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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omi 2008. 9. 17. 23:23

한번 구원받은 자가 왜 구원에서 떨어 질 수 없는가?

 

로마서3 : 10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시편53 : 3절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의 정의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행하는 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준은 바로 이 두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사람은 물론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라는 것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사람의 생각에 의한 선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약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굳이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분이 오셔서 구속을 이루어 주셔야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금 행하고 있는 선을 보면서 마치 자기는 선을 행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은 아무렇게나 방종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마치 어떤 선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어떤 행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야고보서2:14-26절의 말씀을 묵상 하시면 성령이 임재하신 성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물론 전혀 행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여 주시면 분명히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갈라디아서2 :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따른 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냐면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가 행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보겠습니다.

 

야고보서4 :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전도서1 : 2-3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안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행하는 선이라는 것 행위라는 것이 바로 안개라는 말씀입니다 그 안개를 보면서 잠시 후에 사라져 버릴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집착을 하면서 마치 그것이 실체 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개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감동하여 주신다고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조차도 안개와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안개를 잡으려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 합니다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행위가 따른 다고 말하는 그 행위도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인생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 라는 말씀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모든 행위가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율법주의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헛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개와 같이 잠시 후에 사라질 것이 헛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 : 9절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무익하고 헛된 행위를 가지고 믿음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있으면 그 무익하고 헛된 것이 당연히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익하고 헛된 것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아니 조금 있으면 어떻고 많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많이 있으나 조금 있으나 어차피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율법주의자들은 아주 교묘하게도 그 안개와 같이 무익하고 헛된 것을 헛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따라온다는 그 헛된 것이 따라 온다는 아주 그럴 사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체가 율법주의입니다 헛되고 무익한 것을 마치 진실처럼 말하는 자체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려는 자체입니다

 

마태복음6 : 2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당대에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왕 중에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저자이기도 하며 지혜가 솔로몬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솔로몬의 모든 행위도 들에 피는 백합화 보다 못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율법주의에 미혹된 사람들은 솔로몬의 발꿈치도 못 따라갈 행위를 강조 하면서 마치 그것이 대단한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럼 솔로몬의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겠습니다.

 

시편62 : 9절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솔로몬의 모든 행위나 예수님 옆에 달린 한편 강도나 저울에 달아 보니까 입김 보다 경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헛되고 무익하고 입김 보다 경한 것을 가지고 율법주의자들은 성도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가를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방종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귀한 보석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선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헛되고 무익하고 저울에 달려 입김 보다 경한 것을 가지고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또 공격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 중에는 도덕 폐기 론을 들고 나오면서 저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절대로 도덕 폐기를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내가 가진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시 토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성도의 견인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에서 떨어 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논의하기를 하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이 왜 중요한 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이 마치 잘못된 주장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정코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지 어느 말씀도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모르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를 구하기도 전에 마치 오리가 처음 자기가 알에서 깨어나 본 것을 어미로 알고 따라가듯이 처음 들은 지식에 세뇌가 되어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미혹되어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성도의 견인에 대해 반대 변론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답글로 성경적으로 성도의 견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 하시면 저도 그것에 성실히 토론에 임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세뇌되어 있는 지식으로 저를 공격하듯이 지나가듯이 한 마디 던지면서 리플을 단다면 운영자에게 말씀을 드려서 리플을 삭제 하도록 건의를 드리겠습니다.

 

토론에 임하시려면 신사적으로 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내 생각이 아닌 오직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반론을 펴시고 토론에 임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헛된 존재입니다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은 저울에 달면 입김 보다 경한 것입니다 그런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를 살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을 이루어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육신은 혈통과 육정에 의해 사람의 뜻으로 낳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행위의 기준이 있어야 내 아들이 됩니까? 그 아들이 어떤 기준에 못 미치면 내 아들이 안 됩니까? 그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 있으면 내 아들이 안 됩니까?

 

여러분의 아들은 여러분의 마음에 쏙들 정도로 모든 행위를 잘 해서 여러분에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어떤 기준이 있어서 그렇게 부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낳기 때문에 여러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낳았으면 그 아이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더라도 그 아이는 여러분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안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낳은 것입니다 그 아이가 부모 보다 먼저 죽어 가슴에 묻었어도 그 아이는 내 자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어느 정도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들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부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가 낳은 자녀를 어떤 방법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낳았으면 그는 무조건 내 자녀입니다. 내 자녀가 안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방에는 자녀가 안 될 수 있다고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 :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성도는 이 세상 부모가 혈통과 육정으로 낳은 것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육으로 나는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낳으셨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가 어떤 처지에 있어도 자기 자녀가 안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낳으셨으면 우리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겠다고 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싫다고 해도 낳았기 때문에 나는 자녀가 안 될 수 없습니다.이것이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낳았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자기 처지에 따라서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은 성도는 압니다 그러나 낳지 않은 사람 자기가 하나님으로 부터 확실하게 났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께서 나은 사람은 의심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나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것은 끊어질 수 없는 혈통이나 육정보다 더 강한 영혼의 관계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 부터 낳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입니다 자기를 낳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아주 교묘한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말에 불과한 사상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 아들이 조금 잘못하면 아들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아들을 버리는 가 봅니다 율법주의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아들에게 겁을 주고 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 있지도 않을 일을 마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해서 성도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 보고 아들이 안 될 수 있다고 해 보세요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불안 하겠습니까?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유를 빼앗기 위함입니다. 아이가 아버지 안에서 마음껏 자유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도 그 자유를 빼앗아 자기를 위해 충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교묘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해하기 힘든 말씀들을 골라서 마치 자기를 낳은 아버지에게서 자녀가 안 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들에게 충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면 누가 이익을 보겠습니까? 당연히 율법주의자들이 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겁을 주어서 그 아이가 충성을 해야 자기가 이익을 보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낳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인데 그 아이가 자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아버지를 무섭게 만들어서 그 자유를 빼앗고 자기들에게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서11 :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 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들어서 자기들에게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행위가 따라 온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갈라디아서 말씀을 뒤집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면서 무섭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미혹이 되면 반드시 찍히는바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낳은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낳았을 때는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나은 것입니다 나에게 무섭게 하기 위해서 나를 나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나은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낳아 겁을 주고 무섭게 하기 위해서 자녀를 낳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사랑의 아버지를 무서운 아버지로 만들어서 그 영혼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나를 나은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안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그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말씀이 맞는 가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칼빈주의의 오대 강령입니다

이것은 장로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장로교 자체를 이단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지금 이 시대 장로 교인들이 다 이단에 미혹이 되어 있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게끔 만드는 아주 악한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지혜롭게 말씀에 대해 분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덧붙임

성도의 견인(堅忍)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계획에 의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 성도는 성령의 지속적인 보호로 인하여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음을 밝히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를 받으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정하심에 의해 그 반대를 반박할수 있다.

 

1) 인간을 태만과 방종으로 인도한다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의 생활까지 지배하므로 더욱 열심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2)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영적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회복된 자유의지를 주었으므로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궁극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3) 배교에 대한 경고와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한 자는 일시적으로 외적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배교하고 만다

(마24:12;골1:23;히2:1;6:1;요일2:6). 불택자(不擇者)는 성도의 견인에서 제외된 자이므로 이러한 배교의 경고가 그들에게는 적용된다(딤전1:19,20;딤후2:17,18;4:10;히6:4-6). 한편 택함을 받은 자에게 이 경고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여 성화케 하는 데 유익한 역할을 한다. 

 

예) 기관차에 매여있는 화차나 객차는 기관차의 힘에 이끌려 나아간다.

 

 

 

예수가 좋다오에서 펌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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