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론은 내적 부르심(유효적 부르심)이전에 있는 그 어떤 노력이나 애씀과는 무관합니다.
연중론이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유효적 부르심(좁은 의미의 중생)이 있고 나서
그 유효적 부르심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그러면서도 그 순간적인 변화에 의해서 깨어나게 되고 각성되어서 참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는 것이 과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내적 부르심이 아닌, 외적 부르심에 있는 애씀과 노력을 연중론이
강조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연중론의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
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외적 부르심이 진행되는 중에 있는 노력이나 애씀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의 수고가 헛되고, 또한 구도자의
애씀이 전혀 도로아미타불입니다.
하지만, 연중론의 강조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결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참된 회심자에
이르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곧 효과적 부르심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그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부르심에 의해서 중생의 씨앗이 심겨지게 되고 그 씨앗의 생명력에 의해서 힘쓰고 애쓰는 일들
이 일어나는데 크게 보아서 그것은 각성과 죄인됨의 문제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런 각성이 지속되고
또한 죄인됨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전도자,설교자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에게 유효한 부르심이 일어났다는 것을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그 안에 내적 부르심을 통해서 주어진 중생의 씨앗이
생명의 현상을 보여줄때입니다. 이 생명의 현상은 단순히 애쓰고 노력하는 정도의 현상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을 구주로만 아니고 주님으로 진실로 영접하게 되는 것으로
처음 표출될 때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중생이요, 그 순간이 회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애씀과 노력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바로 하나님께로 시작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선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세미-어거스틴주의조차도 아닌 것입니다.
제발 연중론을 비판하여도 알고서 비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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