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Re: 라마드님과 논쟁을 종료한 이유

baromi 2012. 7. 11. 10:09



lamad 12.07.10. 23:15 new

성경의 본문안에서 해석이 다르면서 후크마와 벌코프가 연속적 중생을 주장한다고요^^
성경의 본문안에 있는 해석이 다르다 ---> 저는 이부분이 안개라고 봅니다.




논쟁이 왜 되었는가?


1. 홀리조이가 고넬료와 루디아가 언제 부르심을 받았는가? 에 대한 해석 부분에 라마드님께서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는 루디아와 고넬료는 사도들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서 순간적으로 "효과있는 부르심+회개와 믿음을 통한 회심(돌이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석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홀리조이는 사도들을 만나기 전 유대교의 오실 메시야에 대한 신앙을 접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시점에서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었다고,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시점에 효과적 부르심이 있었고, 사도들을 만나 오신 메시야에 대한 복음을 듣고 고넬료와 루디아는 드디어 온전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효과적인 부르심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 그 결과로 회개와 믿음으로서 고넬료와 루디아는 "경건한 생활",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아직 이들은 회심에 이르지 못하다가 사도들을 만나게 될때, 효과적인 부르심부터 계속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복음을 듣게 되고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는 해석은 고넬료와 루디아가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의 경건과 공경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그들의 회심과 연결되어 해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크마나 아더핑크와 같이 혹은 라마드님과 같이 고넬료와 루디아가 사도들을 만난 후에야 <효과적인 부르심+회개와 믿음을 통해 회심>이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하면, 제일 먼저 의문이 나는 것이, 그럼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 구원과 전혀 연관성이 없게 되는 이들의 경건과 공경 생활은 대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의문점에 후크마는 해석하지 않고 침묵만 지킬 뿐이며, 아더핑크 역시 마찬가지이고, 라마드님 역시 아무런 해석을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라마드님은 유대교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지, 그들은 구원과 연관 없는 상태라고, 신약의 복음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의 그 상태가 구원과 어떻게 연관되냐고 언급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커지지요. 구약의 복음만으로 구원을 받은 히브리서 11장의 옛 선조들은 다 무엇이 되겠습니까?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이 들은 구약의 복음과 고넬료와 루디아가 들은 구약의 복음과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되려 의문점만 더 커질 뿐입니다.



2. 그리고 아울러 위의 라마드님의 덧글 주장과 같이 이렇게 성경해석이 틀린 이유가 후크마가 주장하는 "중생"과 피터마스터스의 "영혼의 의사" 책에서 제시한 "연속적 중생관"이 서로 틀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과연 라마드님의 주장과 같이 성경해석이 틀리면 교리가 틀리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칼빈과 뻘콥과 후크마는 서로 중생에 대한 교리가 틀립니까? 제가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중생 부분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후크마와 뻘콥은 같은 중생론을 주장하나 약간 차이가 있다면 후크마는 효과적인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 하고 뻘콥은 효과적인 부르심 안에 중생이 포함된다고 하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결국 같은 중생 교리라고 할 수 있음을 제가 후크마의 구원론과 뻘콥의 구원론을 근거로 하여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후크마와 뻘콥의 중생론과 피터마스터스가 주장하는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이 같은 개념이고, 후크마와 뻘콥이 우장하는 중생론을 최대한 간략하게 축약하여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이 순간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란 36개의 글자를 <연속적 중생관>이란 6개의 글자로 함축한 것 뿐이다. 라고 수차례 알려주어도 서로 왜 틀린지, 설명도 없고 근거자료도 없이 그냥 틀라다는 주장만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위의 덧글과 같이 "성경해석이 틀리다는 것은 교리가 틀리다는 것" 인양 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마드님의 주장대로라면 <칼빈과 멘튜헨리 등>과 <뻘콥과 후크마, 아더핑크 등>는 지금 서로 중생교리가 틀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논쟁의 불씨는 왜 꺼지지 않는가?


1. 성경해석이 틀리면 교리가 틀리다는 것을 일획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해서 그렇습니다. 심각한 교리가 생성되는 중요한 핵심구절이라면 몰라도 일반적으로 다양한 해석 혹은 해석이 잘 안될 수도 있는 애매한 구절까지 이런 원칙을 적용하는 라마드님의 적용의 오류를 고집하는 한 논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습니다.


2. 문제 제기를 위해 신중치 못하고 성실치 못하게 준비했던 라마드님의 자세 때문입니다. 중생교리가 서로 틀려 성경해석이 틀리게 되는 것은 큰 문제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문제를 제기한 라마드님께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심각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연구와 해석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확실히 문제점을 밝히고, 근거를 제공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라마드님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문제부터 제기하고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라마드님이 논쟁 전에 미리 준비한 것은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저도 같은 책이 있어 개혁주의 구원론을 읽어보니, 후크마의 중생론은 피터마스터가 언급한 연속적 중생론과 같은 중생론이지, 다른 중생론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라마드님이 "연속적 중생론"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아예 모르고 "연속적 중생론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처음부터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을 알았다면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을 읽으면서 두 개념이 같은 개념임을 알게되어 문제 제기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틀리다면 교리가 틀린게 아니라 성경해석면에서 틀린 것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라마드님이 연속적 중생론이 무엇인지 모르는 또 한가지 이유는 논쟁 중에 계속 요구한 "라마드님이 알고 있는 연속적 중생론은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일괄적으로 계속 무시-알면 설명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준비가 없었던 라마드님은 성경해석이 다른데 어찌 같은 중생교리를 주장하겠냐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뻘콥과 후크마는 모든 성경해석이 다 똑같습니까? 칼빈과 후크마가 성경해석이 틀리니 이 둘의 중생 개념이 틀린 것입니까? 청교도들과 후크마는 다른 중생론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청교들도 같은 중생교리를 가지고 있어서 약간씩 다른 성경해석을 보이곤 합니다. 교리적으로 약간의 미묘한 차이(뻘콥과 후크마의 차이와 같이)가 있어도 이들의 교리는 같은 교리입니다.


이러한 사전적 지식은 문제점을 찾기 위해 성실히 준비를 하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일반적인 내용들입니다. 라마드님이 평신도가 아닌 이상 사역자로서 이러한 과정은 더욱 신중을 기할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라마드님은 이러한 사전적 준비에 있어서 성실치 못했습니다.


라마드님께서 문제 제기를 하기 전에 미리 성실하게 과연 그러한가? 라고 신사적으로 연구를 했었다면 이 구절에 대해서 칼빈과 멘튜헨리와 같은 해석도 있고, 후크마나 뻘콥이나 아더 핑크와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어 굳이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할 필요성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논쟁 중에라도 라마드님에게 신실한 논쟁 자세를 요구했습니다. 즉


1. 라마드님이 후크마의 "중생론"과 "연속적 중생관"이 서로 틀리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틀린지 비교해서 알려달라. 고 몇 차례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무시되었습니다. 또 라마드님이 이해하고 있는 연속적 중생론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하자, 그것도 역시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위의 라마드님의 덧글과 같이 서로 틀리다는 주장만 할 뿐입니다. 라마드님께서 마지막으로 쓰신 글에서까지 역시 왜 틀린지 라마드님이 알고 있는 연속적 중생론이 무엇인지 설명 없이 그냥 무시하고 있습니다. 


2. 성경해석면에 있어서 고넬료와 루디아가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이 경건하고 공경했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해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요구 역시 계속 무시되어 오다가 마지막에 바이블렉스 프로그램에 있는 사전해석만 복사할 뿐 뚜렷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해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신학적, 해석적 근거 자료도 없이 말입니다. 


라마드님이 갖고 계신 바이블렉스 프로그램에 있는 세보마이에 대한 신학사전의 첫 머리 부분 내용입니다. 



경건,경외

경외심을 품게 하는 것, 숭고한 것, 거룩한 것에 직면하였을 때, 사람은 언제나 어떤 존경심에 찬 거리감을 갖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거리감은 세보마이(sebomai) 단어군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이 단어들은 동료 인간이나 사회의 규범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공공예배에 있어서의 경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존경을 받을 만한 것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가리킨다. 한편 율라베스(eulabe:s) 단어군은 신중함, 세심한 주의라는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가지며,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통상적인 종교적 태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형용사 세보메노스(sebomenos)는 회당에 소속된 비유대인을 가리키는 통상적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에 대해서는 → 회심 Converion(art. proselytos)에서 별도로 논의되어 있다.




논쟁을 제가 먼저 종료한 이유는 사전 준비를 성실히 못했더라도 논쟁 중에는 성실히 임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논쟁 중에도 역시 너무 가볍게 논쟁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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