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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의 구속 사역 (행1:1-5) / 존 칼빈

baromi 2009. 1. 5. 08:58

그리스도인의 구속 사역 (행1:1-5)

 

 

1. 그리스도의 수난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형제가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으므로 거룩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셔야 했으며 그러한 교훈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으므로 주님은 그것을 신뢰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은 반항하지 않고 그들에게 잡혀가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 즉 우리 모두를 구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을 대에 그 과업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뜻은 은밀하여 진실로 우리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섭리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 선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 도는 저것을 결정하셨다는 특별한 계시를 항상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에는 우리의 판단을 보류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가 빠져있는 재앙에서 구해주시기를, 또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율법을 부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덧붙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로 인정해 주실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위탁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1)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1-4)

 

여기서 우리는 누가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소망을 갖고 기다려야 하는 나라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가 의미한 것은 영적인 통치로서 이 통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에게 순종하게 하시고 마침내 그이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시며, 우리에게서 이 썩을 몸을 벗겨 하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말하고자 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편은 복음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주 복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마4;23,9:35,24;14, 막1;14). 만일 우리가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나누어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주께 오라고 부르고, 우리가 주님의 성령에 의해 중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것은 우리가 변화되어 예수께로 나아가고, 우리 자신의 것을 던져 버리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이 없으면 마귀가 지배하게 되므로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어떤 지방에 전파되게 하시는 것은 마치 “나는 너를 지배하여 너의 왕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2)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카톨릭교회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들은 말로는 “나는 이것을 믿고, 저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하기를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누가 그것을 말해 주었습니까?“”우리의 선조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확신이 없고 무익한 견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카톨릭 교회에서 끌어내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가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바 믿음의 기초가 되는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것을 확증해 주시지 않으면 이 일은 가능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확실한 것임을 보여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안정을 얻지 못해 동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신실한 증인이시기에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더욱 많이 이 일을 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는 “내가 하늘로 올라가서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노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요14;16,26,28,15:26). 주님은 제자들이 끊임없이 주님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확인하여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약속의 확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직책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직책을 헛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 열매와 노고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씀인 듯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에는 결코 헛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이 직책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가 그의 충만하심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직책이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의 경험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말미암는 유익을 함께 나누어 갖게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게 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 안에는 아무 진리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안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물로만 세례를 받는 유대인들에게 항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해야 했던 까닭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려야 할 것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단지 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세례를 줄뿐이며, 은혜의 세례를 주는 것은 자기의 직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을 인용하여 “너희는 이것을 조금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미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특권이 오직 나에게만 주어졌음을 들은 일이 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악한 미신에 사로잡혀 피조물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베일이 됩니다.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피조물이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상에는 거룩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수만큼 많은 우상들을 마련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상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우상들에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카톨릭 교도들은 자기 교회의 성도들을 칭송하고자 하여 주장하기를 “ 그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시편기자가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라고 한 것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엄 있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그와 같이 해석하는 그들은 짐승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성도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도들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며, 아마도 하나님과 성도들이 같은 계층으로 분류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격언 중에 “사도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마치 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조각조각 찢어 나누어, 자기들이 보기에 선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라도 그 영광의 조각을 나누어준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찬양을 받으셔야 하며, 선지자들과 순교자들은 주님과  비교할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카톨릭교회의 처사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피조물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 영광을 강탈하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라는 말씀은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요한의 세례가 불완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요한이 말한 의도는 그가 제공하는 성례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밝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세례는 동일한 것으로서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에게는 세례에 가치를 부여할 능력이 없으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베푼 세례는 분명히 참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징을 보지 않고 진리를 바라보아야 하며, 또 그 상징도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에 관해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옛 아담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실 때에 우리의 모든 더러움이 깨끗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요점입니다.

 

이제 요한이 이것들을 모두 행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전파했으며, 이 목적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하나임의 고의가 우리 안에서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타락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에서 그 밖에 다른 것은 발견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역자의 인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 세례는 죄를 씻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가 정결하게 되고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아나니아는 사도 바울에게 세례를 주면서 “와서 네 죄를 씻으라”고 했습니다(행9:18,22:16). 또한 우리가 세례라고 말할 대에 그것은 단지 상징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상징되는 진리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따라 생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모든 것이 세례 안에 포함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진 권한은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며, 주님은 세례가 표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내면적으로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실재와 상징이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한 토막의 어릿광대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시적인 상징이 나타내는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상징과 실재를 결합시키십니다.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어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참된 그의 지체가 되게 됩니다.

 

교훈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물에 있다고 여겨 마치 마법사처럼 그것을 부적으로 만들며, 그 물에 성례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정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남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능력을 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여자들에게도 그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세례의 실재가 물 속에 있다고 생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의 실재는 물에 잇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라는 상징이 무익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씻음을 증거해 줍니다. 그러나 실재를 소유하려면 우리는 성령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물이나 사람에게서 성령을 구하지 않고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아직도 이것을 무시해 오고 있습니다.

 

"불“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부정함을 제거하기 위해 주님이 우리를 정련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금과 은을 불 속에서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오염된 것들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일은 성령께 속한 일임을 생각할 때 성령에게 이 같은 명칭을 붙인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오직 타락만을 가지고 왔으므로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살수록 그만큼 타락과 부정을 더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렘17:9). 우리 안에는 온갖 사악함의 소굴이 있으며, 하나님만이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다 밑바닥에 닻을 던질 수 있으나, 우리 마음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나쁜 병에 감염되었으며, 마치 문둥병자처럼 냄새를 풍기고 있어 무서울 정도입니다. 이런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실제로 세례 안에는 주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고 우리의 결점을 깨끗게해 주신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불 속에서 금속을 정련할 때에 필요 없는 불순물들이 모두 제거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회복하려 하실 때에는 우리 자신의 것들을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자아라는 것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멸망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항상 온전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받아들일 만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낮추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불같은 성령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직무가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며, 우리는 그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시면서 세례를 제거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상징을 남기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이 성례를 유효하게 하기 위해 항상 성령을 통하여 임재 하실 것이라는 완전한 증거가 됩니다.

 

4. 오순절 설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참된 그이 지체가 될 때에 이사야가 말한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에 의해 사용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령을 완전하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은사에는 분량이 있으며, 우리는 더욱 큰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항상 의지하고 열심히 주님을 부르게 되고, 겸손해지며 우리 안에 여전히 많은 허물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더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1:6-10)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누어 갖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성도들”, 즉 신자들의 특성을 묘사했습니다.

(1) 이 세상의 더러움에 빠진 사람들은 이 기업의 일부를 소유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 공통된 것을 소유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서”라고 말한 것은 믿음이 모든 거룩함의 근원임을 나타냅니다.

(3) 만일 우리가 순결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성화됩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만일 우리가 더러움과 타락함 속에서 뒹굴어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분리되며, 그의 재림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지 말라 그 날은 우리에게 구원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공포와 놀라움의 날이 될 것이며, 잔인한 혼동의 날이 될 것이며, 어두움의 날이 될 것이다.” 그 시대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패를 삼는 위선자들이 많았으므로 이 선지자는 그들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을 나타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 까요?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선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운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개나 돼지처럼 많은 신앙을 가진 불경하고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에는 불충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여우만큼도 믿음이나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배반과 위증과 잔인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신경질이나 화를 내며,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바치는 사람만이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의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장사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믿음과 명에도 팔아먹습니다. 그들은 상점을 열어 공개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교회 안에서 가장 신앙심이 좋은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고맙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고 자랑을 하지만, 실상 그들은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보는 것처럼, 이 선지자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찌 된 일이냐? 왜 너희는 교만하게 뽐내고 있느냐? 여호와의 날을 자랑하느냐? 너희는 그가 오셔서 너희에게 무엇을 주시리라고 생각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날은 너희에게 두렵고 떨리는 무서운 날이 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다만 공포와 경악만이 임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구세주로 나타나시기를 원한다며, 스스로를 거룩하게 해야 하며, 이 세상과 육체의 더러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 일에 성공하려면,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은 거룩함의 원천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겉으로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깨끗케 해 주시지 않는 한 항상 더럽고 흠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정은 만일 우리에게 참 믿음이 있다면 더욱 성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권면입니다. 즉, 우리가 변화되어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성경, 특히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포옹하는 순간에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가 여전히 악하고 더러운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 아닙니까? 주님이 돼지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주님은 거룩, 공의, 의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방탕하고 악하게 생활하고 세상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나는 태양은 좋아하지만 그 밝음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뒤집는 말입니다. 밝은 빛을 비추지 않는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고의를 지니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복음을 믿고 안다고 하는 위선의 가면을 쓰지 맙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것과 주님이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성화시키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게 하셨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거짓된 표시들을 의지하여 믿음이라는 명칭을 강탈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거룩한 것이므로 그것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며,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그이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이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지만, 결국 주님의 영광과 의로 옷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이 약속의 능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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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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