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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김영한 교수가 인용한 오스카 쿨만의 신학적 문제...

baromi 2008. 11. 25. 18:58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적 종말론

  • 글쓴이: xian
  • 조회수 : 12
  • 08.11.0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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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만의 종말론과 몰트만의 종말론에 대해

 

 

 

이택환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적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에 위치시키면서도, 현재의 고난의 문제를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통해 훌륭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쿨만은 슈바이처의 미래적 종말론에 대해서는 ‘이미’의 개념으로 대결하고, 불트만의 비신화화 된 영원한 현재적 종말에 대해 ‘아직’의 개념으로 맞서는 것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이 이를 비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구속사적 종말론이 지니고 있는 지나친 낙관주의입니다. 쿨만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승리가 결정되어 있으므로, 단지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자동적으로 도착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이 최후의 날이 아니라, 최후의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지요. 몰트만은 쿨만의 종말론에서 계몽주의의 이신론적 사고를 보았습니다. 이신론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없지요. 하나님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 놓은 프로그램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모순!

 


몰트만은 바르트의 후예답게, 종말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말의 때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시는 때가 곧 종말이라고 보는 겁니다(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참조). 몰트만은 전자를 ‘Future’(시간이 흘러서 오게 되는 미래), 후자를 ‘Advent’(미래에서 현재로 도래하는 미래)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역사적으로 대림절(Advent) 신앙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마땅히 ‘Advent 종말론’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 참여에 있어서, 쿨만의 종말론은 긴장감이나 절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모든 게 저절로 되고 있는데, 우리가 굳이 한다고 나서봐야 나중에 하나님이 다 엎어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고..., 반면에 몰트만의 종말론은 깨어 있지 않으면 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수 없다는 긴장감과 절박함이 있습니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일관되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의 폐기가 아니었듯이, 현재의 것에 대한 폐기가 아닌, 그러나 완전히 새롭게 된 현재의 것이라는 측면을 놓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몰트만의 종말론에는 현재의 것에 대한 개선으로서의 정치 신학이나, 보존으로서의 환경신학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편 쿨만의 낙관적 사고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곧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라는 오만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이 곧 대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거지요. 반면에 몰트만적 사고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그리스도/사도바울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것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메시지이고, 어떤 것이 인간이 밀고 나가려고 하는 속셈인지를 잘 분별해 낼 것을 촉구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는 과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앞에 깨어 있는 의식 속에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단지 성경적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식 밀어붙이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몰트만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쿨만의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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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을 그림으로 표시하자면,

 


-슈바이처의 종말론 : 앞에 있는 점으로서의 종말론(무한히 연기된 미래적 종말론)

-불트만의 종말론 : 위로부터 내려오는 화살표로서의 종말론(날마다 종말의 은총을 살아가는 현재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의 종말론 : 앞으로 나아가는 화살표로서의 종말론(이미 시작되어 시간이 지나면 완성되는 종말론)

몰트만의 종말론 : 앞에서 다가오는 화살표로서의 종말론(완성된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종말론)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와 시간』에 대하여

이달 교수(한남대, 기독교학과)

 

  오스카 쿨만의 초기 역작에 속하는『그리스도와 시간』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쿨만은 이 책을 철저 종말론 (consistent eschatology)과 비신화화 논의가 한창이던 1 차 세계 대전 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썼다. 비록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은 2 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6년이지만, 쿨만이 이전에 쓴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와 교회』 (1941)와 『초대 기독교 신앙 고백』 (1943)을 비롯한 10 여년의 연구가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시간』의 목적은 기독교적 선포에 있어서 무엇이 핵심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약 성서 계시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요소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쿨만은 신약 성서에 대한 주석에 근거를 두고 슈바이쩌의 철저 종말론적 입장과 달리 오히려 현재 (이미 완성됨)와 미래 (아직 성취되지 않음)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종말론을 이해하였다. 쿨만은 불트만이나 슈바이쩌가 비판하는 구속사관을 고수하면서 신약 성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구속사의 핵심은 시간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이다. 이 중심점은 양적으로 양분된 시간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의 결정적인 절개 (incision)를 뜻한다. 따라서 쿨만은 그의 관심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선적 시간 (linear time)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선적 시간은 쿨만의 구속사를 위한 틀로서 기능할 뿐이다.

 

   앞에서 제시한 전제를 가지고 쿨만은 구속사 신학을 내세우게 된 문제의 배경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현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시간 계산법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정착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초대 기독교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세속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시간의 중심점과 의미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서는 역사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그리스도 과정” (Christ-process)이라고 명명할 수 있고, 세속사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역사가 모든 역사인 셈이다. 그래서 순수 역사가에게는 성서의 역사가 편집된 역사처럼 보이겠지만, 기독교인에게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역을 중심으로 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라는 신학적 문제로 귀결된다.

 

   쿨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은 본질상 성경 역사라고 보는 입장이다. 요한복음서 1:1 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로고스의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보다 더 분명한 계시는 없다는 것이다. 이 계시는 역사적인 과정은 물론 우주적인 모든 과정에 관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의 하나님과 주라는 표현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는데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구속사이며, 또한 그것은 성경 역사라고 본다.

 

   쿨만은 슈바이쩌의 철저 종말론적 입장이 미래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까지도 관련되어 있는 전체적인 구속사선 (entire redemptive line)과 분리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케리그마의 시간성”을 벗겨냄으로써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역시 비판하고 있다. 쿨만은 자신의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구원은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는 연속적인 시간 과정에 걸쳐 일어난다.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은 헬라의 순환적 시간관과 구별되며, 구원은 언제나 피안의 세계에서만 유익하다는 모든 형이상학적 시간관과도 대립된다. 2) 구속사는 중심점에서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관계된다는 것이 이 시간관의 특징이다. 이 사건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1. 성서적 시간관


   쿨만은 구속사를 이해하는 데 시간에 대한 입장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 문제에 관해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는 먼저 초대 기독교 신앙은 차안 (the Here)과 피안 (the Beyond) 사이의 공간적 대조에서 출발하지 않고 지금 (Now)과 그 때 (Then) 사이의 시간 구분에서 시작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모든 계시가 본질적으로 시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신약 성서에서 시간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시기” (καιρο?; a point of time)와 “시대”(αιων; age)라는 두 단어가 신약 성서의 시간관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라고 하면서, 이에 대한 구별을 보여준다. “아이온”이 시간의 계속성을 시사해 주는 반면에 “카이로스”는 어떤 고정된 내용을 갖는 일정한 시점과 관계한다. 카이로스는 세속적으로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 즉 기회로서의 시기를 의미하지만, 성서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실 때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시점이다. 쿨만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속사란 계속되는 시간의 모든 단편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카이로이” (카이로스의 복수형)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신약 성서에서는 “카이로스”에 대한 진술이 많이 발견된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7) 라든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카이로이”가 갑자기 돌입해 올 것이라고 상기한 것이라든지 (살전 5:1) 하는 표현에서 예를 찾을 수 있다. 마 8:29; 마 26:18; 눅 19:44; 눅 21:8; 벧전 1:1, 5; 딤전 2:6; 딤전 6:14, 15; 딛 1:3 등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가장 고전적인 표현은 요 7:6 에서 예수가 불신하는 자기 형제들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하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형제들에게는 세속적인 카이로스만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성서에는 많은 “카이로이”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가장 근원적인 카이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이는 하나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구속의 맥락이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카이로스”는 통상 “날” (day)과 “때” (hour)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특히 “날”은 유대교로부터 “주의 날” (the day of the Lord; yom yahweh)이란 개념을 전승받아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의 시작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인 “아이온”은 시간의 연장/연속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한편 아이온은 히브리어 “올람” (olam)처럼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이 경우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이온”이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는 시간이 한정되지 않고 셀 수 없는 연계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무한의 연계성을 “영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때에는 아이온의 복수형이 사용되는데, 복수형으로 영원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시간의 종결이나 또는 무시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셈이다. 다시 말해,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무엇이 아니라 끝없는 시간이다. 이것이 성서의 시간관이다. 이것은 시간의 저편에 존재하는 끝없는 영원이라는 헬라적 시간관과는 다르다.

 


   쿨만은 성서적인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전체로서 끝없이 펼쳐지는 시간, 또 전후방을 향하여 한계가 없는 시간이 있다. 이것을  “영원”이라 부른다.
   (2) 창조와 종말론적 사건 사이에 있는 한정된 시간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현 세대” 또는  “이 세대”라 부른다.
   (3) 한쪽 방향으로는 한정되어 있으며, 또 다른 방향으로는 한정되어 있지 않은 시점이 있다.
      a. “창세 이전의 시간.” 제한이 없고 끝이 없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b. “종말 이후의 시간.” 역시 제한이 없고 끝이 없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그러므로 성서의 시간관은 직선 시간이며, 이 틀 안에서 구속사가 전개된다. 이 직선의 시간을 따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카이로이”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서에서 시간을 추상적인 대상으로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연대기적 시간으로서 카이로스와 대조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크로노스” (χρονο?)의 뜻조차도 구속사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사용됨으로써 “카이로스”나 “아이온”의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경과할 어떤 시간의 공간을 단순히 나타내기도 한다 (계 10:6 참조).

 

   쿨만은 헬라의 순환적 시간관과 대조되는 성경적인 직선 시간관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암시한다. 쿨만은 초대 기독교의 시간관이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계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전제한다. 또한 시간은 영원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며, 시간은 또한 원이 아니라 직선이라고 말한다. 반면, 헬라적 시간관은 원과 순환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시간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공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헬라인들은 구원이 시간 속의 사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성서적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쿨만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망은 “언제나 결단의 상황 속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불트만의 견해를 비판한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권이 도래하는 사건은 시간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또한 시간 속에 도래하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기대는 신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쿨만은 시간성이 제거된 미래는 미래가 아니며, “오늘, 어제, 그리고 미래”라고 하는 선적 시간관만을 강조한다. 불트만이 시간이 제거된 신화를 말한다면, 쿨만은 시간에 바탕을 둔 역사를 제시한다. 신약 성서가 즐겨 사용하는 “때의 성취”라는 개념은 시간과 역사의 직선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헬라적 플라톤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초대 기독교의 시간관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의 핵심적인 사상은 헬라 사상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 기독교적 시간관을 벗어나는 것은 오히려 영지주의 사상에서 그 첫 번째 예를 찾을 수 있다.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고 이스라엘 역사가 구속사를 보여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지주의는 예수가 육체의 외형을 갖고 있지만 실제의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았다는 가현설을 주장함으로써 시간 안에 일어난 구속사적 의의를 부인한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형이상학적 특징을 가진 “차안”과 “무시간성의 피안”의 대조를 말함으로써 현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의 시간관에 기초한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적 대망 사상도 부인한다.

 

   쿨만은 19 세기에 “구속사 학파” (베크, 호프만, 오버렌, 캘러 등)가 나타나기 전까지 영지주의의 맹점을 신랄하게 공격한 사람은 이레니우스였다고 소개한다. 쿨만은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에 반대해서 기독교의 복음 선포가 구속사와 일치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를 인지하며, 그리고 구속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이 구약 성서에서부터 그리스도 재림에 이르기까지 이끌어가는 선의 중심점을 형성한다고 생각한 거의 유일한 신학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시간관과 관련하여 헬라 사상과 성경적 사상 사이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대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메시지를 결코 헬라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헬라 사상은 시간과 영원 사이에는 일종의 질적 차이가 있다고 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영원은 무한히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곧 그의 영원은 무시간성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시간과 영원을 이렇게 구분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영원이라고 호칭하는 것과 시간이라 호칭하는 것 사이, 즉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과 한정된 시간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용어인 “아이온”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며,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적 시간관의 특징이다. 하나님 역시 시간 속에서 파악된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계 1:4)라고 표현된다. 쿨만의 이러한 시간관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시간과 영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쿨만의 주장이 성서적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쿨만의 이러한 견해는 성서적 시간관이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쿨만은 칼 바르트가 종말론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 이후의 상태”라고 정의한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바르트가 오로지 이 시간 이후의 상태에 미래성을 부여할 때나 종말의 상태는 여전히 미래적이라고 말할 때, 쿨만은 성서적 견해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쿨만은 묵시 문학까지 포함하여 종말론적 사건은 철저히 연대기적 진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문헌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그 후에” 및 “그 떄” 등의 시간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 세대는 무시간적 영원이 아니다. 미래 세대가 현 세대와 다른 것은 그것이 단순히 구속사의 처음 상태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 성서는 두 세대뿐 아니라 적어도 1) 창조 이전의 세대; 2) 현재 세대; 3) 다가오는 세대라는 세 새대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 이전-창조-새 창조).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끊임없이 직선으로 운동하는 시간의 틀 안에서만 발생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시간과 무시간적 영원 간의 이원론적 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시간을 어떻게 통치하는가? 쿨만은 우선 하나님의 통치권은 홀로 그만이 그의 구속 사역의 “카이로이” 또는 “때”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통치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선재 (pre-existence)와 예정 (predestination)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한 사건이 그의 뜻을 따라 이미 예기된다는 사실에서 또한 밝혀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 통치는 한편으로 재림과 선재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 사건에서 명백해진 것처럼, 그것은 영원자이신 그가 끝없이 연장되어 있는 전체 시간선을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만이 홀로 시간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전체의 연장 속에 나타난 시간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시간 및 세대의 길이를 결정하시므로 시간을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 24:22 참조).

 

   하나님의 시간 통치는 우리 개인의 선택과 예정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그것은 이미 구속사관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개개인의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시간 통치권이 성도에게 현실화되도록 도와주며, 비록 종말의 때를 모르더라도 성령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전체 구속선을 따라서 일어나는 사건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성령은 현재에 있어서 종말을 대망하는 “처음 익은 열매” (롬 8:23)이며 “보증” (고후 1:22; 5:5)이다. 또한 하나님의 시간 통치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나타난다. 초대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교회는 이제 성령이 활동하는 장소 (행 2 장)이므로, 교회 자체는 하나님의 시간 통치에 포함되고 그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제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이런 독특한 긴장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의 모든 예배 의식 가운데 정점은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과 함께 현존한다는 엄숙한 의식이었다. 이것은 성찬식을 통해 표현되었는데, 성찬식은 역사적 예수의 최후의 만찬과 그리고 부활하신 주가 그의 제자들과 부활의 만찬을 먹은 사실을 “회상”해 보며, 또 이미 유대교에서 메시아 향연으로 나타났던 종말을 “대망”하는 것이었다.

 

   구속사적 측면에서 새 세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앞에서 성서적 시간선을 “창조 이전의 때,” “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의 때,” 그리고 “재림 이후의 때”의 셋으로 구분한다고 하였는데, 쿨만은 이 개념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시 논의한다. 이러한 3 분법은 유대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 조로아스터교로 소급되는 양분법, 즉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구분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유대교적 양분법은 모든 것을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유대교에서 양분한 시간선의 결정적인 중심점은 미래에 있을 메시아의 도래로 파악된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는 시간의 중심점을 미래에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둠으로써, 미래에 있을 메시아의 도래로부터 과거에 종결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 및 사역으로 중심점이 옮겨지게 되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모두 직선적인 시간관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시간관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교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실현을 믿는 기독교와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유대교도 구약 성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있다고 보지만, 오로지 그것은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쉬바이쩌와 마르틴 베르너 (Martin Werner)는 쿨만으로부터 비판을 면치 못한다. 쿨만은 전체 신약 성서에 나타난 시간의 중심은 이미 예수 자신의 역사적 사역 안에 나타났다고 보는데 반하여, 쉬바이쩌와 베르너는 도래하고 있는 메시아 사역의 미래를 그 과정의 중심점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같이 종말론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악하면서도 중심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각각 미래와 과거를 강조하는 차이점을 드러낸다. 이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심점
   유대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Ж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현     세                 내   세


                        중심점          재림
   기독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현        세            내   세

 


    간단히 말해서, 유대교는 메시아의 도래에 종말론적 중심점을 두기 때문에, 종말론은 근본적으로 미래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기 때문에, 종말론적 중심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에 이르러서야 종말론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종말론은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이 중심이 됨으로써 종말론은 다만 유대교처럼 미래적이기만 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다.

 

   오히려 근본적인 차이라면 종말의 대망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확신에 있다. 모든 사건의 중심점과 의미를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파루시아” (재림)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이다. 신약 성서에서 근본적인 사건은 초대 기독교가 시간 중심을 바꿨다는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사실상 초대 기독교의 소망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는 것은 시간의 중심이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쿨만은 결론적으로 대망이 신앙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대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재림의 날짜를 한정하는 문제로 인해 성서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막 9:1; 마 10:23; 막 13:30 참조), 이것으로 인해 기독교의 소망에 대한 신뢰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임박한 종말의 대망 및 재림 지연에 대한 복잡한 문제는 초대 교회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하였다. 그런 복잡한 문제는 실제로 심리학적인 문제일 수는 있었지만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처럼 시간의 중심이 미래에 있다고 주장할 경우에만 재림 지연의 문제가 신학적 의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들과 역사적 검증을 초월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구속사 안에는 태초, 창조, 종말 등의 주제와 신화와 전설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들과 구별되는 성격을 보여준다. 불트만은 신화와 역사를 구별하면서 비신화화시키려고 한다. 불트만은 비신화화를 통해서 케리그마의 본질적인 핵심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쿨만은 그것이 구속사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역사와 신화의 신학적인 결합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쿨만은 이것을 예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쿨만은 구속사 전체는 예언이라고 진단하면서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고 한다. 태초와 종말에 관한 설화들이 객관적으로 계시의 대상이 되며 또 주관적으로는 신앙의 대상이 되므로 그것들은 예언일 뿐이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역사도 역사가의 검증을 마친 무엇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계시된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령의 교회 사역의 역사인 사도행전은 예언인데, 초대 기독교의 생활 및 복음 확장을 표시하는 역사적 사건에서 성령이 사역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틴 캘러는 그래서 historisch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과 geschichtlich (역사적인 것)를 구별한다.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시간의 중심점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쿨만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 역사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예비로서, 교회 역사는 확장으로서 성육신 사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 성서는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실제적 예비 기간을 초월해서 원역사에까지 소급시키며,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는 성육신 사건을 교회의 발전 기간을 지나서 마지막 일들에 관한 역사에까지 연장시킨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구속사를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즉, 그들은 구속사를 “창조 이전-창조 자체-이스라엘 역사-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교회 시대-종말” 이라는 연대기적 순서로 파악하거나, 또는 거꾸로 종말에서부터 창조로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도 중심점을 출발점으로 하여 양방향으로 확장하여 나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카이로이”가 나타나는 구속사의 사건들을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부터 중보자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요 17:24; 벧전 1:20 참조), 물론 창조 자체의 중보자였다 (요 1:1; 히 1:2, 10; 고전 8:6; 골 1:16).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며,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실제로 그의 지상의 몸을 형성하는 교회에서 계속된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이스라엘 선택을 성취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종, 현재에 통치하시는 주로서의 그리스도, 새 창조의 중보자이며 재림의 인자로서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선 (line)으로 파악된다. 다양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구속사에서 시간의 연속적인 단계 가운데서 나타난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동일한 그리스도이시다.

 

   신약 성서 전체는 구속 과정의 통일된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스데반은 유대인의 불순종을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것처럼 전체 구속사에 일치시키고 있으며,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전체 구속 계획에 일치시키고 있다. 마태복음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족보를 통해 예수를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 대한 성취자로 묘사하며, 누가복음서는 아담에까지 소급시키는 족보를 소개함으로써 창조에서 예수에 이르는 하나의 선을 선정한다. 요한복음서는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 분이 성육신하여 나타난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의식적으로 창세기적 표현인 태초에까지 소급하고 있다.

 

   신약 성서의 구속선 (redemtive-line)은 이처럼 실제로 그리스도 선 (Christ-line)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선을 따라 한정된 시점에만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초기 신앙 고백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신앙 고백들은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최초의 신약 성서 텍스트보다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뿐만 아니라 케리그마의 중심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압도적인 수의 신앙 고백들이 순전히 기독론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앙 고백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함께 언급하는 예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신약 성서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신앙 고백들 (고전 12:3; 요일 2:22; 행 8:37; 요일 4:15; 히 4:14; 롬 1:3 이하; 빌 2:6 이하)은 단 하나의 신조인 기독론적 신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전 8:6 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 신조들은 후대의 신조와 다르게 아버지와 아들의 직무를 분리해서 말하지 않는다.

 

   쿨만은 구속사의 발전 과정이 선택과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구속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것은 전체의 구원을 위하여 소수를 선택하는 원리로 제시된다. 구속사는 두 가지 방향의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인류-이스라엘 백성-이스라엘의 남은 자-그리스도”로 감축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속사는 “그리스도-사도들-교회-구속 받은 창조 세계”로 확장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구속사는 양면 운동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에서부터 한 사람 (그리스도)에게까지 전진한 것은 구약이며, 한 사람에서부터 많은 사람에게까지 전진한 것은 신약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점에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의 사역이 있다.

 

 

2. 구속사의 독특성


   쿨만은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구속사는 성서에서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고 본다. 그래서 구속사의 독특성에 관해 말하게 되었다. 쿨만은 먼저 구속사를 이루고 있는 “카이로이”의 특징을 밝히고 나서, 구속사의 중심점으로서의 그리스도 사역의 독특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 다음 구속사의 과거성, 미래성, 현재성과 그리스도 사건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구속사 전체가 어떻게 독특한 성격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면 구속사를 이루고 있는 “카이로이”의 특성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쿨만은 모든 “카이로이”는 각각 유일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의 특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원래 “단 일회적” (once for all)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파팍스” 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속 사역에 적용된 말이다 (롬 6:10; 히 7:27; 9:12).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모든 구속사의 사건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논쟁의 대상인 “성서와 전승”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놓여져 있는 현재 국면이 구속사에서 그 나름대로 유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중심점 그 자체에서 발생한 그리스도 사역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주후 첫 30 년 사이에 발생한 유일한 사건이 단 한 번의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것은 유대교에서 강조한 미래로부터 과거로 초점을 바꾼 것을 의미했고, 그것도 바로 직전의 과거를 구속사의 중심점으로 믿은 것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 십자가에 죽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점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비춰질 수 있었다. 바울 사도가 미련한 십자가의 도 (고전 1:18)와 십자가의 거치는 것 (갈 5:11)을 위대한 계시의 진리로 표현한 것은 대담한 주장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위협적인 이단은 가현설 (docetism)이었다. 좁은 의미의 가현설은 단지 외관상으로만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가현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실제적 죽음을 부인함으로써 구원이 시간 속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추상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 속에 “단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모순은 제거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의 선포에 있어 본질이 되는 바로 그 사건이 제거되고 마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러한 가현설은 초대 기독교 시대에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쿨만은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넓은 의미로서의 가현설에 대한 예를 들면서 (단일성론적 교리, 멜랑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강조, 꾸슈의 예수의 역사적 실존 부정), 복음서에서 예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구속 사역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적으로 취급하려 하는 모든 현대 신학자들의 설명을 비판한다.

 

   쿨만은 구속사의 과거, 현재, 미래가 그들 나름대로 유일한 구속 사건임을 보이는 한편, 다른 면으로는 그들이 중심점과 관련될 때만 그렇게 된다는 것을 천명하려고 한다. 먼저 구속사의 과거성과 그리스도 사건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시도한다. 쿨만은 먼저 구약에서 서술된 창조로부터 그리스도까지 과거의 전 과정은 하나의 구속 과정이지만 그리스도 이전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 (그리스도 사건)을 향한 직선적 방향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지므로 중심점인 그리스도로부터 구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점과의 관계를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대 교회는 마르시온이 주장한 것과 같이 구약을 제거하지 않았다.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쿨만은 바나바서를 들어 길게 설명한다. 바나바서는 우화적 (allegorical)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의 생애에 대한 모든 세목들이 다 미리 구약 성서에 묘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구약 성서를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은 포기되며, 신약 성서는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여분의 책이 되고 만다. 쿨만은 구약 성서의 사건들은 구속사에 있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나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라는 이 구별된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초대 기독교 시대의 한 동안 신약 성서가 존재하지 않고도 구약 성서만이 정경으로서 사용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구약의 구속사는 성육화라는 목표를 지향한다”는 명제는 맞는 말이지만, 이것은 구약에서 예수의 성육화를 발견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구약에서 성육화와 십자가를 위한 준비가 되는 구속사의 과거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에 불과한 구약 성서가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 이후에도 여전히 구원에 필요한 의미를 제공해 주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쿨만은 순환적 논리를 가지고 대답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구약의 준비가 그 중심점으로부터 빛을 받았고, 그 후 다시 중심점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약의 준비로부터 부분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쿨만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전의 과거 사실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시간적인 “동일성”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선이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과거와 중심점 사이에 시간상 연속적인 “관련성” 위에 놓여진다.

 

   그러면 구속사의 미래성과 그리스도 사건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쿨만은 대전제로서 “종말론이 왕관을 박탈 당했다”고 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아직 다가올 미래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고 갈파한다. 초대 기독교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철저하게” 종말론적 방법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종말론은 중심점에서 발생한 사건 위에 세워지긴 하지만, 구속사에 있어서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본래적 의미를 가진다. 이미 이루어진 결정에 부가되어 “승리의 날” (V-Day)이 가져오는 새로움은 바로 성령이며, 이는 물질과 육의 전 세계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종말이 언제 오는가의 문제는 지극히 유대적인 질문이며, 그 때를 알려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호기심의 범주에서만 중요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때에 관한 질문은 더 이상 신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쿨만은 구속사의 현재성과 중심점에서 발생한 그리스도 사건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현재가 갖는 구속사적 의의와 중심점과의 관계는 과거나 미래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전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부활 후의 현재가, 한편으로는 이미 과거에 놓여 있는 중심점에 의해서 전적으로 규정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다가올 미래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면, 현재가 구속사에 대하여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질 어떤 여지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쿨만은 실제로 이레니우스가 중심점에서 종말로 서둘러 가기 위해 현재 시기를 뛰어 넘으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키에르케고르는 “동시대성” (구속의 시간이 이미 예수와 함께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이라는 개념으로 구속사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논함에 있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쿨만은 현재 시대의 구속사적 의의를 또한 교회와 관련시켜 설명한다. 그러나 가톨릭처럼 “전통”을 성서에 종속시키지 못함으로써 교회를 절대화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고, 교회 시대를 그리스도의 통치 시대요 복음이 선포되는 시대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공관복음서에서 예수 자신은 그의 대속적 죽음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중간 시간”을 기대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쉬바이쩌는 이 물음에 부정적인 답변을 하였지만, 쿨만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종말론적으로 결정적 사건으로 이해했고, 그 후에 인자가 비로소 올 것이라는 견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중간 시간의 존재는 “종말이 오기 전 복음이 모든 이방인에게 반드시 전파되어야 한다” (막 13:10)는 말씀이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8)는 말씀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이 중간 시간에 제자들이 할 일을 염두에 두면서 “교회” (마 16:18)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특히 시간의 중심점에 너무나 가까이 위치하였으므로 중간 시기가 완전히 이 중심점에 고정되어 있다는 확신을 후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하고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쉬바이쩌의 “철저 종말론적 입장”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말할 때 잘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을 표현해야 하는 곳에서 신약 성서가 미래형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현재에 대한 강조를 엿볼 수 있다. 현재에 대한 강조는 초대 교회에서 성만찬 예배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성만찬은 최후의 만찬과 부활 후 애찬과 종말에 있을 메시아 향연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중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구속적 선물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죄 많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구속사 안에서 교회의 기능은 그 교회 구성원을 위한 것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과 종말론적 신의 영광을 위한 직무 (선교적 사명)를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해야 할 선교적 사명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에 구속사적 의미를 주며, 동시에 이 의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선교는 종말론적 요소인 성령에 의하여 달성된다.

 

   종말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도래한다는 사상은 유대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교에서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 시기를 추정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 엘리저 학파는 온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메시아가 도래한다고 가르쳤고, 여호수아 학파는 명확한 날짜에 메시아의 도래를 고정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전자는 종말이 인간의 도덕적 태도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신의 전능성을 제한하였고, 후자는 종말을 인간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신적 전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곡해하였다. 신약 성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고 하면서 교회의 선교를 강조한다. 선교는 종말론적인 신적 징조에 속한다. 쿨만은 지적하기를, 천국의 도래는 복음 전파의 성공적인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파된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3. 구속사와 세속사의 관계


   쿨만은 그리스도 사건의 독특성을 중심으로 구속사의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시간성과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구속사의 독특성을 강조하였다. 쿨만은 이에 근거하여 구속사와 세속사의 문제를 다룬다. 구속사와 세속사는 어디에서 만나며 또 어떻게 다른가? 서로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특히 구속사와 국가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쿨만은 그리스도-선 (Christ-line)이 단지 어떤 한 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속사 전체에 확장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속 사이의 모든 이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 성서에서는 구속에 관계하는 그리스도 선과 분리된 창조에 관계하는 하나님-선 (God-line)을 따로 말하지 않는다. 즉, 신약 성서 저자들은 창조시 그리스도의 중재적 사역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쿨만은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보편적 집약”이라는 개념으로서 설명한다.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집약되는 동시에, 그리스도 사건은 모든 세속적 인간 사건뿐만 아니라 전체 자연적인 과정까지 포함시키는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선은 세 가지 결정적인 단계에서 구속 과정이 일반 과정을 흡수하고 있다: 1) 창조 때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만물이 그를 통하여 화목되었고; 3) 종말론적 완성에서 만물이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 복종한다.

 

   구속사가 세속사 및 자연 세계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쿨만이 자연 계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창조 사역 가운데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구속사에 주어진 기독교적 계시에 자연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롬 1:18 이하 참조). 오히려 바울은 이방인들 역시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뿐이다. 불트만도 이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 신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쿨만은 말하기를, 천지 창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결국 그들의 한계를 의식하게 하며 그들 스스로가 선물의 수혜자이며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쿨만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신약 성서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와 동떨어진 자연 계시와 기독교적 계시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속 과정의 빛 아래 이방인들이 갖는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쿨만은 “세속적” 사건 전부가 구속사와 관련되어 있고, 두 개의 영역이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로 만물에 대한 통치권이 그리스도에게 위임되어졌는데, 문제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우주권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그리스도는 단지 작은 교회의 머리에 불과하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의 머리로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쿨만은 이에 대해 교회와 세상은 서로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원이 아니며, 단지 접촉되거나 교차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서로 동일한 원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공통 중심으로 하는 크고 작은 두 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안쪽 원은 교회를 말하고 바깥쪽 원은 세상을 뜻하는데, 전자는 후자보다 그리스도와 가까운 관계 속에 놓여 있지만 공통 중심은 역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두 원 모두에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쿨만은 세속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와 구속사와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 문제는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 라는 책의 내용을 취급할 때 다시 자세하게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이는 특히 롬 13:1에서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와 관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국가에 복종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쿨만은 우선 “권세들” (헬라어로 “엑수시아이”)이란 용어는 국가의 배후에 있는 “천사적 능력”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점을 길게 논구한다. 후대 유대교에서 민족에게도 수호 천사가 있다고 믿었듯이, 국가 권력에도 천사적 존재가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천사의 집행 도구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사들 (영들)은 모두 예수의 발 앞에 굴복한 영들로서 잠정적으로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질서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의 사자 (롬 13:4)요, 하나님의 일꾼 (롬 13:6)으로 지칭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계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부정적 태도”나 “긍정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 “세계 부정”의 태도는 구속사의 현재 국면이 갖는 의미를 잘못 인식하는 것이며, “세계 긍정”의 태도 역시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쿨만은 이 둘 사이에 양자 택일은 있을 수 없고,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거와 미래의 긴장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4. 구속사와 개인의 문제


   쿨만은 마지막으로『그리스도와 시간』에서 구속사와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구속사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개인이 상실될 위험성을 간파하고 그 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쿨만은 구속사가 전체 인류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개인에 대한 관심은 기껏해야 난외로 취급한다고 보는 오해를 시정하고자 노력한다. 실제로 신약 성서에서 개인의 가치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조되어 있다고 강조하면서, 개인과 구속사의 과거, 현재, 미래 단계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개인은 구속사 전체와 관련되며, 구속사는 개인을 목표로 삼고 있고 모든 발생하는 사건은 다 개인과 관계가 있다고 전제한다. 모든 신앙인 각자의 인생은 예정에 의해 그리스도-선의 시간적인 연장선을 따라 그 속에 그의 위치가 주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확신은 “창세 전부터” 구속사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믿음을 포함한다. 따라서 칭의 (justification)도 본래 구속 과정을 개인에게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자신이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 속에 처음부터 속해 있었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구속사의 과거 국면과 이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전 구속 과정이 죄인인 자신을 위하여 발생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속 과정의 실질적인 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개인과 구속사의 현재 단계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세례와 성만찬을 통하여 현재화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각 신자에게 죄사함을 중재하며, 구속 과정을 발전시키는 은사인 성령을 중재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구속사의 현재 단계는 복잡성을 띠고 나타나는데, 이는 명령법을 서술법과 결합시킴으로써 윤리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증명된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매 순간마다 성령의 분별에 따라 사랑의 원리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구속사의 현재와 관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개인과 구속사의 미래 단계의 관계를 말할 차례다. 초대 기독교의 대망 사상에서 보면, 개인의 미래는 완전히 전 구속사의 미래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드라마가 결코 구원-선 (salvation-line)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미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미 중심적인 사건은 과거에 발생했지만 구속사의 미래 단계 역시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믿는 자에게도 역시 부활이 이미 발생하였지만 (과거 시제에 유의), 몸의 부활은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발생할 것이다 (미래 시제에 유의). 세례는 성령이 중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롬 6:3-5 참조). 그러나 성령의 활동으로 악한 육체를 현재 제한적으로 다스리곤 있지만 완전한 성취는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과 부활 소망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5. 결론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시간』이란 책을 통해 유대교가 미래적 종말론에 그 초점을 둔 것과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점으로 하여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창세 이전부터 종말 이후까지 전적으로 직선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영원의 개념 역시 시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구속사는 세속사와 구별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에 항상 서 있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과 세계 모두의 주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쿨만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성서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신약 성서 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공헌하였다.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메시아 대망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역사의 목적으로 밝혀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포함하여 초기 기독교 이후의 역사를 단순한 역사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성서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쿨만의 구속사관은 비판받을 소지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쿨만은 구속사라는 개념 안에서 통일적으로 신약 성서를 해석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신약 성서 각 책의 독특성과 차별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과 요한이 다르고 누가와 마태가 다른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평준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실제로 요한문서 안에서 바울서신만큼 구속사관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는지는 불트만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확실하지 않다.

 

   쿨만은 또한 성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적 사변이나 비교종교학적 접근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말았다. 기독교와 철학이 서로 배타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에 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인지는 객관적이고 진지한 검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쿨만은 기독교의 독특성만을 지나치게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쿨만의 구속사관이 비판을 받는 것은 그의 직선적 시간관에 있다. 쿨만은 헬라적 시간관을 순환적으로 보아 기독교적 시간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분법이 과연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헬라적 역사관을 공간적인 것으로 보아 기독교적 역사관을 시간적인 것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성서적 계시의 현실성을 약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있다. 쿨만은 성서적 직선 사관이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의 결정적인 특색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반 철학에서도 직선적 시간 이해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쿨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간과 영원을 동일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은 창조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종말 이후에도 존재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를 성서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쿨만은 영원을 무한히 긴 시간으로 봄으로써 시간과 영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 양식의 차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진다. 시간과 영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개념이라면, 하나님은 시간의 주가 아니라 시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쿨만의 구속사관은 역사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 현대인들에게 신약 성서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시도한 독창적인 노력이었다고 평가된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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