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로 행진하시는 하나님
시 68편 1-18
손석태 (개혁신학교·구약학)
본문 사역
1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원수를 흩으시며a
주를 미워하는 자를 주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
2 연기가 몰려감같이a 저희를 몰아내소서b
물 앞에서 초가 녹듯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 그러나 의인은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을a 칭송하라
구름을 타신 자를b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이시니c
그 앞에서 기뻐할지어다
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
6 하나님은 외로운 자를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포로 된 자를 이끌어내어 노래하게 하신다
그러나 거역한 자는 메마른 땅에서 살리로다
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였을 때에 (셀라)
8 땅이 흔들리며
하늘이 비를 퍼부었도다
하나님, 곧 시내산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내리사
주의 산업이 황폐할 때에 소생케 하셨고
10 주의 백성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11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표하는 자가 큰 무리라
12 여러 군대의 왕들이a b급히c 도망하니b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같도다
14 전능하신 자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같도다a
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이며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시내산으로부터 그의 성소에 나오셨도다a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예물을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거역하는 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본문비평
1a LXX나 Syriac은 에 를 첨가하여 미완료형으로 읽고 있다. 앞의 과 연계해서 Wav Consecutive로 읽을 필요가 없다.
2a 는 니팔형 으로 읽어야 옳다.
2b 은 칼 미완료 2인칭 단수로서 주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굳이 니팔형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4a LXX나 Syriac에서는 '그 이름을 위하여'( )라고 읽고 있지만 비분리 전치사 를 를 구태여 첨가할 필요가 없다.
4b BHS는 MT의 [바아라봇]( ) 대신에 [바아라폿]( )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우가릿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바알신을 rkb 'rpt '구름을 타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MT의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개역)보다는 본문의 문맥에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4c 를 LXX나 Syriac은 전치사 를 생략하고 있으며, BHS는 로 읽도록 권한다. BHS를 따른다.
12a LXX는 o` basileu,j (왕이)로 읽고 있지만 많은 사본은 로 있다. 이들 다 문맥상 맞지 않다. NIV는 '왕들과 군대들'은 근거 없는 수정이다. 개역은 MT를 따라 '여러 군대의 왕들'(kings of armies)로 번역하고 있다. MT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12b-b LXX는 [투 아가페투] (tou/ avgaphtou///)로 읽고 있는데 이는 로 읽은 때문일 것이다.
12c 일부의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 필요성이 없다.
14a (그 중에… 날림같도다)를 BHS는 로 읽도록 제안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17a (주께서 그 중에 계시며, 시내산은 그 성소에 있도다)를 BHS의 제안대로 로 읽는다.
시편 소개
시68편의 연구
시편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부분은 이 시편의 통일성 문제이다. Kraus, Robinson, Albright 등은 이 시를 여러 개의 시구를 편집해 놓은 시로 이해하려고 하는 반면, Mowinkel, Lepeau, Gray 등은 시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Mowinkel은 이 시가 MT에 수록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증거가 없는 한 그 연속성을 부인해서는 안되며, 시편의 통일성이나 연속성 문제는 시편의 주제를 가지고 논의하기보다는 시편이 사용된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Gray는 이 시가 이스라엘의 가을 축제에 사용된 일종의 칸타타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축제는 승리의 주 여호와께서 왕 중의 왕이요, 신 중의 신으로 등극하시는 것을 축하하며, 그가 비를 주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18,19절에서 힌트를 얻어, 이 축제는 스불론과 잇사갈과 납달리 경계의 다볼산 성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제한된 한 두 구절을 통해서 시의 유래나 전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려는 것은 무리이다.
1-18절은 분명히 시내산으로부터 시온산으로 향한 여호와의 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신적 전사로 수많은 그의 군사를 대동하고 나아가는 그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의 궁창이 비를 쏟으며, 열국의 왕들이 도망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산에 그의 거처를 마련하려 하신다. 따라서 이 시는 승리의 주,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그의 영영한 성소를 향하여 웅장하게 행진하는 의식을 그리는 시이다.
시68편의 구조
이 시는 찬양과 행진이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간구 1-3절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찬양 4-6절 하나님께 노래하라
행진 7-18절 바산으로 행진하시는 하나님
찬양 19-23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행진 24-31절 성소로 행진하시는 하나님
찬양 32-35절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양하라
우선 이 시는 1-3절의 서론적인 간구와 32-35절의 결론적인 찬양으로 구성되며 4-31절은 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찬양과 행진이 반복되고 있다. 첫번째 찬양과 행진(4-18절)은 바산, 곧 하나님의 산으로 행진하여 그 곳에 거하시며 만백성의 예물을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으며, 두번째 찬양과 행진(19-31)은 성소, 곧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으로 행진하여 그곳에서 왕들의 예물을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찬양과 행진이 서로 병행을 이루며 반복되고 있다. 4-6절은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시며, 이산가족을 상봉케 하시며,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며, 19-23절은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7-18절과 24-31절은 다같이 하나님의 행진을 묘사하는데, 7-18절의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의 전사로 그의 병사를 이끌고 출현하심으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비를 쏟아 내리며, 열왕들이 도망가버려, 그의 백성들은 흡족한 비로 견고케 된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산에 영영히 거하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24-31절도 하나님께서 그의 전에 거하시며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르며, 이 때에는 전사로서 행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보다는 언약궤의 행진을 연상케 하며, 특별히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지칭한다(24).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산이나 전에서 왕으로 거주하시며 만민들과 열왕들의 경배와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처소에 영영한 왕국을 이루시려고 행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의 영영한 거주지를 향한 하나님의 행진을 묘사하는 행진시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18절의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하는 구절을 에베소4:8-13에 인용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적용하고 있다.
주 해석
68:1-3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민10:33-35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민수기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행진의 출발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1-3절은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악인들과 의인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 1절 >
하나님은 일어나사. '일어나다'의 히브리어 [야쿰] 은 권고형 jussive 으로 하나님은 출현 theophany 을 간구한다.
< 1절하-2절 >
… 흩으시며 … 도망가게 하소서 … 몰아내소서 … 망하게 하소서 . 이 네 동사는 다같이 하나님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 '악인'들에게 몰아칠 결과를 예상하며 그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그의 출현을 고대하는 하나님은 마치 전쟁을 몰고 오는 전사의 모습이다. 예전에 시내 광야에서 위풍당당하게 진행하는 하나님의 기세 앞에 그의 대적들이 흩어지고, 도망하고, 결국 망하던 모습을 연상하며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 악인은 모두 하나님의 출현으로 흩어지고 도망가고, 결국 망할 자, 곧 패전의 병사들이다. '몰려간다'라는 말은 안개나 연기가 바람에 순식간에 날려 흩어져가는 모습을 그리는 표현이며, '밀'은 밀초, 곧 왁스를 말하며 틀에 녹아내려 그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는 물질이다. 항상 은유적으로 쓰인다(시2215 ; 97:5 ; 미1:4).
< 3절 >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서 의인은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 악인들과는 대조되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말한다. 악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흩어져 도망하는 것과는 달리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의인들은 하나님의 출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뛰논다. 개역 성경에서 '뛰놀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아라츠] 도 심상은 '즐거워하다'라는 의미이다 (삼상2:1).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특징적인 반응은 기뻐하는 것이다.
68:4-6 하나님을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심을 전제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권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요, 재판장이시요, 이산 가족을 만나게 하시며, 갇힌 자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거역하는 자를 지옥에 던지시기도 한다.
< 4절 >
노래하며 … 찬양하라. '노래하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실] 과 '찬양하라'로 번역하는 [자말] 은 특별한 경우에 맞추어 작사 작곡한 것을 노래한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실]과 달리 악기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노래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권한다. '노래하라'와 '찬양하라'가 서로 의미상 병행을 이루듯이 '하나님'과 '그 이름'이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별개로 사용될 수 없으며, 바로 하나님과 동의어로 쓰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신12:5, 11 ; 삼하7:13 ; 시74:7 ; 사62:2, 4, 12 ; 렘25:29)과 성전(렘7:10,11, 30, 32:34 ; 34:15)을 택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 (신28:10 ; 대하7:14. Seok-Tae Sohn, The Divine Election of Israel, Grand Rapids ; Eerdmans, 1991, p.69.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개역성경은 그의 백성들이 노래하고 찬양해야 할 대상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탔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표준새번역은 이 점을 고려하여 '광야에서 수레를 타고 오시는 분'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수레를 타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본문 문맥이나 어휘의 용례에 맞지 않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타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 것으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었던 언약궤이거나 구름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아라봇] 인데 많은 역본들은 광야나 사막을 일컫는 [아라바] 로 읽기보다는 구름을 의미하는 [아라포트] 로 읽는다. 왜냐하면 흔히 우가릿 문헌에서 폭풍우를 주관하는 바알신을 가리켜 '구름을 타는 자'로 일컫고, 히브리어의 [b] 와 우가릿어 [P]는 그 발음이 서로 교환 가능해서 [라로켑 바아라봇] 은 우가릿어로 rkp 'rpt (구름을 타는 자, UT, 'Anat Ⅱ:39-40)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NIV, Kraus, Dahood, Tate).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한다면 "구름을 타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구름을 타고 폭풍우를 몰고 오시는 분이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참조. 33절 ; 18:9 ; 104:3 ; 사19:1 ; 마26:24).
[솔루]의 원형 [소랄] 은 '높이 평가하다', '소중히 하다'는 뜻도 있지만 '(길을) 구획하다,' '(길을) 예비하다'의 뜻도 있다. 따라서 NIV는 '구름 타시는 자를 칭찬하라'로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성경은 '대로를 수축하라'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개의 현대의 주석가들은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표준새번역도 '길을 열어드려라'로 번역하고 있다.
< 5절 >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그의 거룩한 처소는 하늘이다 (신24:15 ; 렘25:30 ; 슥2:17). [마온] 이라는 말은 '숨겨진 굴,' '집' (dwelling place)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은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하늘의 처소와 땅의 처소가 마주치는 곳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Mowinkel, Der achtundsechzigste Psalm, 28-29).
아버지 … 재판장. 거룩한 처소에 계시며,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고, 과부의 재판장이시다. 아버지는 자식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자이다. 재판관은 시비를 가려주고 억울한 약자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자이다. 특별히 고아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가 필요하고 과부들에게는 억울함을 동정하고 원한을 풀어주는 의로운 재판장이 필요하다. 시인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 6절 >
고독한 자로 가족 중에 처하게 하시며. 많은 주석가들이 제언한 대로 '고독한 자'로 번역하고 있는 [에히딤] 이라는 말은 '고독한'이라는 뜻보다는 '버림받은'에 더 가깝고, 그의 집이나 조국으로부터 추방된 자에 대해서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은 집을 쫓겨난 자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가족들과 함께 살게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수금된 자를 … 형통케 하시느니라. '수금된 자'란 '갇힌 자' 혹은 '죄수'라는 뜻이다. 개역성경이 '형통케 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바코샤롯] 은 '성공하다, 잘되다'는 뜻의 히브리 동사 [카셀] 의 칼 부정형에 비분리 전치사 [벹] 이 첨가된 것이다. 그러나 NIV에서는 '죄수를 이끌어내어 노래하게 하시며' he leads forth the prisoner with singing 라고 번역하고 있다. 풀려난 죄수들이 기뻐하여 노래하는 의미를 첨가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시105:43이나 사24:9에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의 즐거워 노래하는 모습과 [카세르]의 우가릿 동계어 ktrt가 '여자 가수'라는 점을 연결시켜 그러한 번역을 한 것 같다 (Pope, 137).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말은 앞의 열거하는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기술하고자 할 때 쓰는 말로, '그러나'의 의미를 가진다 (VT 14 [1964] 221-25). [사랄]( , '거역하는 자')은 원래 '고집이 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는 애굽 왕 바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처는'이라고 개역성경이 번역하고 있는 [소크누] 는 동사형이다. 따라서 '그러나 거역하는 자는 메마른 땅에 거하리로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다 (표준새번역 참조). [샤켄]( , '거주하다')은 시94:7이나 사26:19, 3:18에서 보는 것처럼 무덤이나 지하세계에서 거주하는 것도 의미하며, [스올](지옥)이 물이 없는 메마른 땅으로 묘사되는 구절이 많은 것을 보면 (렘2:31 ; 엡2:20 ; 욥10:22 ; 눅16:24) 메마른 땅에 거주한다는 것은 지옥에서 거주한다는 의미도 가능하다 (Pope, 138)
4-6절에 우리는 대조되는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본다. 첫번째 무리는 고아, 과부, 외로운 자, 그리고 갇힌 자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보호자이시요, 재판장이시며, 이산가족을 상봉케 하시는 분이시며, 해방자이시다. 이들은 하나님의 출현을 대망하고, 하나님의 출현을 대비하여 그 길을 단장하며, 하나님의 출현을 기뻐하고 노래하는 자이다. 두번째의 무리는 하나님의 출현을 거역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메마른 땅, 곧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다.
68:7-18 광야를 행진하시는 하나님
68:7-10 비를 주시는 하나님
7-10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앞서 광야를 행진하실 때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특별히 7-8절은 삿5:4-5과 매우 흡사하다.
< 7절 >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 개역성경의 '앞에서 앞서 나가사'는 분명 [리프네] 의 이중번역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행진하는 모습은 거룩한 전쟁 the divine war 에서 신적 전사 the divine warrior 가 그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는 모습이다 (삿4:14 ; 삼하5:24 ; 대상14:5 ; 슥14:3 ; 시44:10 ; 60:12).
셀라의 위치는 특별하다. 5절에 이미 [사랄]( , '높이다,' '예비하다')이라는 같은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낭송하다'의 의미가 더 적절한 것 같다. 바로 여기서 저자는 출애굽, 홍해를 건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를 지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심 등의 사건을 회상하고 그것을 이 시를 듣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야기하라고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Tate, 177).
< 8절 >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개역성경의 이 번역은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진다는 말이나 '진동하다'는 말도 중복 번역되어 있다. 표준새번역도 '하늘이 무너져내렸습니다'라는 불필요한 구절을 첨가하였다.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비를) 퍼부었다.
하나님, 곧 시내산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라고 번역함이 옳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노트푸] 는 '내리다, 뿌리다'는 뜻이나, 하나님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비는 정녕 이보다 더 세차게 퍼붓는 폭우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개역에서 '저'라고 번역하고 있는 지시대명사 [제] 는 아랍어 대명사 du 나 우가릿 불변사 d 와 같아서 영어의 'of'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엘로힘 제 시나이] 는 '시내산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Pope, 139, Tate, 163).
< 9절 >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산업'의 문자적인 번역은 '당신의 유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아들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 그래서 가나안을 기업의 땅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의 백성([암 나할라], )이라고 칭한다 (신9:29 ; 렘3:19, Seock-Tae Sohn, The Divine Election of Israel, pp. 67-73. 손석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 pp.104-111. Delitzsch, p.251.). [나할라테카 베니르아] 를 개역성경대로 '주의 백성이 곤핍할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순이 맞지 않아 어색한 점이 없지 않지마나, 표준새번역의 임의적인 번역이나 다른 주석가들(Dahood, Tate, Kraus 등)보다는 낫다. 히브리어 [코난타] 의 원형은 [쿤] 이고 그 사전적 의미는 '세우다, 견고히하다'이다. 여기서는 '회복하다', '소생하다'가 더 적절하다.
< 10절 >
주의 회중. [하아테카] 는 '주의 살아있는 자' 즉 '주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가리킨다. '주의 은택'에서 '은택'의 문자적인 번역은 '선한 것, 좋은 것' ([톱] )이다. 다후드 Dahood 는 우가릿 동계어로부터 [톱]을 '비'로 번역하고 있지만(p.140)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너무 제한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비뿐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너무 제한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비뿐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향한 변함없는 관심과 양육이다. 특별히 가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세상에서 짓눌려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신 모든 종류의 포괄적인 관심과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은택이다. 여기서 [아니] ( , '가난한 자')는 환난을 당하거나 희생물이 되어 고난을 겪는 자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7-10절은 하나님께서 광야를 행진하실 때 거룩한 전쟁의 전사처럼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비를 퍼붓는다. 이 비로 말미암아 주의 백성은 해갈하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주의 온갖 좋은 것으로 만족을 얻게 된다.
68:11-14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11-14절은 하나님의 가나안 열왕들에 대한 승리를 회상하고 있다. 11절은 하나님의 승리의 선포이며 12-14절은 그 결과를 기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함으로 왕들은 도망가고, 그의 백성들은 탈취물을 나누며, 비둘기처럼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 11절 >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들에 대한 승리를 먼저 선포하시는 것이다 (출23:22-23, 27-28, 31 ; 신7:10-24 ; 11:23-25 ; 수1:2-6).
소식을 공포하는 자가 큰 무리라. 전통적으로 [ 살] 의 피엘, 분사, 여성, 복수형인 [하므바세롯] 을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라고 번역해왔다. 전쟁에서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 삼하1:20). 칼빈은 이 경우 마치 전쟁이 끝난 후 여인들이 노래하고 승전의 소식을 전한 것처럼 이해하나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이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열왕들이 놀래어 도망하는 경우라면 여기서 여자를 언급하는 것은 문맥상 순서가 맞지 않다. 만일에 이것을 집합적인 복수로 읽는다면 여성적인 의미가 사라져, '소식을 공포하는 자가 큰 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식을 공포하는 자'가 누구인가? 히브리어 [차바] 는 군대나 전사를 의미한다 (삼하3:23 ; 출6:26). 따라서 주께서 신적인 전사로서 말씀을 주실 때, 이를 선포하는 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군대이며, 그 수가 많다는 뜻이다. Dahood는 이를 구체적으로 하늘의 '별'이라고 말하지만(p.141), 별 이상의 천군 천마이다. 17절의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한 것도 바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전쟁에서 공격이 끝나면 병사들이 탈취물을 나누는 것이 순서이며, 병사들의 즐거움은 거기에 있다. 이 탈취물은 집에까지 가져와 가족들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네밧 바잇] 을 '집에 거하는 여자'로 번역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이 경우 [네밧] 의 원형은 [나바] 로서 동물이나 사람 또는 하나님의 거주지라는 뜻이 될 것이며, 목초지라는 뜻도 가능하다 (삼하 7:8 ; 사65:10 ; 시23:2, Tate, p.165). 전장의 병사뿐만 아니라 집에 거하는 여인들마저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전쟁에서의 대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 13절 >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는. 사람이 양 우리에 눕는다는 표현은 은유적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양무리에 비유한다면 [세파타임] 을 양 우리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다. 이스라엘이 양 우리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찬란하게 빛나는 한 마리의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NIV에서처럼 양 우리를 '야영장의 모닥불' campfire 나, 테이트 Tate 처럼 '안장 사이'(p.165)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다.
< 14절 >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는 열왕들을 흩으시는 모습을 살몬에 흩날리는 눈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몬은 세겜 근처에 있는 산이었다 (삿9:46 -48).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바산의 동쪽에 있는 검은 화산이 [예벨 두르주]를 가리킨다고 한다 (Albright, HUCA 23 [1950]23). 레바논을 흰색에 비유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곳을 검은 색으로 비유한다. 어지러이 도망하는 열왕들과 병사들의 모습은 검고 어두운 살몬에 휜 눈이 뿌리는 모습에 아주 극적이다.
68:15-18 바산에 거하려 하신 하나님
15-18절은 그의 행진을 마치시고 그의 산에 거주하시고, 그의 군대와 백성들을 거느리시며 사람들로부터 예물을 받으시고자 한다.
< 15절 >
바산. 바산은 살진 암소와 힘센 황소가 자라는 곳이며 (신32:14 ; 겔39:18 ; 암4:1 ; 시22:13), 용맹스러운 사자의 집이 있는 곳이다 (신33:22). 성경에서 고상함과 부요함과 능력의 상징이다 (사2:13 ; 렘22:30).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이며, 높은 산이다.
< 16절 >
바산 주변의 높은 산들이 하나님이 영영토록 거하시려고 선택하신 산을 시기한다. 여기서 산들은 의인화되어있다. 사2:2에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며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라고 말하고 있다(미4:1). 고대 근동의 세계에는 신들의 거처가 산이었다. 여호와의 산이 다른 산 꼭대기에 선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여호와의 통치와 위엄과 능력이 다른 모든 산보다 뛰어나 굳게 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온 세계에 대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산이 반드시 높게 설 필요는 없다. 오히려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처로 별로 높지 않은 바산을 택하여 높이시기 때문에 바산 주변의 산들이 시기하는 것이다. 택함을 받은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 17절 >
하나님의 병거. 고대의 근동의 산들은 하늘의 군대와 지상의 군대를 보유한다. 천상에서 신들이 전쟁을 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그 신들의 백성들이 싸우는 것이며, 지상에서의 한 백성의 다른 백성에 대한 승리는 곧 한 신의 다른 신에 대한 승리였다 (삼삼4-5장 참조). 하나님께서는 천상에 수많은 군대를 보유하시며 지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군대로 뽑으셨다 (Sohn, pp.54-61).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쓰였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병거'는 곧 하늘의 군대를 의미한다 (왕하6:17 ; 합3:8, 15). [아도나이 밤 시나이 바코데쉬]( , '주께서 그 중에 계시며, 시내산은 그 성소에 있도다)는 시내산이 그 성소에 있다고 할 때 그 성소가 무엇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Tate는 를 로 읽음으로 가 와 두 단어에 같이 연결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the one of Sinai'나 'the god of Sinai'로 번역하고 있으나 (Tate, p.166) 여기에는 무리가 많다. BHS의 제안대로 (주께서 시내산으로부터 그의 성소에 나타나셨도다) 로 읽는다. 신33:2은 이를 뒷받침한다.
< 18절 >
하나님은 높은 곳으로 오르셔서 그의 잡힌 백성을 이끌고 오시며, 선물을 받으신다. 여기서 '높은 곳'은 시온산의 여호와께서 왕으로서 좌정하신 곳을 가리킨다. '선물을 받으심'은 예배와 경배를 받으심을 의미한다. 엡4:8은 본문을 인용하여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주시는 일이 바로 본문의 연속이요 성취로 이해하고 있다.
본문 요약
시편68:1-18은 하나님께서 신적 전사로 수많은 병거와 병사를 대동하고 광야를 거쳐 행진하여, 그의 영영한 거처에 왕으로 좌정하시고 뭇 백성들로부터 경배와 예물을 받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행진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친다. 거역하는 자, 곧 열방의 왕들은 마치 눈밥이 날리듯이 다 흩어지고 도망간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비로 말미암아 오히려 해갈하고, 아버지처럼 그들은 보호하시며 재판장처럼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맛본다. 시편 저자는 그의 영영한 성소를 향하여 행진하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그곳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며 그들의 경배와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열왕들과 그의 백성들의 반응을 대조하고 있다.
신약과의 관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7-16에서 시6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로 올라가심을 하나님께서 그의 영영한 성소, 곧 시온산에 그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올라가심에 대한 연속이요 완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Calvin). 마치 하나님께서 신적 전사로서 그의 성전을 마치고 그의 높은 처소에 올라가 그의 병사들에게 선물 (탈취물)을 나누어주시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부활 승천 후에 하늘에 올라가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 곧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칠칠절의 시로 사용되었듯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오순절의 시로 사용되고 있다 (Kinder, p.238).
설교 요지
제목 : 영원한 성소로 행진하시는 하나님
서론
대관식을 마친 왕이나 취임식을 마친 대통령은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들의 거처인 궁전이나 대통령 관저로 행진을 한다. 왕중의 왕, 만군의 하나님께서 행진을 하신다면 그 모습이 어떠한 모습일까?
본론
1. 성소를 향하여 행진하시는 하나님
1. 신적 전사로 행진하시는 하나님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며, 시내산도 흔들림,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다.
2. 성소에 거하시고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의 성소에 거하시고자, 그가 택하신 성산 시온을 향하여 행진하신다. 그리하여 만백성의 경배와 예물을 받으시고자 한다.
2. 도망가는 열왕들
하나님께서 행진을 하시매, 열왕과 그 군대들이 도망한다. 마치 안개가 몰려감같이 눈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날려간다. 하나님을 대적한 자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3. 탈취물을 나누는 그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진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며, 찬양한다. 심지어 집에 거하는 여자들도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승리의 기쁨을 맛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요, 재판장이시요, 구원자이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마치 비둘기처럼 평안을 누릴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성령의 선물 (엡4:8-13)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그의 영원한 보좌에서 경배와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아울러 그의 백성에게 탈취물을 나누는 승리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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