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교리사적 고찰
김재성 교수/합동신학교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죄에 대한개념은 항상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문제이다. 인간이 ‘원죄’의 상황을 벗을 수없는 까닭에 인간의 존재와 함께 죄는 항시 거론되며, 이는 인류의 비참함이자, 불쌍한 현상이기조차 하다. 죄는 인간이 지닌 도덕적인 본성의 질병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에 이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질문과 전제
죄의 첫 시작에 대해서 들을 때에, 사람과 타락한 천사인 사단과의 관계로 설명되어있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이다. 성경은 죄의 기원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만 말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와가 사단의 충동으로 의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사단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다(ablenot to sin; Posse non pecare).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도덕적 순결성을 지킬 수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서는 죄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왜 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철저히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는가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원죄의 문제를 토론하고 답하려 할 때,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교훈으로 질문하고 전제를 세워야할 것이 있다. 즉, 하나님은 죄의 제공자가 아니요, 근거도 아니요, 원인도 아니라는 사실이다(Deus non est causa, auctor pec-cati). 인간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는 표현에 접하게 된다. 우리가 조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허용이라는 용어 에서 비약하고 만다. 허용(permissio),혹은 관용이라는 말은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죄 사이에 있었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고 긍정적이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해명되어야 할부분이다. 이 허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무한정으로 이를 확대시키면 하나님께서 불만족스러운 죄의 상태에 인간을 내버려두시었음을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해보자. 항상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마 13:39)라는 말씀으로 이죄는 우리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임을 지적하셨다. 마귀는 세상을 속이는 자요(계12:9),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역사하는 자(엡 2:2)이다.
디모데전서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좌정하여 계신 분이다(범전 6:16).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이시요, 빛이시다”(요 4:24,요일4:16)라고 묘사하였다. 이런 말은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회의적 이거나, 형이상학적인의미로 사용한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과 및 가운데서 교제하여 나가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및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우리가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6-7).
성경적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도 이런 전제를 심각하게 취급한 바 있다. 벨직신앙고백 제13항에 보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정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만드셨다는 책임을 지실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에서도 “인간의 타락된 본성이 어디서 왔는가?”를 답하면서,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한 타락과 불순종에서 왔다. 그것에 의해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오염되어, 인간은 모두가 죄의 상태에서 잉태되고 출생하게 되었다”고 답하였다(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 제7문답).여기서 “인간이 할 수없는 것을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사람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귀의 꼬임에 빠져 고의적으로 불순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속였고 그의 모든 후손들이 은사를 받지 못하게 했다”(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 제 9문답).
교리사적으로 본 죄에 관한 논쟁들
초대교회의 쟁점들
기독론적인 논쟁이 동방교회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서방교회에서는 인간론에 관한 많은 쟁론이 일어났다.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은 죄와 은혜, 자유의지와 예정론 등이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이후로 인간의 죄의 기원에 관한 논쟁들이 계속된 것은 이것이 창조의 실재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파괴와 파멸의 실재 속에 나타나며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의 기원의 문제는 다른 기원들의 문제와는 질적으로 달리 취급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기원들과 같이 인과론적으로 취급되어서, 누군가가 원인을 제공하고, 근거가 되었다고만 생각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파 신학자들
초대교회의 죄에 대한 교리 논쟁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위한 점진적인 준비단계로 볼 수 있다.1세기와 2세기의 헬라파 신학자들은 악의 물체적인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면서,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였다. 이들은 영지주의에 맞서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완전함이 불가능한 것이고, 본질상 도덕적인 완전의 가능성 정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죄란 항상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있었고, 실제로 죄를 범했다. 그래서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였고, 죄가 인류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육체적 타락이 죄 그 자체가 아니요, 인류가 죄책의 상태 아래 놓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들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원죄의 상태란 없다는 것이다. 죄란 약함과 무지의 상태일 뿐이었다. 따라서 유아는 죄인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사실 모든 신앙을 헬라적인 사상으로 접목시켜서 왜곡시키는 데 앞장섰던 이들 초대 헬라 교부들에 이어서 나온 것이었다.
터툴리안의 공헌
초대 교부시대에 터툴리안의 공헌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그의 유명한 말은 대부분의 신학도들 에게는 단지 변증법의방식으로만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이 훗날 채용하게 된 실재론은 터툴리안에게서 나온 것이다. 터툴리안의 유명한 명제는 “영혼의 번식은 죄의 번식에도 관계된다”(Traduxanimae, tradux peccati)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라틴 신학을 대변하면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번식을 통해서 이 원죄의 실재적 전이가 이루어진다고 역설하였다. 원래 인간의 본성에 있던 죄가 각기 인간 개개인에게 머무르게 된다고 했다. 이 죄성은 그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인간개개인의 사고방식, 행동, 책임의식에서 쉬지 않고 작용하는 것이다. 순수한 영아들이란 없고, 이들도 완전한 자유의지를 소유한 것은 아니 라고 보았다.
씨프리안, 암브로스, 힐라리
씨프리안은 원죄에 대한 책임이란 개인이 범하는 죄보다는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원래 인간의 죄악된 상태라는 것과 개인의 타락과를 상당히 구별하는 것이다. 암브로스와 힐라리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분명히 죄를 지었고, 죄악된 상태에서 출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의지 전체가 타락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의 죄에 대한 견해
어거스틴은 자신의 체험에서 죄에 대한 실존적인 이해가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고백록에 나타나는 깊은 신앙적인 경험과 위대한 영적 투쟁은 복음의 빛을 발견하기까지 치열한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의 수도사였다.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한 사람이요, 남들에게 흠잡힐 만한 것이 없도록 살아갔던 성격을 갖고 있다. 영혼의 투쟁이나, 죄와의 씨를, 깊은 회심의 체험이라든가 새롭게 하시는 은총 같은 것은 매우 낯설게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적극적인 거룩함을 부여해주시지 않으셨다는 관점이다. 인간의 최초 상태는 중립적이다. 거룩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선과 악의 가능성 모두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고, 완전히 미확정 상태에 놓여 있다. 이 양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똑같은 가능성이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다. 본성에 있어서 선대로부터 죄악성을 물려받지도 않는다. 결국 원죄란 없는 것이다.
아담과 같은 최초의 상태로 인간은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책으로부터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았다. 악의 경향성이나 불가피하게 죄로 빠져들어 가는 열망 같은 것이 없다. 아담은 단지 앞선 시대에 살았던 죄를 지은 사람의 한 실례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선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은 이런 능력을 아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죄가 보편적이 된다. 이점에서, 펠라기우스는 죄의 보편성을 받아들였다. 이 보편적인 죄는 나쁜 교육과 잘못된 선례, 그리고 죄를 짓는 습관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악을 버리고 선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성령의 영향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내적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지 외적으로 주어진 은사와 자연적인 하사품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이성적 본성,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들을 통해서이다. 이런 것들을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이성으로 모방할 수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인데, 펠라기우스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였다. 단지 미래의 용서에 대한 상징적 행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컬한 점은, 펠라기우스가 어린아이들을 천국으로부터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의 죄관
어거스틴의 죄관은 주로 그의 치밀한 로마서 연구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생각에서 나봤다. 한때 마니교도였던 어거스틴은 죄의 자발적인 성격에 대해 매우 강조하였다.
어거스틴의 죄관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하여 그의 교리적인 설명이 교회의 공식적인 동의를 얻은 부분이다.418년 칼타고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문과 비탈리스(Vitalis)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어거스틴의 포괄적인 원리들이다. 셋째로는 아담의 상태에 대한 질문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는 부분이다.
원죄의 뿌리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뒤로, 인간은 더이상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참된 선을 추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신의 참된 운명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타락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인 것, 결여된 것으로 보았다. 죄란 인간에게 첨가되어진 악이 아니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바꿔버린 데 죄의 본질적인 뿌리가 있다.
무능성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에 있었다(Posse non peccare et mori).그래서 죄와 죽음에 대해 무관한 존재(non possepeccare et mori)로 갈 수도 있을 뻔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죄를 짓지 않고 죽지도 않을 수 있는 무관함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non posse nonpeccare et mori).
적용
아담과 그 후손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 선조의 타락한 본성이 후손들에게 전달된다. 죄책과 타락이 이에 수반되어 따라간다. 인간 종족을 통칭하여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각하여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첫 조상의 실제 죄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 죄를 범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 본성의 죄성이 각각 개인적 차원의 죄가 되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더 완전히 부패하였고, 어떤 영적인 선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가 여전히 어떤 본질직인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부정하였다. 물론 시민사회에서 볼 때 선행의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매우 저급한 수준에서 칭송하고 높이는 것일 따름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죄책의 짐을 젊어지고, 악의 지배하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여야 한다고 어거스틴은 보았다.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인간의 참된 자유를 회복시킨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의 견해가 409년에서 411년 사이에 로마에 전파되었고, 그의 제자 셀레스티우스에 의해서 북부 아프리카 교회들에 번지기 시작하였다. 펠라기우스 자신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방문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416년 밀레브와 칼타고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완전히 이단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529년 이후로 로마교회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를 반반씩 뒤섞어서 이성적으로 맞춰진 반텔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기울고 말았다. 반면 라틴교회들은 여전히 헬라교회의 인간론을 채택하여 이를 고수해오고 있었다.
중세시대의 죄관
중세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을 캔터베리의 주교인 안셀름 (Anselm,1033-1109)이다. 그는 어거스틴의 인간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긍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안셀름은 원죄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종족의 기원을 의미하지 않고 사실들의 현재적 조건에 놓여 있는 각개인의 기원적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죄란 자연적인 죄라고 불릴 수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서 죄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타락하였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전달된다. 원죄든지, 실제 죄든지 모든 죄란 죄책을 구성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린아이 경우에도 어른들과 같은 일반적인 인간본성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죄책이 있고,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만일타락하지 않았다면 부모로 부터 거룩한 성품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안셀름은 이상한 질문을 하나 제기했는데, 직접적인 조상들의 죄가 아담의 죄와 마찬가지로 전가되는가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안셀름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선조들이 지은 죄악들은 아담 안에서 보편적 본성에 의해서 저질러진 죄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는 독특하다. 이와 같은 유사한 제2의 죄악이란 없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진 개인적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셀름의 논리상 약점을 드러낸 부분이다. 이후에 따라 나오는 모든 죄악들은 그것들이 각자 개인들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아담과 같은 인간본성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들이다. 왜 오직 아담의 첫번째 죄악만 후손들에게 전가되어지고, 그 후손들에 의한 것들은 아닌가의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라는 첫번째 인간 속에서 전 인류는 시험을 받았다. 이것은 훗날 언약사상의 시초가 되는 접근법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죄관
종교개혁자들은 중세말기의 반펠라기우스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였고, 특히 어거스틴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단지 어거스틴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원죄가 부모의 성관계를 통해서 전수 되어진다는 것이고 논리적인 귀결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되었다고 강조한 점이다. 중세시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자연적인 특성으로 존재한다고 보았으나, 개혁자들은 자유의지란 존재하더라도 상처를 입었고,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개혁자들은 터툴리안, 어거스틴, 안셀름을 넘어서서 원죄와 아담과 그의 후손들과의 관계에 대한 언약신학을 발전시켰다. 루터나 칼빈은 타락의 결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전혀 깨달을 수 없으며,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원죄는 단지 어떤 결집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타락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개혁자들은 인간의 죄란 단지 원래의 정의로움을 상실한 것만이 아니고, 욕망에서 비롯되어 죄의 방향으로 나아가 실재로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의 저주스러운 상태를 드러내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책임이 있고 오염되었으며, 하나님의 안목에서 저주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Begae)가 아담은 단지 인류의 자연적인 조상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대표적 존재(federal represen-tative)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의 첫번째 죄는 그의 후손들 모두에게 형벌로써 전가되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책이 있기 때문에 오염된 상태에서 태어난다. 아담은 도덕적, 법적, 영적인 의미에서 그의 모든 후손들의 대표라는 사상은 불링거, 폴라누스, 고마루스, 크로펜부르그, 코케이우스 등에 의해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역시, 죄의 전가 문제도 직접적인 실재전가보다는 언약적 대표설로 기울어졌다.
후기 종교개혁시대의 죄관
소시니안주의
이태리 출신으로 폴란드에서 활약한 렐리오 소시니우스(1525-1562)와 그의 조카 파우스투스 소시니우스(1539-1604)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를 재연시킴으로써 개혁신학에 많은 문제를 던지게 된다. 칼빈은 이들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아담은 본성에 있어서 어떤 도덕적 완전함이나 뛰어남이 없었고, 죄의 결과로 잃어버릴 것도 없었다고 보았다. 인간은 아담의 죄악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요,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들은 지금도 아담과 같은 본성상에 죄를 지을 경향이나 과오를 저지르기 쉬운 것은 아니요, 단지 죄 짓는 예들을 너무 많이 보고 듣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하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즉시 용서하신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구세주나 어떤 특별한 중보자도 필요가 없다. 단지 그리스도는 좋은 방향의 지침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알미니안주의의 죄관
1610년대의 화란 신학자 알미니우스는 한때 제네바에 가서 베자 밑에서 공부하면서 철저한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나, 일반속죄론과 자유의지론으로 빠져버렸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치 않은 사람이 있다는 유기설을 부인하였다. 그의 선생이었던 화란 라이덴 대학의 에피스코피우스의 영향이었고, 훗텐보가에트, 그로티우스, 림보르치 등이 뒤를 따랐다.
알미니우스의 생각은 중세의 반펠라기우스(Semi-pelagianism)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아담의 타락이 그의 후손들에게 영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전적인 무능력과 타락의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은 부인하였다. 이런 절충주의와 타협주의적인 생각은 결국 인간의 상태란 오염과 죄악의 대물림의 상태가 아니요, 단지 약함과 영생의 불가능성을 초래했을 뿐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낼 만한 구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적인 무능력을 부인한다. 이런 사상은 1618년 돌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확립하게 되었다.
아미랄디안주의
프랑스의 아미랄두스91596-1664)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지 않고 보편적이라 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서 사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를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시려고 보내셨다. 단지 인간이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믿으려 하지는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은혜가 구원의 준비에서는 보편적으로 나타났으나, 이를 적용하는 면에서만 특별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과 칼빈의 신학과, 돌트신경을 잘 지켜나갔다고 아미랄두스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정통신학의 노선을 빗나가기 시작한 대표적인 종교개혁 후기 신학이 되고 말았다.
웨슬레안주의의 죄관
18세기 중엽의 상황에서 요한 웨슬레(1703-1791)는 매우 복음적인 열정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정통신앙의 맥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첫째, 원죄는 엄격하게 말하면, 단지 본성의 오염이나 질병상태가 아니고 진정으로 실제적으로 죄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정되어야 한다. 아담의 죄는 후손에게 전가된다. 그러나 이 원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의 칭의가 주어짐으로써 상실된다. 이 말은 원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성립이 가능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은혜로 인해서 취소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다. 인간의 도덕적인 전적부패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으로 구속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과 회개를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자유로운 은혜의 문제이기에 인간은 믿어서 회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잉글랜드 신학의 죄관
칼빈 이후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는 인간의자유와 완전한 선의 가능성이 타락으로 인해서 없어져버렸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후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곁길로 이탈해버렸다. 예일 대학이 소재한 뉴헤이븐 신학의 대표자인 나타니엘 테일러(N.W.Taylor, 1786-1858)는 에드워즈의 손자 드와이트(12-1817)의 지도하에서 이성적인 신학의 길로 나아가버렸다. 테일러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론(the moral govem-ment theo)을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선택을 함에 직면할 때, 반대에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도덕적인 우주를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반대되는 선택의 권한을 가진 자유롭고 도덕적 대행자들의 창조를 자연스럽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가 가능하다. 동시에 죄란 최상의 체제에 대한 필수적인 우발적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인간의 죄성은 죄짓는 행동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부패한 본성의유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이죄를 짓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입각한 행동의 결과도 아니요, 아담의 죄책의 전가 때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를 대항하여 초기 청교도신학을 계승한 프린스톤 신학의 찰스 핫지가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한 원죄론과 아담의 죄의 전가설에 입각하여 논쟁을 벌였다.
현대신학자들의 죄관
오늘날 교회의 죄에 대한 설교가 성경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된 배경에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원죄를 반대하고 있다. 현대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반펠라기우스주의와 연결되어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시니언주의와 휴머니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계몽주의의 인간관은 자기 확신을 내세우는 그들의 철학과 맞지 않는다 하여 원죄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런 다양한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후기 계몽주의 신학과 슐라이에르마하나 릿츨은 이전 신학이 취급한 죄관에 대해서 새로운 진보를 모색하였다. 현대신학자들이 종래 교회가 주장해온 원죄론을 반대하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책임, 자유, 인격성의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자아인식의 표현에 관계를 맺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을 주장하였다. 영혼이 육체적 기관과 결합한 결과의 하나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본성을 필연적 결과로서 이해하였다. 즉, 죄란 육체적인 것에 흥미를 느껴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결정하여 바른 기능을 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감각적 본성이 결정적인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죄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여,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죄의 감각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투쟁의 의식인데 감각적인 본성이 지배함으로써 비롯되는 부적절한 그의 신 의식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이런 결함의 감정을 죄책으로 규정하도록 정하셨던 것이지 실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의 기회가 있다. 원죄는 단지 점차적으로 형성된, 후천적으로 획득된 습관에 불과하고 이는 모든 실제 죄의 근거가 된다.
릿츨은 이 세상에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자신의 핵심으로 세웠다. 죄란 무지의 일종이요, 도덕적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단계로 이해된다. 따라서 실제적인 죄란 하나님 나라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이 최고의 선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만 마땅한데, 그 반대로 완전한 선은 무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죄에 대한 생각은 매우 모호하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순전히 관계성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로부터의 새로워짐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도 않고 있다. 하나님 말에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부패된 측면보다는 타락 이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면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역량이나 능력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심각한 “타락”이나 “죄악”이란 의미가 완전히 모호해져버린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다는 강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에밀 부르너도 역시 아담의 실존적 역사성과 타락의 사실성을 배격한다. 따라서 인간의 현재적 죄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회의를 품도록 만든다. 만일 역사의 특정한 시간에 첫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되고 죄에 빠지게 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하겠는가? 화란 개혁신학자 바빙크는 인간의 형상은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부패되었다고 말한다.
죄에 대한 설교에서 유의할 점
성경에 나타나는 죄라는 단어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표적에서 벗나감’ 이다. 모든 잘못된 행동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미치지 못함이다. 따라서 죄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고 이런 문제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죄는 영혼의 부패를 초래했다
우리가 철저히 부패한 자요 전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무능력한 자들임을 고백해야한다. 우리는 마치 죄가 우리 본성의 일부분에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적 측면에서는 간직하고 있으나 기능상에서는 죄의 영향으로 인해서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자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여기서 마음이란 인간의 내적 중심,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관이자, 인격의 중심점이란 말이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라”(막7:21-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알리요마는”(렘17:9).
죄는 교만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다
교만이 사단과 그의 천사들의 죄의 뿌리였다는 사실이 디모데전서 3장6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새로 입교한 자로도 말지니,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교만하여져서 마귀가 처한 같은 심판에 처하게 될까 함이라.”타락한 천사나 하와의 마음에 죄의 근원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교만한 생각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 3:5).여기서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보자.
죄의 기원은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왜냐하면, 교만은 죄의 시초(전 10:13)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은 부당한 칭찬의 갈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부당한 칭찬은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최종목적으로 삼을 때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관계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시편 51편 4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울부짖었다. 죄는 사람들에게 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한 것이다. 우리는 가공할 만한 죄의 광대함을 보아야만 한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항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미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죄는 가면을 쓰고 있다
우리가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죄의 합리화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쉽게 합리화시켜버리려고 한다.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난 후에 합리화시키고자 변명하였다. 우리는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말을 합리화시키려 한다. 온갖 미사여구로 우리의 죄악을 모면하려고 애를 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다윗은 부르짖었다. 우리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터는 보면서,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마 7:3).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죄를 숨기려 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경향은 우리의 생각 속에 이를 은폐시키려는 마음이 모든 것을 덮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토설하기 전에는 그대로 있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상황을 직시해야
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원죄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단지 우리는 존재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죄를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의존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개인적인 죄악을 인식해야만 하고, 이런 것은 곧바로 인간의 회개와 뉘우침에 직결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내적인 작용인 이런 감정의 움직임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마저 없다면, 이 시대의 인간들은 어디서 양심의 목소리를 듣고 뉘우칠 계기를 삼을 것인가?
우리가 설교하는 시대상과 인간 상태가 어떤 상황하에 놓여 있는가를 직시해야만 한다. 설교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의 부패성과 타락성에 대한 성경의 선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모든 면에서 만연된 죄악을 씻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이르렀다. 무조건 결과만 좋으면 축복이요, 만사형통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고쳐지지 않으면 교회나 사회에 소망이 없다.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고뇌와 심정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의 죄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볼 때,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의 병폐를 극복치 못한 채, 항상 부패하고 타락해 있는 심성의 본질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 자유나 권리가 있듯이 생각하여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인간은 오직 부패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서만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중세 수도원 시대로부터 죽어 마땅한 일곱 가지 죄악을 일주일에 한 가지씩 명상하며 고백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교만, 탐욕, 탐색, 시기, 탐식, 분노, 나태 등이다. 다행히도 우리가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세상은 아직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양심 속에 빛을 비추셔서 인간의 삶 속에서 죄를 억제하고 계신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땅이 지옥과 같이 되지 않도록 죄를 억제하고 계신다. 개혁신학자들은 이를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비록 구원에 이르는 특별은총을 받지 못하였지만, 현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더 좋은 세상을 이룩하고자 계속해서 일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반은총을 사용하시어 인간의 죄성향을 억제시키신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요,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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