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스크랩] 폴워셔의 열가지 기소장(1)

baromi 2009. 6. 2. 21:04

폴 워셔의 열가지 기소장
                              - 한글 번역문 1

     열가지에 대한 고발

주님께 기도로 나아갑시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은 펼쳐진 책과 같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임재하심과 당신의 눈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숨길수 있습니까? 가장 영리한 사람들의 행동들도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납니다. 당신의 전지하심은 한계가 없으며, 은혜가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약한 자들에게 부어지며 당신의 영광에 풍성한,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은혜가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당신되심과 당신의 하신 모든 일들을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아래에 당신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당신은 왕이시며 다른 왕은 없습니다. 당신은 구원자시며 당신은 그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오늘밤 당신은 나를 아시며 내가 커다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 당신께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 형제들 중에 가장 미천한 자를 부르셨고, 당신의 은혜로 때로는 더 작은 자가 더 큰 자를 가르친다는 사실외에 내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언제나 나의 경우이며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

아버지, 오늘밤 우리를 도와주소서. 말의 유창함이나 탁월한 지성 따위는 사라지게 하소서. 진리가 앞서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의 상태가 더 영광스럽게 되도록 내가 변화하게 하소서. 나 자신과 여기에서 듣는 자들을 위해 은혜위에 은혜와 자비위에 자비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도와주소서, 오 하나님, 그러면 우리가 도움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안에 있는 그 도우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랑할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저녁 내가 여기에 선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 서서 부흥, 개혁, 하나님의 백성과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기소장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망의 기소장입니다.

이 일련의 모임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의 커다란 결론, 커다란 부담감이 내 마음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우리가 만든 모든 문제들을 다 청소해 주시기만을 단순히 기대할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원칙이 우리 모두 가운데서 위반되고 있으면서 여분의 성경적 계시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익합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악마나 악한 사람들이 그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주어졌고 우리가 단순히 우리 눈에 옳은 것들을 행하면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때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아주 세부적인 설명들이 주어진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세를 위해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주어진 것일까요? 제 생각에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대해 특정하시고 우리가 그중 가장 작은 세부사항이라도 빼서 무시해도 된다고 추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연약한 사람이며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기소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관대 다른 이를 기소할수 있겠습니까. 또한 감히 이것을 하나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하겠습니다. 내가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경과 비교해 볼때, 변화해야만 하는 분명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틴 루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텐부르그의 문에 못박힌 95개조의 선언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에 지워진 부담이며 나는 이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금 말하겠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말들은 일부 여러분들을 화나게 할것입니다, 그러나 경고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건방지다고 비난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전달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싫을수도 있을것입니다. 나는 건방진 적도 많이 있었고 진리를 잘못된 방법으로 전달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변명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잘못된 전달자를 통해서든 아니든 간에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여러분이 듣는 것을 기뻐하며 “아멘” 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어떤 영적 경지에 도달했다면, 내 형제가 했던 이말을 하겠습니다. “네가 가진 것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받은 것이라면 왜 자랑하는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젊은 성직자라면, 이 진리들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사랑없이 여러분의 교회에 휘두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의 제안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개혁이라도 하기 전에 여러분의 무릎에 피가 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여러해동안 섬겨오신 더 나이든 성직자라면 제발 거만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늙고 어리석은 왕이 그의 하인들 중 가장 약한 사람으로부터 배울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오늘이 당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바꿀 용기를 가지십시오. 적어도 당신이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영광중에 들어갈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드신 분들께 경고로써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자, 내말을 잘 들으십시오. 나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방법에 대한 디모데전서 5장의 훈계를 알고 있고 그 방법으로 여러분께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안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고 있고, 이 나라 뿐만 아니라 내가 다녀왔던 유럽과 남미 그리고 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나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잘려져 나왔던 반석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펄젼과 휘트필드를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래벤힐,마틴 로이드-존스, 토저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하고 놀라운 운동입니다. 단지 인기있는 대중매체와 저명한 기독잡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15년 전에는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각성을 내 사역이 아닌 것을 통해 보게 될거라고는 꿈꾸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곳에 다니면서 내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을 봅니다.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를 위해 부르짖으며 “변화해야 한다” 하고 천명의 젊은이들이 선포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든, 전도에 대한 미국으로부터 온 심리학과 각종 얄팍한 기술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 울면서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 그들의 교회를 전도하는 남미에서든, 내가 때때로 새벽 두세시까지 앉아, 오늘날 그 누가 상상할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두건을 쓴 젊은 흑인들과 신학을 논하곤 하는 미국 내부의 어느 도시에서든 간에 말입니다. 각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부드럽게 말하고자 합니다. 40세 이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매번 각성을 가져왔었던 옛 사람들과 옛날 방식들과 진리들에게로 눈을 돌리는 많은 젊은이들, 그 대부분은 아주 어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우리가 발견한거요. 웨일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이것 좀 보세요, 저것 좀 보세요, 그리고 이 가르침을 좀 보세요. 이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외면하거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지난 25년간 설교해온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들이 25년간 설교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부흥 가운데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네가 기도하든 안하든 올것이다.”

나는 이중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압니다. 내가 전 세계의 남녀와 젊은이들이 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때에, 내게 그것은 부흥의 첫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열매들을 주신 분께서 모든 추수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제 10 가지의 고발들, 내가 믿기로 우리가 변해야 할 것들을 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첫번째 고발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특히 나의 교파에서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디모데후서 3:15 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지난 몇십년간 성경의 영감에 관한 강력한 전투가 있어왔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전투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더 자유주의적인 교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위한 전투에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함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은 전투의 반밖에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오류가 없는가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려면, 성경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모든 사회과학과 문화연구를 들여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 의견에는, 사회과학이 우리들 대다수가 보지조차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와 전도와 선교학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서 이제 더이상 우리가 하는 일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교회에 주요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몇년전에, 여러해 전에, 내가 신학교에 다닐때 한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발자국들을 그리기 시작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칠판을 가로질러 간후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단지 이말만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교의 복도들을 누비고 있다. 주의하라. 이 발자국 소리가 사도 바울이나 그와 함께 하였던 영감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분명히 들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 생활의 극히 작은 어떤 영역들은 다룰수 있지만 일이 정말 힘들어지면 사회적 전문가들에게로 갈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거짓말입니다. 여기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모든 현대 사회과학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왜 전도와 선교와 소위 말하는 교회 성장이 고고학자나 사회학자 그리고 모든 문화의 영향을 받는 월스트리트의 학생들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됩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선교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 활동과 교회 활동,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성경을 펴고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 하나님?’ 이라는 한 가지 질문만 하는 신학자과 성경학자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교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를 보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찾는 자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찾는 자는 오직 한분이라는 것을 교회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며,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순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된다 할지라도 그분과 그의 영광에 순응하십시오. 우리는 제국을 건설하라고 부르심을 받은게 아닙니다.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별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잠시 이사야 8장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19절 – 역자주). 이것은 사회과학과 교회성장 도사들과 그외의 것들에 대한 완벽한, 아주 완벽한 정의, 또는 적어도 삽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삼사년마다 한번씩 그들의 모든 이론들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계도할 것인가부터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장시킬수 있을까 까지입니다. 삼사년마다 무엇이 여러분의 교회를 세상이 볼때 최고로 만들수 있는지에 관한 다른 유행이 찾아옵니다.

최근에 최고 또는 가장 잘 알려진 교회 성장 전문가가 자신의 모든 이론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과 눈물로 무릎을 꿇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명료한 말을 주지 않습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8:19 – 역자주)

교인으로서,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나가서 성령께서 살리신 사람들을 위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상담을 해야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두번째 고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때때로 사람들이 이렇게 요청합니다. “폴 형제님, 와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일주일간 시리즈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 경우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글쎄요, 형제님,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셨나요?”

그는 말합니다, “잘 생각해 봤냐니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그건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젠데요, 당신의 교회에 가서 가르치라고 하는 그 주제가요...”

그들은 말합니다. “ 논쟁의 여지가 있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인데요. 우리는 크리스챤들이잖아요. 이것은 교회이구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말합니다. “친애하는 목사님,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최고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당신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할때, 당신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교회 구성원들 중 일부가 일어나서 이런말을 할텐데요. ‘그건 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마음에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 있고 그들은 자신이 만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시편 50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을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1, 22절 – 역자주)

자,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속성이나 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는 높은 상아탑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모든 기독서점들이 자기 도움에 관한 책들과 ‘그것을 하는 다섯 가지 방법’과 ‘독실해지는 여섯가지 방법’과 ‘넘어지지 않는 열가지’에 대한 책들로 가득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들이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걸어가기 위해 모든 종류의 사소한 작은 육신적 장치들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조차 죄악이 만연합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집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목사로서 일년내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것이 언제입니까? 미국에서 일주일 내내 행해지고 있는 가르침 중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관계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흐름에 따라, 다른 사람들 모두를 그냥 따라가다가 어느날 이런 소리를 듣고 갑자기 “나는 누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라고 말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의 사람들인 것이 하나도 이상할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여러분이 영광의 문들을 지나갈때 시작되지 않습니다. 영생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진주 문을 여닫고 금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정말로 신나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원 속에서 미치지 않을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영광이 무한하신 분이 계시고 여러분은 그분을 좇아 가는데 영원의 영원을 보내게 될것이며 그래도 결코 그분의 산기슭 주변에조차 여러분의 팔이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싶고 하기 원하는 많은 여러 일들과 모든 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을 꺼내십시오, 이 책(성경 – 역자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공부하십시오.

일요일 아침,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차라리 일요일 아침이 없는 것이 더 낫겠다고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미국에서 일주일 전체 가운데 우상숭배가 가장 심하게 행해지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 적어도 대다수의 군중들은 – 그들 자신의 육신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만든 하나님, 사탄적 장치들과 세상적 지성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은 여호와보다는 산타클로스를 더 닮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세번째 고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볼때, 이것은 체계적 신학은 아닙니다만, 성경중에서 어떤 책이 체계적인 신학책이라고 말할수 있다면 로마서가 가장 근접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 책의 처음 세 장을 한가지만을 하려고 썼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정죄아래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그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결말도 아니고 최종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은 아주 타락한 존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데려가려면 그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모든 육신의 소망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가 21살때, 설교하도록 막 부르심을 받았을 때였는데, 나는 성직자들에게 반값으로 양복을 파는 어느 오래된 가게에 갔습니다. 그들은 50, 60년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로 들어가서, 캔터키 파두카에서, 양복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습니다. 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습니다. 거기에는 한 늙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가 걸어 들어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구만, 그렇지?”

나는 말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는 아주 늙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건물 바로 바깥에 있는 저 건물이 보이나?”

나는 말했습니다. “네.”

그가 말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설교했었지.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영혼들이 구원받곤 했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요즘의 전도와 같은게 없었어. 우리는 이삼주 동안 설교를 하고서 죄인들에게 영접하도록 초대하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실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하기만 했지.”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를 어떻게 아셨나요?”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 글쎄, 그냥 예를 하나 들어주지. 수십년 전에 내가 이 가게에 양복을 사러 왔었다네. 누가 나한테 30불을 주면서 말하더군, ‘목사님, 내일 가서 양복 한벌을 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문으로 들어왔을때 가게를 맡고 있던 젊은 점원이 돌아서 나를 보았고 나를 봤을때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쳤다네, ‘누가 나 같이 악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임했다는 것을 알았지.”

지금 우리는 그냥 사람들에게 가서 얘기하고, 세가지의 입문적인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할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 우리가 우리 입으로 토해 놓은 종교적 삶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두번 다시는 복음에 마음을 열지 않을, 두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레오나르드 레벤힐이 즐겨하던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많은 장소에서 오직 한번만 설교하는지 이해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상적으로 다룰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 역자주)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영원보다는 지금 가장 좋은 삶을 주는데 더 신경쓰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합니다. 나는 이것을 말할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사역과 싸우게 될까봐 그들의 사역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사람이 인간의 죄를 다루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령께서 하십니다. 오셔서 죄의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특정하게,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면, 성령은 여러분 주변에 절대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레미야 시대의 목자들처럼 우리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가볍게 다룬다면 우리는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렙6:14 – 역자주)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낼까봐, 그 사람이 슬퍼질까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부인하는 의사와 같이 우리는속이는 자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폴 형제,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우리는 요한과 찰스 웨슬리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문화와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마음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져 있어요. 우리는 자존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도 약합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본적 있으십니까? 그들이 설교했던 것들은 그들의 문화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설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짐승의 사나움을 가지고 대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의지가 박약하고 자존감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와 이 세상은 이 혐오스러운 자존감의 병폐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때 우리는 또한 도둑들입니다. 우리는 도둑들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어느 우주 거인이 바구니를 타고 와서 별들을 다 따서 담아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져갔나요?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여러분은 그것들을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서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게 되면 별들이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급진적 타락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거부할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영광은 우리의 타락성의 바탕위에 놓여졌을때 가장 광대해지기 때문입니다 .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여인은 많이 사랑하였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알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 알았습니다. (눅7:47 – 역자주)

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로인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훈계를 따를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강탈하였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고후10:17 –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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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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