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스크랩] "축도"의 의미 /이광호목사님

baromi 2009. 2. 19. 12:51

“축도”의 의미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목사가 축도할 때 자기의 의도를 섞어 마치 목사 자신이 축복하는 권한을 가진 듯이 길게 축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축도란 목사가 교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약속된 그 언약을 주님의 몸된 교회 앞에 말씀의 선포자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공 예배 시간에 목사에 의해 선포되는 축도는 언약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대다수 교인들은 축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다. 축도를 하는 목사도 그렇거니와 각종 예배 모임에 참여하는 일반 교인들 역시 축도가 마치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행위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직 기록된 성경 말씀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성실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축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축도는 지상의 교회들이 공 예배 가운데서 복음의 상속을 확인하며 드러내는 고백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도는 종교적 색체를 띤 다양한 모임에서 무분별하게 행해져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한국 기독교의 경우 결혼식, 장례식, 심지어는 개업식에서도 목사가 축도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총회와 신학교의 개학식 및 졸업식 혹은 경건회 시간에도 축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행위인 축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즉 특별히 잘못된 의도가 있지 않은 한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축도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축도의 본질적인 성격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다양한 집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도록 허락된 것이 아니다. 축도는 목사가 하나님께 복을 빌거나 공적인 자리에 함께 한 여러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종교적 행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그에 관한 잘못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적 정체성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교회의 의미와 더불어 축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축도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주일 공 예배 시간에 말씀사역자인 목사에 의해 교회 가운데 선포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마치 축도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축도는 목사의 개인적인 권한이 아니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도는 다양한 형태의 예배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세례와 성찬이 있으며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 주일 공 예배 시간에 전체 성도들 가운데 행해지게 된다. 그 축도는 역사적 교회를 상속해가는 언약적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 따라서 지상의 건전한 교회들 가운데 존재하는 축도 사역 또한 지속적으로 상속되어 간다.

  현대교회가 유념해야 할 바는 목사가 축도를 자의적으로 오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가운데는 목사가 미사여구를 섞어 형식적으로 근엄하게 축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조장되어 있다. 따라서 목회 경험이 많은 연로한 목사의 축도가 안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목사가 하는 축도 보다 더 권위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축도가 마치 목사의 개인적인 권위를 드러내는 방편이 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축도는 결코 교권적인 의례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공적사역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축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교회에서는 목사가 축도를 할 때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는 손바닥을 위로 향할 것인가 아래로 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하기도 한다. 그리고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를 두고 논란을 빚기도 한다. 이를테면 축도의 맨 끝부분에 “~있을찌어다”가 옳으냐, “축원하옵나이다”가 맞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논란이다.

  도리어 그러한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은 축도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개혁교회에서는 인간들이 축도에 사용되는 말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교회를 향해 전한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건전한 교회들은 대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축도한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교회는 말씀사역자인 목사가 공 예배 시간에 축도로서 선포하는 언약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상속이 지속되어 가고 있음을 매주일 확인하게 된다. 이는 지난 주일에 축도로서 언약이 선포된 것처럼 이번 주일에도 선포되며 다음 주일 공 예배 때에도 선포될 것이다. 그 축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까지 교회 가운데 선포된다. 그러므로 축도는 교회의 상속을 확인하는 언약의 선포인 것이다.

  축도의 본질적인 의미가 실종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시대에 그 진정한 의미와 실행이 회복되어야 한다. 축도는 결코 특정한 직분자들의 권위를 세우는 방편이 될 수 없으며,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축복을 받게 하는 방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여긴다면 잘못된 축도 자체가 우상화될 우려가 없지 않다.

  지상의 건전한 교회들이 매주일 올바른 말씀선포 및 성례와 더불어 온전한 축도가 선포되는 공 예배를 드린다면 보편교회의 하나(one) 되는 아름다움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교회의 참된 일치는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존재하는 언약의 동질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것이다. (크리스챤 한국신문)

       

 

교회와성경에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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