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성가대의 역사 /펌

baromi 2010. 12. 10. 17:04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가대

 

창세기 4장 21절에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구절은 음악의 조상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문헌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교회음악의 역사는 구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성가대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예배에서의 성가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찬송의 역사는 교회음악의 역사인 동시에 일반 음악사의 고대 음악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성가대 기원의 역사이다. 

성가대의 기원은 구약성경 역대상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다윗은 그 당시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자들로 레위 사람을 택하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케 하였다. 이렇게 레위 자손을 택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으로 알 수 있는데 그 말씀은 민수기 3장 11절과 12절에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1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것이라"고 하셨으며 이들로 찬양하는 일을 전담케 하셨다. 

성가대의 기원은 역대상 15장 16절에서 22장에서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16절)'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성가대의 기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당시에도 노래와 더불어 모든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앞 구절과 이어 '...비파와 수금과 제금들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16절)'고 하였던 것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레위 족속의 수(음악하는 이의 수)가 지금 보아도 그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알 수 있다.

역대상 23장 5절에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고 했던 구절로 보아 노래하는 성가대의 수가 사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구절은 후에 성가대의 인원을 계산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당시에도 성가에 전념하며 노래만을 가르치던 일에 골몰하는 자를 세웠는데 역대상 15장 22절에 '레위 사람의 족장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요'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다윗 시대에는 찬양의 직분을 주어 성가대를 두었으며 이 직분을 감당한 자들로는 찬양과 놋제금(놋으로 만든 타악기, 심벌즈의 일종)을 치는 자를 헤만{{) 헤만: 신실한 이라는 뜻을 가진 자로 솔로몬과 비교된 이름난 지혜자(왕상 4:31) 시편의 저자(시편 88편)로 또한 하나님을 만드는 선견자요 다윗 왕의 수하에서 찬송의 직무를 행하였다. 헤만(Heman) : 모으는 자의 뜻을 가짐,다윗 왕과 솔로몬 치세시 찬송을 맡은 레위인, 시편 열 두편을 지음, 그 자손들도 찬송하는 자가 되었다.  아삽(Asaph)에게 명하고 그리고 노래를 지도하는 자로는 에단과 그나냐(Chenaniah : 여호와께서 심으셨다. 레위인의 족장으로 재판관이며 다윗 왕 때의 노래하는 일에 전념하며 가르치던 자)를 세워 그 재능에 따라 전문적인 활동을 하게 하였으며 이것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성가대는 이렇듯 구별된 자들로 세워졌으며 그 자격도 제한을 두었다.

역대상 23장 3절에서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라고 한 말씀에서처럼 이 당시 성가대는 남자만으로 구성하였으며 이렇게 선별된 레위인 중에서도 삼십 세 이상만을 인구조사 하여 그 직분을 맡겼다. 

구약시대로부터 교회음악은 역대상 9장 33절의 말씀에서 보듯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씀처럼 찬양을 위해 전담하여 전심으로 그 직분만을 담당하는 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을 시작하여 7년만에 성전의 건축을 마치고(기원전 967년경) 하나님께 봉헌 의식을 거행하며 세마포를 입고 노래하는 자와 그 밖의 악기를 다루는 자의 수가 120명이 되었다. 이렇게 음악을 담당하는 신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레위 지파로 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세마포를 입도록 하였으니, 이 제도는 왕이나 대제사장들과 고귀한 신분에 속한 자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역대상 15장 27절에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라고 하였던 것처럼 구별된 직분을 나타내는 세마포를 입어 그 권세와 거룩함을 알리게 하였다. 

 솔로몬 이후 유다 왕국은 멸망으로 향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히브리인들은 언약궤를 손실하고, 성전도 파괴되었으며, 이렇게 포로가 된 70년간은 예배와 찬양조차 당당하게 드릴 수 없는 수난을 겪게 된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가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과 그의 생애를 전후로 하여 예수님의 공생회 시기의 음악은 구약의 시가서인 시편의 송영이나 영창이 주된 음악이었으며, 그저 읊조리는 형태의 음악을 즐겨하였다. 이런 음악은 주로 무반주로 기악의 반주가 없는 순수한 노래로 제한되었으며, 이런 음악은 회당 음악의 형식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사도시대는 예수님 사망 후 약 1백년 동안을 말하는 시기이다. 예수님 당시의 음악은 구약의 시편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며 지금도 신약시대의 음악에 대한 중요성은 그리 고려되지 못하는 이유는 구약의 시편만큼 위대한 시가서를 발견 못한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을 유대인들은 율법 . 선지서 . 성문서로 구분하고 시편 . 욥기 . 잠언 . 전도서 등을 '지혜로운 사람들'이 즐겨했다 하여 <지혜서>로 구분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편은 가장 음악적인 시(詩)로 헬라어인 '프살모이'(Psalmoi)를 음역한 것이며 이는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구약의 시편을 노래하던 것에서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노래들이 작곡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당시 그리스 문화는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 등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기독교에 좋은 토양을 제공하였다. 이들이 끼친 영역은 철학, 자연과학, 수학, 천문학, 음악 등 무수히 많은 학문들이 쏟아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그리스의 근본적 정신과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기독교 교회와 유태교에서 유래했지만, 그들의 이룩한 중세의 모든 학문과 음악에 관한 학문적 업적은 매우 놀라운 것으로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큰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3. 종교개혁 전까지의 성가대

 

사도시대 이후, 313년에 이르러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회는 억압과 핍박에서 벗어나 로마의 보호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교회의 교세와 재산이 불어나고 교황의 의식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로마에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성가 학교(Schola Cantorun)라는 음악학교가 설립되었고,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을 정식 음악교육을 하게 되었다. 

또한 529년에 설립된 성 베네딕트 수도원(또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가장 크게 공헌한 수도원으로 로마 남동쪽에 자리를 잡고 수도원장과 수도승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때 수석 독창자 제도인 칸토르(Cantor)제도가 확립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전문적인 성가교육 및 교회음악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서방의 교회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그레고리안 성가집을 만든 업적과 더불어 예배의식을 재편찬하면서 노래학교의 재조직에도 힘을 썼다. 기원 후 3세기 이후 교회음악은 예배를 중심으로 음악이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이 당시의 음악은 개인적인 즉흥적인 변주의 형태였다.

예배음악은 응답식이어서 교창이 없이 혼자 노래를 부르거나, 독창자와 합창단의 교창으로 진행이 되거나 하는 답창식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교대로 교창하는 식의 예배를 음악으로 진행했으므로 성가대의 조직과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이다. 

 

다성음악의 발달은 교회음악에서 특히 로마의 보수적 대위법의 학습과 훈련을 쌓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더욱 견고한 음악작품들이 탄생하였다.

17세기 짤츠부르크의 태생의 교회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베네볼리(Orazio Benevoli : 1605∼1672)의 작품에서는 합창단이 여러 방향에서 연주하게 하여 마치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 환상적인 느낌으로 빠져들게 하였으며, 이 시기가 다성음악의 최고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  또한 스페인에서도 몬트세라 수도원의 에스코라니아(escolania)라는 합창 학교를 통하여 다성음악(polyphony)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었다.

이런 지금까지의 성가대 변천사를 살펴본다면 초기 구약시대의 성가대에서 시작에서 11세기 이전까지, 그저 단순히 한 선율만을 연주하는 단선음악{{) 단선음악(모노포닉, monophony) : 최초 교회음악과 고대 그리스음악에서 중세,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는 음악으로 단선율의 음악이다. 그리스어로 monos(단일의)와 phone(음)의 합성어이다. }}(Monophony)이었으며, 11세기 이후 나타나는 두 성부 이상의 복음을 연주하는 다성음악(Polyphony)으로 발전되면서, 높은 성역인 소프라노(Soprano)를 감당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필요성은 지금까지 변성전의 소년들을 성가대에 기용하여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음악이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게 되면서 높은 성역을 담당할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지만, 이때까지도 성가대는 남자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고, 이런 요구에 의해 17세기경 이태리에서는 소년이 변성되기 전에 거세를 행하여 어른이 되서도 영원히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하는 카스트라토(castrato : 어린 남성의 아이를 변성기 전에 거세하여 어른이 되어도 소프라노나 알토의 성역을 지니게 하여 음악의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소리는 소년이나 성인 여성에 비해 강하고 순수하며 또한 성역도 훨씬 넓었다)를 두었는데 카스트라토란 라틴어로 castrare(거세하다)에서 나온 말로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음악에서 많이 사용하다가 17∼18세기에는 종교음악만이 아닌 이태리 오페라에서도 많이 노래하게 되었다.

후에 가톨릭에서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새로이 여성이 성가대에 도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4. 종교개혁 이후의 성가대

 

 종교개혁은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에서 츠빙글리(Ulrich Zwingli : 1484∼1531), 그리고 프랑스의 칼빈(Calvin : 1509∼1564)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이 세 사람 모두 종교개혁에 대한 업적도 크게 인정받고 있지만, 종교 음악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음악관은 기본적인 몇 가지의 공통점 외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예배의 음악을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이함을 보이고 있다.  

교회음악의 예배 사용에 대한 이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면 자기 나라의 모국어로 된 성경과 가사를 가지게 했다는 것이며, 찬송의 가사를 시편을 사용하였고, 가사와 선율이 일치가 되도록 운율과 리듬, 그리고 선율이 일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 예배 의식인 '전례'(典禮)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가대의 구성과 역할이 축소되면서 '말씀'이 중심이 되고 성가대는 예배를 돕는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적 형태의 성가대가 아니라 종교개혁 이전에 성가학교를 통하여 전문적인 예배음악가들이 하던 음악에서 일반 회중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성가대처럼 높은 성역인 소프라노와 알토(Soprano & Alto)를 여성이 담당하게 된 것은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18세기 이후에 와서야 가능하였다. 그 시발점이 된 곳은 여자들만이 생활했던 여자 수도원으로 수도사들이 예배 때 사용하는 성가나 찬양을 예배에 적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가대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중세시대부터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예전의 영향이 컸다.

서방 교회 예배역사의 두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주후 500-900년은 로마 예배의식 (the Reman Rite)과 갈리칸 예배의식(the Gallican Rite)이 발달한 시기이다. 예전이 발달 함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교회에서 노래하는 집단 즉, 성가대의 출현과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중세시대의 성가대는 남성으로만 구성되었으며 높은 음역의 노래를 위하여 소년들도 성가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배의식을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그레고리 교황 (Gregory the Great, 540-604)이다. 그레고리 교황은 "스콜라 칸토룸" (Schola Cantorum 성가대, 후에는 성경학교의 뜻)의 교육을 강화하여 그곳에서 통일된 의식을 가르쳤다. 그는 라테라노와 성 베드로 교황 성당 옆에 성직자들의 공동생활을 위한 숙소와 성가대원 양성을 위한 고아원도 지었다. "스콜라 칸토룸"은 그레고리 교황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590년에는 이미 가수들의 조합이 결성 되었던 시기였다.  

 

성 비오 10세 교황이 'Motu Proprio'의 제5장에서는 Cantori(성가대원)라는 제목으로 교회 성가대원의 자격과 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3항) 전항의 원칙에 의해 성가대원들은 교회 안에서 참된 전례적 직무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여성들은 그러한 직무를 해낼 능력이 없기에 성가단이나 주교좌 또는 그에 준하는 성당 전속 성가단(cappella musicale)에 참여하도록 허가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소프라노나 콘트랄토의 높은 소리가 필요할 경우,  그러한 소리를 위해 교회의 아주 오래된 관습에 따라 어린이들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14항) 끝으로, 성실한 삶과 신심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성가대에 참여함이 허락되지 않는데, 그들은, 그 전례적 직능을 수행하는 중에 경건한 신심과 절제된 태도로써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성무에 합당하다는 것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성가단원들이 교회안에서 노래할 때에 교회적인 의복차림이나 또는 흰 중백의를 입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만일 성가단원들의 차림이 현란하여 일반 신자들의 눈에 너무 튀어 보인다면 오히려 그들의 기분만 상하게 해 줄것이다.>

 

성 비오 10세가 성음악의 범주를 다시 교회전례 안으로 되돌리기 위해 발표(1903년 11월 22일)되었던 'Motu Proprio'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매우 시의적절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유명 소프라노 가수들이 그들의 성악적인 기량만 가지고 노래할 때 오히려 미사전례 분위기를 해 칠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가대는 미사전례시 한 요소는 될 수 있지만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Motu Prorpio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등장하는 성음악전례에 관한 여러 교회문서에서 자주 발견된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중세시대는 특별히 교육받은 성가대 집단의 발생과 구약시대의 제사 개념에 의한 사제들의 음악목회를 특징으로 한다.  사실상 중세시대의 성가대 제도는 18세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되었다.

 

그 이후,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여성들의 성가단 참여를 허락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Motu Proprio의 전 조항이 모두 사장된것은 아니다. 그 기본정신, 다시말해 성가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안에서 미사전례를 도와 야훼를 더욱 찬양해야 한다는 정신은 지금도 변함없다. 

 

 

5. 혼성 성가대의 시초

 

현대 성가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혼성 성가대는 18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West Gallery Tradition"이라는 것이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이 전통의 중요한 의미는

첫째, 여성이 성가대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

둘째, 성가대는 직업적인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성가대는 미국에서 청교도들이 몰고온 "역사적으로 균형 잡히지 않은 음악 문화에 대한 염증" 때문에 시련을 받았지만 그 후 현저한 발달을 가져왔다. 

뉴욕에 있는 삼위일체 영국 교회는 1693년 성가대원과 오르간 반주자를 영국에서 초청하여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성가대를 조직하였다.

1774년 메사추세스 주의 스타우톤에서 빌링스(William Billings 1746-1800)에 의하여 최초로 성가학교(Sacred Singing School)가 설립되었다. 그때 창단된 성가대는 남성 17명과 여성 31명으로 구성된 혼성 성가대였다.  

19세기에는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에 의하여 가창(singing)이 공립학교의 교과목으로 소개되었고, 보스톤 음악협회(the Boston Academy of Music)가 창립되어 성가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   메이슨의 제자인 브래드버리(William Bradbury, 1816-1868)는 뉴욕의 침례교도 예배소(the Baptist Tabernacle)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봉사하며 성가음악에 공헌했다.  

19세기 후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전문적인 성가대의 가창 인도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혼성 4중창단(the Mixed Quartet)이다. 이 혼성 중창단은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첫째, 성가대와 같이 노래함으로써 자원 성가대원들을 노래로써 돕는 것이고

둘째, 성가대를 대신하여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성가대 음악의 질적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성가대에 독창자를 두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가합창을 강조한 웨스트민스터 성가학교 등으로부터 본격적인 음악목회 사역의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6. 우리 나라의 성가대

 

우리 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18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885년 4월 5일 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 1859∼1916)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라(H. D. Appenzeller)가 인천에 들어오면서 소개되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선교와 더불어 찬송가를 정리하여 내놓았고, 이로써 우리 나라의 교회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교회음악에 있어서 영향을 준 것은 미군이 6.25 사변이후 주둔하면서였다. "미 8군 군인 교회 성가대로 발족한 '필그림 합창단'이 이동훈(李東勳)의 지휘 아래 꾸준히 활약하고 있었고, 황임춘(黃任春) 지휘의 '아넬 성가단', 김두완 지휘의 '아가페 합창단', 박재훈 지휘의 '서울 코랄' 등이 이 나라 교회음악 발전을 위한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활동을 시작한 교회 성가대와 합창단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의 여러 교회에서 활성화되며 발전하였고, 이런 동시 다발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교회 성가대나 합창단을 이끌어갈 유능한 지휘자와 성가대원의 확보 등이 시급한 과제였다.  교회 성가대의 활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영락 교회나 새문안 교회, 정동 감리교회 등 비교적 큰 규모의 교회들의 성가대가 활동하면서 작은 교회의 성가대도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1954년 12월 15일에는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사 오토 E. 디캠프(한국 이름으로 감의도)가 미국의 선교사업기구의 하나인 시청각 위원회(Ravemcco)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방송국(Christian Broadcasting System, 基督敎放送局)을 설립하였다. 기독교 방송은 기독교적 사명과 기독교적 교양의 육성과 복음의 전파를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이것은 한국 최초로 민간방송의 시작이며 종교방송설립으로도 최초의 일이었다.

1954년 기독교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한국의 개신교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특히 한국 교회음악과 성가대의 발전에 크나큰 사명을 감당하였다. 이런 한국 개신교의 전파와 발전으로 지금은 교회마다 성가대가 조직되었으며 큰 규모의 교회는 몇 개의 독자적인 성가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가대의 필요성과 구성이 보편화되었다. 그 수준도 크나큰 발전을 이룩하여 지금은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사랑나누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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