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스크랩] 변목사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나? (큰믿음교회 셀모임 교재의 오류)

baromi 2009. 2. 19. 11:55

 

 

오늘 카페의 한 회원이 올려준 큰 믿음교회의 셀모임교재를 보았습니다.

 

그 교재의 내용들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앞 뒤 맞지 않는 소리는

성경대로 믿고자 따지는 사람들이라면 금방 앞과 뒤가 맞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교재를 보면서 굳이 이단으로까지 몰아갈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는 변목사는 <구원>에 대해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그가 구원론에서 사용되는 각 신학용어들(중생, 회개, 믿음, 칭의, 성화)의 개념과 각 용어들의 관계성에

대해 무지한 상태임을 여실히 자신의 책을 통해 드러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그는 자신의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부족한 지성인이라는 점입니다.

 

일단 그의 셀그룹교재에서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그가 얼마나 앞뒤 맞지 않는 모순된 글을 쓰는지 이러한 것을 알고 계시면서 변목사의 글이 옳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맹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1월둘째주. 지금은 다림줄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1. 타협하거나 변질되지 않은 순수하고 강렬한 말씀의 회복을 통해 대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1) 부흥의 1단계-말씀
강해설교나 교리적이지 않고 성경적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한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영이요 생명의 말씀의 회복
(2) 부흥의 2단계-회개
말씀이 회복되면 사람들의 심령을 찌름, 그래서 상한 마음이 되어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남.
(3) 부흥의 3단계-성령
말씀의 날선 검이 사람을 찔러대면 그게 바로 회개의 영입니다. 회개는 강요한다고 터지는 것 아니며, 그때 회개가 터집니다. 회개한 자에게 성령이 임함
(4) 부흥의 4단계-은사
말씀에 찔림을 받아 회개가 터지고 성령이 임하시면 이제 성령께서 선물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
(5) 부흥의 5단계-부흥
성령임하시고 은사가 임하면 부흥이 일어남

말씀의 회복은 회개를 불러오고, 회개를 통해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은사를 선물로 너눠주고 그리고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 큰믿음교회는 그들이 전하는 다림줄이되는 성경적인 바른 메세지로인해 부흥을 오게 하는 통로로 사용받게 될 것입니다.

 

3. 지금은 큰 믿음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2) 큰믿음교회의 흐름이 곧 성령의 흐름이기 때문
-교리가 아니라 진리(성경)
-종교가 아니라 성령
-사역이 아니라 사랑
-군림이 아니라 섬김
-부흥이 아니라 임재
-자기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부흥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말씀회복의 첫 단추가 바로 말씀회복이라고 합니다. 2 단원에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 3단원 에서는 성령의 흐름이 <부흥이 아니라 임재>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러한 말을 하기 바로 전 문장까지만

해도 부흥이 오는 다림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흐름이라는 목록을 적었는데,

<부흥이 아니라 임재> 라고 합니다. 그럼 앞에서 언급한 부흥의 5단계는 무엇인지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혹시 설명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냥 읽기에도 이 얼마나 앞뒤 맞지 않는 소리입니까?

 

 

이렇게 일반적인 문장 구성에 있어서 모순점을 드러내는데, 하물며 더 신경을 써야 하는

하물며 더 심각하고 심도있게 신경써야하는 신학용어들이야말로 얼마나 허술하고 지멋대로

해석해서 적용했는지는 그의 글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먼저 그는 존라일의 글을 인용합니다. 존 라일이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사항인, 칭의와 중생>을 언급하자

이 둘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고 말합니다. 즉 중생과 칭의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존 라일의 글을 잘못 읽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해를 못했다고 해야 옳습니다.

 

 

 존 라일의 글

변목사의 엉뚱한 해석 

 주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수행하시는, 명백한 두 가지 사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의 피로 죄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값없는 용서를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불어 넣으시고 우리를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거듭남)"입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둘 다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즉 죄책 때문에 인간에게는 '칭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적부패 때문에 인간에게는 "중생(거듭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마치 동전과 같아서 한 면이 아니라 양면이 있는데, 한면은 "칭의"이고 다른 면은 "중생"입니다. 한면만 보면 그것이 전부인것 같지만 사실은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참된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둘다 있어야 합니다.

 

 

중생과 칭의는 다 하나님의 행위지만 둘은 차이가 있음을 변목사는 알지를 못하는 상태에서 존 라일의 글을

해석한 것입니다. 중생은 우리 안에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이고, 칭의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중생은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만, 칭의는 죄인의 신분을 변경시켜 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을 변목사는 미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존 라일의 글을 읽었는데,

그것은 바로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는 회개와 믿음 전에 중생이 먼저 선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온 후에 회개와 믿음이 있고 그리고 그러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됩니다.

회개와 믿음은 시간적 과정으로 반복적이지만 회심은 일회성입니다. 이러한 회심을 통해서 칭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 전에 중생이 먼저 선행되어야하는 이유는 중생이 없이는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개와 믿음이 동전의 양면인데, 믿음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지적하기에 그가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의 변목사는 이러한 중생과 회개와 믿음 그리고 회심과 칭의라는 구원과 연관된 신학적 용어들의

개념과 각 용어들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중생>과 <칭의>가 구원의 동전과 같다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동전의 양면>에 대한 언급은 두 개가 같이 이루어질때에 사용되는 예문입니다.

즉 믿음과 회개는 같이 굴러간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전의 양면을 언급한 것이며,

또한 동시에 두 사건이 일어날때를 가르쳐 동전의 양면이라는 예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변목사가 사용한 동전의 양면인 <칭의와 중생>은 서로 시간적으로도

틀린 것으로 위의 동전의 양면 예는 잘못된 적용입니다.

 

만약 변목사의 위의 동전의 예화대로라면 <중생>과 <칭의>가 동전의 두 양면이라면

중생이 일어날 때 뒷면인 칭의도 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중생과 칭의 중간에 회개와 믿음과 회심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변목사의 위의 주장은 회개와 믿음 없이 칭의를 받게 되는 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목사는 그의 교재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회개를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변목사가 <중생과 칭의>라는 두 신학용어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존 라일의 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고

그것을 또한 잘못 적용해서 동전의 두 양면이라고 주장하는 것임이 여실히

자신이 스스로 쓴 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 구원의 순서를 보면

중생과 회개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중생은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성화까지 포함된

중생을 말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용어들을 말함에 있어서

칭의와 수양, 성화와 견인, 회개와 믿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생과 칭의와 동시적이라고도 합니다.

 

문제는 변목사의 이러한 구원론 해설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가 있음은 스스로 진단하고 수정을 해야하는데

수정하라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되려 역공격을 합니다. 그럼 이렇게 되려 큰소리치며 수정하라는 자들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외칩니다.

 

기본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중생이 일어나야 믿음과 함께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심을 통해 칭의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중생과 칭의가 같이 굴러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중생이 굴러갈때(즉 일어날때), 칭의도 굴러가야한다(일어나야)는 말입니다.

그럼 변목사의 주장은 회개와 믿음 없이 칭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도 없이 죄에 대한 회개도 없이 칭의를 얻게 된다는

말인데, 이러한 말을 변목사가 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회개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도 안되는 구원의 논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중생과 칭의라는 신학용어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모르면 좀 배우든지, 잘못됨을 지적하면 받아들이든지 해야하는데,

끝까지 고집을 피우니.. 어찌합니까?

분명히 자신이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면 받아들여 수용하겠다고 한 그 약속도 지키질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킨다면 위의 교재를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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