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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칼바르트의 Urgeschichte(원역사)에 대한 글

baromi 2009. 4. 20. 20:46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초기 바르트의 이해-- 󰡔로마서 주석󰡕 제2판을 중심으로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교수)

계시와 역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이 논문에서 초기 바르트에게 물으려고 하는 질문이다. 초기 바르트라고 할 때 나는 주로 󰡔로마서 주석󰡕 제2판에서의 바르트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시기 전체의 저작이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효과적인 논의와 깊이 있는 분석을 위해서 나는 그의 󰡔로마서 주석󰡕 제2판을 중심으로 하여 초기 바르트가 계시와 역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논의하려고 한다. 이 질문과 관련되어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는 역사적 계시에 대한 어떤 여지가 있는가?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 안에 실제로 사셨던 역사적 예수와 계시의 관계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초기 바르트에게는 계시가 역사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가?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개요를 따라 논의할 것이다. (1) 초기 바르트는 계시와 실제로 역사 안에 사셨던 역사적 예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2) 초기 바르트는 계시와 역사 일반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가? (3) 초기 바르트는 Overbeck의 특별한 용어인 “Urgeschichte(원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며, 그것을 계시와 역사의 관계의 문제에 어떻게 관련시키는가?

이 고찰을 통하여 나는 비록 계시 안에서 역사의 의미가 계시되었다는 의미에서 역사가 계시와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계시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시간 안에서의 일련의 사건들로서 역사는 계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 초기 바르트의 입장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심지어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가 시간 안에 있는 한, 그는 계시가 아니다. 오직 부활의 빛에서만 그리스도가 계시로 간주되어진다.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그리스도만이 계시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는 역사에 속하지 않고 역사 너머에 있는 “Urgeschichte(원역사)”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그가 궁극적으로 칸트 철학적 이원론을 극복하지 않은데서 나타난 결과의 하나이다. 이제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1922년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제2판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1919년 제1판에 비해 그가 말하는 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다 고쳐서 1921년에 집필하여 1922년에 출간한 로마서 제2판에서 바르트는 계시와 역사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제시하는가?

I. 계시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관계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을 위해 계시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초기 바르트의 이해로부터 시작해 보자. 역사적 예수라는 말로 우리는 과거 역사에 실제로 사셨던 역사적 인물 예수를 의미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 즉 나사렛 예수는 A.D. 1-30년에 사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부활에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삶의 가시적 의의는 성부의 불가시적 영화의 드러냄과 계시를 제외하고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것이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이다”(Romans, 203).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의 빛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부활의 빛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인격성”(Romans, 159)도 아니고, “예수의 종교”(Romans, 366)도 아니며, “예수의 행동”(Romans, 507)도, 그의 가르침(예를 들면, 산상 수훈)(Romans, 159, 507)도 아니다. 초기 바르트는 예수님의 역사적 삶에 관한 한,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성 프란시스는 “‘사랑’에 있어서 예수를 능가한다”(Romans, 57)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활의 빛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그의 죽음뿐이다(Romans, 159). 그리고 부활의 빛에서 예수의 죽음은 시간과 역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을 의미한다.
부활의 빛에서 해석되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계시된 것은 시간과 역사와 우리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것들이 무엇일지라도, 하나님의 부정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에서 비로소 계시된다. 즉,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는 (예수님을 포함하여)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부정 하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긍정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다.

I-1. 초기 바르트의 부활 이해

이 요점은 우리가 초기 바르트의 부활 이해를 고려해 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다음 몇 문단에서 내가 고찰하려는 점은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그가 계시로 말하는 부활 자체가 역사와 시간 안에 있는 발생사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는 부활에서 계시된 것도 역사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말한다: “이 전환과 변혁(부활)은 다른 사건들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역사적’ 사건이다”(Romans, 203). 왜냐하면 만약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포기하신 인간적 가능성들 중 다른 하나가 된다”(Romans, 203)고 보기 때문이다. 즉, 만약 부활이 역사 안에 있다면, 이 계시에서 계시된 것(하나님의 부정과 그의 긍정)은 완전한 부정과 긍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의 논의에 따르면, 절대적 부정과 긍정으로서 하나님의 부정과 긍정의 계시는 역사 안에 있을 수 없다. 초기 바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부활의 개념은 죽음의 개념과 모든 역사적인 것들, 그 자체의 종국의 개념과 함께 나타난다”(Romans, 205, 나 자신의 강조). 이와 같이 초기 바르트에게는 부활은 역사 안에 있지 않은 사건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초기 바르트는 때때로 부활과 관련해서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르트가 그의 사상의 초기에도 부활을 비록 역사적 분석으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지만 부활 자체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았다고 해석하려고 하는 학자들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가 부활을 언급하는 몇 구절을 언급한 후에 맥킨토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르트의 복잡한 사상 안에로 동감적으로 들어가기를 실패해야만 이런 말들은 그것이 표면적으로 말하려는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역사”라는 말의 급진적 이중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 우리는 바르트가 많은 헤겔주의자들과 같이 그가 참으로 “A는 단순히 B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에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승리”에 대해 말할 때(Romans, 498), 그가 설명하고 있는 개념을 정당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을 때에 최고로, 그리고 신자들 안에서도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능력들이 시간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맥킨토쉬는 비록 바르트가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부활의 역사성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토랜스도 󰡔로마서 주석󰡕 제2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 바르트에게도 부활(그리고 성육신, 승천, 그리고 파루시아 조차도) “시공간”과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토랜스는 초기 바르트를 󰡔기독교의 본질󰡕(What is Christianity?)에서의 하르낙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바르트와의 대조는 성육신과 새로운 신체성으로서의 부활, 절대적 현실성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바르트의 실재론적 선포에서보다 더 잘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배후에는 사람들의 창조자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 교리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려고 하는, 그리고 인간의 실존과 역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과 온전히 그리고 실재론적으로 연관하려고 하는 새로운 결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랜스도 과거의 구자유주의자들과 비교하면 바르트는 성육신과 부활 등을 아주 실재적으로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제임스 스마트는 좀 특이한 해석을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초기 바르트에게서 “부활은 역사 안에 있지 않고, 역사를 너머선 이 영역[Urgeschichte]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초기 바르트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을 주장했다....... 짧게 말해서, 원역사(Urgeschichte)가 시간 안에 실재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초기 바르트가 부활을 실제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여기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 좋을 것이다.
󰡔로마서 주석󰡕 한 곳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것이 거기서 ‘일어났다’(come to pass)는 것이 발견되고 인식되었다는 한(限)에서, A.D. 30년에 예루살렘 문밖에서 일어난 역사 안에서의 발생사이다”(Romans, 30).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부활은 그 발생에 관한 한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일어났으나, 그 의미나 역사적 분석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이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독일어 Geschichte를 그 어원적 의미에서 부활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옳은 해석이지 아닌지는 이 해석을 󰡔로마서 주석󰡕 의 다른 곳에서의 바르트의 주장들과 비교해 보아야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초기 바르트의 부활에 대한 견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부활이 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한다(Romans, 203). 또한 다음 인용문에서도 바르트는 부활의 역사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모든 역사적 가능성들과 개연성들과 필연성들과 확실성 가운데서 죽음이 최고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죽는 것이고 부패에 종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빈무덤이나 고린도전서 15장의 현현들과 같은) 부활의 역사적 사실들(facts)과 부활 자체 사이에 어떤 직접적이고 인과적인 연관성이 있다면, 즉, 부활이 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 안의 한 ‘사실’(a 'fact' in history)이라면, 그 어떤 신앙의 고백이나 세련된 경건이라도 그것이 역사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특징인 ‘긍정'과 '부정', 삶과 죽음, 하나님과 인간의 시소(see-saw)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에 부활을 역사의 맥락 안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은 그 모호성과 오류 그리고 본질적 의문성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Romans, 204).

이렇게 말할 때 바르트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만일에 부활이 그 어떤 의미에서라도 “역사 안의 한 사실”(a fact in history)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분석에 종속되며 역사의 상대성에 사로잡히는 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로 여겨질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역사의 영역 너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바르트에게는 그런 해석만이 부활로 하여금 그 의미를 지니게 하고 그 발생이 상대화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해석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일에 부활이 초기 바르트가 강조하듯이 계시라면, 그것은 역사의 영역 너머의 영역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활은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 바르트의 부활 이해에 대한 이런 해석을 좀더 확증해 줄 수 있는 구절을 하나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로서 그것[부활]은 역사가 아닌 것의 경계에 있고, 비역사로서 그것[부활]은 역사의 경계에 있다”(Romans, 222). 여기서 우리는 초기 바르트가 말하는 순간(moment)의 의미와 연관시켜서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초기 바르트에게는, 마치 그가 말하는 영원한 순간이 있으나 그것은 시간 안에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일어나나 그것이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부활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는 데, “하나님의 진리는 ‘시간의 흐름’(the flux of history)에 있어서 그에 의해 좌우될 수(liable to) 없기” 때문이다(Romans, 277).
그러므로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그러므로 부활은 그것이 거기서 ‘일어났다’(come to pass)는 것이 발견되고 인식되었다는 한에서 A.D. 30년에 예루살렘 문밖에서 일어난 역사 안에서의 발생사이다”(Romans, 30)는 말로부터 우리는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활은 그것의 발생에 관한 한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부활은 그 의미에 있어서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또한 부활은 그 발생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지만, 우리가 그 의미나 그 실재조차도 역사적 분석으로 찾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부활이 계시이라면 부활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제랄드 오콜린스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옳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껏해야 바르트는 특정한 시공간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선포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historical)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해석의 타당성은 다음 두 가지 사실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첫째로, 이런 해석은 “계시는 시간과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초기 바르트의 주장과 잘 들어맞는다. 만일에 부활이 바르트가 그렇게도 강조하려고 하는 바와 같이 계시요 하나님의 행동이라면, 그것은 초기 바르트의 개념상 시간과 역사 너머의 영역에서 발생해야만 한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 그것은 오직 ...... 영원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Romans, 435).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활은 역사 안에 있지도 않고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활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도 아니고, 부활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도 아니다. 바르트는 부활이 비록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지 않아도 우리는 부활의 현실이나 실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시로서의 부활은 영원한 순간에서 일어나고 따라서 시간과 역사를 너머선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와 비슷한 해석을 제시하는 오글트리의 말을 들어 보라: “우리의 참된 희망은 시간 너머 영원한 순간에서 일어나는, 즉 시간과 영원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다. 바르트는 이 사건을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한다.”
둘째로, 바르트가 이 시기에 프란츠 오버벡(Franz Overbeck)으로부터 채용하여 사용하는 Urgeschicht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아직 부활에 대해 구별된 말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후에 󰡔교회 교의학󰡕에서는 그가 부활을 die Geschichte, die Geschichtssache, Faktum, die Ostergeschichte 등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아주 분명히 부활은 온전히 비역사적 사건이다. 즉, 부활은 오직 비역사적 맥락에서만 또는 역사의 영역을 너머선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I-2. 부활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와 역사

그렇다면 부활에서 계시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부활에서 계시되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인가? 부활에서 십자가의 의미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정과 긍정”은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인가? 계시와 그 계시 가운데서 계시되는 것은 과연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다음 세 가지 구절에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부활을 “예수 안에서 알려지지 않았고 관찰할 수 없는 것”의 계시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Romans, 30). 둘째로, 바르트는 주후 1-30년을 계시와 드러냄의 시기라고 말하기도 한다(Romans, 29). 그리고 한 곳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의 모든 드러남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실제로 만난 것을 지시하고 증언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증되고 권위를 얻는다. 율법과 선지자의 감취어진 권위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나는 그리스도이시다. 구속과 부활, 하나님의 불가시성과 새로운 질서가 모든 종교의 의미를 규정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현존 앞에서 정지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서나 발견되시며, 예수의 전후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모든 하나님 발견과 그에 의해서 발견됨이 바로 그런 것으로 알려지는 기준을 발견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발견됨이 영원의 질서의 진리(the truth of the order of the eternity)라는 것을 인식한다. 많은 이들이 구속과 죄 용서와 부활의 빛에서 그들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보는 눈을 갖게 되는 일은 한 분에게서 얻는 것이다(Romans, 96f. 나 자신의 강조점).

우리가 이 세 가지 인용문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예수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가 좀 모호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예수를 과거 역사에 살았던 역사적 예수로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바로 동일시하여 말한다. 우리는 이 모호성을 바르트가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빛에서 드러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와 동일시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때때로 그런 시사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초기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의 삶 자체는 계시일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계시는 예수의 역사적 삶 너머에 있다: “바르트는 (계시로서,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역사적 예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직 부활하신 분, 좀더 조심스럽게 진술하자면 그의 부활이 그를 증언하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전에 매코나키도 같은 점을 잘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옛 세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다. 역사와 심리학의 표면에 움직이는 소위 역사적 예수는, 모든 역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과 같이, 부패할 수 있고 모든 역사적인 것들의 불확실성에 참여한다. ......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역사의 인물이 아니며, 인류라는 집의 모퉁이 돌도 아닌 것이다.

이는 초기 바르트의 사상을 충실히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그 ‘초월’의 영역에서만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기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영원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며, 이 영역에서만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지평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로지름은, 우리가 바로 앞 단원에서 본 바와 같이, 시간 안에 있지 않은 영원의 영역에서만 있다. 그러므로 만약 역사적 예수가 부활의 빛에서 그리스도와 동등시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와 동등한 분은 영원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 안에서는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시간과 역사에 있는 한, 역사적 예수 자신은 계시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실제도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고, 시간과 역사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부활에서 계시된 것조차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은 나사렛 예수가 실제로 살았던 시대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너머에만 존재한다. 이 점은 신중한 바르트 연구가들 대다수가 동의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바르트 신학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쓴 한스 프라이는 󰡔로마서 주석󰡕 “제2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구체적인 시간 안에로 내려 오셨는지를 의아해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바르트와 여러 면에서 친근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발타잘도 “[로마서 주석]의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중심점인 성육신이 이제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라고 말하고, 아버딘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던 바버도 신약학자로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평가를 하는 중에 “바르트의 로마서에서 우리는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성육신에 대해서도 거의 발견할 것이 없음을 발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에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시간과 역사 너머에 존재한다. 바르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스도이며 메시아인 예수는 역사의 종국이다”(Romans, 29).

II. 계시와 역사 일반

계시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를 고찰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이 시기의 바르트가 계시와 역사 일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고찰하는 데로 우리의 탐구를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이 확대된 탐구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계시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우리가 발견했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초기 바르트는 역사적 예수를 역사의 대표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 몇 문단에서 논의해 보고자 하는 요점이다.
그렇다면 먼저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역사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지고 있는 소위 힘과 지성의 유익의 증시이며, 관념론자에 의해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위선적으로 묘사된 생존 투쟁의 증시이며, 모든 것이 엄숙함과 사소함에 머무르려는 것과 경쟁하는 인간적 의의 옛 형태와 새 형태의 밀물과 썰물의 증시이다(Romans, 77).
역사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초기 바르트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Cf. Romans, 107). 유일하게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시간의 흐름 안에 있는 역사) 끝마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안 어디에 역사의 끝이 있을까?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 그 자체에 관한 한, 역사의 끝은 없다. 역사 안에서 역사의 끝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사의 진짜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는 역사의 절대적인 끝이 없다. 역사적 영역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 안에는 “정과 반,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쉼 없음과 휴식”의 계속됨이 있을 뿐이다(Romans, 159).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그의 주석의 앞부분에서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직접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Romans, 4). 이 세상은 이런 인과 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닫혀진 우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는 역사가 상대적인 것으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여지기도 한다. 그것은 그 어떤 가치와 의미의 주장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전이적(轉移的)이고 지나가는 영역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오글트리의 관찰은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 안에서는 절대적 ‘예’도 없고 절대적 ‘아니오’도 없다. 만약 역사에 진정한 끝이 있다면, 그것은 이 상대적 역사의 영역 너머에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바르트는 우리에게 역사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두 번째의 시기의 시초가 아닌 역사의 끝이다. 그것에 의해서 역사는 연장되지 않고 사라진다. 심판 너머에 있다는 것과 그것의 이쪽에 있다는 것의 차이는 상대적이 아니고 절대적이다. 그 둘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Romans, 77).
절대적인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참된 끝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 너머에 있으며 그것이 역사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인가? 아니다. 초기 바르트는 이 인용의 앞부분에서 그런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초기 바르트는 앞선 인용에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심판에 의해 변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시간과 영원, 여기와 저기,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확고하게 서로 연결될 정도이다. 끝은 곧 목표이며, 구속자는 곧 창조자이며, 심판하시는 분이 곧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다”(Romans, 77). 물론 이 인용의 앞부분에서 바르트는 확실히 변혁 혹은 회복을 시사한다. 그러나 변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시간과 영원, 여기와 저기 사이의 구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변혁된 것, 곧 회복된 것은 심판 받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정에 의해 끝나는 역사 안에 있지 않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에 대한 한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모든 주장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포기되고 깨어지는 곳에 있으며, 그의 부정이 마지막이고 그의 분노가 불가피한 곳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인식되어지는 때에 있다. 그 주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에 존재하며, 기록할 어떤 역사도 없는 곳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발생하고 발생하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사람이 감히 - 그러나 이것조차 복됨을 위한 방법이 아닌 오직 인식의 영원한 근거이다 - 새로운 데에로 나아가며 발견될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Romans, 76).
바르트가 이 구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정이 있을 때, 또한 구원에 대한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 주장은 역사로서 기록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영원히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발생 혹은 사건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이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종국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역사적 예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역사의 종국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순간에 어떤 역사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는 역사의 대표이다. 예수님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되어져만 하고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부활에서 그리스도로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은 예수 안에서 부정된 모든 것이 긍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활의 사실이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긍정의 실재도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이와 같이 계시에 관계된, 역사적 예수와 역사 일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의미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이 분이 복음이며 역사의 의미이다”(Romans, 29). 우리가 말해 온 바와 같이, 바르트에 따르면, 역사의 의미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의 영역은 상대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의 의미는 예수의 역사적 삶 그 자체에서는 발견되어질 수 없다. 단지 부활에서만 그는 그리스도로서 계시된다. 이것이 또한 역사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 안에서 부정된 것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전술한 모든 것에서 대조되는 것은,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역사와 영원이다. 즉, 시간 안에 있는 역사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 대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와 역사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역사와 역사 너머에 있는 것 사이의 관계의 문제가 된다. 사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 안에 계시된 것은 역사와 역사 너머(혹은 역사의 종국)에 있는 것 사이의 절대적 차이이다. 계시와 관련하여 인식되어져만 하는 것은 시간과 역사 너머에 모든 것의 절대적 기원과 종국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플라톤과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사이의 몇 가지 유사성들을 발견한다. 바르트는 플라톤에 대해서 그는 “그의 지혜로 오래 전에, 보이는 것 뒤에 모든 구체적인 것들의 기원인 보이지 않는 우주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Romans, 46)고 말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바르트는 그들 둘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이며, 그들 둘 모두는 초월의 영역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는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역사의 의미를 계시하는 계시는 역사 안에 있지 않고 역사 너머에 있다. 따라서 계시는 영원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 안에서 발생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의 의미이다. 그러나 역사의 의미는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역사의 의미는 “비역사적 요소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역사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창세기의 묘사가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역사성을 믿지 않고도 아브라함 역사의 묘사를 읽을 수 있다. 바르트는 우리가 비역사적 요소(즉, 역사의 의미)의 중요성을 알아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영적 빈곤이 시대에는 역사적 분석이 우리가 채택해야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것 자체는 그것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고, 한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의 인격성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선언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또한 동일하게 요구되는, 창세기의 출발점인 종합의 필요성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가 아브라함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관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이 말해야만 하는 것을 인식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 방식은 너무 너무 다르다. ...... 그[아브라함]는 비평적 분석이 꿈꿔 왔던 것보다 더욱 더 ‘비역사적’ 인물이다. 우리는 비평적 방법에 족쇄를 채우거나 의혹을 던지려는 어떤 열망도 없다. ...... 왜냐하면 그것[비평적 방법]은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아브라함은 정말로 우리에게 관심이 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과 같이 그것은 창세기 이야기의 비역사적 아브라함의 이해에로 길을 연다......(Romans, 147f.).
이 인용에 따르면 ‘비역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면서 역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세기 이야기 자체와 성경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들 너머에 있는 것이다. 󰡔로마서 주석󰡕 제3판 서문에서 바르트는 제2판에 대한 불트만의 서평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영의 심판(KRISIS) 아래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경] 전부는 문자(litera)이다. 즉, 다른 영들의 목소리들인 것이다. 문제는 그 전부가 그 참된 주제, 즉 그리스도의 영과의 관계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바울의 말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불트만과 그리고 모든 지성을 지닌 이들과 동의한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을 넘어서 보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Romans, 17, 19).

이 인용문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더 논의하지 않겠다고 한 질문인 “우리들[바르트와 불트만 가운데서] 누가 더 급진적인가?”하는 질문에 실질적으로 대답한 것이 된다(Cf. Romans, 16). 따라서 이렇게 급진적인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역사적인 것’과 관련이 없고 ‘비역사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비역사적인 것]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지도 않았고 발생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바르트가 또한 단지 역사 분석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만이 역사 안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정도로, 바르트가 역사 비평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역사 분석이 성경 안에 있는 어떤 것(예를 들면, 부활, 기적, 계시 등)을 긍정하지 않는 이유는 역사적 분석에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역사 안에서는 어떤 발생(혹은 사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 너머에 있는 ‘비역사적인 것’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바르트에 따르면, 영적인 빈곤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영적 의미, 즉 ‘비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반 하뷔(Van A. Harvey)의 다음 같은 관찰은 바르트의 역사 비평에 대한 태도를 아주 분명히 해 준다: “바르트의 주석은 새로운 신학적 시대를 도입시켰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와 그들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역사적 탐구의 방법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나, 그 탐구를 성경이 사람에게 그의 개인적 실존의 가장 깊은 문제를 여전히 말하는 문서들로 해석될 수 있도록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바르트에 따르면 신앙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영역 너머에 있는 역사의 의미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의 영역 안에서 발행하지 않거나 발생한 것은 신앙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감취어진 것이다. 그는 [역사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영원에서의] 영생을 약속한다. 그는 [역사 안에서] 부패에로 넘어가는 이들에게 [역사 너머의 영역에서의] 부활의 복됨을 말하다”(Romans, 20).
따라서 계시와 관련된 것 또한 역사 너머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와 역사의 관계는 역사 너머에 있는 것과 역사 안에 있는 것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또한 영원의 영역과 역사의 영역 사이의 관계와 같다. 역사 그 자체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역사의 의미도 없다. 이 모든 것들[시작, 끝, 역사의 의미]은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이다.

III. 계시와 원역사

계시와 역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바르트가 ‘원역사'(Urgeschichte, Primal history)라는 용어에 부여하는 의미를 우리가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바르트는 “Urgeschichte” 라는 용어를 니체의 친구인 프란츠 오버벡(Franz Overbeck)에게서 빌려 온다. 이 용어는 오버벡에게서와 바르트에게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오버벡에 따르면, “원역사”는 아직 특별한 것과 보편적인 것의 구별이 없는 기원의 영역에 있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원역사”는 보통 역사 혹은 역사의 영역과 대조된다. “원역사라는 개념으로 오버벡은 우리 존재의 파악할 수 없는 초시간적 시작, 즉 역사 이전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역사적 실존 안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는 점인 기원의 점을 지칭하는 것이다.” 오버벡에 대한 바르트의 요약에 따르면, 오버벡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전체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을 구별하는 경계가 여전히 유동적인 모두 시원적으로 구성된 초시간적이고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초역사(원역사)로부터 우리는 왔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애를 통틀어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이고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죽음의 순간으로 우리는 간다.” 오버벡에 있어서 이 두 극단(즉, 원역사와 죽음)은 사람과 역사의 근본 경계이다.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산다. “이 두 끝. 즉 이 두 개의 마지막 것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세계 즉 우리의 세계, 우리에게 주어진 이해 가능한 세계이다. ‘역사적’인 것 혹은 ‘역사적’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본질상(eo ipso) 이 세사의 일부분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시간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버벡에 따르면,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제를 상대성으로 환원시키는 비평의 대상이다. 이 세상 안에서는 오직 회의적 세계관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역사 안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역사의 기원에 관해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황금 시대가 있었는가 혹은 순수한 야수성만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부조리하다. 역사의 끝에 관해 묻는 것도 어떤 의미도 없다. 역사 안에는 어떤 것도 끝나지 않는다.” 단지 이 역사와 세계 너머에 기원(‘원역사’)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역사와 원역사의 관계에 대한 오버벡의 기본적인 사고 구조이다.
오버벡에 따르면, 기독교의 기원 역시 ‘원역사’와 관계 있다. 참된 기독교인 기독교는 오직 이 원역사의 영역에만 있다. 따라서 사실 기독교는 역사와 무관하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확고부동하게 그(오버벡)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다. 기독교라면 역사는 아닌 것이며, 역사라면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즉, 기독교는 역사와 무관하며, 따라서 역사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역사 안에서 기독교를 찾으려 한다면, 그는 기독교로부터 그것의 참된 특징을 빼앗고, 그것을 인간의 조작에 종속시키고 마는 것이다. 오버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의 영역에서는 사람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에 관해 구별 짓고 차별화 하는 것이다. 그 곳은 그가 자신의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이다. 그 곳에서 그는 단순히 자신을 다루므로 그는 이 영역에서 주인이다..... 현상계의 물체의 성질은 그들이 과학적 조작의 대상이 되는 그들의 작용의 복합이다.
바로 이런 이해 가운데서 오버벡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즉 시간에 종속된 기독교는 부조리이다.” 오버벡에 따르면, 역사적 기독교는 그것이 역사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말의 실재 의미로는 기독교가 아니다. 역사 안에서는 어떤 기독교도 있을 가능성이 없다. 기독교가 있을 유일한 가능성은 역사 너머에 있는 역사(원역사)에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오버벡이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그의 추종자의 신앙을 ‘원역사’의 영역에 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의 신앙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무엇인데, 예수의 생애에서 그것은(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신앙)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버벡의 입장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의 영원한 영속성은 단지 영원한 관점(sub specie aeterni)으로부터, 즉 시간과 시간에만 존재하는 젊음과 늙음의 대조를 알지 못하는 견지로부터만 주장되어질 수 있다.”
오버벡의 ‘원역사’ 이해와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그들 사이에 강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현저한 유사성은 역사와 시간의 영역과 이 영역 너머에 있는 영역과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이다. 그들[바르트와 오버벡] 모두에게 있어서 시간과 역사는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영역이 아니다. 시간과 역사의 영역에서 사람은 최고이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그의 계시가 존재한다면, 그 분과 그것은 시간과 역사의 영역 안에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고, 단지 ‘비역사적 것’의 영역 혹은 ‘원역사’의 영역에만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왜곡된 형태 혹은 모순된 형태 이외로는 역사의 영역에 존재할 수 없다. 이상적인 것은 ‘원역사’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역사의 영역은 상대적인 것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것은 역사의 영역 너머에만 있다.
바르트와 오버벡의 사상 사이의 두 번째 유사성은, 우리가 시사한 바와 같이, 역사의 영역 너머에 있는 영역에 대한 그들의 가정이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이 영역에 부여한 특징이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의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원역사’의 영역에 있는 것은 시간과 역사의 영역에 있는 모든 것들의 기원이라는 그들의[바르트와 오버벡의] 이해는 우리에게 플라톤의 ‘이데아의 영역’과 칸트의 ‘예지계’를 생각나게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베르까우어의 다음과 같은 관찰을 여기서 인용해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Roemerbrief)에는 어떤, 철학적 사상, 특히 플라톤주의적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르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심판(위기, crisis)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도록 만든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보다는 철학적 관념론을 더 생각하도록 하는 초월적인 한계 개념에 의해서 성경적 사상이 계속해서 모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 근거해서 바르트가 ‘원역사’라는 용어에 부여한 의미는 오버벡과 다르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오버벡과 마찬가지로, ‘원역사’는 모든 역사를 조건 지우는 ‘비역사적’인 것이다(cf. Romans, 140).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역사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와 오버벡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시간과 역사 안에 사셨던 역사적 예수에 관한 한, 그를 원역사라고 부를 수 없다. 단지 그가 더 이상 역사 안에 있지 않을 때, 즉 그가 역사 안에 있지 않은 부활의 빛에서 해석될 때, 그는 원역사라고 불려질 수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원역사라면, 그는 역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에 속하지 않는 역사의 기원이다.

IV. 결론: 키에르케고르와의 비교 가운데서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가지 면에서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를 고찰해 왔다. 우리의 결론에 따르면, 바르트는 시간과 역사 안에 있는 것은 절대적일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안에 있을 수 없고 역사의 기원으로서의 역사 너머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을 오버벡을 따라서 “원역사”라고 부른다. 이제 계시와 역사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견해를 간단히 비교해 보자.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역사와 다르지 않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발생한다. 물론 계시는 절대적 사실로서 매우 특별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과 역사 안에서 계시의 발생에 관한 한, 그것은 다른 어떤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계시는 시간과 역사 너머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시간과 역사 안에 어떤 계시도 없다면, 계시는 전혀 있지 않은 것이다. 계시는 시간과 역사 안에 있는 것 너머 혹은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의 견해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르트는 계시를 시간과 역사의 흐름 안에 있지 않은 영원한 계시로 만들려 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비평(예를 들면, 역사적 비평 등)으로부터 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따르면, (역사적 요소 너머에 있는) 계시와 관련된 역사적 요소가 비평될 수 있고 파기 될 수 있다 할지라도, 계시 그 자체는 어떤 어려움 없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바르트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계시의 절대적 특성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표현이 약간 다를지라도,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 사이에는 실제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바르트는 해석하는 몇몇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중요한 주장은 20세기초의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히 19세기의 인간학적 혹은 관계적 신학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하나님과 그 분의 계시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하는 것이다. 계시가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다고 시사하는 것 같은 바르트의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바르트의 참된 의도의 빛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함의들 중 하나는 바르트가 사실 계시의 역사적 발생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로마서 주석󰡕 제2판에서 바르트의 의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서 주석󰡕 제2판의 의도는, 계시와 관련하여서 계시의 소여성과 하나님과 사람의 함께함으로 항상 시작하는 자유주의의 관계 신학과 대조적으로, 주로 완전히 새로움과 은혜의 기적과 하나님의 자유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함께함은 순순한 새로움이며 순순한 은혜와 기적이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바르트가 반대하는 자들 편에서 동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의도와 그들의 의도를 구별하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종말론으로서 계시 개념을 사용한다.
‘종말론으로서 계시’라는 어구로서 프라이는 계시의 종말론적 특성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를 의미한다. 즉,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계시가 영원한 순간에 전체적으로 주어질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시간과 역사의 영역 안에 사는 자들로서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는 영원한 순간에만 있고 시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가 자신을 계시가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드러내려는 방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바르트의 의도가 관계 신학자들과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적 새로움을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의도가 계시의 역사성을 인정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바르트가 자신을 계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듯이 나타내려는 방식으로 표현한 이유가 오직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라는 그의 2중 구조의 견해와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보기에는 이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에 불가능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절에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만약 계시가 시간과 역사 안에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시간과 역사 안에 있는 것은 상대적이고, 반면에 계시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계시의 역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역사 분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르트가 계시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피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따라서, 계시가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다는 바르트의 표현은 단순히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계시의 새로움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에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사고 구조에 따르면, 계시가 시간과 역사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르트와 대조적으로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사실 영원한 계시로서, 시간과 역사 안에 있지 않은 계시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기독교를 치워 버리는 시도인 것이다.
이 논문에서 내가 제기하려는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바르트로 하여금 계시를, 우리가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은 그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한 그의 근본적인 사고 구조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의 계시는 시간과 역사의 우리 세계에 속할 수 없는가? 왜 하나님의 계시는 시간과 역사와 우리 세계 안에서는 계시 그 자체가 아닌 분화구만을 남기는가? 왜 하나님은 시간의 역사의 우리 세계 안에 들어오시지 못하는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시간과 역사 안에 두는 것이 하나님이 자유를 헤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권적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그의 계시에서조차 자유 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영원한 순간에서만 계시하여야 한다. 내재적 하나님이 아니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상과 역사와 인간 의지와 인간의 신의식 안에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항상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만약 그가 시간의 역사의 인간 세계로 들어오신다면 그는 상대적이 되고 만다. 그가 한 번 시간과 역사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이 있을 가능성은 없어진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으로 남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 안에 들어오시지 않는다. 그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바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관계적 신학과 ‘변증법 신학’의 시기 이전의 자신의 초기 자유주의 신학까지도 극복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초월성을] 분명하고 건조한 방식으로 표현해 보려는 직접적인 인간의 모든 시도에 대항해서 초월성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맥코나키의 말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로마서 주석”의 변증법 신학 안에서의 그의 하나님의 주권성 강조 배후에 일종의 절대적 이원론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에서 나는 바르트의 절대적 이원론을 지적할 것이고, 그것을 키에르케고르의 이원론과 비교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는 요점은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의 이원론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 행위에서 극복된 이원론인 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영원과 시간, 원역사와 역사, 근원의 영역과 이 세상 영역, 시간과 역사 너머에 있는 것과 신간과 역사 안에 있는 것 사이의 이원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조차도 극복될 수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혹은 사람에 대한 절대적 타자이기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 우리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순간에서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시간과 역사 너머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시간과 역사의 영역 안에 있지 않다. 시간과 역사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도 없다. 물론, 바르트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간성과 자연과 역사로 아는 모든 것의 변혁이며 따라서 모든 체계의 시작점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Romans, 278). 그러나 우리가 이 장 전체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변혁은 영원한 순간에만 있다. 이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순간의 중요성이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한 어떤 변혁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있고 이 두 영역 사이의 충돌이 없는 때는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두 영역들은 영원히 충돌하는 영역들이다. (이 세상의 기원과 끝의 영역이며, 근원적 창조의 영역이며, 부활의 영역이며, 구속의 영역이며, 종국적 승리의 영역인) 하나님의 영원한 영역과 (시간의 흐름의 영역이고, 역사의 영역이며 사물의 영역인) 사람의 영역이 초기 바르트에게서는 끊임없이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초기 저작들에 대한 빌헬름 폭(Wilhelm Pauck)의 다음 같은 관찰은 정확한 것이다: “[초기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은 시간에 한계를 지운다. 그 각각은 전혀 다른 영역들이다. 그러므로 영원과 동일시된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에로 들어오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며,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고, 우리와는 동떨어진 분이시다.” 물론 바르트의 이 두 세계 구조의 요청과 플라톤의 정적 이원론을 정확히 동등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두 영역은 플라톤이 두 영역의 이원론의 경우보다 더 역동적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이원론의 근본적 구조는 동일하다. 기원과 결과들의 관계를 공유하는 두 세계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원론은 사실의 세계와 의미의 세계 사이의 구별과 관련지을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시간과 역사의 영역에서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사실들이다. 그래서 이 사실들의 의미는 시간과 역사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의 영역의 의미 자체는 의미의 영역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사실(혹은 사물)의 영역을 초월해야 하며 시간과 역사와 사물의 영역 너머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는 시간과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부활의 빛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우리에게 사실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 사이의 이 구별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이원론은 일종의 절대적 이원론이다. 이원론 안에 있는 두 요소는 시간의 끝까지 지속된다. 이원론의 한 요소가 다른 요소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때는 없다. 물론 바르트가 종국적 승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국적 승리는 시간과 역사와 우리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의 영역 너머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순간에만 있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 어떤 변화도 변혁도 없다. 그러므로 그 두 영역은 끝없이 충돌이 계속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이원론을 비교할 때, 우리는 그들 사고 구조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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