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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주의 사상(5) 칼빈과 기독교강요/ 고경태 박사

baromi 2010. 11. 22. 08:56

개혁주의 사상(5) 칼빈과 기독교강요

광신대 목회자반 강의 고경태 박사

 

개혁신학의 근본은 ‘칼빈의 신학’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개혁주의’라는 도식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 강의에서 ‘칼빈주의’의 태동이 루터교가 칼빈의 진영을 비판할 때 규정한 부정적인 의미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칼빈은 당시에 미비한 존재였으므로 루터의 진영에서 ‘칼빈주의’라고 불러준 것이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신교의 한 축을 세울 거대한 신학의 사조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나사렛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로마의 변방에서 일어난 십자가가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가 갑자기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거룩한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지 사람의 도움이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그리고 바울이 모든 교회 역사의 개혁자들이 보여줄 실례들이다. 물론 칼빈에게도 당대에 그리고 후대에도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칼빈을 따르는 사람보다 대적자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에 대한 전기는 정통 개혁파에서 쓴 것보다 로마 교회, 루터파 진영에서 쓴 자료가 더 많다. 자기 진영의 신학자도 아닌 사람을 왜 연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진영의 신학자는 자기 역사관으로 보기 때문에 정통 개혁파의 관점과 다르다. 그런데 그 역사 및 해석 자료를 그대로 인식하거나 사용한다면 칼빈은 점점 왜곡되어 우리에게 접근될 것이다.

 

인간은 교육받은 존재이며 교육의 영향력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기는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의해서 모든 것을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존주의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질문은 항상 그 자리만을 맴돌게 할 뿐 진리에 다다르게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실례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이미 진리를 성취한 절대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의 창시자의 절대 주권을 믿는 경건으로 신학과 학문을 연마한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칼빈에 대한 논의는 그에 대한 인생의 오점에 대한 논의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대해서 추구하는 것이 신학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 제네바의 독재자?

 

오늘날 칼빈에게 덧 씌워진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행한 독재자 아닌가 하는 비판이다. A. 맥그라쓰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칼빈의 신화'(Calvin's mythology)라고 규정하며, 비판의 대부분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잘못된 비판이 발생한 원인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16세기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관점으로 비판한 것이다. 예로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가혹한 처형으로 이해하지만 이단에 대한 보편적인 사형방법이다.

둘째, 오랜 세월 동안 칼빈의 대적자들이 행한 근거 없는 비방을 아무런 조사 연구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런 비방은 특히 현재 한국 교회 이단들이 많이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문제가 된 ‘이단과 정통'에서 칼빈을 비판하며, 말씀보존학회, 신천지 등에서는 명백하게 칼빈을 이단으로 매도한다. 셋째, 현재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20세기의 유럽에서 공산 좌익들이 칼빈을 자본주의의 근원으로 평가함으로 의도적 왜곡을 하였다.

먼저 당시 칼빈이 제네바를 자신의 마음대로 지배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독재자는 고사하고 제네바의 지배자조차 될 수 없었다. 1538년 파렐과 칼빈 그리고 쿠로는 3일 내에 제네바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시의회로부터 받아 추방당했다. 결국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났다. 몇 년 후 망명에서 돌아 왔을 때, 과연 제네바시 전체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았던 것일까? 칼빈이 돌아온 후, 그는 1541년 교회를 위한 최초의 개혁인 제네바 교회법령을 의회에 제출하여, 겨우 제네바의 승인을 얻었다. 왜냐하면 1555년 5월 16일까지 칼빈을 따르는 세력들은 의회 내의 소수파, 오늘로 말하면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칼빈의 개혁이 도시 전체의 지지를 얻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1555년 5월 16일 칼빈의 반대파인 의회 다수파는 소수파를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무력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를 봉쇄, 칼빈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칼빈은 “나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다”라고 고백한다. 칼빈은 평생 조국 프랑스를 떠난 망명객이었고, 칼빈파가 집권하지만 그는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 및 국제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신학 저서 집필과 서신에 매진했다. 당시 제네바는 “압제당하는 자들의 고향”, “솔직하고 자유로운 도시”로 불려졌다. 중세의 암흑이 지배하던 유럽에서 제네바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칼빈이라는 인물을 평가함에서 특히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다. 많은 역사적인 왜곡이 있기 때문이다. 작금에 개혁파들의 비판에 행위에 대해서는 ‘교조주의’로 맹비난을 하지만, 칼빈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마치 당연한 귀결인양 위로도 해주지 않는다. 칼빈에 대한 이해는 그가 남긴 글인 [기독교강요]와 [주석] 그리고 [설교]와 [서간문]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칼빈을 따르는 후예들에게 ‘칼빈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은 칼빈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선배를 존경하는 방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에서 행하는 성자 숭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동이 없는데 반해, 칼빈의 후예들이 칼빈의 학문을 연마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조주의라고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루터파는 교파의 이름이 루터교회이지만 칼빈의 후예들에게는 개혁파(장로교)라고 칭함도 분별해야 한다.

 

2. 칼빈(1509-1564)의 저작

 

칼빈의 회심에 대해서는 오직 칼빈이 주석한 시편 서문에서 “뜻밖의 회심”이라는 것에만 근거한다. 그리고 1533년 파리 대학의 강연에서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의 취임식 연설의 원고를 작성하여 줌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칼빈은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니콜라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결국 파리 남서부 앙그렘(Angouleme)에 은신처를 정했다. 그는 친구인 루이스 두 틸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1534년 5월 4일에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을 했다. 1534년에 그는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하여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관용과 박해로 프로테스탄트들을 대했다. 1534년 10월 18일에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하여 박해가 시작되어 결국 망명자로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5년 1월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인 콥을 만났다. 그리고 두 틸레의 서재에서 쓰기 시작한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1535년 8월).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하면서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사를 썼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출판되었다(516쪽으로 1장: 율법, 2장: 신조 문제, 3장: 기도(주기도), 4장: 성례, 5장: 다른 성례들, 6장: 기독교인의 자유).

 

1539년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여 성경 전체 주석 작업에 들어간다. [기독교강요]의 개념이 확립됨과 동시에 성경 주석 작업을 착수하였다. 1538년에 제네바에서 파렐과 칼빈은 부활절 성찬 문제(바젤의 성찬용 떡을 준비함에 로마 교회의 형식임으로 거부하여 성찬을 집행하지 않음)로 추방당한다. 1540년 제네바에서 파렐을 지지하는 기욤이 권력을 잡게 되어 두 사람은 다시 제네바로 복귀하게 된다.

 

제2판 역시 라틴어로 1539년에 출판됐다. 이것은 소책자를 벗어나 기워 메운 책(in-folio)으로 되고 초판보다는 3배나 되는 중보 판이었고 11장을 보충했었다. 처음 2장을 새로 쓰는데 초판에서는 제1장 율법 안에 요약했던 신지식(神知識)과 사람의 지식, 구약과 신약의 관계, 유아 세례 변호, 성경의 가치, 성화, 천년 왕국 반대론을 1,2장에 따로 기록했다. 초판의 제2장은 또 회개, 신앙, 칭의, 예정, 섭리의 각 장으로 나누어 썼다. 이 제2판은 1541년에 프랑스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라틴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었다. 그런데 1542년 7월 1일 프랑스 의회는 《기독교 강요》라틴어판과 프랑스의 번역판을 다 이단서로 지적하고 탄압을 선포했다.

 

제3판도 라틴어로 1543년에 출판되었고 프랑스 번역은 1545년에 출판됐다. 제2판보다도 4장이 증보(增補)되어 합 21장이 됐다. 증보된 장들의 내용은 맹세, 인간의 전망, 교회 권한, 교회 조직에 관한 것이다.

 

제4판 라틴어 판은 1550년에, 프랑스 번역판은 155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모든 장들은 각각 구절들로 나누어져서 읽기 쉽게 되었다.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증보되고 성자숭배, 성상 숭배에 관한 것을 논박(論駁)하고 인간 양심을 해설한 것이 증보됐다.

 

제5판 라틴어판은 1559년에, 프랑스 번역판은 1560년에 출판되었다. 번역판도 자기 조국의 동포들을 위해서 그 자신이 손수 완필한 것이다. 이 결정판은 제4권, 전 80장이다.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편찬한 것으로 초판보다는 완전한 새 책이 되었다. 칼빈의 수명이 길었다면 완성된 주석에 근거해서 더욱 개진되었을 것이다. 칼빈의 신학의 진보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다.

 

제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2권- 처음에는 율법 아래서 조상들에게 알려지시고,

다음으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오며, 어떤 효력이 뒤따르는가?

제4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청하시며,

거기서 머물게 하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방법

 

[기독교강요] 1559-1560년의 출판은 칼빈 신학의 결정이다. 개혁신학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어거스틴의 신학과 동방교회의 이해들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칼빈의 신학을 익힌다면 고대교회의 신학을 익힐 수 있는 관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칼빈 신학이 정통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강요》의 목적

 

1536년판 서문은 프랑스 왕(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있다. 거기에 그는 《기독교 강요》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쓰려고 할 때, 왕이여 당신의 존전에 드리고자 하는 것 외에는 내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어떤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배울 수 있는 원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로 이 책을 가지고 원하는 바는 프랑스 국민들을 섬기고 싶은 것인데,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이라 부르며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내가 보았고, 그들 중에 몇 사람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가능한 한 교리를 가장 쉬운 양식으로 썼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포악이 당신의 왕조의 높은 자리에 들어왔으므로 건전한 교리가 있을 여지가 없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에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이 책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고, 또 당신에게는 이것을 나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아마 이 교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며 칼과 피로써 당신의 왕국을 지금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이 교리를 반대하여 심히 격노하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기독교 강요》의 유일(唯一)한 목적이 아니다. 칼빈은 신학의 특별한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은 많은 독자 대중이 더 알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던 교훈적 목적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를 프랑스어 번역으로 출판했다.

 

 

1541년 프랑스어 번역판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으로 독자들이 더 유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사용하는 법을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의 목적한 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바란다. 우리 구주께서 성경에 자신의 지혜의 무한한 보고를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이 아무도 더할 수 없는 완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잘 훈련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 바라는 목적대로 바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받은 사람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발견하도록 인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자랑이 될까 염려하면서도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참으로 잘 이해하는데 열쇠와 입문이 되고 접근하게 하는 것이 될 줄을 믿는다.”

 

4.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은 정치적, 신학적으로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고, 가정 환경적, 신체적으로 많은 제약을 갖았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파렐과 함께 추방당하기도 하였다(성찬 문제). 피에르 칼롤리, 볼섹, 세르베투스 등 신학적 대적자와 제네바 시의회(Peter Ameaux=아모는 엄격한 규율로 자신의 사업이 망함과 아내가 재세례파 교리를 수용함)의 반대파들이 있었다.

 

(1) 1543년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는 칼빈이 추천하여 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 이해가 다름이 나타남으로 목사 청원을 거부하였다. 그는 원래 인문주의자였는데 칼빈 밑에서 인문주의 교육에 기여했으나 성경의 권위는 불신하고 있었다. 즉 성경의 일부의 정경성을 부인하였는데, 예를 들면 그는 아가서를 '음란하고 추잡스런 시'로 생각했다. 칼빈의 사도신경 해석을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목사 자격 심사에서 탈락하였고 결국 칼빈의 적이 되었다.

 

(2) 1551년 파리 출신의 의사로서 카르멜 수도회(Carmelite) 수도사였던 볼섹(Jerome Bolsec)은 칼빈의 예정론에 반박하였으며 칼빈을 비방하는 전기를 써서 반 칼빈 운동을 전개하다가 형을 받아 투옥되고 결국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로마 교회로 복귀하였다.

 

(3) 자유파에 속한 페랑(Ami Perrin)과 버틀러(Philbert Berthelier)도 칼빈에 도전했다. 페랑은 칼빈을 제네바에 귀환하도록 스트라스버그에 특사로 파견된 자였다. 그는 제네바 시에서 절대적 지지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자유파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도덕한 생활로 장로회의 징계를 받자 이를 거부하였다. 버틀러도 역시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장로회에 반기를 들었다.

 

(4) 칼빈의 생애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던 중요한 사건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의 논쟁이었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다방면에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요, 법률가요, 신학자였다. 그가 혈액 순환을 발견한 자였다. 1531년 그가 20세 되던 해에 <삼위일체론의 오류>를 라는 책을 출간하여 화제를 모았던 자였는데 1533년에는 <기독교의 회복>이란 책을 써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비판하면서 칼빈보다 더 큰 인기를 얻기를 원했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가리켜 '머리 셋을 가진 지옥의 개'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삼위일체 뿐만 아니라 동정녀 탄생, 유아세례, 그리스도의 신성 등을 부인했다. 이런 저작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카톨릭 교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리용 감옥에 수감되었던 중에 탈옥하여 제네바로 왔다. 그는 결국 칼빈의 교회에서 체포되어 유스티니안 법정에서 칼빈과 심각한 논쟁을 한 후 소 의회에서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산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을 언도 받았다. 자유파는 칼빈에 대항하는 세르베투스를 지지했다. 결국 그는 1553년 10월에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은 역사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잔혹한 칼빈상을 제시하였지만, 당시 이단자에 대한 보편적인 사형은 화형이었다. 칼빈과 세르베투스의 대화를 보라, 세르베투스의 독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격하면서도 거침없는 독설로 교회와 교회의 사역자를 모욕하고 정죄하였다(참고, 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나단).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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