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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빌려주신 것-청교도와 돈-/ 레만드 라이켐/휘튼대학 교수

baromi 2008. 10. 16. 08:32

하나님이 빌려주신 것-청교도와 돈-

 

레만드 라이켐/휘튼대학 교수


20세기에 상당히 영향력 있고 논쟁의 대상이 된 책으로 막스 메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30)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베버는 중산층에 의한 무역이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주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고찰을 시작으로 “개신교의 윤리”와 “현대 자본주의 정신”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많은 관련성들을 발견했다. 즉 세상의 직업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 훈련된 생활, 나아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는 경향, 개인주의 정신, 근로에 대한 강조 그리고 성실한 부의 축적 등이 그것들이다. 비록 그의 자료들이 임의로 선택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분석은 개신교 운동의 중요한 부분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베버의 이론은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개신교도들은 재산증식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은 듯 보였고, 도덕적 의무로 놀랍도록 재산을 쌓고, 모든 사업상의 경쟁을 하나의 덕목으로 보는 것처럼 비치었다. 그럼에도 돈에 대한 청교도들의 자세와 생활을 관찰함으로써, 베버의 이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진실을 회복시킨 훌륭한 사상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돈은 선한 것인가 나쁜 것인가

말틴 루터는 수사가 되었을 때 청빈의 맹세를 하였다. 이것은 가난이 한 개인에게 원천적인 덕목이라는 오래된 가톨릭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를 포함한 개혁자들은 가난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돈과 소유에 대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그것은 선하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라고 한 말에 동의하였다. 사무엘 월라드는 존 훌의 장례식에서 그를 추모할 때, “세상 위에” 살면서 “지상의 성자”였던 상인과 자기 사업에 근면했던 상인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선한 것들 가운데에서 부요한 부분을 그에게 주셨다.” 리차드 박스터에 의하면, “피조물이나 세상 또는 부요함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같이 모두 전하기 때문이다.”


사무엘 윌라드는 “부(富)는 경건과 동등하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을 행할 마음을 허락하신다면, 사람이 부해지면 부해질수록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데 유리해진다"는 이론을 세웠다. 윌리암 아담스는 경제적인 노력을 기독교인의 사랑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곳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돈이 선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청교도들은 돈의 합법적인 면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돈의 합법적인 면을 방어할 필요성을 발견하였다. 윌리암 퍼킨스(1558-1602)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0절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금하지 않으신 것들을 나열하였다.


자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얻고 부양가족들을 위하여 일하기도 하는 현장인 본업에 충실하십시오. 재산 소유와 풍족한 재산은 잘 쓰여질 하나님의 선한 축복입니다. 보화를 모으고 증식시키는 것은 단순하게 금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들을 존경함으로 이를 행할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2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청교도들은 돈을 버는 데 대한 죄책감이 없었다. 돈을 버는 것은 청지기의 관행이었다. 베버 이론은 박스터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다른 방법보다 더 정당하게(그대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상하지 않고)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보이셨는데 그대가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대는 가치 없는 길을 선택한 것이며,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박스터가 쓴 경제에 대한 글의 내용을 보면,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이 소명은 그저 상식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은사들에 대한 선한 청지기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일 뿐이다. 왜 청교도들은 돈이 좋은 것이라고 확신했는가? 주된 이유는, 그들이 돈과 부요함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윌리암 퍼킨스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많은 재산을 상속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선물로 알고 선한 양심으로 그것을 즐겨야 한다”고 했다.


존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축복은 부요함을 주신다… 그리고 부요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과 시민국가의 안녕을 위해 그것을 구해야만 한다.” 만일 돈과 부요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리차드 시브스는 이렇게 확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만물은 그 자체로 선하며 하늘에서 우리의 여로를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청교도들은 부요함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와 단호히 구별하였다. 그것이 선물이라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노력이 성공을 보증할 수 없고 하나님이 성공하도록 일을 축복하신다면, 축복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코톤 마더는 주장하기를, “그물을 던지는 이는 사람이지만 그 그물을 가득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존 로빈슨은 이렇게 썼다. “재화가 우리의 근면, 섭리 그리고 기술로 획득된다면, 그것은 재능을 주시고 그것을 사용하게 하시며 재능을 통해 성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청교도 윤리는 은혜의 윤리요 인간공로의 윤리가 아니다.


청교도들의 개인적 성공에 대한 변론은 돈의 적합성을 믿는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윌리암 아메스는, 개인의 성공이 “인간의 권리뿐 아니라 자연과 신의 권리에로”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아메스는 다른 곳에서 정의가 “우리의 재산을 적법하게 지키는 곳”에 있다고 했다. 메사추세츠의 초기 거대 상인이었던 존 훌이 독일로 향하던 배를 잃어버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위로를 받았다. “만일 주님이 내 영혼을 가까이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직원이 자신의 말들을 훔쳤을 때, 훌은 “내가 너희에게 그 말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내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했어야 하는건데…”라고 말했다.


청교도가 돈과 부유함을 용인한 것이, 물질의 가치를 영적 덕성보다 높였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존 윈드릅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부요함을 던져버리는” 실수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피터 버클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지만 단지 “이 일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관에 반하지 않고 순종하는” 한에서 가능할 뿐이라고 했다.

가난에 대한 견해

만일 부유함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저주요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표시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라고 청교도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20세기에 종종 그들 탓으로 돌리는 가설들에 반대한다.


우선, 청교도들은 경건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토마스 와트슨은, “진정한 경건은 보통 핍박과 함께 온다… 성인들은 고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들의 순결이 고통에서 그들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경건이 성공의 보증이 아니라면, 경건의 반대도 보증이 될 수 없다. 성공은 경건의 표식이 아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그 문제를 이해했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선과 악을 골고루 주시기 때문에 선과 악을 똑같이 견뎌낸다”고 존 코톤이 말했다. 사무엘 윌라드는,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의 분노와 증오로 인한 가난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구분된 성공과 경건의 차서를 정하고, 청교도들은 가난에 대해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가난이 필요악이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 라는 점이다. “가난 그 자체는 어떤 잘못도 없고 부끄러울것도 없다. 그러나 가난은 종종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에게 잘못을 고치거나 시험해보거나 관찰할 때 주어진다.” 리차드 박스터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어느 누구도 돈 요구 때문에 교회 출입을 통제당하지 않고, 가난도 주님의 눈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빈 마음은 그런 것들을 쫓아내지만 빈 주머니는 그렇지 못한다. 그의 은혜의 나라는 이제까지 부취와 명 예보다 멸시 받는 가난과 부합해왔다.


사실, 청교도들은 가난이 사람을 영적으로 축복하거나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복주시리라는 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말씀에 관련하여 사무엘 볼톤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축복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순간적이고 외형적인 좋은 것들만을 판단할 것인가? 잃어버리는 것도 즐거움처럼 축복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토마스 와트슨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을 위해 쓰여지는 것들”의 목록에 가난을 포함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한 일을 한다. 가난은 탐욕을 가지고 있다. 가난은 은총을 더한다.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고, 믿음에 해하여 부요하라”(약 2:5). 가난은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가난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셨을 때, 그들은 은혜의 보좌로 빠르게 올라간다.


이렇게 가난을 옹호하면서, 청교도들은 가난 그 자체를 공로로 가르치는 가톨릭의 가르침과 자신들을 조심스럽게 구분하였다. 윌리암 아메스는 수사들이 하는 청빈의 서약을 “미친 짓이며, 미신적이고 사악한 추론”이라고 비난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실 때, 가난으로부터 영적인 교훈을 배우는 개념을 묘사하면서 “복음적 가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청교도들은 꼭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톨릭의 수도원적 논리에 반박하면서, 청교도들은 가년이 유혹을 피하는 확실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체계화시켰다. 리차드 박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도 그 자체에 유혹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이 전혀 가지지 못했던 부요함과 풍족함을 사랑함으로써 파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망할 수도 있다. 세상을 사랑하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청교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여전히 가난하게 두는 무관심한 윤리도 거부했다. 그들은 가난이 완전한 불행은 아니지만, 분명히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삼아야 할 목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대하고 위로하여야 한다”고 토마스 레버는 설교하였다. 휴즈 라티머는 이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은 한두 번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만일 그분이 부요함을 주신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보내시는 것이다.” 라티머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물건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자는 자신의 재산 가운데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동시에 그들을 위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가난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청교도들은 때로 가난이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일 수도 있고 영적인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난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재화를 가진 사람들의 관대함을 요구한다.

재물의 위험

성공을 하나님의 승인의 표시나 또는 하나의 덕목으로 보는 대신, 청교도들은 부유해지는 것을 하나의 유혹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했다. 제네바 성경에 있는 창세기 13장 1절의 난외주는 “아브라함의 거대한 부는 그의 사명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이집트에서 형성되었다”고 그의 부요함이 쉽게 유혹이 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가난과 부요함 둘은 모두 안에 유혹이 들어있으며, 두 가지 중에서 부요함의 유혹이 더욱 위험하다”고 존 로빈슨은 썼다. 토마스 레버는 선언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유혹에 빠질 것이고 마귀의 독에 물릴 것이다.” 리차드 로저스는 밤이 깊을 때에 깨어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를 너무 편하게 해주었기에 위험하게 되었다ࡓ;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놀랍게도 청교도들은 부와 경건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가 밝혀질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관점은 일반적으로 그랬다. “부자는 구원사역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리차드 박스터는 경고했다. 사무엘 윌라드는 “가장 가시적인 이득을 얻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 드문 일이다. 하나님이 매우 질투하시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리차드 시베스는 “세상을 마음 중심에 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불성실하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에 실패하고, 우리의 소명에 신실할 수 없으며 기독교 그 자체에 성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물의 위험을 논하면서, 청교도들은 왜 돈이 유해한가를 분석하였다. 가장 우선적인 위험은 예배받으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대신 들어서려는 경향이다.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서서 하나님을 직접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어떻게 사람이 그의 영원한 행복을 현세에서 끝낼 수 있는가”를 토마스 와트슨은 알고 있었다. 존 로빈슨은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부유하여 만족하게 산다면, 그는 하나님을 부정할 위험에 처해 있다. 교만하게 말하고 하나님을 모독하여 주님이 누구냐고 말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리차드 로저스는 “부유하고 명예가 있음에도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은 것 같은ࡓ;성공회의 부유한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존경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자가 위험한 두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박스터는, “세상에서 풍족할 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그 지위만큼 자만하게 되고,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그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믿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재물을 모으는 것이 기독교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도덕에 몰입할 시간과 힘을 너무 많이 빼앗는다고 말했다. 리차드 마더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일을 열심히 하면 기독교의 생명과 힘을 쉽게 잃어버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 남게 된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인간 중심의 것을 먹어버리고 바로 경건한 삶과 영혼을 삼켜 시체나 조가비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코톤 마더도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 사회에 확산되는 물질주의에 경종을 울렀다. “기독교는 부유함을 낳는다. 그리고 그 소산물이 그 근원을 삼켜버린다.”


또한, 청교도들은 돈이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낳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돈은 절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들은 보았다. “부요함이란 탐스러운 포도와 같은 것이다”라고 헨리 스미스는 썼다. “그것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것처럼 보이지반. 허기진 배를 채워주거나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대신에 부요함은 사람을 더 탐욕스럽게 만들고, 질투하게 하며 근심에 휩싸이게 한다.”


만일 돈이 이처럼 전혀 무익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해야 하는 청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월리암 아메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요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사람이 선용하느냐 악용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토마스 아담스는 시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돈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지 탐욕을 부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중용적인 청교도정신

청교도들의 중요 관심은 한 사람의 수입이 얼미나 되며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의 생각은 중용적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청교도들만의 것은 아니었지만, “절제”의 개념은 당시의 청교도들에 의해 설정된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극단적 생각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중용과 절제를 생각했다. 존 다우네임은 이런 말을 기록했다. “중산층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전에 오랫 동안 준비하는 것이다. 적당한 재산은 하나님을 망각하거나 비기독교적이 되고 신성모독하는 것에서 우리를 보호한다.”


만일 중용이 목표라면, 그것은 그 반대자들에게서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중하나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퍼킨스는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들을 열거하였다. “각종 탐심이다. 그 중세상의 재물을 과도히 찾는 것이 첫째다. 그때에 사람은 분수와 중용을 지킬 수 없다.”


중용을 저해하는 또다른 것은 사치이다. 청교도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지 않게 보았다. 그 집이나 옷, 여가생활 또는 식생활까지 어떤 것도 사치스러운 것은 용인하지 않았다. “재물의 폐단”을 통박하면서, 리차드 박스터는 호색과 과식, 운동과 여가의 탐닉을 함께 논하였다. 그가 쓴 “소비벽과 죄받을 낭비를 금하는 지시”에는 “무절제한 과식 또는 값비싼 음식이나 음료”, “불필요하고 돈이 많이 드는 방문과 유흥” 그리고 “불필요하고 사치스러운 건물들”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들어 있었다.


사치에 대한 이와 같은 경고들은 청교도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자연과 개인에게 과도한 재산”을 쓰면서 사치의 핵심을 정의한 월리암 퍼킨스는 사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치는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칼처럼 그 손에서 거두지 많으면 다치게 하는 것과 같다.” 사무엘 워드는 자신의 대학일기에서 “허식”을 “대학의 죄” 가운데 하나로 지적했다.


청교도들이 사치를 반대했다고 그들을 금욕주의자로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합법적인 특권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본래 덕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사치의 유혹을 대하는 것처럼 가난의 유혹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박스터가 쓴 유혹들의 목록에는 “사람들의 소망과 세상적인 문제에 대한 과도한 관심”, 불평, 탐욕, 부자들에 대한 질투, 영적 의무와 “자녀들을 거룩하게 교육하는 데 대한 무지”가 들어 있다.

무엇을 위해 돈을 쓸까

청교도의 물질관을 연구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돈에 대하여 그들이 말한 모든 말의 핵심이 돈은 사회적 미덕이지 사유 재산이 아니라는 그들의 고백이었다는 점이다. 이 고백의 주목적은 사회의 모든 사람을 보장해주는 것이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의 개인적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청교도의 특성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고, 돈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개인이 자신의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었다. 박스터는, “문제는 그들이 땀흘려 벌고, 애써서 모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돈을 쓴다면, 그것은 최고로 돈을 잘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엇이 돈의 목적이며 쓰임새인가? 청교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들을 위해 말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우리들의 궁핍한 형제들을 위해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주머니가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속적으로 쓰여지는 세상의 물질을 영적으로 사용하고자 노력한다.” 돈을 버는 목적에 대한 어떤 논의도, 수입이란 단순히 그들이 벌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쓸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월리암 퍼킨스는 돈을 사용하는 법에 대하여 이렇게 요약하였다.


우리는 우리 소유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 되도록 절제하며 사용하여야 한다. 부자들은 적재적소에 돈을 써야 한다. 첫째, 많은 재산과 좋은 여건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들의 재산, 특히 가족이나 친지들의 재산을 유지해야 한다. 셋째,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 넷째, 하나님의 교회를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 공동의 재산을 유지해야 한다.


돈이 사회적 물질이라는 믿음은 이자소득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점을 아는 또 하나의 열쇠이다. 16세기에는 청교도들이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소득을 지나칠 정도로 반대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이자소득을 금하였고, 그것이 탐심과 욕심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영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이자소득을 반대하였다. 사회가 변하여 농업이 감소하고 산업화되면서 청교도들은 점점 이자와 고리대금업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두 개의 입장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이자를 반대하는 청교도와 이자를 찬성하는 청교도가 공유하는 공통점을 보라. 그들은 돈이 사회적 재물이며 따라서 재산의 축재나 착취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갈수록 커지는 상업사회에서 가장 자비로운 행동은 적당한 이자에 돈을 빌려주려는 의지가 되었다. 박스터는 “정의나 자선에 역행하지 않는 고리대금업이 있다”고 하면서 자선이 가능한 방안을 계속 묘사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돈이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보이는 것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때 왜 청교도들은 사회적 재산으로 돈을 이해했을까? 청교도들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탁하신 것의 청지기가 사람이라는 굳은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돈은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영향력 있는 청교도의 책인 「하나님의 가정 통치」라는 책에는 돈이란 “하나님이 그대에게 빌려주신 것”이라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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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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