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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의 개혁자 박윤선

baromi 2010. 10. 2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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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개혁자 박윤선 

     

                                                                                                       장동민(천안대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조직신학)


Ⅰ. 서 론

이미 박윤선에 대하여는 수십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대부분 박윤선의 인격과 신앙을 흠모하는 글과 그의 성경주석과 신학과 그 역사적 공헌을 평가하는 글들이다. 나에게 박윤선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개혁가로 비추어졌는데, 이에 대한 글이 별로 없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의 주된 의도는 교회 개혁가로서의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박윤선이 역사 속에 주어진 한국의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떻게 이를 개혁하려 하였는지를 추적해 보려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박윤선은 깊은 기도와 경건을 통하여, 현대의 비평학에 정통하지는 않았으나 목회와 설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 가득 찬, 영감 있는 성경 주석을 써낸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그가 모년(暮年)에 합동신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분리한 행동은, ‘분리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순수한 영혼을 가진 분이 교단 정치의 압박에 못 이겨 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이런 행동이 결코 돌출적인 것도 아니고 소박한 것도 아니고 ‘분리주의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글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의 이러한 행동이 그의 삶을 관통하는 지극히 일관성 있는 것이고, 더욱이 “개혁주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나타난 결과만을 보고 한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전반적으로는 그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그에게 공감(共感)하면서 다룰 것이지만 무비판적으로 칭송하지는 않겠다.

Ⅱ. 교회의 거룩성

1. 교리적 거룩과 도덕적 거룩

개혁주의 교회론의 기본 전제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교회관의 중요한 특징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는 것이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특성이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교회의 거룩성을 가시적 교회에 나타내기 위하여 생애를 바쳤다. 교회의 거룩성은 다시 교리적 거룩성과 도덕적 거룩성으로 나뉘어진다. 이 양자가 지켜질 때에 교회는 거룩해진다. 교리적으로 정통에 서 있고 자유주의를 배격한다 해도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순결하다 할 수 없다. 아무리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정통적 교리에서 벗어난다면 참된 교회라 할 수 없다.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상 교리의 정통성을 위하여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헌신하기도 하였고, 또한 좀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순결을 모두 염두에 두던 사람은 흔치 않다. 박윤선은 교회의 두 종류의 거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신학자요 교회 개혁가였다.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서의 박윤선이 최초로 만난 교회는 막 해방의 기쁨을 맛본, 그러나 신사참배와 일본화로 타락한 교회였다. 이 당시 한국교회의 과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는 도덕적 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학교를 재건하여 일제 말 ‘자유주의화’ 된 기성 신학을 정화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의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신학교가 고려신학교였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가담하고 고려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교회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그는 참된 교회는 우선 순결(성별)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속하였던 고려파의 회개 운동, 순결 운동을 정당화한다.

교회가 진리를 증거하다가 어떠한 희생을 당하든지 그것은 소금의 직분을 행한 것이고 성별의 생명을 가진 운동이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성별 운동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이 속화 운동과 충돌해 오면서 교회의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역사를 살피면서 특히 현대에 교회의 속화(俗化)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고려파를, 노아, 암부로스, 루터, 칼빈, 요한 낙스, 메이첸 등의 “항의자” 노선에 놓는다.

박윤선이 신사참배에 동참한 교역자들의 회개를 주장하는 고려파에 몸담은 것은 교회의 개혁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행한 자의적인 행동이었다. 은사이며 선배인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탈퇴하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박윤선을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박윤선은 거절하였다. 이 때 박형룡은 박윤선에게 “다른 집을 세우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박형룡은 당시 교권을 잡고 있던 세력들이 신사참배를 공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크게 실망을 하고, 신학교에서 2세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것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이루려 하였다. 비록 신학교를 하기 위하여 (회개하지 않은) 교계의 실세들과 손을 잡는다고 할지라도 다음 세대에는 자신으로부터 교육받은 목사를 통하여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박윤선의 생각은 달랐다. 신학교도 교회의 일부였다. 회개하지 않는 교회의 신학교를 통하여 교회의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특성은 반드시 보이는 교회와 그 교회의 일부인 신학교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박형룡이 교리적 순결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박윤선은 교회의 도덕적 개혁이 없는 교리적 순결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성결하지 않은 신학교에 남아서 신학교육을 통하여 다음 세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박윤선이 볼 때에는 도피요 위선이요 위험한 엘리트주의이다.

2. 교회의 거룩성과 권징 그리고 ‘정치’


박윤선이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였다고 해서 범죄한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교회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박윤선에 의하면 고려파는, “① 범죄한 신자들을 모두 다 교회에서 제외하자는 극단적 강경파”도 아니고, “② 범죄한 신자들을 무조건적으로 그전과 같은 자격으로 용인하고 지나가자는 파”도 아니며, “③ 범한 자들의 진실한 회개를 조건으로 하여 회복시키자고 하는 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박윤선에 의하면, 회개가 중요한 것인데 단순한 개인적인 회개로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교회의 법에 따라 공적으로 회개하고 권징을 받아야 한다. 칼빈주의는 참된 교회의 표지(標識)로서 말씀의 참된 선포와 성례의 올바른 시행,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시행을 들고 있다. 권징이 시행되지 않으면 말씀의 순수성, 교회의 순수성이 절대로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권징을 실시해야 된다. 이것은 교회의 성결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권징을 통하여 성결한 교회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가? 박윤선은 ‘교권주의’라고 단언한다. 교권주의라는 것은 교회와 교단에서 권력을 잡기 위하여 성경과 교회법을 무시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당한 권리(치리권)는 예수님으로부터 교회에 이양된 것인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이 권세를 전용(轉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박윤선의 일생은 교권주의자들과의 투쟁, 아니 교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삶의 연속이었다. (총회측의) 교권주의자들이 자신의 교권을 지키기 위하여 공적인 회개를 못하겠다고 할 때, 박윤선은 회개와 자숙을 주장하는 고려파에 가담하였다. 고려파에서 탈퇴할 때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얽혀져 있었으나 결국은 교권을 장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총회신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합동신학교로 갈라져 나간 후에도 계속 교권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저작도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올바른 교회의 정치를 지키기 위한《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이다.

교권에 의한 정치와 교회법에 의한 정당한 치리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이른바 ‘스푸너(Spooner) 사건’이다. 박윤선이 주일날 출국하는 선교사 스푸너를 배웅하기 위하여 택시를 탔고 시간이 늦어 간단한 환송예배 외에 공적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노회와 총회 그리고 신학교 이사회에서 이를 문제삼아 그의 고려신학교 교장직과 교수직을 박탈하였다(1960년). 고려파 총회 다수파의 입장에서 보면, 몇 년 동안 계속되는 예배당 소송 문제 등을 통하여 교회의 순결을 외쳐 온 박윤선 자신의 도덕성에 흠집을 냄으로써, 성가신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도 박윤선의 그 날의 행동이 “부득이”한 일이었음을 잘 알면서 “건덕상 문제”가 되므로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가결하였다. 박윤선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의 요구에 대하여 박윤선은 “주일 지키는 법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답변서”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이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양심에 하등의 거리낌이 없는 행동이었다고 하면서, “사과한다는 것은 성경과 교리를 굽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과한다든지 도의적 책임을 진다든지 하는 것은 성경의 법, 교회의 치리법에 따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판단”을 높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범죄한 일이 있으면 처벌받겠으나, 범죄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교권주의자들에게 순응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이 고려신학교에 남아 있기 위하여 정치적 행동을 취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것은 교회법과 그것에 따른 정당한 권징을 통해서 나타나는 교회의 성결성을 크게 해치는 일이 된다. 박윤선이 “답변서”를 쓴 것은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알아달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정당한 권징을 받아서 제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3. “다수보다 진리”


이렇게 교회의 거룩성을 외치는 박윤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질시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윤선에게서 소수냐 다수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장로교의 원리는 “소수보다 다수, 다수보다 진리(성경말씀)에 입각한 것이다.” 오직 진리가 명하는 대로 행할 뿐이었다. 고려파를 옹호하면서, “항의자”는 외롭다. “항의자는 일시 고립되며 좁은 문으로 통과하게 되며 언필칭(言必稱) 교회화평 교회정화의 역할을 한다는 중간파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쓴 적이 있다. 교회 소송문제 때문에 당하는 오해와 질시로 인하여 상한 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이 문제로 인하여 동역자들에게서 오해를 받은 일도 없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점점 멀어지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나는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을 예사로 아는 자가 아닙니다. 내가 왜 일선에 서서 이렇게 말을 하게 되는지……이것은 나 자신도 피하여 보려고 하여도 피해지지 않는 일입니다. 좀 외람된 지 모르나, 옳은 말은 해야지 하는 사명감의 포로가 되는 것뿐입니다.

스푸너 사건으로 고려파를 떠나면서도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고 오해되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교계에서 누구가 이것을 변호해 줄까?”라고 탄식한다.

그는 거의 일생 동안을 소수파(minority)로 살았다. 그의 학식과 저서들, 수많은 제자와 추종자들, 교장과 학장이라는 직함들에도 불구하고 항상 벼랑 끝의 삶, 국외자의 삶을 살았다. 다수파인 총회측의 편에 서지 않고 고려파를 선택하였으며, 고려파에서도 결국 물러나야 하였고, 끝내는 합동신학원과 개혁교단으로 분열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생애 마지막에 이런 애가(哀歌, lament)를 남겼다.

근년에 이르러 물량주의가 팽창해 가면서 교회는 그 성결성(혹은 순결성) 교리를 지키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이것은 생활의 순결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른 교리를 문서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족한 것은 아니다.……순결보다 외부적인 교세 확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는 세력 단체가 아니요 증거 단체니 만큼 양보다 질을 앞세워 신자들의 성화를 중요시해야 된다.


Ⅲ. 교회의 거룩성과 통일성

혹자는 박윤선이 고려파의 분리에도 동참하였고, 고려파에서도 갈라져 나간 일이 있었으며, 또한 합동측에서 갈라져 새 교단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그를 분리주의자로 보기도 하고 혹은 분리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를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가 교리적인 보수성과 도덕적 선명성을 이유로 삼아 분열하지만, 사실은 자파의 정치적 입지나 지방색과 같은 요소들이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박윤선의 경우도 교회의 순결성(purity)을 강조한 것은 좋았는데 그러다가 연합(unity)을 놓친 것이 아닌가 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박윤선이 과연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독선적인 사람인가, 왜 박윤선은 이런 길을 택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박윤선이 항상 문제삼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성결성이다. 분리의 가장 중요한 이유도 역시 교회가 성결하게 보존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박윤선은 고려파 분리의 정당성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교회의 표식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信從함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는 이것을 명백히 가르쳤다.……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연합은 그 무엇이든지 다 작당이다. 作黨 혹은 좋지 못한 분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행동만을 指言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떠나는 행동을 반드시 가리키지 않는다.……정당한 分敎는 부패한 교회 지도 원리가 완고히 수립됨으로 말미암아 옳은 주장을 가진 자들이 갈려진 분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생각할 만한 것은 옳은 주장을 가지므로 쫓아냄이 되어 분교된 사실이 가장 분리죄를 면하는 안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박윤선은 고려파의 주장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해 있고, 총회측은 “부패한 교회 지도 원리가 완고히 수립”된 교단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쫓겨났기 때문에 분리의 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윤선은 총회측이 부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속한 교파만 진정한 교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교단을 따로 세우거나 탈퇴하는 까닭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단들이 다 진정한 교회이지만, 고려파가 성경의 법을 잘 지킴으로 타 교단의 모범이 되도록 함으로 온 교회에 영향을 미치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박윤선의 생각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고려파 분리 이후 예배당 차지하는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송상석 목사와〈파수군〉지(紙)를 통하여 논쟁한 때이다.

물론 이 논쟁에서도 박윤선이 예배당 문제로 소송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세상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며, 총회측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교회의 성결을 지키려는 편을 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고려파의 회개 운동, 진리 운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며, 고려파를 통하여 6?25사변 중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섭리로 유엔군이 진주하게 된 것이 그 증거라 한다. 총회에서 갈라진 것도 모두 진리 운동을 배척하는 총회측에 대하여 “끝까지 진리를 파수”하다가 쫓겨난 것이라 말하며 그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박윤선이 이렇게 고려파의 역사적 정당성을 변호하는 이유가, 고려파는 참된 교회이고 총회측은 거짓된 교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박윤선이 소송을 반대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교회의 ‘보편성’(=통일성) 때문이다. 다음의 논증을 주의하여 보자.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대외적으로 사랑과 덕을 잃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진리싸움도 싸움이었으니 만큼 손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니 만큼, 전국적으로 인심을 잃으면서까지 싸워 진리는 파수하였으나 외계의 세계에 대하여 거의 간격이 막히게 된, 좋지 못한 열매도 생겼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본질 다섯 가지 중 하나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입니다. 곧 우리가 他派 신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는 분변하며 파수할찌나 편파심으로서의 장벽을 가지지 않아야 됩니다. 곧 타파의 신자들도 복음을 믿는 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만 신자이고 타파 신자들은 모두 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심리는 교회의 보편성 교리를 어기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타파 신자들의 마음도 다시 얻어 회개시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문제 이외의 사항에 있어서는 그 무엇이든지 남들에게 주고라도, 이제라도 덕을 세워서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그들을 회개시킬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갈라졌는데 다시 이들을 회개케 하고 포용하려는 것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윤선의 입장에서 이를 재조명해 보자. 박윤선은 신사참배를 진리에 위해를 가하는 중대한 범죄로 여겼다. 그러나 신사참배한 이들을 형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회개를 외쳤다. 총회측의 다수파는 이들의 견해를 묵살하고 총회에서 축출해 버렸다. 박윤선과 고려파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교회의 보편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나, 아니면 갈려서 새로운 교단을 이루는 길밖에 없었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성결(purity)을 지키는 유일한 대안이었고 이를 택하였다. 교단의 분열과 함께 예배당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파의 거두 한상동 목사는 그가 시무하는 초량교회를 총회측에 선뜻 넘겨주고 삼일교회를 세웠고 많은 교회가 순교적 신앙으로써 이를 따랐으나, 모든 교회가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예배당을 짓는데 소요된 성도들의 헌금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예배당이 갖는 정신적 중요성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소송을 옹호하는 송상석 목사가 주장하는 논지는 이러하다. 고신측이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예배당을 빼앗기고 그 명칭[대한예수교장로회]까지 저들에게 내어주게 되었으니 이를 되찾아 오는 것이 진리 운동이 승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려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유일한 교회이니 만큼 교단명도 이들에게 내어 줄 수 없다고 한다.

일견 송상석의 주장이 그럴 듯하고 박윤선의 주장이 “장신측을 향하여 고신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 행동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윤선의 입장에서 보도록 하자. 그가 보기에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교회 내의 운동이고, 이를 주장하다가 교회에서 축출 당한 것은 억울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미 갈라진 이상 명칭을 누가 가지느냐 예배당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리 운동은 ‘운동’일 뿐이고 고려파나 총회측이나 다 그리스도의 교회이니 만큼, 그 진리 운동이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제 논의해야 할 것은 진리 운동의 확산을 위하여 필요한 전략인 것이다. 그 전략의 하나가 바로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교단명이나 예배당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송상석 목사에 따르면 고려파는 참 교회이고 총회측은 참 교회를 쫓아낸 악한 집단이 된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에 따르면 이 둘은 다 참 교회이고 고려파는 진리 운동을 위한 집단이다. 송목사에 따르면 교단이라는 보이는 교회가 진리를 담지하고 독점할 수 있다. 박윤선에 따르면 보편적인 교회가 살고 고려파가 주장하는 바 교회의 성결도 전파될 수 있다.

흔히들 교회의 성결성과 통일성은 서로 배타적인 교회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성결을 지키려면 외연(外延)이 작아져야 하고 따라서 타 교단이나 성도들을 정죄하게 마련이며, 통일성을 강조하여 연합하려 하면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하여 이를 눈감아 주고 혼합주의에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통일은 성결을 전제할 때 의미가 있고, 통일성을 염두에 둔 성결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성결이다. 사실은 교회의 통일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성결은 진정한 성결이 될 수 없고, 통일성만을 주장한다고 해서 보편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 교회론은, 성결성과 통일성의 중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고양된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결성과 통일성의 고양된 통합의 예를 박윤선에게서 본다.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회개운동을 펼쳐 나갔지만 총회측에서 축출되었다. 회개 운동을 포기하는 것은 성결성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박윤선이 취한 길 외에 더 나은 대안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박윤선은 이후의 삶을 통하여서도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교회의 개혁을 도모한다.


Ⅳ. “연합보다 개혁”

교회의 성결성과 통일성과 관련되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건은 박윤선이 1980년 총회신학교를 사임하고 4인의 교수와 함께 합동신학원(합신)을 세운 일일 것이다. 물론 박윤선이 이 탈퇴를 주도한 것이 아니고 이미 4인의 교수들이 합신을 세운 후 많은 고민 끝에 합류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치로 보아 그가 의도하였던 하지 않았던 그는 합신 그룹의 대표적 신학자가 되었고, (만일에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박윤선은 합신의 분리 직전인 1980년 3월〈신학지남〉에 쓴 “분파의식 구조에 대한 소고”라는 논문을 통하여 정당한 교회의 분열과 잘못된 분파의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일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정당한 교회의 분열을 말한다. 첫째는 중대한 교리적 오류를 범할 경우(예를 들어 중세 말의 가톨릭 교회가 공로주의 사상으로 나가게 된 것), 둘째는 명문상의 교리체계는 옳은데 사실상의 가르침이 명백한 잘못일 때(예를 들어 20세기 초 자유주의로 인하여 웨스트민스터가 갈라진 것), 또한 셋째로 “옳지 않은 권징이 실시될 경우”(해방 후 신사참배의 죄를 공적으로 회개하고 책벌하는 데 게을렀기 때문에 고려파가 생긴 것)가 있다고 하였다. 합신의 분열에는 정당한 교리적 이유도 없고 총신이 자유주의화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세 번째의 경우와 같이, 당시 합동측에서는 교권에 의한 권징이 자행됨으로 부패가 만연하였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교권에 의한 타락이 극심하더라도 곧장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게 될 신학교의 분열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들을 만 하다. 특히 고려파가 총회측으로부터 쫓겨난 것과 같은 축출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박윤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의 일생에 걸친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 교권주의와의 싸움, 실패로 말미암은 상처와 좌절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박윤선이 부패한 총신을 개혁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1980년 4월 그는 학장 서리로 임명되자마자, 부흥회를 열어 총신 사태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을 회개하도록 하여 일시적인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문제의 궁극적인 발단이 교권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을 알고 그 대표자인 이영수 목사를 찾아가 용감하게도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순순히 교권을 내어주고 물러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책은 조용히 물러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학교의 책임 있는 자로 계속해서 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다수파 교권주의자의 일원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 고려파에 있을 때, 교회 건물 문제 때문에 박윤선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고려파에서 탈퇴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은 나[박윤선]의 지도 이론이 서지 않는 교계에서 진리 운동의 지도자 중 하나라는 이름을 가지기가 너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물러가되 분파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나가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고려파도 조용히 물러났고 예배당 문제로 소송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스푸너 사건으로 인하여 고려신학교 교장과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을 때에도, 그는 학교에서 조용히 물러 나왔다. “이는 내[박윤선]가 벌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물러 나온 것이 아니고, 이사회의 권리 행사를 대항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는 “분파의식 구조에 대한 소고” (1980)라는 글에서도 교회 내에 진리 외의 문제에 관하여 불일치가 있을 때, 조용히 물러날 것을 권고한다. “위대한 영력의 소유자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억울하게 그 시무하던 교회에서 배척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그는 조용히 물러나서 아무 불평 없이 여러 해 동안 그의 가족들과 함께 고생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쓴다. 1년 전 분리해 나간 비주류를 비판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거취를 암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르긴 몰라도 박윤선은 이 때 조용히 은퇴하는 방법을 많이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교회의 개혁이라는 일생의 대사명이 완수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리고 이미 신학교에서 떠난 교수와 학생들은 박윤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교단이 분열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새 학교를 통하여 개혁 운동이 총회신학교와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어 가는 이상을 다시 품게 되었다. 여러 모로 보아 나가는 것이 어려운 결단이었으나 그는 결국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가 총회신학교로부터 분리해 나갔더라도 역시 합동측을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주를 섬기고 한 세례와 한 구원을 믿는 이미 하나된 백성들”이라 하였다. 박윤선의 의도는 단지 한 교단 안에서 좀더 개혁적인 신학교를 둠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신학교의 분리를 통하여 교단을 개혁시키자는 방법은 박윤선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29년 미국에서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분리를 연상할 수 있다. 박윤선이 누구보다도 메이첸을 존경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메이첸은 미국장로교회가 자유주의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프린스턴을 떠나서 전통적인 (구)프린스턴의 노선을 걸으면서 외부에서 개혁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운 바 있다. 또한 스승 박형룡과 함께 하였던 봉천신학원을 상기했을 수 있다. 국내에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후 (후)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가 세워졌지만 박형룡은 이 신학교와 교회가 타락하였기 때문에 국외로 나가서 신학교육에 참여하고, 이를 통하여 정통신학을 배운 목회자들을 국내에 공급함으로써 신학과 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도 신학교를 통한 개혁 운동의 한 모델이었다. 국내에 돌아온 박형룡은 조선신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회신학교를 사설(私設)로 세운 후 인가 받는 방법을 통하여 세력을 확보해 나갔던 전례도 있었다. 이 모든 신학교를 통한 운동들 가운데 봉천신학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단의 분열로 이어졌는데(봉천신학원은 원래 초교파 신학교였음), 이로부터 역사적인 교훈을 받지 못한 것은 박윤선의 불찰이었다. 박윤선의 경우 교단의 분열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이 판단은 착오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대안이 없다고 느꼈기에 이를 택한 것이었다. 총신의 신학교육을 통하여 학장으로서 봉사함으로써 신학교와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는 길 외에는 그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없는 듯이 보였다.

박윤선이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또한 총회신학교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것은 교단이 신학교를 직영하게 되면 교단 정치에 휘둘리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합동신학원이 교단의 직접 관리를 받지 않는 방식을 원하였다. 합동신학원을 세운 후 그가 해야 할 일은 신학교가 교단의 교권주의자들에게 넘어감으로써, 보편적 교회의 이상을 상실하고 또 하나의 ‘교단’이 되어 가는 것으로부터 신학교를 지키는 것이었다. 1979년도에 합동측에서 갈라져 나온 ‘비주류’의 일파인 청담측(보수측)과 합동신학원을 후원하는 교단인 개혁측과의 합동 문제에 대하여 그는 반대의 입장을 보인다. ‘합동보다는 개혁’이라는 기치를 걸고 “개혁총회에 호소함”이라는 글을 통하여 그는 양측의 합동을 반대한다. 신학교와 교단이 내세운 개혁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합동신학원 보호” 즉 “교단으로부터 신학교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라 한다. 비주류와 연합하면 개혁의 이상(理想)을 가지지 않은 교권주의자들이 새 교단의 권세를 잡고 신학교에서도 발언권을 높여 결국 교회의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원하였지만 박윤선은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반대하여 관철시켰다. 물론 이렇게 할 때 다른 교단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었고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서로를 존중하되 그 방법이 다를 때에 난관이 있을 것을 확언”하기 때문이며, 결코 “사랑의 부족으로 누구를 비판하는 제의가 아님”을 밝힌다고 함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을 언급하기를 잊지 않았다.


Ⅴ. 교회개혁의 틀 : “회중주의적 장로교”

교회가 타락하고 교권주의자들의 정치가 판을 치며 올바른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박윤선이 보기에 이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다스리게 하자는 장로교회 정치의 기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박윤선의 한국 교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는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향후 교회를 계속해서 성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틀이 어떤 것인가? 박윤선은 어떠한 정치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데에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박윤선의 교회정치론은 한마디로 “회중주의적 장로교 정치”라 이름지을 수 있다. 그는 개교회의 권위의 근거가 회중 개개인에게 있으며 치리회 중 당회가 근본이 된다고 하여 개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였다. 평신도의 권한을 다시 찾고 개교회가 대회(노회나 총회)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교권주의자들의 타락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합동신학원에 재직하면서 1983년《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이라는 책을 썼다. 이제 이 책을 살펴보면서 박윤선이 어디에 강조점을 두었고, 어떠한 상황에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 추적해 보도록 하자.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그는 이《헌법주석》을 통하여 그 당시 만연되었던 교회 내의 교권주의를 제어하고 타파하려 하였다. 우선은 지교회 안의 권위주의, 주로 목사에 의하여 행해지던 권위주의를 지적하였고, 나아가 총회 내에서 총회-노회-당회간의 권위주의적, 계층구조적 이해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폐해들을 시정하려 하였다. 박윤선은 장로회 정치제도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상향과 하향의 균형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상향적인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향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헌법주석》의 서론에서 “장로회 정치의 정신은 한 마디로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라는 교리이다”라고 하였다. 교회 내에서도 회중들의 모임인 공동의회가 모든 권위의 근원이고 출발점으로 생각하였고, 지역 교회가 총회를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박윤선이 자신이 겪어온 그 당시 장로교회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해결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합동신학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가져야 할 목회자상과 치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그의《헌법주석》은 다른 모든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그 시대적 공헌이 평가되어져야 하고, 또한 그 한계도 지적되어야 한다. 다음 몇 가지의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1. “양심의 자유”와 회중주의적(Congregationalistic) 해석

박윤선은 성도들이 교회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의 “원리”(principles)에서부터 찾는다. 헌법의 원리는 모두 여덟 개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가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이다. 이 두 원리는 원래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박윤선은 이 원리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개인과 교회가 신앙 문제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주셨다고 하여 이를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적으로 이해한다.

박윤선의 양심을 강조하는 이러한 회중주의적 요소는《헌법주석》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장로의 시무 연한에 대한 조항인 정치 제13장 4조(“단, 3년에 1차씩 시무 투표할 수 있고, 그 표결 수는 과반수를 요한다”)의 해석에서 장로의 시무 기간을 두고 시무투표를 시행하는 것을 권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로의 전횡을 막고 회중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박윤선이 회중에게 모든 권위의 원천이 있다고 한 것은 치리회(제8장)에 대한 주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8장의 제1조 치리회(혹은 정치)의 필요를 새로 번역하면서, “교회를 치리함에는 일정한 정치 원리가 절대 필요하다. 우리는 회중, 노회, 총회의 제도에 의한 교회 치리가 사리상 유익하고 성경적이고 사도시대 교회의 치리법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그는 “당회”(Session) 대신 “회중”(congregation)이라는 말을 대치시켰다. 그리고 “장로교 정치는……회중을 기본으로 하여 노회, 총회의 치리회를 가짐이 사리상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장로교회에서도 회중이 치리회가 된 적이 없었다. 개인과 치리회와의 관계에 대하여도 양자간의 균형을 말하기보다는 개인이 더 앞선다. 장로교 정치의 제1원리인 “양심의 자유”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치리회가 행할 때에 이에 복종할 책임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가 교회 내에서 당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법을 대신하였던 시대였음을 생각할 때 역시 혁명적인 말이다. “신자는 치리회에 대하여 맹종할 것이 아니라 비판해야 한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교회의 평신도들은 심지어 권징권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18 : 15~18의 말씀을 “개인 신자들도 서로 권면, 혹은 경계에 의하여 권징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개인들끼리의 권징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 치리회가 그 일을 하도록 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구속받은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도 어떤 의미의 성직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권징의 주체이고 이를 시행하지 못할 때 치리회가 대신 그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2. 목사의 권위 문제

양심에 따라 믿고,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박윤선의 해석은 곧 사역자들의 권위를 제한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박윤선은 성직자가 성도들 위에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직분을 받고 은사를 받았기에 그 일을 수행한다고 하는 기능주의적 직분관을 견지한다. 성직자들은 귀족이 아니고 단순히 “특수한 분량의 은사 때문에 직분을 받아서 그 은사로 사역하는 것뿐이다”라고 한다.

특별히 박윤선은 그의《헌법주석》에서 사역자들의 사역의 방법이 “사역적”(혹은 “수종적”, ministerial)이어야 하며, 또한 “선포적”(declarative)이어야 한다는 말을 대단히 많이 한다. 이 단어들이 최초로 나온 것은 제1장 원리의 제7항(치리권)에서이다.(“치리권은 치리회로나 그 택해 세운 대표자로 행사함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遵奉傳達하려는 것 뿐이다”) 이 말의 뜻은 교회의 치리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서 치리자나 치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만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박윤선은 이 말을 권위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해석한다. 즉, 목사의 모든 활동은 “사역적, 즉 수종적(ministerial)”이어야 한다는 조문을 해석하면서 목사가 권세를 가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일 자기에게 어떤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반역이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 목사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강대상을 높이고 복식을 화려하게 갖추며 박사학위를 선호하며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재정을 낭비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박윤선은 목사의 권한을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장로직을 든다. 목사직과 장로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단지 교훈권을 더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여 목사와 장로의 사역상의 동등(parity of ministry)을 강조한다. 목사와 장로가 계급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중세의 계급적 사제주의의 잔재로서 개혁자들이 이를 반대하였다고 옳게 지적한다. 말씀 전하는 목사와 그렇지 않은 장로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당시의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이를 좋게 생각하였을 리 없다. 목사와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계급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한국 교회에 대하여 직분의 동등성을 주장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3. 치리회간의 관계

박윤선의 교회 정치론에서 또한 가지 특이한 부분은 바로 각 치리회들간의 관계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치리회들이 상하 관계를 가지지 않고 대소관계만 가진다고 말한다. 그는 우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의 “최고 치리회”라는 말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에는 없는 표현이고 다만 “전국회(national assembly)”라는 말로 되어 있다 한다. 박윤선은 노회나 총회가 당회를 보조하고 봉사하는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기관으로서 당연히 더 작은 권세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장로교회의 정치제도의 정신에 의하면, 지역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그 대표자들을 통하여 교회의 보편적 하나됨을 이룬다는 지역교회 → 보편교회의 방향도 있지만, 동시에 보편교회의 통일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기에 보편교회 → 지역교회의 방향도 있어 이 둘이 균형을 이룬다.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관계는 지역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와 직원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지역교회의 완전한 독립과 교제의 연합체만을 인정하는 회중교회도 아니고, 상명하복의 교구제를 가진 감독교회도 아니다. 그런데 박윤선은 이 점에서도 회중교회적인 성향이 강하다. 치리권에 대하여 이것이 “사역적”(ministerial) 성격을 띤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개교회가 외부의 어떤 교권(敎權)에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모든 교회들을 지배하는 중앙집권정치(centralized church government)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한국의 장로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던 교권 정치에 대한 박윤선의 강한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지교회가 중심이고 보편교회는 단지 지교회들의 “연합체”라고 한다. “한 몸”이 아니라 연합이라고 한다. “지교회는 자주적(自主的) 형태로 교회 자격을 완비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질상으로 어떤 외부 교세의 간섭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면 지교회가 잘못된 교리를 가르칠 때 대회의 간섭을 안 받아도 된다는 말인가? 박윤선은 헌법에 나타난 문구들 가운데 치리회를 수직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든 것들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헌법의 문구들 중 “상회에 올려보냄”, “상회에서 내려보냄”, “그 지휘를 봉행함” 등은 치리회들을 상하 계급식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잘못된 것이라 한다. 박윤선의《헌법주석》에서 우리는 그가 대회(노회와 총회)의 횡포로부터 개교회를 지키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총회의 횡포를 제한하고 그 권한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총회의 권한을 과대평가하는 한국 교회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한다. 즉 “총회의 폐회는 파회(罷會)이다. ‘파회’(dissolve)란 뜻은 그 총회는 폐회되는 순간부터 없어진다는 것이다. 파회한 후 일 년 동안은 지교회의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총회의 권위로써 관여하지 못한다. 총회는 해마다 새로 조직하여 모이는 회합이다.” 노회를 설립?합병?분립?폐지할 때도 “총회는 독단을 피하고, 상대방 혹은 노회의 의견을 존중시하며, 돕는 태도로 처사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는 70년대 장로교단(합동측) 내에서 개교회의 분규에 노회나 총회가 개입하여, 혹은 분규를 일으켜, 총회 다수파의 이익을 따라 분규를 해결하려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4. 말씀만의 권위

박윤선의 이러한 교회정치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선 박윤선의 생각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박윤선의 의도는 단순하다. 그가 처음부터 견지해 온 바, 보이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도록 하는 것이다.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들과 치리회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단지 “사역적”(ministerial)이고 “선포적”(declarative)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들어 봉사하는 것이다. 목회자나 치리회가 사역적이 되지 못하면 바로 “계시의존사색을 전제로 하지 않게 될 위험이 있다.……교회의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에서 혹은 노회나 총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다스려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 박윤선이 보기에 그것은 바로 목사들의 성도들에 대한 권위주의적이며 독단적인 횡포요, 상급 치리회의 하급 치리회에 대한 횡포였다. 목사들이 외부적인 복식이나 강단을 높이는 데만 신경을 쓸 뿐, 말씀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자신이 복종하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반대하는 장로나 성도들을 권위주의로 누르고 이들을 향하여 저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노회나 총회가 개교회의 문제에 간섭하여 노회나 총회의 다수파에 유리한 쪽으로 ‘전권’(專權)을 휘둘렀다. 노회는 자파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격자가 없는 사람을 안수하기 일쑤였고, 문제가 생기면 무지역노회(無地域老會)로 도피한다.

박윤선은 이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모든 권한의 시작이 회중이라는 사상이 장로교 헌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주장하며, 모든 치리회의 근본이 당회라고 말하였다. 모든 권한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가는 것이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물론 장로교의 경우는 이 두 방향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박윤선은 이 점에서 명백히 한 쪽을 과도하게 강조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박윤선의 사상이 모든 권위가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부터 기인한 폐해를 시정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시계추가 너무 오른쪽으로 가 있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나치게 왼쪽을 강조해야 했던 것이다. 장로가 목사를 견제하고 성도들이 목사를 비판해야 한다고 하였고, 상급치리회가 하급치리회에 부당하게 간섭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사실 실제적인 제안들만을 본다면 그 동안 한국의 장로교회가 부당하게 권위주의적이었던 면을 시정할 수 있게 해 준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장로교회의 모든 권세의 원천이 교인에게 있다고 본 점이다. 과연 이것이 오늘날에도 타당한가? 물론 오늘날에도 전근대적인 그리고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을 억압하며 학대하는 교회가 다수이고, 각 장로교회의 총회들이 그 전횡을 그만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박윤선의《헌법주석》이 오늘날도 읽힐만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상황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박윤선의 이러한 헌법의 해석과 더불어, 그가 설립하고 봉직하던 합동신학원의 영향력 있는 교수들과 졸업생들의 영향으로, 그리고 80~90년대의 새로운 교회의 실험과 그 성공을 통하여 교회 내의 권위주의는 많이 극복되었다. 이들의 일치된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가장 큰 걸림돌인 권위주의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교회에서 권위주의 통치가 막을 내리게 된 데는 말씀에 대한 존중보다는 더 큰 사회적 배경이 있다. 민주주의와 다원화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정보화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제는 권위주의가 설자리가 없다.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를 피해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많은 성도가 모이면 그것이 곧 그 교회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시금석이 되었다. 큰 개교회들은 노회나 총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숫자 외에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상업주의와 포퓰리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하는 규범의 권위도 희석되었다. 다시 시계추를 오른쪽으로 돌려놓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판단된다. 이런 점에서 박윤선의《헌법주석》은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즉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는 교회에서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정신은 계승되어야 한다. 둘째,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아래로부터의 권세가 강조되어야 한다. 셋째, 그러면서도 권위를 무시하는 새로운 세대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가지기 위하여 목사와 치리회의 권위가 다시 서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이 바로 장로교의 정치원리의 영속적 가치인 것이다.

Ⅵ. 결 론

우리는 위에서 박윤선의 교회 개혁의 이상과 실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박윤선은 조직신학 교과서에 나타나는 교회의 특성들을 한국 교회에 적용시키려 하였다. 개혁주의 교회관이 역사 속에 구현될 때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겠구나 하는 전범(典範)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교회는 다수의 세력이나 교권주의에 의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법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 권징이 올바로 시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결해야 하고 동시에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며,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며, 배척을 받고 수난을 당해야 하는 길이다. 박윤선은 ‘기성교회’(established church)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섹트’(sect)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좁은 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사고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啓示依存思索’]이며, ‘나다나엘’ 같은 진실되고 뜨거운 기도이며, (초역사적, Urgeschichte 사건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 살아 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 나타나야 하겠다는 열심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박윤선 시대의 교회보다 나아졌는가? 강대상의 높이는 낮아지고, 가짜 박사는 줄어들고, 평신도의 중요성이 발굴되고, 노회?총회는 다소 세련되어지고, 예배는 갱신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권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교회의 목사들은 숫자놀음의 승리주의에 도취되었고, 실용주의적인 교회 성장의 방법들이 가르쳐지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그 방법을 따라가려고 발버둥친다. 목사들이 주도권을 잡은 교회와 대회를 견제하기 위하여 장로회?안수집사회가 만들어지고, 목사들은 장로들의 세력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한다. 지방주의는 고착되어 더 이상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신학교들은 교권주의에 휘둘리지 않으면 경제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신학자들은 이들로부터 절대 초연하지 못하다. 박윤선의 후예들(고신?총신?합신)은 그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꾸밀” 뿐(마 23 : 29), 그의 정신을 본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박윤선은 죽었으나 오늘 살아 있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하고 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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