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사도행전 주석 (행15:1-32) / 존 칼빈

baromi 2009. 3. 3. 08:40


제 15 장

 

 

1절.

 

이 교리야말로 형제가 연합할 수 있는 거룩한 띠이다......그러므로 바울이 믿는 자들의 일치를 권했을 때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니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4:5)라는 말씀을 활용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이 거짓을 가지고 위조한 것으로 복음을 부패시키거나 의심나게 만들어 교회를 나누어 편당을 만들고자 나타날 때에 우리는 사단의 속임수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고 이단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훌륭한 목적을 위하여 사단의 음흉함을 분명하게 분쇄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와 같은 시련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주심으로써 자기의 말씀을 존귀하게 하시며 악한 자들이 애매하게 만들려는 진리를 더욱 찬란히 빛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대로 이 사건의 모든 형편을 깊이 고려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그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이 구실은 훌륭한 사람들까지 속이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다. 예루살렘은 모든 교리를 중에서 가장 높은 영예를 갖는데 있어서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모든 교회는 예루살렘을 그들의 모교회로 여겨 소중히 여기고 우러러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말하자면, 통로를 통하여 흘러 나간 본래의 샘은 바로 이곳이었다. 사기꾼들이 내려 왔다. 그들은 사도들이 승인해 주었던 자들처럼 행세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만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거만스럽게 행동했다. 여하간 이러한 허울을 가지고 그들은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잘 변하고 경건하게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자들이 제시하는 것을 굶주린 자들처럼 잘 붙잡는다. 교회 안에 태풍처럼 일어나는 소란은 선량하고 온화한 사람들을 흔들어서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성도라는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경우에 사단의 속임수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들을 몹시 존경하는 나머지 그 사실의 진실여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는 무엇이 그 악한 자들을 그렇게 이끌어 갔는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카코젤리아), 즉 잘못된 열심히 그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게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것 말고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까다로운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할례와 율법의 다른 의식들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마치 그 한 교회의 실예가 확고한 규칙이 되어 다른 모든 교회를 구속하는 것처럼, 어떤 새로운 것이나 다른 것은 전혀 참아 보지 못한다. 그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릇된 열심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야심이 그들을 자극하고 있었으며 어떤 오만한 마음이 그들을 충동했다. 이와 동시에 사단은 원하는 것을 가진다. 왜냐하면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은 연막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무엇이 희고 무엇이 검은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이 악한 일을 조심하자. 자기 자신의 관습을 다른 사람의 법이 되지 않게 하고 한 교회의 실례가 전체의 규범으로 선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인물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이나 명분을 묻지 않거나 애매하게 내버려두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고후11:14) 바꾸고 모독적인 뻔뻔스러움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횡령할 때가 자주 있다면 그가 이와 같은 악으로 거룩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장하여 속임을 베푼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과를 볼 때 사도들은 이방인들이게 놀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과를 볼 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메우고자 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단이 그들을 몰래 공격하려고 했던 방법은 바로 이 속임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반대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의 이름을 가장하여 몰래 행동하는 일은 종종 있다.

 

2절. 다툼이……일어난지라.

 

바울과 바나바가 격렬한 다툼에 끌려든 것은 작은 시험이 아니었다. 다툼 그 자체만 하더라도 나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악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고집으로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오해에 의한 나쁜 평판을 생각할 때도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 선한 대의를 변호하는 데 충성스럽게 일한 다음에도 마침내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고 악평을 받게 되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들에 관하여 퍼지는 좋지 않은 소문을 무시해 버리도록 굽힘이 없는 큰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자기가 요란함을 통하여 전진할 수 있었음을 자랑하고 있다(고후6:5).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들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불화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리고 사단이 소동과 말다툼을 일으킬 때에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마침내는 연합을 갖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으면 이를 막기 위한 싸움을 피해서는 안되며 하늘과 땅이 부딪히는 한이 있어도 이를 반대하는 일에 용기를 내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이 사실로서 분명히 경고를 받아 교회 안에 소동이 생기면 이에 대하여 누가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인지 분간하기를 지혜롭게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들의 강인한 힘을 칭찬해 주는 대신에 그들을 경솔하게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처럼 사나운 사단의 공격에 견디어 내고 의기가 꺽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단은 하나님의 훌륭한 섭리에 의하여 제지되어 바울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게 했음을 기억하자. 만일 사단이 원하는 대로 손상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면 이방인들의 믿음은 전복되고 소멸되었을 것이며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며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문은 닫히고 말았을 것이다. 셋째로 불일치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른 단계에서 제지되어야 한다. 이 불일치가 불길같은 논쟁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노리는 것은 불화의 부채를 부쳐 보다 많이 불길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초대 교회가 소란을 당했으며 그리스도의 훌륭한 모든 일꾼들이 열심히 말다툼을 한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겨날 경우, 마치 우리가 어떤 새롭고 예기치 않았던 일에 끌려 들어간 것처럼 놀라지 말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당시에 주셨던 그 해결과 같은 해결책을 주시도록 구하면서 거센 소란 중에서도 동일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너희가……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이 말로써 누가는 제기된 주요 문제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이는 자들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말하여 믿는 자들의 양심을 얽어매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할례만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말씀의 전후관계를 볼 때 그들이 온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관하여 논쟁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할례는 율법에 속한 다른 모든 의식의 엄숙한 시작이므로 제유법에 의하여 이 할례는 온 율법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충성을 드리면서도 그들은 율법의 옛 의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 이 과오는 용납될 만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싸움이 교회를 흔들지 않도록 최소한 잠시라도 침묵을 지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이에 관한 말다툼은 외부적인 것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성경의 다른 데서 이같은 외부적인 것들에 관하여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는 사실상 세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근거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면 그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되고 만다. 믿음은 평화롭고 잠잠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의식이 믿음의 자유로운 의에 거스리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는 한 잠잠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원수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며 그 영광을 행위 쪽으로 옮기고 있고 그들은 불행한 영혼들의 신뢰를 흔들므로써 그들을 괴롭게 하고 요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실한 영혼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자유를 빼앗는 것은 크게 중대한 문제였다. 성령의 내적 자유는 조상들이나 우리들에게 공통된 어떤 것이지만 우리는 조상들이 율법이라는 유치한 보호아래 갇혀 있어서 노예와 거의 다른 바 없다(갈4:1,2)고 바울이 한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뒤에는, 마치 우리가 보호를 받는 시간이 끝난 것처럼(갈3;23),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하여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가르침의 세 번째 잘못은 이 교훈이 복음의 빛을 어둡게 하거나 최소한 어두운 구름과 같은 어떤 것을 끼워 넣어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충만한 광채를 발휘하시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바울이 그러한 원칙에 굴복했더라면 이 교훈은 짧은 시간 안에 전체 기독교에 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외적인 육체의 할례를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와 영원한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경건한 양심을 얻게 하려고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르로써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은혜의 광채가 맑고 잔잔한 하늘에서처럼 다시 빛나게 하려고 싸웠다. 그리고 그 악한 사람들은 율법의 바른 사용을 경건치 못하게 부패시켜 그 율법에 심각한 손상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율법을 가진 바른 기능은, 몽학 선생처럼 어린이들의 손을 이끌어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약화시키는 구실로서 사용된다면 이보다 더 나쁘게 변질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사단의 술책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공격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음으로써 그 진리를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의문에 대한 숨은 근원을 이 방법으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향해서는 안되며 모욕과 비방을 받는다고 해서 그 앞에서 유순해져 버리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순전한 신앙은 항상 지켜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다투지 아니'해야 한다(딤후2:24). 그러므로 어떤 말다툼이 생기면 하나님의 종들은 즉시 나팔을 부는 대신에 자신의 온건한 마음으로 이를 진정시키고 가라앉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필요하지 않고 소용도 없는 논쟁은 피하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중요하지 않은 말다툼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단의 오만이 우리의 신앙을 손상할 정도까지 커지는 것을 볼 때에는 그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리 유쾌하지 않다 하더라도 반드시 용기를 되찾아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하고 싸우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p.52)다. '평화'란 듣기 좋은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잃은 만큼의 큰 대가를 치르고 얻어지는 평화는 저주받는 평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해서만 경건하고 거룩한 연합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황과 그를 따른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세상을 흔들어 놓는 소동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를 향하여 큰 악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 답변할 수가 있다. 우리가 반박하는 데 애를 쓰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옳지 않을 만큼 심했기 때문이고 또한 이 이유 때문에 천사들이라 하더라도 싸워야 할 것인데 사람들과 논쟁한다고 해서 우리가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이 마음에 만족하도록까지 소리지르게 내버려두자! 사단의 종들이 자기들의 힘을 다하여 경건의 교훈을 파멸하고 있을 때 이 교훈을 지키는 데 있어서 우리가 냉담하지나 마지못해 하며 실천하지 않도록 바울이 보여준 모범은 훌륭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난폭한 행위는 하나님의 종들이 더 이상 참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맹렬하게 반대했을 때 마침내 이 충돌로 말미암아 분쟁이 폭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이 때문에 바울을 꾸짖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사람에게 주셨던 그 용기를 합당하게 칭찬하심으로써 귀하게 여기셨다.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이 방법을 암시해 주셨다. 이 방법을 쓰지 아니하였더라면 그 소란은 상당히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알맞고 적합한 방법들을 언제나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온건함을 지켜서 지나친 열심에 의하여 바른 길을 벗어나가거나 정당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교훈을 지키는 데 있어서 용기를 가져야 하되 융통성이 없거나 경솔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칭찬하고 계시는 바울 속에 있는 그 두 가지 미덕을 서로 결합하도록 하자. 그가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싸움의 위치로 억지로 끌려갔을 때 그는 자기의 사건을 지혜롭게 제시하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의된 해결의 방법을 말없이 받아들이면서 자기는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도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음을 자만스럽게 여기고 그러한 태도를 완고하게 고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내려 주는 판단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무지하고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다른 종들로부터 그 두 사람이 분리하여 떠나는 것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된 관념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교사들은 자신들이 교회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믿음을 길러 주는, 이 각별한 태도를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사도들이 시키는대로 할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도들이 자기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더라도 그는 자기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1:8), 그는 천사에게라도 양보하지 아니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들이 그를 심히 교만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열중하고 있는 사람으로 말하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그를 비난하지 않도록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서고 있는데 이는 바른 일이며 전체 교회를 위해서도 은혜스러운 일이었다. 둘째로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디옥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다른 사도들에게 보낸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안디옥 사람들이 그 다른 사도들을 극히 존경하였으므로 그 사도들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 옳다고 발표하기까지 그들은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들의 믿음은 없어지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믿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쉽다. 안디옥 사람들은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같은 명령을 내리셔서 똑같이 보내심을 받았으며 사도들은 같은 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악한 사람들이 베드로와 야고보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직하고 신중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음에는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우호적인 결정을 내려 그 선한 대의를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모든 거룩한 회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명하고 정통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라서는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토론을 끝내는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소집되어 왔다. 교황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공연한 소란으로 누구라도 실망시키지 않도록 이 사실을 눈여겨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함께 폐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경건의 빛을 온전히 꺼버리기 위하여, 마치 사람들의 어떤 결정이 하늘에서 주시는 어떤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은 회의의 결정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거룩한 교부들이 오늘날 회의를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주셨던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제의하기 위한 권리나 의도까지도 없음을 일치하게 선언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유일하신 스승이신 것처럼 그들의 유일하신 스승이셨다. 나는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우둔한 무지와 어리석음 외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온전하지 못한 회의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그 회의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모임은 필연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회의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말한 신랄한 불평이 있다. 교회 안에서 번창하고 힘있고 움직이고 있었던 온갖 좋은 것들은 기원 100년이 되면서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지금 살아 있다면 몇 명 안되는 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자기들에게만 맞는 결정을 하고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배격되도록 부끄러움도 모르고 정당한 회의에 가면무도회를 끌어들이는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를 얼마나 분하게 배척하겠는가!

 

3절.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우리는 예절을 지켜 바울과 바나바를 전송하기 위해 교회가 인정하는 가운데 두 사도와 연합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의 편을 들고 있었으며 그들과 뜻을 같이 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출발에 관하여 두 종들이 계획했던 것과 같은 목적을 가졌던 것이다. 그 목적을 거짓으로 사도들의 권위를 내세웠던 그 소란스러운 정신을 억압하려는 것이었다. 누가가 두 번째로 하고 있는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을 하면서 이방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온 훌륭한 사실을 형제들에게 보고한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그들이 겁에 질려서 예루사렘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여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전에 가르쳤던 것을 두려움 없이 선언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재판관들 앞에 호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편이 일치하게 결정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의식의 폐지에 관하여 내리신 명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판결을 일축하고 있지는 않으나 자기들이나 사도들도 이 일에 있어서 다른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되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파고들어 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갖고 있었으며 기뻤다. 뿐만 아니라 이는 경건한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절. 바리새파 중에……어떤 사람들이.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심을 갖고 있으며 거만한지를 알고 있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덧입고 있었다면, 바울 속에 바리새주의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오랜 관습 때문에 완고한 습성에 젖어 있었고 이 습성을 단번에 없앤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위선이 그들을 크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에 대한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만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자기들의 원칙에다 굴복시키는 열심에 있어서 사나웠다. 수도자들 역시 이 두 가지의 병폐로부터 그들은 교회를 분쇄하고도 스스로 잔인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일축하고 있으면서도 난폭하거나 염치가 없음을 느끼지 못한다. 실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난폭하거나 염치가 없음을 느끼지 못한다. 실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사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들의 소굴에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 곳에서 받아들였던 그 관습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6절. 사도와 장로들이……모여.

 

누가는 온 교회가 모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교훈과 판결에 있어서 권한을 가지고 그들의 직임에 의하여 이 일에 합법적인 판단자들이었던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해 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토론이 진행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있을 듯 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이 문제를 아무렇게나 처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 일을 맡았다고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들은 더욱 유능한 판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어떤 논쟁이 생겼을 때 회의를 소집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식과 질서가 여기에 있음을 깨달아 알기로 하자.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의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의 결의에 일치하여 그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이 올무가 양심에 부담을 줄 때 사람의 구원은 모두 무너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시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음을 반복하고 있는 그가 한 말의 첫부분이 내포한 취지는 율법의 의식들이 사람에 의하여 경솔하게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문제의 중심에 자리를 보내시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음을 반복하고 있는 그가 한 말의 첫부분이 내포한 취지는 율법의 의식들이 사람에 의하여 경솔하게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문제의 중심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의심은 물러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말없이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모든 이론보다 높이 평가하는 데 우리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율법의 멍에에서 풀려나게 하셨다고 증거하는 베드로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동사 '택하다'는 '마음먹다'와 '정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선택과 이방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라고 말했다. '너희 가운데서'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데서', '우리가 증인들이 되어' 혹은 '우리들 가운데서'라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사실이 그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들에게 친근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귀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있어서 공통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서 나를 택(p.59)하시고'라고 번역할 것이다.

 

믿게 하시려고.

 

이 말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확증해 주는 도장과 같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가르치는 직임을 받았다. 그의 가르침에 의한 성과는 그가 말한 것같이 그의 사역에 명성을 더해주고 그 사역을 권위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역자들 속에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어 주셔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부적으로 가르치시고 그들의 마음을 내적으로 이끌어 주시지 않는다면 가르침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교훈이 전달될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더럽혀진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그들을 자신에게로 거룩하게 구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에 양자 삼으심의 표를 새기시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면에 있어서의 진정한 성별은 완성되었다.

 

이어서 기록된 말씀은 앞에 나온 말씀을 설명하고 있다고 간주해야 하겠다. 성령의 은혜는 분명히 우리를 믿음으로 가까이 데려다 주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가 마라고 있는 성령에 의한 눈에 보이는 은혜를 믿음에다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들이 할례나 어떤 의식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접붙임이 될 경우에 그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써 그들을 선택하신 증거가 되셨던 사실은 설득력을 갖는 것같이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은사들은 그들이 경건한 사람들의 부류 안에서 인식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을 밖의 사람들과 구별하는 분은 오직 중생의 영 뿐이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다른 점에 있어서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던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와 이와 은사들을 받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마치 손가락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한 눈에 보이는 은혜로서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에게 은혜로운 양자 삼으심을 인치신 사실은 정당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8절.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베드로는 회고하는 입장에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 적응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말없는 대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우둔하고 땅에 속한 이해력을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밖으로 깨끗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와는 반대로 마음속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런 점에 있어서 그릇된 판단은 인간적인 이해로부터 나오게 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속의 깨끗함이며 이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베드로는 우리의 경박한 마음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베드로는 우리의 경박한 마음을 억제하고 있다.

 

9절. 믿음으로……깨끗이 하사……

 

이 구절은 누가가 앞에서(8절) 하나님께 적응시켰던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누가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영적으로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자녀로 삼으실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때 그들을 내적으로 깨끗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이 깨끗함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부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심판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참된 성결은 아무런 의식을 행하지 않고도 이방인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이 성결이 믿음에 의하여 얻어지고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동일하게 바울 역시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롭고 거룩하게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 할례는 그가 의로와진 다음에 시행되었으며 시간적으로 이후였기 때문이다(롬4:10).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베드로는 마음의 깨끗함으로 만족하고 이방인들이 율법에 의한 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특징에 의하여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족장들이 받았던 그 깨끗함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시는 그것과 다른 것인가?' 나는 그들이 본질에 있어서라기 보다는 형식에 서로 달랐다고 대답한다. 갖가지 의식들은 믿음에 도움이 되도록 옛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형식과 실행에 연관된 깨끗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깨끗함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 즉 신령한 예배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존속하기는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식에 있어서는 크게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에 의하여 의로움 혹은 깨끗함을 얻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의식 그 자체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연히 깨끗하게 해주는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진리는 옛 사람들이나 우리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부수적인 것은 모두 다 없어졌다. 그러므로 그림자들이 없어짐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은 아무런 덮인 것이 없이 나타나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쉽게 해결된다. 할례는 영구적인 혹은 영원한 언약으로 호칭되었다(창17:13). 그러므로 그들은 이 할례가 폐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창세기의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상징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해결이 있다. 이는 내가 말한 적이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한 가지이기 때문에 그가 율법의 모든 그림자를 끝내셨다는 사실에 불합리한 점이란 없다. 율법의 영원성은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서로 연관을 갖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들 영혼 속에 부어 넣은 어떤 힘이나 자질로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지 않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깨끗함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는 말씀 역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누가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깨끗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임을 의미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얻은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고 말씀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단번에 속죄하신 우리의 죄를 날마다 멸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순결함과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으로 우리가 가진 육신의 욕망을 억제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주신다. 나는 본문의 말씀으로 이 두 가지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누가는 한 가지 종류의 깨끗함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율법의 의식들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함이 온전하게 존속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0절. 그런데……너희가 어찌하여……시험하여.

 

베드로는 만일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자기가 앞에서 한 말로서 추론하여 단정하고 있다......우리는 베드로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해당되는 성경귀절에서 어떠한 말을 하고 있는지 곧 보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을 받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본문의 문맥 중에서 베드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하나님께서 느슨하게 해 주시는 멍에를 더욱 든든하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고의적으로, 도전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본성을 거스려 싸움으로써 거인들처럼 되고자 하는 행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룩한 족장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율법의 멍에를 맬 수 없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음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제롬의 말이 거의 확고한 원칙이 될 만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판단하는 사실에 반대가 되는 어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뜻과 행위가 아니라 능력과 힘에 관하여 성령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선언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다......그러므로 믿는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에 율법의 의를 위하여 열심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다면 그 율법의 전부는 커녕 그 절반, 아니 그보다 훨씬 적게도 시행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베드로는 에비구레오파의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른 거룩한 족장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짐이 그들의 힘을 압도하여 그들이 그 짐 아래 굴복했다고 말하고 있다......하나님은 충성된 자들이 육신의 정욕과 싸워서 그 정욕을 억압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육신의 정욕을 온전히 멸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새 생명 가운데서 걷도록 은혜를 주시겠음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율법이 그 실행을 요구하는 만큼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아니 하신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생활 전부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정하신 질서를 구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손상시킨다고 우리의 원수들이 주장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은 어리석고 쓸데없는 헐뜯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은 변동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다른 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에 펠라기아파 사람들도 어거스틴을 향하여 그와 같은 비방을 했다. 어거스틴은 율법을 실행하기란 가능하지만 성경은 이 율법을 온전히 행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이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온전하게 이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의 말썽많은 그 교활한 계책으로부터 빠져 나왔다......제롬은 철학적인 이론을 가짐으로써 베드로와 바울에게 저주의 벼락을 내 던졌다. 법은 그 법을 지킬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누그러워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인간의 여러 가지 법에는 이렇게 될만한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의 법에 관한 한 이 말에 대한 타당성을 나는 부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의를 위한 요구사항에 있어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멍에를……목에 두려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하다. 사람의 양심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짐을 그 양심에 지우게 될 때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영혼들은 실망 중에 사로잡히고 멸망에 이룰 수밖에 없으므로 구원을 받아야 될 영혼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권이 탈취를 당하여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하실 수밖에 없게 하는 하나님께 가하는 이 잘못을 우리는 잠시라도 자유롭게 해방하실 수 없게 하는 하나님께 가하는 이 잘못을 우리는 잠시라도 잡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 모든 설명을 떠나서라도 베드로가 단지 의식들만을 논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당시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짐작할 수가 있다.

 

13절.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교회에 관한 고대의 저작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야고보가 요세푸스의 〈고대사의〉의 제20권에서 그의 부끄러운 죽음을 보고하고 있는 '의로운 자'와 '오블리아스'라는 별명을 가진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신성함을 크게 칭찬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의 신분을 밝혀보려고 수고한 것으로 본다. 오직 그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그의 신분을 밝혀보려고 수고한 것으로 본다. 오직 그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는 그들의 설명은 하나의 유치하게 꾸민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 출입이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관련되고 있다면 대제사장이 아니었던 그가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방법으로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 성전을 섬기도록 격려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였다. 나는 다른 유사한 허탄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넘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였음을 부인함에 있어서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야고보는 바울이 교회의 세 기둥들(갈2:9)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높이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음을 억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도들보다 못한 반열에 있었던 사람은 그처럼 사도들보다 우월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라는 칭호로써 그를 영예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롬의 견해는 그 '기둥'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다른 교사들보다 사도들을 먼저 세우셨으므로, 이 말은 신중하게 취급되고 있는 반열상의 위엄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구절을 볼 때 그가 특별히 높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란 쉽다. 왜냐하면 그가 찬성함으로써 베드로의 말을 확증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의견에 따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들이 그의 의견에 따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권위가 얼마나 힘이 있었던가를 다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고대 저작자들은 그러한 상황은 그가 예루살렘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신실한 자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의향대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순위를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었으며 그리스도와 혈연의 관계에 있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주의 형제"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누구나 생각해 볼 만한 의문으로 남겨 둔다. 이 문제는 회의의 명령이 베드로보다는 야고보의 권세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로써 교황의 참람함은 반박된다는 사실을 제의하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제 2권의 시초에서 그가 어떤 야고보였든간에 그는 사도들의 감독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로마 사람들은 지금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전체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베드로 위에 또한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다.

 

19절. 하나님께로…… 자들을 괴롭게 말고.

 

'피'와 '목매어 죽인 것'에 관해서는 유대인들만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이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신12:23). 그러나 이 법은 홍수 직후에 온 세계 사람들에게 주셨던 것이었다(창9:4). 그러므로 온전히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 사람들도 피는 싫어했었다. 나는 이 경계의 말씀 역시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경계는 한 국민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이 경계를 범함으로써 큰 장애물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른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문제는 '음행'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단지 장애물이 된다는 견지에서 피해야 한다고 말한, 그 어느 편으로도 기울어져 있지 않은,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다 이 음행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는 불법이 아닌 것들의 부류에다 이 음행을 연관시킨 데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음행의 방종이 어디에나 억제할 수 없이 심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특별히 이 병폐는 동양 사람들 가운데 너무도 심했다. 그들은 더욱 정욕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결혼에 대한 성실성과 정절이 이 곳보다 양심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던 곳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간음이나 모든 정절이 공공연하게 침해되고 부패되는 종잡을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과 같은 모든 종류의 음행을 분별없이 문제로 삼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첩을 두는 일인데 이방인들은 첩을 두는 일에 너무도 습관이 들어 이는 거의 묵인된 법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서로 크게 다른 것들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것들에다 일반적인 부패를 포함시킨 것은 불합당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깨끗치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더러움에 대한 핑계로서 이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반박하기는 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고보는 피를 먹는 것과 음행을 결부시켰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로 비슷한 것들 혹은 최소한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것들을 비교하고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과 질서의 첫째가는 법에서 떠난 사람들이 변질되고 부패된 관습만을 숙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에 관한 한 이 관습을 알려면 성경의 영구적인 교훈에서 이를 찾아보아야 한다.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사실에는 애매한 점이란 없다. 다시 말하면 음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주받을 행위이며 사람의 영혼은 이 음행에 의하여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성전인 몸이 이 때문에 더러워져서 그리스도께서는 대신 상처를 당하셨으며 하나님은 매일 음행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어느 날엔가 두려운 보응자가 되실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하늘의 재판관이 그처럼 엄격하게 정죄하신 음행의 더러움은 이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웅변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그럴 듯한 말로는 변명되지 못한다.

 

28절. 성령과 우리는 …… 가한 줄 알았노니.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특별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이 말씀으로부터 증명하려고 하고 있으니 어리석다. 그렇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분명히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다스리심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가 잘못을 범할 수 없음을 주장할 어떤 구실도 막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폭로하는 것을 성령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시끄럽게 자랑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리석게 '가한 줄 알았노니'라는 말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사도들이 성령을 떠나 어떤 것을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면 회의에서는 성령께서 선언하신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결정될 수 없다는 이 기본적 원칙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이 말씀을 구실삼아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은 마치 사람들이 양심을 묶어놓는 법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들은 교회가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파하는 것 같은 노력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자기들이 명한 것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 없는 말에 대한 쉬운 설명이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에는 연합을 파괴하는 위험 이외에 다른 점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말하자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은 우연 혹은 부대적인 것,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피하려는 것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명령이 즉시 폐지된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들에 관한 법은 영속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란과 말다툼이 끝나자마자 이 법은 바울에 의하여 폐지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울은 깨끗지 않은 것은 없으며, 어떠한 음식,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허락이 우리에게 있음을 가르쳤다(롬14:14, 고전 10:25). 이에 따라 그들은 이 말씀으로부터 양심을 얽어매는 헛된 핑계를 붙잡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필연성은 사람들의 외적 행위에만 관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필연성으로부터 어떤 추문도 생겨나지 않게 하고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본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구절로부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라도 결정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추론하려는 것도 헛된 일이다. 교황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법을 만들며 이 법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열 가지나 스무 가지나 스무 가지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악스럽게 영혼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영혼들을 괴롭히는 데 무서운 고문을 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잔인함을 변명하기 위하여 교황이 고용한 궤변가들은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고 있지 않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금지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도 보태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사도들의 목적에 유의하기만 하면 이 사실은 상당히 분명해진다. 나는 사도들이 믿는 자들을 얽어매는 영구적인 법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음을 잠시 전에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들은 때가 되면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적응하도록 교회 중에 형제다운 화평과 일치를 증진시키기에 합당한 한 가지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랑이 중립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 중에 규칙을 정하여 놓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자체에 있어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그 몇가지의 외적 실행은 사랑의 규범에 따라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이 율법의 온전함과 목적을 위한 피가 되며 하나님의 명령은 신실한 자들이 피차의 연합을 명하고 각자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 이웃에게 봉사할 것을 명한다면 여기서 사도들이 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지 못할 만큼 무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규범을 자기들의 시대에 적응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앞에서 말했던 것을 생각하자. 양심에 대하여 어떠한 올무도 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헛된 예배를 소개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행정적인 법에 관한 것임을 나는 말했다......사도들이 교회들의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그 시대의 형편에 따른 외적 행위에 관한 법을 제의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를 넘고 있지 않았다는 본 절이 충분하게 의미하고 있는 내용을 알기로 하자.

 

30절. 무리를 모은 후에……

 

이 편지를 읽고 또 모든 사람이 이를 듣도록 온 무리를 모으는 것은 바른 일이었다. 믿음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 어떤 논쟁이 일어나면 이에 관한 결정은 성경을 잘 알고 경험이 있는 유식한 사람들, 특히 바르게 세워진 목사들이 이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붙잡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심거리이므로 교사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결정한 것을 각자 형제된 입장에서 전체 교회와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교황이 다스리는 횡포 아래서 늘 그런 일이 생기듯이 일반 백성은, 마치 돼지 떼인 것처럼, 일반적인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부터 배제되는 것보다 거룩한 그리스도인 질서에 있어서 더욱 모순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교황과 주교들은 그 백성이 우둔한 무지에 이르기 전에는 충분히 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요점이란 성직자인 자기들의 의견에 따르기 위하여 교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이편이나 저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는 지배 당국이 아무런 소란이 없이 그 맡은 일을 계속하고 한편으로 그 백성은 노예들처럼 억압을 당하지 않고 그들의 자유가 보전되기 위해서이다.

 

31절.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그 편지는 극히 짧았고 공적인 기록 외에 아무 것도 부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믿는 자들이 그 편지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 편지 속에 위로를 위한 많은 근거들이 있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이 일치하고 있었던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일치하지 못했던 마음들도 훌륭한 상태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소문은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요란스럽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망설였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때를 중상의 기회로 삼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과 색다른 것을 즐기는 마음으로 자극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판단이 바울과 바나바의 교훈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원하는 것, 즉 바른 믿음 안에 서서 일치된 중에 조용한 마음으로 서로 화평을 이루는 것을 얻게 되었다.

 

32절. 유다와 실라도……

 

이 두 형제들은 말로써 그 편지에 증거를 더 보태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이들이 보냄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도들은 그처럼 중요한 일에 관하여 그처럼 짧고 간결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믿음의 신비에 관한 어떤 것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경건하게 헌신하도록 상당히 긴 권면을 썼을 것이다. 당시에 누가는 그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 교회에 덕을 세웠다는 사실도 전해 주고 있다. 그는 마치 그들이 급한 상황에 있어서 자기들의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고 권면함으로써 그 교회를 위하여 유용한 봉사를 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 누가는 그들이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교회를 격려했다고 말한 사실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별된 기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의 분량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전7:20,엡4:1)고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아무라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하게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일은 특별한 일이라는 누가의 말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일은 특별한 일이라는 누가의 말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가르칠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야심에 의해서나 분별없는 열심이나 다른 어떤 어리석은 욕심에 의하여 그 위치에 서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지자라.

 

이 '선지자'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겠지만 본절에서는 미래 사건을 예고하는 선견자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다른 상황이 취급되고 있는 도중에 매우 어울리지 않게 삽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유다와 실라가 하나님의 신비를 잘 이해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받아 하나님에 관하여 설명하는데 뛰어났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서, 예언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예언을 다른 모든 은사들보다 강조하면서 미래의 것을 말하거나 알려 주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르치고 위로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결과를 내세워 이를 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방법으로 누가는 마치 권면이 선지자들이 가졌던 직무의 주요한 의무였던 것처럼, 이 권면하는 일을 선지자들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로이드돈스연구사이트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