심 자리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특히 예배 공동체 안입니다.

셋째, 경건의 실제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다하는 데 있습니다.

ARTICLE

구약 성경의 경건




1. 들어가는 말


한글학회에서 엮어서 펴낸 『우리말큰사전』(서울: 어문각, 1992), 239쪽에서는 ‘경건(敬虔)하다’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는 태도가 있다’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경건(敬虔)’이라는 한잣말은 ‘공경할 경(敬)’자와 ‘정성 건(虔)’자가 한데 어우러진 말입니다. 이로 보면, 공경하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 경건한 모습을 뜻한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에서 ‘경건하다’고 할 때, 이 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정성스럽게 모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점은 ‘경건하다’를 뜻하는 영어 낱말 godly, pious, devout에서 잘 드러납니다. godly는 ‘하나님’, ‘신(神)’을 뜻하는 god에 ‘...다운’, ‘...스러운’을 뜻하는 ly가 붙은 말이어서,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나님다운’, ‘하나님스러운’, 한자말로는 ‘신적(神的)인’, 곧 ‘하나님에게 어울리는’의 뜻으로 이해해 볼 만합니다. 대학생용 웹스터 영영사전에서는 이 godly 자체의 뜻은 따로 풀이해 놓지 않고, 이 낱말이 한편으로는 divine, 다른 한편으로는 pious, devout와 같다고만 밝힙니다. 이와는 달리 pious는 일차적으로 ‘신에 대한 공경심을 보이거나 신을 섬기는 데에 몰두하는 표가 나는’(marked by or showing reverence for deity and devotion to divine worship) 또는 ‘뚜렷한 종교성으로 표나는’(marked by conspicuous religiosity)이라고 풀이하고, devout는 우선 ‘종교나 종교적인 여러 가지 의무나 훈련에 몰두하는‘(devoted to religion or religious duties or exercises)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경회 성경공부 시간에는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경건’이라는 낱말이 나오는 곳을 중심으로 신구약 성경이 ‘경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죽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개역성경을 기준으로 할 때,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는 ‘경건’이란 말이 겨우 아홉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쉰 세 번 나오므로 사정이 좀 낫습니다만, ‘경건’이란 말이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쓰이는 것에 비해서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첫 시간에는 구약 성경에서 경건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를, 내일 둘째 시간에는 신약 성경에서 경건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를 함께 알아보고, 마지막 시간에는 조별로 모여 앉아 이 두 시간 공부한 내용과 제가 아침 오전 저녁 모두 여섯 번에 걸친 내용을 통틀어 간추려보면서 결단의 기도문을 하나씩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 ‘경건’이라는 낱말이 어디에 나오는지 한글 성구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하시드>1))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신33:8)

(2)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2)[악인]3)(<아왈>4))에게 붙이시며[넘기시며] 악인[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욥16:11)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하시드>)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4}5))

(4)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하시드>)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없어지나이다](시12:1{2})

(5) 이로 인하여[말미암아] 무릇[모든] ‘경건한 자’(<하시드>)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6)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경건하지](<하시드>) 아니한 나라에 향[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43:1)

(7) 나는 경건하오니(<하시드>)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86:2)

(8)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경건하지] 아니한 자들’(<하네핌>)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33:14)

(9) 여호와는[그에게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짓지[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엘로힘>)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맞이한] 아내에게 궤사를[거짓을] 행치[행하지] 말찌니라[말지니라](말2:15)


위 (2) 욥기 16장 11절의 경우에는, 개역개정판의 ‘악인’이라는 번역과 표준새번역의 ‘범법자’라는 번역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히브리 낱말 <아왈>을 반드시 ‘경건치 않은’으로 옮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8) 이사야 33장 14절의 <하네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들’, ‘하나님 없는 자들’을 뜻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로 번역할 만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불경(不敬)한 자들’이라고 옮겼습니다. (9) 말라기 2장 15절의 경우에는 ‘경건한 자손’으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손’이 되는데, ‘하나님의’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 <엘로힘>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 어울리는’이라는 뜻의 형용사 노릇을 한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개역 구약 성경에서 ‘경건’이라는 낱말이 나오는 아홉 구절 가운데, 여섯 군데에는 ‘경건한’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로 형용사 <하시드>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구약 성경에서 ‘경건’에 대한 가르침을 알아보려고 할 때는, 이 <하시드>의 뜻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시드>이라는 히브리 낱말이 언제나 ‘경건한’으로 번역된 것은 아닙니다. <하시드>가 구약 성경에는 모두 32번 나옵니다만, 위에서 살펴 본 여섯 경우에는 개역 성경이 ‘경건한’으로 번역했지만, 주로 ‘성도’로 번역하고(대하6:41; 시30:4{5}; 잠2:8 등 모두 19 번), 그밖에는 ‘거룩한 자’(삼상2:9; 시16:10), ‘자비한 자’(삼상22:26; 시18:25{26}), ‘선인(善人)’(미7:2), ‘긍휼이 있는’(렘3:12), ‘은혜로운’(시145:17)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시드>가 ‘경건한’으로 번역되지 않는 구절들도, 구약의 경건을 이해하는 데 간접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전제 아래, 구약의 <하시드> 본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는 중간 중간에 오늘 우리의 경건에 대해 암시하는 바를 한두 마디씩 곁들여 보려고 합니다.



2. 실천을 본질로 하는 경건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헤세드>를 행하는 사람인 <하시드>:

<하시드>는 명사 <헤세드>의 형용사형이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단 네 번만 서술어(이를테면 ‘ ...가 경건하다‘)로나 한정어(’경건한 ...‘)으로 쓰이고(시43:1; 86:2; 145:17; 렘3:12), 나머지 경우는 한결같이 ‘<하시드>한 사람’이란 뜻의 명사로 쓰입니다. 이렇게 명사로 쓰이는 <하시드>는 그 뿌리가 되는 추상 명사 <헤세드>를 행하는 사람,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벌써 여기서 우리는 ‘경건’에는 ‘실천’이 포함된다는 중요한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경건의 삶의 문제입니다.

<헤세드>는 구약 성경에 250번 정도 나오는, 아주 중요한 낱말입니다. <헤세드>는 본디 친척, 친구, 손님과 손님 맞는 사람, 주인과 종, 왕과 신하 등의 여러 가지 인간 관계에서 그 관계에 근거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행해야 할 의무, 유대감, 연대성, 충성, 신실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이 <헤세드>는 ‘효’, ‘자애’, ‘사랑’, ‘우정’, ‘충성’, ‘총애’, ‘의리’ 등으로 아주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세드>는 ‘충성’, ‘헌신’, ‘사랑’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헤세드>는 ‘사랑’, ‘자비’, ‘인자’, ‘인애(仁愛)’, ‘긍휼’, ‘은혜’, ‘은총’을 뜻합니다.

구약 성경에 모두 32번 나오는 <하시드>는 시편에만 25번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4:3{4}; 12:1{2}; 16:10; 18:25{26}; 30:4{5}; 31:23{24}; 32:6; 37:28; 43:1; 50:5; 52:9{11}; 79:2; 85:8{9}; 86:2; 89:19{20}; 97:10; 116:15; 132:9,16; 145:10,17; 148:14; 149:1,5,9), 그 밖에 신명기(33:8), 사무엘상(2:9), 사무엘하(22:26), 역대하(6:41), 잠언(2:8), 예레미야(3:12), 미가(7:2)에서 각각 한 번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이 낱말이 시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구약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경건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책이 시편이라는 사실과 통합니다.


하나님께 <하시드>가 쓰이는 경우:

그런데 형용사 <하시드>가 하나님께 쓰이는 경우는 단 두 번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3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하시드>)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이미 백 여 년 전에 망해버린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곧, “나는 <하시드>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곧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오래 전에 나라를 잃고 고생하고 있는 하나님 백성을 돌보아주시려는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문장이므로, 이 경우 <하시드>는 ‘자비로운’(표준새번역), ‘인자한’, ‘은혜로운’, ‘사랑깊은’, ‘사랑 많은’ 정도로 번역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북왕국 이스라엘은 계속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는 등으로 하나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망해버린 당신의 백성에게도 지킬 도리를 다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145편 17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일]에 은혜로우시도다(<하시드>)”고 하면서 <하시드>를 ‘의롭다’와 나란히 씁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돌보심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롭다. 주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로, 공동번역에서는 “야훼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로 풀어 옮깁니다.


이 두 구절을 뺀 나머지 서른 구절에서 <하시드>는  모두 사람에게 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해 <하시드>라는 형용사가 하나님보다는 주로 사람에게 쓰인다고 할 때, 여기서도 두 가지를 미리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우선, 경건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그렇다 해도 그 경건의 근본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피게 되겠습니다.



3. 경건의 공동체성


형용사 <하시드>가 사람에 대해 쓰이는 30번 가운데, 그 가운데서 단수로 쓰이는 경우가 10번(신33:8; 삼하22:6; 시4:3{4}; 12:1{2}; 16:10; 18:25{26}; 32:6; 43:1; 86:2; 미7:2)이고 나머지 20번은 복수로 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은 공동체성을 띠고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몇 가지 보기를 살펴보십시다.


하나님 백성인 <하시딤>:

시편 148장 14절에서는 “저[그]가 그[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그]는 모든 성도  (<하시드>들=<하시딤>) 곧 저[그]를 친근히[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라고 함으로써, <하시딤>이 곧 ‘이스라엘 자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85편 8{9}절에서는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무릇] 그[그의] 백성, 그[그의] 성도[성도들](<하시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그들은] 다시 망령된[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찌로다[말지로다]”라고 하는데, 그 다음 절 9{10}절에 ‘그를 경외하는 자’가 나오는 것으로 보면, 여기서 <하시딤>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되 이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배 공동체인 <하시딤>:

시편 50편 5절에서는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성도들을](<하시딤>) 내 앞에 모으라 곧[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이들이니라] 하시도다”고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제사드림으로써 언약을 맺는 사람들, 곧 언약 백성으로서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시딤>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예배 공동체를 떠난 경건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경건은 예배하는 공동체 생활에서 흘러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49편 1절에서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하시딤>)의 회중에서[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찌어다[찬양할지어다]”고 할 때도 ‘<하시딤>의 회중’은 그 다음절 2절의 ‘이스라엘’ 및 ‘시온의 자민(子民)[주민]’과 같고, 4절의 ‘자기 백성’ 및 ‘겸손한 자’와 같습니다. 이리하여 ‘<하시딤>의 회중’은 그들의 하나님의 <헤세드>(‘은혜’, ‘인자’, ‘자비’, ‘사랑’)를 맛보는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예배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과 9절의 <하시딤>(’성도‘)은 이 예배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하시딤>은 기뻐하며 야훼께 영광 돌리며 야훼의 판단을 통해 영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6장 41절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원하옵건대] 주의 제사장으로[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로[성도들에게](<하시딤>)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하시딤>은 봉헌 예배에 참석한일반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 132편 9절에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하시딤>)들은 즐거이 외칠찌어다[외칠지어다]”라고, 또 16절에서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하시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라고 할 때도 <하시딤>들은 제사장들과 구별되지만 제사장들과 더불어 예배하는 일반인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89편 19{20}절에서는 “[그 때에] 주께서 이상[환상] 중에 주의 성도[성도들](<하시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라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뽑으셨다는 사실을 <하시딤>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이므로, 이 경우 <하시딤>도 왕에 관련된 예식에 참석한 사람들, 곧 일종의 예배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