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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제1부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

baromi 2008. 11. 25. 19:08

스크랩] 제1부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

  • 글쓴이: 고목사
  • 조회수 : 21
  • 08.08.2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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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들의 예들을 전부다 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

 

더러 또한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

 

이라는 것은 다음에 인용한 대표적 인물들의 사상의 예들을 통해 분명하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을 인물별로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를 원하지 않는 분은 4장으로 넘어가십시오.>

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2.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3.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5.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6.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7.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     )

 

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9.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   )

 

10.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11.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이다. 그는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객관적 계시의 기록임을 부정하고,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이중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Church Dog- matics, I. i. pp. 122, 123).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Ibid., p. 124).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Ibid., p. 127).

성경은 인간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연구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연구는 성경 안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체적 인간적 형식의 증거를 명백히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연구가 그 증거의 대상 즉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드러내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twofold)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pp. 66, 67).

 

1-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축자(逐字, 글자)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533).

 

1-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 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1-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The Humanity of God, p. 49).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Ibid., p. 51).

 

1-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 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1-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171).

 

1-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1-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1-9.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로마서 3:24의 설명에서) "나사렛 예수 즉 육신을 따라 난 그리스도는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가운데의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의 모든 표들을 소유하신 그 가능성이시다. 그의 생애는 역사의 구조 속의 한 역사이며, 다른 구체적 사건들 가운데서의 한 구체적 사건이다. . . . 그러나 그것은 의미를 가득히 가진 역사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구체성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p. 103, 104).

"그의 피를 흘림으로써 . . . 심판자 자신은 . . . 그를 믿는 사람들 전체를 위한 유화적(宥和的) 제물이 되셨다. 그는 그들의 정죄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그 형벌의,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결과들의, 책임을 짊어지셨다"(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p. 46) 이 진술은 대리적, 형벌적 속죄, 그것도 제한 속죄를 믿는 것 같으나, 그는 처음의 로마서 주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1-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1-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1-12.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Ibid., III. 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1-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1-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2.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C. H. 다드는 영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신약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29.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32.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51(1936).

About the Gosp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2-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 ta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2-2.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Ibid., p. 16).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2-3.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Ibid.,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2-4.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Ibid., p. 23).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Ibid., p. 24).

 

2-5.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Ibid., p. 79).

 

2-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진다.

"그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즉 우주의 의미를 표현하는 생애의 기록이다. 영원한 로고스[말씀]이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 생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서이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 . . 그 서두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어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신적 의미 혹은 원리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바로,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으나 실재상 그와 분리되지 않는, 이 원리이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pp. 284, 285).

 

2-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리라고 간주한다.

"요한에게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이기 때문에 . . . 부활이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느 저자들에게 가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의를 거의 가질 수 없다"(Ibid., pp. 440, 441).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승귀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지만."(Ibid., p. 442).

 

2-8.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Ibid., p. 59).

 

2-9.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Ibid.,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2-10.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정한다.

"그 서신의[데살로니가후서의] 첫번째 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구절(7-10절)은--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것이 문체에 있어서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고 논평했는데--유대교적이든지 혹은 유대-기독교적이든지 간에 실상 당시의 어떤 묵시 문학의 인용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거기에는 그 내용에서나 그 일반적 어조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The Apostolic Preaching, p. 37).

 

3.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라인홀드 니이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회윤리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Beyond Traged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38.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43.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55.

 

3-1.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93).

 

3-2.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Beyond Tragedy, p. 3).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Ibid., p. 7).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3-3.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3-4.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 반대론(obscurantism)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Ibid., p. 10).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Ibid., p. 11).

 

3-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Ibid., p. 13).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Ibid., p. 14).

 

3-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Ibid.,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3-7.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3-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Ibid., p. 290).

 

3-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Ibid., p. 21).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상징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내버려질 수도 없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3-10.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 dy, p. 290).

 

3-11. 마지막 심판을 부정한다.

"신약의 상징론에서 에스카다(eschata) 혹은 '마지막 일들'은 세 개의 근본적 상징들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부활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90).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Ibid., p. 294).

 

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루돌프 불트만은 불트만학파의 시조이며 신약신학자이었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Scribner, 195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asil Blackwell, 1970.

Theology of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1951-55.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1.

 

4-1.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적 증거성을 부정한다.

"그 두 이야기들은 역사적 서술들로서 조화될 수 없다. 실상, 그렇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각 이야기의 독특한 의도를 파괴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16-20에 나오는 두 장면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믿을 만한 역사적 전통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p. 108).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메시아 혹은 인자(人子)는 유대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난의 예언들에서 인자라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이 재해석되었다는--혹은 더 낫게 표현한다면, 독특하게 부요하게 해석되었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러한 재해석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사건들 후에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31).

"만일 그 계시가 그[공동체=초대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그 공동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이 기도에서도 그 안에 계실 것이다. 사실 누가 기도하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 공동체이다"(The Gospel of John, p. 522).

"비록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정죄되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지라도, 요한의 묘사는 거의 더 나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Ibid., p. 637).

 

4-2.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6).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Ibid., I, p. 27).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The Gospel of John, p. 1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Ibid., p. 28).

 

4-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Ibid., p. 496).

 

4-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리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Ibid., pp. 62, 63).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4-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4-6.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 John, pp. 118, 119).

 

4-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여하튼, 아주 초대 교회는, 비록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Ibid., I, p. 51).

"[요한복음 10장] 17절 이하에서 복음서 기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라는 신화적 진술을 했고, 예수님의 권위의 증명을 위한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풍자적 대답을 첨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했다"(The Gospel of John, p. 282).

 

4-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4-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 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 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4-10.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대는 망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 선포가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즉, 세상의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그 기대가 망상으로 판명되었을 때--그의 신 개념이 또한 망상적이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2).

 

4-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공관복음서의 전통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혹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말들이 없다.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는 파루시아라는 말도 기독교의 최초의 시기에는 '돌아옴'으로가 아니고 '도착, 도래(到來)'로 정확히 이해되었다)"(Ibid., I, p. 29).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4-12.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Ibid., p. 14).

 

5.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폴 틸리히는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에 있다고 표현된다. 그의 사상들은 매우 과격하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5-1.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Systematic Theology, I, p. 3).

 

5-2.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 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Ibid., I, pp. 134, 135).

 

5-3.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Ibid., I, p. 141).

 

5-4.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 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Ibid., I, p. 11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Ibid., I, p. 35).

 

5-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Ibid., I, p. 35).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不)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Ibid., I, p. 158).

 

5-6.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Ibid., I, p. 51).

 

5-7.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Ibid., I, p. 20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Ibid., I, p. 237).

 

5-8.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Ibid., I, p. 245).

 

5-9.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Ibid., I, p.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p.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p.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p. 174).

 

5-10.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Ibid., III, p. 284).

 

5-11.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Ibid., I, p. 252).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Ibid., I, p. 263).

 

5-12.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超)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Ibid., II, p. 40).

 

5-13.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Ibid., I, p. 116).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Ibid., I, p. 267).

 

5-14.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 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Ibid., II, p. 29).

5-1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Ibid., II, p. 94).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Ibid., II, p. 109).

 

5-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Ibid., II, p. 107).

 

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Ibid., II, p. 131).

 

5-18.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Ibid., II, p. 176).

 

5-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케 하는 인상은 그의 자기 복종적 사랑의 인상이다. 이 사랑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마지막 말이라고 확신하는 응답적 사랑을 사람 안에 일깨운다"(Ibid., II, p. 172).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존재가 소외의 상태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에 대한 묘사이다"(Ibid., II, p. 170).

"하나님의 속죄적 행위는 그가 실존적 소외와 그것의 자멸적 결과들에 참여하심이라고 이해해야 한다"(Ibid., II, p. 174).

". . .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심이 드러나게 된다"(Ibid., p. 175).

 

5-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Ibid., II, p. 153).

"신들과 반신(半神, 절반쯤의 신)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순간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Ibid., II, p. 154).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심지어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Ibid., II, p. 15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蓋然的)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p. 15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probability)--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Ibid., II, p. 155).

 

5-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Ibid., II, p. 162).

 

5-2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Ibid., II, p.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p. 409).

 

5-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이라고 한다.

'재림'의 상징(Ibid., II, p. 163).

 

5-24.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Ibid., II, p. 78).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은 가장 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이다"(Ibid., II, p. 164).

"[영원한 죽음은]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액면 그대로 해석되면 완전히 모순되는, 영원과 죽음이라는 두 개념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결합은 영원으로부터 '떠난'(away) 죽음, 즉 영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 시간성에 내버려져 있음을 의미한다"(Ibid., III, p. 415).

 

5-25.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p. 418).

 

6.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훼퍼는 급진파로 분류되며 또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이다. 인용된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New York: Macmillan, 1959.

Ethics. New York: Macmillan, 195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67.

 

6-1.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內面性)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 p. 152).

 

6-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Ibid., pp. 196, 197).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Ibid., p. 199).

 

6-3.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Ibid., p. 153).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Ibid., p. 153).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Ibid., p. 156).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the thing itself)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 181).

 

6-4.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Ibid., p. 185).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Ibid., p. 186).

 

6-5.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p. 210).

 

6-6.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 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6-7.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숴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Ibid., p. 65).

 

6-8.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Letters from Prison, p. 209).

 

6-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 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Ibid., p. 211).

 

6-10.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1955],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7.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     )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 학파(The Heilsgeschichte)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Epworth, 195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rev. ed., 1963].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8.

 

7-1.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Ibid., p. 95).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 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Ibid., p. 96).

"하나의 전체로서의 구속사는 '예언'이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Ibid., p. 97).

"그 과정 전체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으로는 오직 계시의 대상일 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그것들은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결정을 통한 확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성경의 책들(역사서)에 언급된 것은, 완전히 믿음과 독립된 역사적 시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Ibid., p. 98).

 

7-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substance)와 성질들(natures)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 306).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Ibid., pp. 306, 307).

 

7-3.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Ibid., p. 162).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7-4.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발견한 바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용감하고 기쁜 원시적 기독교의 소망과, 불멸적 영혼의 잔존에 대한 평화로운 철학적 기대 간에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6).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Ibid., p. 17).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bid., p. 15).

 

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판넨베르크 학파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Revelation as History. New York: Macmillan, 1968.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2nd ed. 1977].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The Apostles' Cre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2.

 

8-1.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 . .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Revelation as History, pp. 13, 14).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현재 사건들의 규명된 목표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일어난 후에만 하나님의 신성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계시를 역사의 끝에 두는 것은 계시의 간접성에 근거한다"(Ibid., p. 131).

"바울의 복음은 그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이 그 완성된 형태로, 들리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의 저작 사이에 바울의 사상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반대되는 가장 작은 증거가 아니다"(Jesus--God and Man, p. 73).

8-2. 사람이 성경을 판단하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94).

 

8-3. 사도신경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10).

"사도신경의 표현 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 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 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 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 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 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Ibid., p. 13).

 

8-4.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兆)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8-5.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72).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Ibid., p. 73).

 

8-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Ibid., p. 98).

 

8-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진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성(nature)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The Apostles' Creed, pp. 63, 64).

 

8-8.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 70).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8-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Ibid., p. 104).

 

8-10.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Ibid., p. 91).

 

9.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   )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독일의 신약 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65.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Scribner, 1971.

 

9-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9-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Ibid.,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Ibid., p. 310).

 

9-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53, 54).

 

9-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Ibid., p. 59).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Ibid.).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Ibid., p. 65)

 

10.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은 카톨릭 예수회 신부이며 철저한 진화론자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Hymn of the Universe.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Divine Milieu: An Essay on the Interior Life. New York: Harper & Row, 1965.

Science and Christ. New York: Harper & Row, 1968.

The Future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9.

 

10-1.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294).

 

10-2.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Hymn of the Universe, p. 133).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Ibid., pp. 143, 144).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The Phenome- non of Man. p. 39).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Ibid., pp. 79, 80).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Ibid., p. 221).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Ibid.).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The Future of Man, p. 66).

 

10-3.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12).

 

10-4. 에큐메니칼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 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 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Science and Christ, p. 190).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Ibid., p. 197).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Ibid., p. 198).

 

11.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크리스터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장이며 신자유주의 학파로 분류된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Krister Stendahl. New York: Harper & Row, 1957.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8.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Edited and Published by National Geographic Society, n.d.

 

11-1.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 3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Ibid., p. 35).

 

11-2.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 12).

".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Ibid., p. 26).

 

11-3.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 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 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p. 3).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Ibid., p. 4).

 

11-4. 기독교의 절대적, 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두드러지게 다르다"("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p. 7).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리운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Ibid.).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Ibid.).

출처 : 강동교회청년부
글쓴이 : 박기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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