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의 물과 성령을 본질적으로 하나로 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지계표님의 요청에 답한 것이 개혁신학의
보편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지적을 듣고 다시 한 번 더 칼빈으로부터 시작되는 개혁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서 다시금 저의 원래 입장이 개혁신학의 보편적인 견해와 일치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애당초 말씀드렸던 것을 여기 다시 한 번 확인해 놓고 칼빈의 견해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홀리죠이: 1. 저는 참된 회개, 곧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한 여러 논의
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참고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런 저의 글을 보고 어떤 이는 물과 성령을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양 비판하였습니다. 제가분명히
말하기를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라고 하였는데도 말입니다. 별개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이 이미 저의 제안한 입장 속에 표명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빈은 이 구절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요? 칼빈은 이 두 개의 표현이 결코 두 개의 현상을
개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또한 외적인 성례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도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By water therefore is meant simply the inward cleaning and quickening of the Holy Spirit. (그러
므로 물로서 의미하는 바는 간단히 성령의 내적 씻음과 깨어나게 하심을 말한다)
칼빈이 말하는 '성령의 내적 씻음'과 홀리죠이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가 동일한 것이 아닌
가요? 도대체 '내적 씻음'이라는 것이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 가능하다는 것일까요? 이것이 개혁신학
의 보편적인 해설이 아니라면 도대체 칼빈의 해설은 개혁신학적 설명이 아니라는 것일까요?
참으로 이상한 비판들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저는 그런 비판들에 대해서 대응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이 있
습니다. 그것은 칼빈이 말하기를 '성령의 깨어나게 하심' 곧 quickening of the Holy Spirit을 '물'로서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심에 대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 없으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칼빈의 설명과 더불어서 해설하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어나는 것이 있어야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어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이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 깨어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이 구분되는 것, 그러면서도 결코 분리되지 않는 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바로 연중론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성을 강조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중생의
순간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순간성을 강조한다 함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성을 '좁은
의미의 중생'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이들의 설명과는 달리, 오히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깨어나게
되고 그런 뒤에 거듭나게 되는, 곧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연중론의 주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해석하게 되면, 이 말씀을 직접 들었던
니고데모 그 사람의 중생을 설명하는데 딱 들어맞게 됩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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