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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된 경건에 대한 칼빈의 견해 / 배틀 F.루이스

baromi 2008. 9. 19. 09:20

참된 경건에 대한 칼빈의 견해

 

배틀 F.루이스

 

경건에 대한 칼빈의 정의
존 칼빈은 그의 첫 번째 「교리문답」(불어판은 1537년, 라틴어판은 1538년에 출간)에서 피에타스(pietas)는 번역 볼가능한 용어에 대해서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칼빈은, 피에타스라는 말은 자신이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다 설명해 주기에는 부족한 용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고의로 달아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주님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의를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는 주님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훨씬 더 무서워한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이란 주님 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히 자신을 위해 신을 만들어내는 경솔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보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내시고 선포하신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2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보다 간결하게 피에타스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결합된 것”3이라고 정의하였다. 피에타스와는 별도로, 칼빈은 렐리기오(religio)의 의미도 밝힌다. "렐리기오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자발적인 경외가 포함되어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합당한 예배가 수반된다.“4
피에타스와 할리피오에 대한 이러한 정의 속에는 다른 많은 증요한 용어들 - 신앙, 두려움, 경외, 사랑,지식 - 이 읽혀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용어들의 상호관계는 다음표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표 : 경건과 종교의 상호관계 >
하나님
↗ ↖
예배 섬김
↗ ↖
종교←-------- 경건
「――――― ↗
신앙과 두려움 + 경외와 사랑
↖ ↗
인간


피에타스에 내포된 모든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칼빈의 주석서 및 다른 여러 저서들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많를 관련 어구들 중 몇 가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119:78 이하) 에서 신자들에게는 '존경'(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과 '두려움'(주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5 이라는 두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 두가지 특징 속에서 피에타스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불신자가 가지는 두려움은 신자의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두려움은 신앙(fides)이 아니라 불신앙(diffidentia)에 근거하고 있다.6 넓은 의미에서는 지식도 피에타스 개념과 관계된다. 「예레미야 주석」(10:25) 에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cognito Dei)이 피에타스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것 (invocation)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그가 피에타스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7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 8이 피에타스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칼빈은 또 다른 곳에서, 제자라는 말 자체의 의미에 비추어볼 때 참된 교훈이 없이는 피에타스도 없다고 단언하였다.9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종교와 예배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외에는 누구도 합당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10고 말하였다.


칼빈은 또한 경건과 사랑을 연관시킨다. 「에스겔 강해」에서 그는 피에타스가 카리타스(caritas)의 뿌리라고 말했다. “피에타스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또는 경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료들과 지낼 때에도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12 이렇게 하여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자세와 이웃에 대한 경외의 자세를 연관시켰는데, 이같은 견해는 신명기 5장 16절에 대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방인들은 이 피에타스라는 말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에게 권위를 가지는 모든 분들에게 우리가 드리는 존경이라는 의미로까지 응용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피에타스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외이다. 그런데 이교도들- 이들이 비록 불쌍하고 몽매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엄 가운데서만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우리를 다스리는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 또한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고위 관리, 그밖에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이니만큼,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13

그러나 칼빈은 피에타스를 카리라스보다 우위에 놓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높으시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서로의 의를 높여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14
계속해서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 에서도 이교도의 피에타스 개념과 그리스도인의 피에타스 개념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칼빈은 “피에타스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조금씩은 퍼져 있다"고 인정했지만, "철학자들과 이교도 학자들의 작품 속에 훌륭한 감정의 씨앗을 뿌려주신 분은 하니님이시다"15 라고 말한다. 바울이 불경건한 자들과 진정한 피에타스를 모르는 이들에게 설교하면서 인용했던 아라투스의 시는 '인간의 정신에는 자연적으로 새겨져 있는 지식이 있음을 고백하는 증언의 시'16이다.


칼빈이 22세 때인 1532년에 출간한 「세네카 관용론 주석」을 보면, 청년 칼빈의 고전 연구가 기독교적일 뿐만 아니라 고전적이기도 한 그의 피에타스 이해의 근거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다. 칼빈은 회심 이후에 세네카의 “그의 자녀들의 경건도 아니다"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최고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을 끌어들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만들어냈다. 칼빈은 이러한 과정에서 고전 텍스트들을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해석하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고전적인 이교도 사상가들의 글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플란시우스를 반박함」(33.80)에서 "경건이라는 것이 자신의 부모에게 드리는 선의의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말했으며 「퀸틸리안」(5.10,12) 에서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경건이 부모에게 대한 것이라는 사실처럼, 인류 대부분이 한마음으로 인정하는 일들"이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나의 독자들이 진정으로 경건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키케로의 「여러 주제들」(23.90)에서 발췌한 다음 인용구를 첨가하됐다. 즉, “평등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하늘의 신들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하늘을 떠난 영들에 관한 것, 셋째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경건, 둘째는 거룩, 첫째는 정의나 평등이라고 불리워진다"라는 구절이다. 키케로는 여기까지만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신들의 반열에 속하는 분들이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개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한 예배’ 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희랍인들은 이것을 유새에이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유세베이아는 부모님에 대한 의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어야 옳다(「하나님의 도성」,10.1.3.)". 그런데 우리는 특별히 강한 사랑을 나타낼 때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키케로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9.1,에서)"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대단히 기뻤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경건에 대해서 당신이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엄숙하고 신성한 '경건' 이라는 말도 내가 당신에게 받은 은혜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면, 무슨 말로 저의 '호의' 를 나타내야 할까요?17 라고 말했다.

고전에 등장하는 이러한 구절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고대 라틴어인 피우스(pius)와 피에타스라는 말은 우선적으로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었다.18 아버지와 어머니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로마의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순종하고 사랑해야 했다. 피에타스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과 배려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국가란 결국 (아리스토 텔레스가 「국가론」19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정의 확대편이다. 왕이나 황제는 아버지의 아버지였으며, 또한 국가의 아버지였다.20 로마인들이 볼때 부친 살해는 가장 잔인하고 중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범죄로서,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통치자에 대한 암살로까지 확대 해석되었다. 21 그렇다면 피에타스는, 넓은 의미에서는 로마 시민성의 특징이었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랑 및 공익을 위한 자기 희생의 감정까지 다 포괄하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이자 최고의 아버지로 섬겼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피에타스라는 말에 내포된 가족적이고 국가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은 채, 이 말을 보다 고귀한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에 사는 그분의 자녀 사이에 맺어진 모든 다양한 관계들을 이 한마디로 요약해냈다. 그리하여 칼빈 역시 '부모에 대한 자녀의순종' 이라는 피에타스의 고전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았다. 피에타스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우리, 즉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진 우리가 마땅히 갈길을 말해주는 개념인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피에타스의 ‘내적인’ 의미를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칼빈은 피에타스의 외적인 의미에도 주목하였다. 「복음서들의 조화에 관하여」(마 12:7과 그 병행구들)라는 저서에서 그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안식일에도 몇 가지 육체 노동-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계된 일들-은허용된다고 주장하면서, 오피키아 피에타티스(officia pietatis), 번역하자면 '신앙적인 의무들'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 부분에서 칼빈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짓으로 경건을 가장하고, 육적인 예배에만 집착함으로써 개탄스러울 만큼 경건의 참뜻을 왜곡하는 위선자들'22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현대의 위선적인 경건 개념을 암시하였다.


칼빈이 생각한 피엑타스 개넘의 근거가 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칼빈의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 피에타스는 신약 성경의 유세베이아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거의 배타적으로 목회서신과 일반서신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그외 이 단어가 사용된 부분은 사도행전 3장 12절 뿐이다.


목회서신 및 일반서신에는 유세베아아가 15회 발견되는데, 개정 표준역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1946년에 미국 N.C.C.가 펴낸 영역성경 -역주)은 12회를 제외한 나머지를 '독실한 자세'(godliness)로 번역했다. 70인역에서 유세베이아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행해야 할 의무, 즉 경건, 독실한 자세, 신앙의 생활'23 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70인역은 주로 외경 부분에서 유세베이아를 사용하였다.

칼빈의 생애에 투영된 경건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칼빈이 생각한 경건의 의미라면, 우리는 칼빈의 회심에 대한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이 개념이 그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미약한 도움이나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칼빈이 언제, 어떤 정황에서, 그리고 어떤 성격의 결단을 통해서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 논의와 추측을 거듭해왔다. 필자는 1536년판 「기독교강요」를 번역하면서 칼빈의 회심 문제를 다룬 바 있다.24 회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대부분,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회심의 계기로 인용하는 식의 설명이었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근교의 정원에서 “톨레, 레게!"(Tolle,Lege!; "집어들어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 성경을 읽었을 때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의 말씀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나 기독교인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마음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특별한 성경구절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필자는자료들을 면밀히 연구한 결과, 로마서 1장 18-25절이 칼빈을 회심으로 이끈 말씀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추정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마도 로마서 1장 21절("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5 말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칼빈의 경건 개념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하니님께 감사하는 일이다. 칼빈은 「시편 주석」26의 서론에서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사돌렛 추기경에게 보내는 답변」27 에서는 종교 개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고백할 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글들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칼빈은 일적이 사촌 피에르 로베르(올리베땅)가 펴낸 불어판 신약성경의 서문에서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신앙을 피력하였다.28 "이 서문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것이 바로 1536년판 「기독교 걍요」의 제1장 '율법에 관하여' 중 앞부분 몇 페이지이다. 이 문제는 제2장 ‘칼빈 신앙의 핵심' 에서 다루겠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완전성과 인간의 타락상 사이의 화해될 수 없는 대립에서부터 자신의 종교적 탐구를 시작하였다. 칼빈이 아무리 ‘수비타'(subita)29 하게 되심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회심을 하자마자 즉각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죽음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삶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이 회심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로운 은사들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두 가지 지식으로부터 신앙에 대한이 '핵심적인’ 설명을 시작하는데, 그 첫째는 하니님의 영광 ․ 정의 ․ 자비 ․인자하심에 대한 지식이고, 둘째는 타락한 인간의 무지 ․ 죄악 ․ 무능 ․ 죽음 ․ 심판에 대한 지식이다. 셋째로, 우리는 칼빈이 율법 -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양심을 통해 내적으로 쓰여진 율법-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엄청난 간격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최초의 조치’ 로 이해 했음을 알 수 있다.


을법이란 우리 자신의 죄와 저주를 분별하고 성찰하는 거울이다. 율법에 쫓겨가다보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지만 정작 이러한 의무들을 수행할 능력은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주와 심판, 즉 영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칼빈 자신도 이러한 곤경을 체험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칼빈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근거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이러한 해석을 내리게 되었으며,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해석을 일반화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 곤경을 돌파했다.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칼빈의 '핵심적인' 사상은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다룬다. 우리의 빈곤과 파멸에 대한 지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비참함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며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한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경건이란, 창조주로부터 떨어져 있던 우리가 다시 그분과 연합하기 위해 걸어가는 은혜의 오솔길이다. 괴로운 길이지만 기쁨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회심은 일생에 걸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의 짧으면서도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여기서 요약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어째서 율법의 세 번째 용도- 회심을 한 그리스도인들의 선생으로서의 교육적인 용도 -를 믿었으며 , 또한 어째서 그 세 번째 용도를 율법의 제일 중요한 용도라고 생각했는가를 설명해 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30


칼빈은 소명에 대해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사는 동안 파수꾼처럼 자기에게 맡겨진 위치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했다.31 그의 삶이야말로 소명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한 좋은 예가 된다.
첫째로, 칼빈이 제일 처음 제네바에서 사역을 하라는 소명을 받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칼빈은 처음에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삼가는 태도로 묵상하며 신앙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꿈꾸었다. 불어권 종교개혁 운동의 성급한 개척자였던 월리엄 파렐은 칼빈에게 이제 막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제네바로 와서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초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월리엄은 주로 저주와 협박을 수단으로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칼빈에게 “덩신은 자기 자신의 소원을 따르고 있지만,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거니와 당신이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주께서는 주님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이익만 추구한 당신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실 것이오"33라고 말하며 칼빈을 협박했다.


그 후 칼빈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일이었지만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1538년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 부처라는 사람은, 파렐이 했던 것과 똑같은 협박을 하면서 칼빈에게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를 하며 가르치는 일을 담당해 달라고 설득했다.33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자그마한 프랑스 교회의 교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들은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갈 것을 끈질기게 권하였다.34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체류 기간은 목회적, 실천적, 제의적으로 피에타스의 의미가 온전히 구현된 중요한 시기였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칼빈은 족장들의 고난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고난을 성찰하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까지 포함하여 족장들은 극심한 어려움과 고통, 고난을 견뎌내었다. 그들은 순례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일들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을 소망이 그들의 여정에 힘을 더해주었다35 칼빈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가 직면했던 불가항력적인 싸움에서 승리의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비밀도 바로 이같은 소망에 있었다.


칼빈은 이 소망 때문에 자신의 연약한 육체를 지탱할 수 있었으며,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도 계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소망 때문에 그는 최고 수준을 갖춘, 후대를 위한 지극히 중요한 저술들도 끊임없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나타난 경건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의 언행에 드러난 피에타스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제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한 피에타스의 원리들을 살펴보자. 이 일을 위해서는 조금 전 개략적으로만 설명했던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망명 시기 (1538-41)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칼빈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라틴어판「기독교강요」(1559) 제3권의 6-10장 부분이다.36 이 책의 초판본(1536)에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37 사실상 이 부분은(뒤이어 나오는 몇몇 다른 첨가분들과 함께) 1539년에 출간된 라틴어 2판에서부터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장이 수록된 1554년판 사이의 모든 판본에서 발견된다. 왜 칼빈은 이렇게 중요한 주제를 그렇게 뒤늦게 다루었던 것일까?


필자는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갔던 1538년 이전에 쓴 부분과 그 이후에 쓴 부분을 비교해 봄으로써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저 1536년판 「기독교강요」그리고 1537년 1월에 출간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논문들」38,그리고 1537-38년에 출간된 「제네바 교회의 신방고백과 교리문답」39을 살펴보라. 그리고 나서 1539년판 「기독교강요」(칼빈은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라는 논문을 수록하었다)와 역시 1539년에 출간된 「찬양을 위한 시편과 노래들」40 , 그리고 1540년에 출간된 「로마서 주석」을 검토해 보라. 여기에 더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1541년 직후에 출간된 문헌들, 즉 1541년의 「교회 예식 초안」. 1542년의「기도의 형식」,그리고 「기독교강요」 의 세 번째 라린어판(1班3)도 함께 검토해보라.


이같은 비교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41 우리는 교회의 사람인 칼빈이 그리스도인 개인의,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보다 성숙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저작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하게 하고 또 교회가 가진 제의와 훈련의 기능을 온전하게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저작들은 칼빈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들을 증언해주고 있으며, 훗날 「기독교강요」와 1559년판에 제 3,4부로 편입되었다.


15년판 「기독교강요」와 1537-38년에 나온 「교리문답」 은 공히 전통적인 교리문답의 형식, 즉 십계명, 사도신경, 주의 기도, 성례 등의 틀에 맞추어 쓰여졌다. 제네바에서는 「고백록」과 1537-38년에 쓰여진 「교리문답」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가구별, 지역별 감시체계에 막혀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1538년에 칼빈과 파렐은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이에 관련된 사실들을 가볍게 개관해 보자.


1536년 5월 21일 주일, 제네바시의 일반 의회는 만장일치로 미사와 그밖의 교황 정치적인 의식들, 악용된 형식들, 그리고 성상들과 우상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거룩한 복음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살기로 맹세하였다.
월리엄 파렐과 존 칼빈은 합법적으로 안수를 받은 개신교 목사로서, 설교를 통해 시원로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으며 제네바시를 주님의 성찬 테이블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즉 복음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던 1536-37년의 공문서들은,(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데서 돌아온 이후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훈련 목적으로 재학성 되었으며 , 그 결과 1541-43년 사이에 교회 정치에 있어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1539년판 「기독교강요」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성숙에 대해서 1536년판에서보다 훨씬 더 성숙되고 완성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그 다음 판, 즉1543년판은 초판과 재판의 교회론을 훨씬 능가하는 교회론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처음 두해 동안,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3년 동안 마틴 부처의 보호 아래 지냈던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42라는 짧은 논문이야말로 칼빈이 1536-38년에 겪었던 자신의 실패를 성찰한 후 내놓은 첫 번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앙, 회개, 칭의, 중생, 선택, 그리고 이와 관련된 교리적인 주제들에 대한 교리문답적인 진술들은- 비록 아무리 명료하게 진술된다고 하더라도-사람들의 지적인 동의는 얻을 수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이 되는 기독론적인 근거에 대해서.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근거에 대해서 보다 깊이 성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 짧은 논문이 1536년판 「기독교강요」와 1537-38년의 「교리문답」을 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어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1536년판 「기독교강요」의 본문에는 알리네아(alinea),라고 부르는 공백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후에 -이후 판본들에서 - 보충되었다. 이 사실은, 칼빈이 1559년판 「기독교강요」의 독자들에게 말한것처럼「기독교강요」를 여러 판 내면서 그의 사상이 진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을 법하다. 그는 "나는지금과 같은 순서로 이 책이 배열되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해서 결코 만족하지 못했었다”43 고 말했던 것이다. 또한 1537-38년에 출간된 「교리문답」은 크게 보아서 그전 해에 출간된 「기독교강요」의 요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문답」에는 1539년판 「기독교강요」에서 드러날 중대한 변화들이 암시되어 있다.44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칼빈의 계속되는 순례 여정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이 논문에서 철학자들의 글과 성경의 차이에 대한 칼빈의 더욱 깊이 있는 성찰을 볼 수 있다.45 칼빈은 회심을 하면서부터 이미 그리스와 라틴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도덕적인 지침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성경과 이들 문헌들의 차이점이 더욱 날카롭고 자세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여전히 칼빈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칼빈이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칼빈이 거부한 것은 스토아 철학의 운명관 및 열정이 결여된 '현인' 개넘, 그리고 동정심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회심 이전에도, 즉 그의 「세네카 관용른 주석」에서도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이같은 태도를 보인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신을 따르라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요구와 인간은 서로를 돕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들의 주장, 또한 중용과 검약을 외치는 그들의 설교46는 칼빈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너무나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 이같은 내용들은 칼빈의 도덕적 가르침의 일부분으로 남게 되었다.

둘째로, 칼빈은 1536년에 출간된 자신의 첫번째 위대한 신학적 저술(「기독교강요」 초판 -역주)을 집필하면서, 희랍 교부이건 라틴 교부이건간에 초기 교회의 교부들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바실리우스나 크리소스톰의 설교들, 또는 키프리아누스나 암브로시우스의 저술들은 칼빈의 목회 지식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교부들 중 가장 중요판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칼빈으로 하여금 바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47


그리하여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프랑스 교회에서 목사로서 일하다가 부처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잠시 방문한 후. 1539년 봄에는 「기독교강요」 라틴어 2판에 수록될 바로 이 부분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5월 12일에 칼빈은 고린도전서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고 "10월 16일에는 「로마서 주석」을 바실리우스 연구가인 사이먼 그리나에우스에게 헌정했다.


논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에는 바울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집중적인 연구 결과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단순히 바울의 사상에만 열중한 논문이 아니다. 칼빈의 목표는 바울의 사역 방식을 교회에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고 지도할 어떤 질서를 보여주는 것' 이 그의 목표였다. 칼빈 자신이 이러한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는 짧지만 대단한 논문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 즉 심령 깊은 곳의 거룩함을 이루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나아가는 성장과정(일생에 걸친)을 기술하기 시작한다.49 여기에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2단계 개념50과 자신이 재세례파의 가르침에서(옳게든 그르게든) 추정해 낸 '즉각적인 완전성의 획득' 이라는 개념51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신자의 심령에서 내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자아의 부정' 52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외적인 삶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십자가를 젊어짐'53 이라고 묘사한다.
그 다음에 그는 눈을 돌려, 먼저 현재의 상황54을 곁토하고 다음으로 미래의 삶55을 살펴본다. 필자는 때때로 「기독교강요」 제3권을 읽고 있는 학생들에게 9장까지 읽은 후에 잠깐 읽기를 멈추고 거기까지의 감상을 적고, 그 다음에 다시 계속해서 10장을 읽고 다시 한번 감상을 적어보라는 과제를 내준다. 9장의 마지막부분에서 칼빈은 세계의 허망함에 대해 성찰하는 가운데, 중세 수도사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그는 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중세적인 견해를 완전히 벗어난다! 그 비밀이 무엇일까? 그 비밀은 현재 우리가 사는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주는 다가올 삶에 대한 소망에 있다.56


이 부분을 읽는 독자는 양극 사이에 형성된 어떤 자기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심오한 종교적 통찰력은 논쟁 가운데 싹튼 것이다. 그는 양극단 사이에서 중간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을 찾아내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로마 가톨릭과 재세례파의 사이에 중간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이 놓여 있었다.


칼빈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칼빈 사상의 이론적인 구조만을 연구해서는 안되며, 어느 한 부분만을 발췌해서도 안되고, 그의 사상을 일반화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의 글을 원래의 전체성 가운데서, 그리고 그 글이 나오게 된 역사적, 성경적, 신학적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우리 자신의 견해와 실천도 우리 시대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이율배반적 성격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칼빈이 20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예컨대 칼빈은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청지기된 원리를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생태계의 위기 시대에 필요한 삶의 양식을 밝혀준다.57 20세기의 거대한 기술적 진보가 이룩되기도 전에, 현재와 같이 도에 지나친 자원 착취가 행해지기도 전에, 이미 칼빈은, 지구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폐쇄된 생태계’ 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에 기록된 인용구 등을 통해 칼빈은 인간이 창조 세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모세는 여기에서, 땅은 현재의 상태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인간은 땅을 경작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같은 사실로부터 인간은 무언가 일을 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지, 무위와 나태 가운데 누워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노동은 참으로 즐거운 노동이며, 기쁨으로 충만한 노동, 어려움과 권래가 전혀 없는 노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땅을 경작해야 한다고 정하셨으므로 당신 자신의 성품에 따라 게으른 휴식은 저주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부여하지 않은 채 그저 먹고 마시고 자는 일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 더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은 없다. 모세는 동산을 관리하는 책임이 아담에게 주어줬었던 것을 볼 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맡겨주신 일들이 있다고 덧붙인다. 이 일은 남은 땅을 잘 관리하면서, 검약하고 검소하게 선용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땅을 소유한 사람, 그리하여 그 땅에서 나는 열매를 매년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으로 땅이 망쳐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리고 그 땅을 자신이 물려받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또는 더 잘 경작된 모습으로 후손에게 넘겨주기 위해 노력하자. 그땅의 열매로 먹고 살되, 사치스럽게 그것을 낭비하거나 게으름으로 인해서 열매를 망치거나 버리지 말도록 하자.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선한 것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어,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편만히 이루어드리고 더욱더 부지런히 일하자.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나의 소유물을 관리해야 할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모두 다 깨닫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누구도 방탕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용하라고 하신 것들을 악용함으로써 망쳐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58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라고 믿었다59 위의 인용문을 볼 때, 칼빈 자신도 1564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향하여 성장의 과정을 밟아나갔다는 사실을 알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피에타스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멋대로 판단한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제까지 살펴본 칼빈의 경험을 보면서, 또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줄 몇가지 일반적인 원리들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1. 한 사람이 어떤 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중요한 경험을 했는지를 모르고서는 그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2. 또한 고전적인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일상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숨겨진 전제들을 파악해야하며 , 최소한이나마 그것들을 배제할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1)인간은 자기 충족적인 존재이며 과학직,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는 신화 (2)하나님을 일상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덧없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자세 (3)성경을 다른 책들과 똑같은 인간의 책으로 보는 관점 (4)사후의 삶을 부정하고 인간의 모든 관심과 역량을 현재의 삶에만 기울이는 태도 (5) 상품의 생산에 대한 강조와 인간을 소비하는 동물로 보는 관점 (6) 인간이 바라는 바는 모두 다 충족되어야만 한다는 견해 등이 전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배제해야만 한다.


3.이제, 칼빈이 본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칼빈이 설정한 기본 전제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전제들이란.(1)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임 (2)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은 선용하고 누리도록 주어진 것이지만, 이는 중용과 책임을 전제함 (3)하나님은 섭리에 따라 우리를 보호해주심 (4)철학자들의 글과 성경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음 (5) 내세는 현재 삶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소망 가운데 현재의 삶에 힘을 줌 (6)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임 (7)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마지막 날에 히나님께 설명드려야 함 등이다.

주(註)
1 Piety 1978,13-26에서 발췌
2.「교리문답」1538,2.
3.「기독교강요」.11.2.1.
4. Ibid,1.2.2.
5.「시편 주석」(시 119:78f.),0C,32:249; cf. 「기독교강요」 3.2.26.
6.「기독교강요」 3.2.27.
7.「예레미야 주석」(렘 10:25), OC, 38;96
8. 「기독교강요」26.4
9 「사도행전 주석」(행 18:22), OC, 38:96
10.「시편 주석」(시 119:78f.),0C,32;249.
11.「에스겔 강해」(겔 18:5), OC, 40:426.
12. hasid, mansuetus 등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살펴보라. 경건이 사람의 친절함으로 번역된 곳도 있다(시 16-10등).
13 「신명기에 대한설교」(신 5:16), OC, 26:312.
14. Ibid. 이것은 칼빈이 평소에 십계명 「기독교강요」2.8.11.)과 주의 기도를 해석하면서 응용했던 이분법(하나님과 사람) 이다.
15 「요한복음 주석」<요4:36), OC 47.96.
16.「사도행전 강해」(행 17:28), OC, 48:417.
17.「세네카 관용론 주석」 226-29.
18. 유스티누스의 주석과 비교해 보라. 유스티누스는 “아버지의 힘은 잔인성이 아니라 경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유스티니안 법전」 48.9.5.)고 말했다. 칼빈의 「세네카 관용론 주석」254-57에서 재인용.
19. 1.3-13(1253 bl-1260 b25); Nichmachean Echics 8.11(1160 cl). Calvin의 「세네카 관용론 주석」,170f에서 재인용.
20. Calvin, 「세네카 관용론 주석」 263-39
21. Ibid., 252-55; 308f 참조
22. OC, 45:324f., 또한 「기독교강요」.1.4.4. 참조 여기에서 칼빈은 참된 피에타스와 거짓된 피에타스를 대비시킨다.
23.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ed. and trans. by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2nd ed.(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326.
24. 「기독교강요」.1536a, xviff, 「기독교강요」 1536b, xxviff의 역자 서문을보라
25. 「기독교강요」.1536a, xviif, 「기독교강요」 1536b, xxvi-xxvii.
26. Piety 1978,1장을 보라.
27. 「기독교강요」,1536a,xxivf 와 「기독교강요」1536b,xxxiiff에 수록된 나의 역자 서문을보라.T.H.L.파커는 칼빈의 「사돌렛 추기경에 대한 답변」에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들을 '자료' 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John Calvin: A Biography(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162.
28. 「기독교강요」 1536a,xxivf 「기독교강요」 1536b,xxxivff 의 역자 서문.
29. subita('갑작스러운. 예기치 못한’)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진행되었다. 관련된 논의들에 대해서는 Ptety 1978,ch.1,line 257(각주)을 보라.
30. 칼빈은 율법이란 우리를 경건과 사랑의 의무로 인도해주는 완벽한 인도자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2.8.51).
31. 「기독교강요」 3.9.4., 3.10.6.참조
32. Beza, Vita Calvini, OC, 21:125.41ff와 Henry Beveridge, Tracts and Treatises, 1:xxix.
33. Piety 1978, ch. 1, line 445(각주)를 보라.
34. Piety 1978, ch. 1, line 469(각주) 참조
35. 「기독교강요」2.10f.
36. Piety 1978, ch.3에 번역되어 있음.
37. 1536년판 「기독교강요」에는 1559년판 3.8.1.ff 부분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기독교강요」 1536a의 55,「기독교강요」1536b의 40~4l을 보라.
38. John Calvin,Theological Treatises,ed.and trans. by J.K.S.Reid,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22(Philadelphia.Westminster, 1954), 47-55를 보라.
39. 1538년판「교리문답」viiff '편지' 를 보라.
40. Piety 1978,ch.6을 보라.
41. Ford Lewis Battle, "Against Luxu교 ane License in Geneva," 186ff, ch, 9 이후 부분 참조
42. Piety 1978,ch.3을 보라
43. 「기독교강요」,3.
44. 1538년판 「교리문답」에 붙인 나의 서문
45. 「기독교강요」 1.15 8.참조. 칼빈은 타락한 인간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는 데 었어서 철학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는 회심을 겪은 자신의 통찰력으로 이해한 영혼의 현상태(1.15.6-8 이 부분은 주로 1559년판에 나타나지만 1539년판에도 어느 정도는 나타나고 있다)를 근거로 하여 타락한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었던 것이다.
46. 검약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이 제네바의 ‘엄격하고 우울한 법률’ 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Battles,“Against Luxury and License in Geneva," 182ff,ch.9 이하를 보라.
47. 칼빈은 제10계명에 대해서, "이 계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에게 처음으로 길을 열어준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기독교강요」 2.8.50.)라고 말한 바 있다.
48. piety 1978, ch 3, line 558(각주) 참조
49. Piety 1978, ch 3, lines 1-280을보라.
50. 「사돌렛 추기경에게 보내는 담변」(1539)에서 칼빈은 자신이 받은 기독교 교육(그는 가톨릭적인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은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구윈의 소망을 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일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기독교강요」l536a, xixf를 보라. 아울러 각주 26도 참조
51. 「기독교강요」 1536a, 375f(34줄에 대한 각주,p.152)와, 「기독교강요」 1536b, 286을보라.
52. Piety 1978, ch. 3, lines 281-905를 보라.
53. Ibid., lines 906-1505.
54. Ibid., lines 1506-1952.
55. Ibid., lines 1953-2255.
56. Ibid., line 1662(각주)를 보라.
57. Ibid., lines 2133ff(각주)를 보라.
58. 「창세기 주석」(창2:15부터), trans. by John King, 2 vols.(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1850), 1:125.
59 .각주 49,5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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