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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이승구

baromi 2009. 5. 8. 09:33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이승구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교수)


헤르만 리덜보스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과 지면 하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리는 그의 신학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이해를 잘 정리한 것이고, 바울의 사상을 잘 정리하는 중 교회의 의미를 잘 밝혔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가운데서 우리들에게서 그 동안 간과된 몇 측면을 지적하고, 그의 교회 개념을 살핀 후, 천국과 교회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하도록 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정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승된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서에서 주로 표현된 대로 하늘 나라[天國]의 도래이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잘 알려져서 일반화된 (그러나 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리덜보스의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핵심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재로 진행하여 가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리덜보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들만을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天國]에 대한 이해를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한 곳에서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관한 일반적 무시간적 진술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언젠가 보게될 그것의 구속사적 실현의 문제(its redemptive-historical effectuation)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개념은 주로 하나님의 왕적 자기 주장의 개념, 즉 당신님의 왕적 엄위와 능력과 옳음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이 절대적으로 신중심적인 개념을 항상 유념해야만 한다(Coming, 19).


이 구절은 리덜보스의 천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이 세상에서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리덜보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즉, 그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막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이 땅에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국은 구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며(Coming, 20),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그 나라를 "구속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Coming, 55).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신적 영광의 증시, 즉 이 땅에 그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권세가 다시 주장되고 유지되는 것이다"(Coming, 20f.)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시작되는 구속과 그로 말미암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Coming, 23). 그러므로 그 나라는 구속사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이미 임하여온 "천국의 도래는 종말 역사의 큰 드라마의 초기 도입 단계(the ini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로 이해된다(Coming, 27). 그리고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천국의 관계성을 "성취와 극치"(fulfillment and consummation)라는 용어로 정리한다(Coming, 516-23).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었고, 성취되었다(fulfillment).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성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Coming, 520).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천국이 온 것이다"(Coming, 95). 그러므로 "그 안에서 온 것은 사물들의 마지막(the end of things)이다"(Coming, 526).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리덜보스의 큰 공헌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ԨՅՏ׷)와 '아들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ՉՏ׷)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 메시아 왕국)에 대한 지나친 구별을 피하고, 그런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주해적으로 잘 비판하면서 본질상 왜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인지를 주해적으로 잘 밝혀 놓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고 승천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가 시작되었고, 종국의 투쟁 후에 아들이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논의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를 잘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은 마치 성자와 성부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논의하고 있다(Coming, 96). 더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한 말씀을 순전히 예기적(proleptically)만 생각하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하지 못함을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왕국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 즉 그의 성육신에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Coming, 96), "복음서는 말로나 사상으로나 쿨만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Coming, 97)고 확언한다. 왜냐 하면 이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덜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그 때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97).

그러나 그 마지막의 극치(consummation)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인자가 큰 권능으로 임할" 때에야 극치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그 극치는 성취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미 시작하신 그의 성취의 사역을 마치시는 일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Coming, 518).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온 천국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덜보스는 "극치라는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Coming, 45).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 아니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성취가 이미 왔다(the fulfillment has come)는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것(Coming, 520) 또한 그의 큰 강조점이다. 예수님의 선포 가운데서는 "성취의 요소가 기대의 요소만큼이나 놀랍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Coming, 520). "[예수] 안에서 선지자들의 미래가 현존하는 성취(the present fulfillment)가 되었다"(Coming, 55).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선포인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천국이 들어오는 것"(the entry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is world, Coming, 334)이 리덜보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 안에 있다(being in the Kingdom)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데, 그 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성취에 참여한다는 것"(the participation in the fulfillment of salvation that began with Christ's coming)이다(Coming, 3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잠정적으로(provisionally) 실현된 성취의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Coming, 520).

둘째로, 따라서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의 의미와 그 선포를 강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리덜보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천국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 땅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Coming, 334). 그러므로 리덜보스의 이해에 의하면, "천국 복음의 선포는 한편으로는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음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 선포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소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의 사역,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185).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의 선포와 수납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복음의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 도래의 서언적(preliminary)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도 도래한 천국의 '이미'와 '아직 아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이 천국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옳게 지적한다(Coming, 186). 그 한 부분은 복음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명령으로 표현되는 요구와 관련된 것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깨어 있고 신실해야만" 한다(Coming, 518). 이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정 짖는 것이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의 태도가 이 말 속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큰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신적 사역 안의 한 단계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Coming, 520).


그렇다면 리덜보스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왜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은 용어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리덜보스는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ՓײՍ ԷՑՉՓՔٍ ՅסՍՁՉ)는 말은," 여러 주석가들의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바로 후부터 부활 전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는, 게르할더스 보스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은 부활의 궁극적 소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죽은 후의 잠정적인 지복의 상태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부활 이전에 이미 합당한 자로 여겨진 자들에게는 "복된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 of bliss)가 있음이 약속되었다고 한다. 리덜보스는 특히 눅 23:42, 43과 눅 16:19-31에 근거하여 이 복된 중간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 이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부활이 가진 것과 같이 온전한 구속적 의의(the full redemptive significance)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히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영광스러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각 할 수 없는 양태의 인간 존재이다. 물론 신자의 중간 상태는 주와 함께 있는 상태(빌 1:23)이고, "더 이상 지상적인 몸 안에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불완전과 죄, 그리고 이 몸 안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리덜보스는 이를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진 존재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는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롬 8:35, 38ff.). 그러나 그 상태도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고, 잠정적 축복의 상태라고 요약하고 있는 안토니 후크마의 요약은 리덜보스의 견해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논의하는 리덜보스는 한번도 성도의 이 중간 상태를 지칭해서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는 일이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2. 교회 이해


리덜보스는 교회를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한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oming, 343). 리덜보스는 이런 의미의 교회 개념과 용어가 이미 예수님 자신에게서 분명히 기원하였으며, 이 용어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의 해당 부분이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에 대해서 강한 논증을 한다(Coming, 334-42, 347-48, 367).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에수님께서 그의 교회와 그의 사후에 있게될 교회의 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Coming, 369).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해 정교하게 문자화된 계획안은 아니어도, 교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church)이다(Coming, 367). 따라서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의 범주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린다(Coming, 347). 그리하여 리덜보스는 교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카리스마틱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경험적인 실재(empirical one)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교회 조직이 시작되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복음이 선포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Coming, 342, 367).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은 직임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Coming, 367).

리덜보스는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이 교회 개념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하고, 다음 몇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1) 교회(ecclesia) 개념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와 함께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과 연관시키며 설명하는 카텐부쉬(F. Kattenbusch). 카텐부쉬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와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Coming, 339-40, 347), 카텐부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로부터 교회 개념이 기원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는 이 백성이 복음서에서 한번도 그와 같이 불려진 일이 없으므로 특히 다니엘 7:47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의 교회 개념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Coming, 347f.).

(2) 기본적으로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그러나 그보다 더 폭넓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생각하면서 '교회(ecclesia)를 '남은 자'들에 대한 (이사야 10:22ff.와 같은) 구약의 자료들의 연속성에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뢰게(G. Gloege). 글뢰게의 주장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구체적인 해석이 실제적으로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할만한 복음서 내의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복음서에서 그 어디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 '남은 자'에게 집중하는 글뢰게의 이 견해는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oming, 348). 그 대표적인 반응의 하나로 리덜보스는 글뢰게의 해석을 "환상적인 구성"(fantastic construction)이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비판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글뢰게 처럼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복음서의 증거가 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동의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회 개념은 단순히 다니엘서나 남은 자 개념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구약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 백성 개념이 신약 교회 개념의 토대라고 보는 외프케(A. Oepke). 리덜보스는 복음서에 구체적인 설명의 근거가 없으므로, 글뢰게와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불필요하므로, 일반적인 외프케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한다(Coming, 348). 그런 구체적인 설명보다 하나님 백성 개념이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포에 훨씬 더 일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아람어적 논의를 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였던 '콰할'(kãhãl)이나 '케할라'(kehãl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구체화된 회당 모임(synagogue assembly)의 의미로 사용되던 '케니쉬타'(kenischta)를 사용하셨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나타내는 확신 가운데 사는 특별한 회당 모임으로 구체화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쉬미트(K. L. Schmidt). 이는 외프케의 견해를 좀더 특수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쉬미트의 일반적 작업에는 동의하고 높이 사지만(Coming, 341), 이런 구체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특히 Coming, 356). 그는 쉬미트와 카텐부쉬의 '케니쉬타'를 말하는 견해와 그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콰할'이나 '케할라' 어떤 것이 사용되었던지 기본적인 개념은 신적 언약 백성의 모임(the gethering together of the people of the divine covenant)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Coming, 354). 쉬미트 등은 이 '에클레시아'가 구약적 '콰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Coming, 392, n. 66). 즉, 그는 교회(ekklesia)를 유대 공동체 전체 내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구별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에 관한 한, 그런 구별된 공동체가 실제로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쉬미트가 호소하는 언어학적 용례가 분명히 수립되지 않으며, 에클레시아가 '케니쉬타'이고 그것이 특별한 회당이라는 구체적 설명의 사실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Coming, 356). 또한 교회는 한번도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수립된 회당 공동체로 생각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옛 백성을 대치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대치했던 것이다(Coming, 357). 이런 논의에 근거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18의 '에클레시아'는 70인경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는 구약의 '콰할'의 유비를 따라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57).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 백성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을 제시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해가 다음 몇 가지 생각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메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는 항상 그 백성을 가지게끔 되어 있어서, "백성 없는 메시아 개념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며, 심지어 불트만도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특히, 유대교의 종말론에서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있을 것임이 수납되고 있음을 볼 때, 그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제시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에 대한 선언에서 "내" 교회라는 대명사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메시아가 그의 은혜를 주고, 다스리시는 그 백성"을 뜻하는 "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Coming, 348). 이 말씀에 배후에는 "그들을 위해 그가 행동하시고, 그들을 책임지시며, 그들과 그가 연합하신" 메시아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9). 그들을 위해 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마 10:32, 33),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마 12:50; 25:40). 그가 이미 오신 인자시라면 그가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은 아주 자명하다는 것이다(Coming, 349).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신의 활동, 즉 열매를 찾으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제자들의 사역에도 적용된다고 한다(Coming, 350). 리덜보스는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해 사람들을 얻고 모으는 것과 관련된 어떤 특별한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해 약속하셨다"고 한다(Coming, 350).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이다(막 1:17; 마 4:19; 눅 5:10). 또한 오병이어 사건 같은 상황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제자들의 미래 활동을 지칭하는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Coming, 350). 즉, "미래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를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Coming, 35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이 땅 위에서 그의 메시아적 종말론적 교회를 모으셨다"(Coming, 351).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백성, 즉 메시아의 백성이다"(Coming, 351).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선포될 때, 그의 교회는 그 자체를 증시하는 것이다(Coming, 351).

둘째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됨에서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형성한다(new formation of God's people)는 개념에도 교회 개념이 함의되어 있다고 본다(Coming, 351).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세우는데서 메시아를 통한 그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됨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Coming, 352).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 안에 있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주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리덜보스는 해석한다(Coming, 352). 이들은 "천국 선포에 의해 회개하여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Coming, 353). 리덜보스는 이와 제자들을 양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연관시킨다(눅 12:32; 막 14:27)(Coming, 353). 또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을 때도 그들은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의 선취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가 처음부터 구현된 것이다"고도 말한다(Coming, 353). 결국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기본적인 모티브도 교회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덜보스는 "내 교회"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측면과 언약적 측면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Coming, 354).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가 오셨으므로 천국의 은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언젠가 인자의 강림 때에 온전한 상태를 받게 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54).

이런 메시아의 교회(ekklesia)를 예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6:18), 후에 실제로 세우셨다. 이 때 "세운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밭, 농경지,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building)로 이해하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Coming, 357).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나 메시아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연합된 사람들의 모이게 됨"이라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셨는가? 이점에 관한 리덜보스의 해석은 독특하다. 그는 이에 대해 제기된 기존의 해석 두 가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세우심은 (1)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토대로 성찬을 제정하실 것이란 뜻도 아니고, (2)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서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시작되는 베드로(의 사역) 위에 기독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Coming, 358).

이렇게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에게로 선택하시고, 언약과 약속들의 세우셔서 당신님을 매신 역사적 하나님 백성의 연속이며 그 성취"라고 이해되고 있고[교회의 구속사적 성격], 바울은 이를 "독특하게" (typically)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실재적 존재와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고[교회의 기독론적 측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기독론적 존재 방식] 리덜보스는 본다. 리덜보스는 바울 이전부터 "콰할"의 의미로 사용되고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로 세례 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에 "이미 기독 교회 안에서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회중인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되었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을 때 옛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과 질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적용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성되었을까? 어떤 이들은 희랍 세계에서 국가나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흔히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사회적, 실천적 해석]. 그러나 리덜보스는 다른 대부분의 해석자들에게 동의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그 지체들 간의 관계와 교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 자신의 교제의 성격을 규정 짖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이해로 리덜보스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면서 논의한다.

(1) 개신교적 표상적 해석

이 해석에 의하면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내주하시며 그의 영으로 살아 있게 하고 채우시는 교제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는 불가시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2) 전통적 천주교의 표상적 이해

전통적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교회의 연합의 결과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특히 성찬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존재의 연장(extension)을 발견하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된 존재 양상을 집합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비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에 연합하지만, 교회 그 자체는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로 하시는 이들 전체로서 몸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덜보스는 기존의 해석들을 자신의 성경 주해와 잘 대조시키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이해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점이 우리가 다음절에서 고찰하고자하는 이 논문의 핵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고찰에로 나아가기로 하자.


3.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리덜보스는, 그의 교회 이해를 다룬 윗절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과거의 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16:18ff.와 마태복음 18:15ff.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대개 그들은 천국의 일반적 성격이 교회 개념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춘 신자들의 가시적인 모임인 교회는 전혀 "개인을 구별하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정향을 지닌 '내면적 종교'의 선지자인" 예수님의 관심 영역밖에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Coming, 335). 자유주의 신학 일반이 그렇게 하였고, 바이스와 슈바이쳐 중심의 종말론 학파도 예수께서 예언한 인자의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자 나타난 것이 교회라는 해석을 하였다고 지적한다(Coming, 336).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언급된 예수님에 의한 교회의 수립은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지정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42). 이렇게 이해 할 때 천국 개념도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리덜보스는 과연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천국에 대한 정의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더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리덜보스는 이 논의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이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더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의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고 부름을 입어 왕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이 주어진 이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61).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왕국 개념이 선행하는 것이다. 왕국은 전포괄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전 역사의 절정을 함의하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반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덕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드라마 가운데서 하나님 편에 있게 된 백성이다(Coming, 354). 이런 이해 가운데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다.

그는 신약의 용례에 충실하면서 왕국(basileia) 개념이 아주 엄밀하게 사용된 예와 파생적이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 예를 구별하여 논의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있지도 않은 모순을 그에게 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덜보스는 먼저 신약의 용례를 살펴 볼 때 엄밀하게는 왕국(basileia)이 한번도 교회, 즉 복음 선포를 통해 한 공동체에 연합된 이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땅에서의 잠정적 구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형태와 조직으로 구현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Coming, 343).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복음서는 왕국이라는 말이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 어떤 구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Coming, 347). 또한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교회와 왕국의 동일시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Coming, 360).

그러나 리덜보스는 또한 왕국(basileia) 개념이 느슨하게 사용된 예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왕국(basileia) 개념이 사용된 예들, 즉 "경계선상의 예들"이 있다고 말하여 질 수도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서의 왕국(basileia) 개념이 언어적 사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Coming, 343). 따라서 왕국(basileia)이라는 말의 파생적 의미에서는 이 말이 교회, 즉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수납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그 타당성을 얻게된 영역이나 공동체"(Coming, 344) 또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모임"(organized assembly of the faithful, Coming, 344)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도 있다고 시인한다(Coming, 344). 그리고 이런 파생적인 의미로 왕국이 교회란 뜻으로 사용된 것은 공관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공관복음서 밖에서는 한 번도 교회가 왕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Coming, 344).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사용된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약속되고 이미 주어진 모든 은혜와 보화 안에서, 교회의 구속적이고 구원적 의미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Coming, 355). 교회는 "왕국의 은사들과 권세가 주어지고 받아들여진 곳"이기 때문이다(Coming, 356). 이런 뜻에서 리덜보스는 천국은 교회 안에서 드러난다(the kingdom is revealed in the ekklesia)라고도 말한다(Coming, 355). 이런 뜻에서는 "왕국과 교회가 동일하다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Coming, 355).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천국이 교회를 통해서 증시 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는 천국이 아니면서, 또 한번도 천국과 동일시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진전과 미래에 둘러 싸여져 있는 것이다(Coming, 356). 결국 리덜보스는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왕국의 계시의 열매이다. 그리고 역으로 왕국은 교회가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에게 복속해 들어가지 않으면서 서로 불가분리적인 것이다"(Coming, 355). 이런 의미에서는 "왕국으로부터의 축출은 교회로부터의 축출을 함의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Coming, 362)." 교회는 천국의 도구(the instruments of the basileia)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사역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Coming, 356).

그러므로 천국이 선행하고 그 천국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있으면서 그 교회는 천국과 관련된 일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리덜보스는 특히 마태복음 18:17과 연관해서 언급된 "매고 푸는 권세"가 지교회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는 지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법적 권세"(judicial authority)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Coming, 361f.). 특히 사도의 직임은 12제자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만, 매고 푸는 권세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리덜보스는 옳게 주장한다(Coming, 363). 오히려 이 매고 푸는 권세는 베드로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한다(Coming, 364, 365); "열쇠들의 권세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게 그리고 그 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5:2-5과 같은 후기의 구절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듯이 말이다"(Coming, 365). 그러나 이 큰 권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행할 때에만 현존하는 것이니, 그렇게 행하는 그들 가운데 "내가 있으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Coming, 366). 그러므로 이는 리덜보스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렇게 모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과 관련하여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Coming, 366). 그들의 판단에 대한 신적 재가는 그들이 그의 계시된 뜻에 따르는지 그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이를 마태복음 7:22과 연관시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Coming, 366). 교회가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천국과 교회에 관한 리덜보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둘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가운데서 조금 비판적으로 고찰 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마 4:19, cf. 눅 5:10)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서,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 마 14:16)라고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의 미래 활동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제자들이 후에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들을 전하고, 그를 대신해서 그 은사들을 나누어주리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 가운데 그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의 미래 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무력함에만 잠겨 있지 말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평이하게 해석하든지 (그래서 후에 이 사건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고 보든지), 아니면 제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더 절실히 깨닫도록 하며, 주님의 어떠하심과 사역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꾸짖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마태복음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리덜보스는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세움은 결국 베드로의 사역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Coming, 358), 이에 대해서 다른 논의의 가능성이 강하게 있을 수 있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덜보스는 이런 해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Coming, 358).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여기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이나 그에게 계시된 진리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개신교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리덜보스의 논의의 과정에도 상당한 추측이 있음은 "베드로 위에"를 "베드로의 (사역) 위에"로 해석적으로 제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Coming, 358). 물론 그리스도께서 '반석"(ՐִՔՑՁ)이라는 말로 분명히 베드로(԰ִՔՑՏՒ)를 의미하신 것이라는 리덜보스의 지적과 그 이유로 제시하는 페트라(ՐִՔՑՁ)와 페트로스(԰ִՔՑՏՒ)는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Coming, 359) 옳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각주에서 인용하고 있는 떼오도르 쨘(Theodore Zahn)의 생각, 즉 이 두 단어는 모두 예수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신 아람어 '게바'(ԪՇԶ֥Ւ)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의가 매우 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 또는 그의 메시아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베드로의 인격이나 사역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리덜보스는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기능에 근거하여 베드로가 그런 사도가 될 것이며, 베드로의 미래 사도로서의 활동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oming, 359).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상황 가운데서는 신앙 고백을 한 이가 베드로라는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며, 베드로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Coming, 359). 그러면서도 그는 이 문맥에서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representative)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말도 한다(Coming, 363). 이와 연관해서 그는 사도들 전체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rock-foundation) 제시하는 다른 본문들을 언급하기도 하고(엡 2:20; 계 21:14), 다른 사도들도 교회의 토대로서 그의 중요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Coming, 363, 367). 이 뒷부분의 논의는 상당히 신약의 가르침 전반에 기초한 논의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의 가르침에 좀더 부합하는 해석은 여기서 베드로를 너무 개인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리덜보스는 본문에 충실하려고 하다가 베드로 개인과 그의 미래 사도직에 집착하는, 따라서 뒷부분의 논의에서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일반화하기 때문에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을 제시했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을 때, 주께서 "내가 네 위에 ......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볼 때에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에게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 전체(the whole group)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도 간혹 그것을 시사하는 고백자로서의 베드로(Peter the Confessor) 위에 세우신다는 뜻이라고 보는 해석이 좀더 자연스러우나, 이 때도 역시 우리는 베드로 개인적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개신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베드로가 대표로 고백한 그 바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나는 "매고 푸는 권세"와 18:17의 어귀를 같은 어귀이므로 거의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마태복음 16:19을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은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주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교회 내에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18장에서는 권징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덜보스가 매고 푼다는 말을 비록 랍비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말은 아니지만, "권위를 가지고 결정한다"(decide with authority)는 말에 대한 유대교 랍비적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Coming, 360). 이런 의미에서 "맨다"(to bind)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unlawful) 선언하는 것이며, "푼다"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는 것이라고(lawful) 선언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는 합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거나 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도 옳다고 생각된다(Coming, 360).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그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잘 생각하듯이, 마태복음 16:19에서는 주로 천국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은 천국에 들어오고 축출됨에 대한 선언이, 마태복음 18:17에서는 교회의 치리로 말미암은 어떤 결과가 시사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셋째로, 중간 상태에 대한 입장을 논하면서 전반적으로 리덜보스는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게 소개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서 별 논의 없이 죽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말로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견해로 제시하는 죽음 이후에 성도는 하나님께 특별히 가깝게 있는 것(proximity to God)이며, 쉬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존재가 있고, 이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에 대해 별 논의 없이 그것도 죽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 없음을 지지하는 견해라는 시사를 어느 정도는 주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쿨만의 바르지 못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인 리덜보스가 왜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리덜보스가 빌립보서 1장과 고린도후서 5 장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런 의혹은 좀더 증폭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후의 성도들의 상태가 그 존재가 계속되며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서도, 그것이 영혼이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인간의 몸과 영혼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좀더 단일론적인 이해를 그가 가지고 있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런 단일론에 가까운 입장을 지닌 분들 일반과의 논쟁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는 대개 영육단일체적 상태로 존재함을 강조해야 하지만, 이를 강조하는 이도 죽음에서 잠정적으로(temporarily) 이 통일성이 깨어질 수 있고 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이 같이 논의되어서 우리들의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에 좀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서도 그것을 좀더 성경적으로 접근시켜 나가는 작업을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진전이 우리의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한다.

출처 : 일사사공공공
글쓴이 : 바람길따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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