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렘17:9-11)
서론 : 하나님만 신뢰하는가 - 인간의 마음(=모든 악의 보호자)
우리는 앞 설교에서 우리의 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에게 두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그에게서 돌이키는 자는 악하게 되고 저주받게 될 것이 증거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이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봅니다. 비록 세상에서 우리가 많은 비참함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시원하게 해 주시는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신뢰를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발견할까요? 오히려 각자는 자신이 몰두하는 상태를 주목하며, 대부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의지하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선지자는 마음에 대해서 “그것이(=마음) 만물보다 더 거짓되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그가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모든 악의 보호자라고 말한 셈입니다. 마음이 무슨 그럴듯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 속을 조사해 보면, 정반대의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을 속일 때 얻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만 배나 더 깊은 곳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속을 잘 헤아릴줄 아십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 정죄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맙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져야 할 신뢰에 대해서 들은 후, 또한 선지자가 덧붙이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정직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속을 조사해 보면, 그 곳에서 거짓만을 발견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리석은 신뢰 가운데서 실수하지 말고,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신뢰가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봅시다.
1. 자신의 선을 신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탄의 궤계
첫째로 선지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말하며, 그곳에 잔인성(cruaut)과1 부패(perversite)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이(잔인성과 부패) 선지자가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덕성(vertu)입니다. 내가 덕성이라고 한 것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선지자는 우리에게 두 가지 특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잔인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패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당혹케 하기에는 한 가지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온통 정죄할 것밖에는 찾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헤아립시다. 따라서 나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가 매우 잘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에 대한 사랑(自己愛)이 자신을 눈멀게 하기 때문에, 선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거울로 나아옵시다. 사람이 스스로를 보기 전에(누구든 이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려 할 때), 온 세상이 그를 조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게 되면, 이전에 스스로를 드러내기만을 요구했던 그곳에서 자신을 감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울로 나아옵시다. 그렇지만 거울이 우리가 반역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인다고해서 하나님께 항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대번에 우리는 거울이 말하는 그런 존재임을 고백합시다. 왜냐하면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밝혀주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결코 모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것을 중시합시다. 물론 이 위선이 우리에게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잘 검토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선자요 사악한 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 그렇게 간주되겠지만, 동시에 그는 악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위선이 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이고 아무도 예외 없이 모두에게 속한 것일진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본성을 싫어하는 것 외에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교황파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스스로 속아 그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 듯 여기지만,[우리는 이 자유의지에] 온전히 악밖엔 없음을 깨달읍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사악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사람이 여기 저기 찾아봐도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반역은 발견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이런 반역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마음엔 다른 것이 없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우리를 악으로 가득 채우는 자가 곧 마귀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아무런 선도 찾지 맙시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런 판결을 언도하졌을진대, 우리에게서 무슨 선을 찾는 것은 죄입니다. 이제 인간이 스스로가 이렇다는 것을 안다면, 그 악에 대한 처방을 찾아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에 대하여] 진정한 불쾌감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반박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우리는 깨끗이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 우리가 불쾌감을 받아 처방을 갈구하며 하나님께 치유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하나님은 심장을 살핀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사하기 위해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각자가 스스로를 고소하며, 고소한 뒤 스스로를 정죄하며, 정죄한 뒤 성령의 은혜를 찾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즉 우리가 진정한 겸손 가운데서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하며, 우리의 마음이 이처럼 악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그것이 사악하기 때문에 그것을 길들여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거듭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를 잘 억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그를 찾기 위해 무엇이 부족한지와, 그리고 그를 찾으러 이 샘으로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가득하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반역으로 가득하다면, 모든 교리의 규범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애쓰며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우리의 정죄를 입증하셔서 우리로 스스로를 불쾌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본성상 하나님의 진정한 원수이며, 반역과 악의 보다 더 큰 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바꾸고 우리에게 적응해서 우리로 우리 자신을 바꾸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이 주제에 그토록 머무르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일 내가 말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에게 무슨 선이 있다고 믿게 하여 그들로 스스로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교황파가 사람들의 본성에 하나님으로 인도할 수 있는 무슨 선한 씨가 있다고 믿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연약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의 구원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교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로 사탄은 흔히 말하듯 사람들이 그렇게 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무슨 선한 씨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귀에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되었음을 보이려고 노력하십니다. 성경이 이 교리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결코 가볍게 다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말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에 머무릅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악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알 때 우리에게 유익이 있음을 깨달읍시다.
2.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이렇게 선지자는 집어넣을 수 있는 모든 악을 이 두 단어 속에 포함시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잘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패와 악의(malice)라는 두 가지 것에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해서 그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는 고집,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탐욕들, 이 모든 것은 부패라는 말속에 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에서 우리는 악의 심연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류를 바로잡을 정도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발산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십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이런 악의와 부패가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모든 악이 담겨 있는 바다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리 악을 선으로 위장한다 해도 소용이 없고 도리어 [생명]책들이 펼쳐질 때2 이 드러날 것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음을 살피신다”고 합니다.
심지어 선지자는 여기서 다음 두가지 것에 주의하길 원합니다. 즉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가 이 악의와 반역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도록 일찍 그의 편이 될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인인체 하나 위선뿐인 자들의 정죄를 인준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땅을 파봐야 소용이 없을 것임을 보입니다. 이는 이사야서에 “화 있을진저 땅을 파고 너희 죄악을 깊이 행하여 하나님이 보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너희여, 그러나 도리어 그것들이 밝히 드러나리라"3고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에서 받는 훈계입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은 기꺼이 그것을 치료하셔서 성도들이 결코 이 저주에 포함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 바울이 말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성인 의와 진실을 가지고 다니기”4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가 “인간의 마음은 간악하고 음흉하다”고 기록할 때, 성도들이 그것에 포함되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어머니 배에서부터 모든 악의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과 이 악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에 손을 대셔야 한다는 것을 주의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진 사악함을 고치실 뿐만아니라, 그것을 더욱 명백하게 보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성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뒤에, “내가 스스로를 유죄로 느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5고 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그가 선외에 아무것도보지 못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더 멀리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계시를 받은 성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면, 계시도 받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사랑에 눈먼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솔로몬이 말한 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정직하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저울을 돌리시는”6 일이 생길 것이며, 그들의 무게와 부피가 잘못되었음과 하나님이 측정하신 무게에로 나아와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로 돌아갑시다. 즉 우리에겐 악의밖엔 없다는 것과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은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그가 이 반역을 길들이시기를 기대하시고 또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살같은 마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다시 말해 그의 말씀에 유순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반대로 계속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들의 판결이 이미 내려졌다는 것과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 선지자의 이 판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은 위선자들로 덮여 있어서 그들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주 앞에 그들을 맡겨야 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위선자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은 천사들처럼 여겨지나, [생명]책이 펼쳐지고 그들의 죄악이 알려질 때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이처럼 그들이 이런 모든 허위를 행할 경우, 그들은 그렇게 좋은 화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색깔(핑계)을 고갈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위선자들은 너무도 뻔뻔스러워서 모든 수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을 자행할 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약탈자들에 의해 알려질 것인데, 이들은 달아오른 암캐의 뒤를 좇는 수캐와도 같은 호색한들이며 주정뱅이들로서, 이들이 식탁 앞에 있을 때는 야수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채고 그들을 비난할 경우, 그들은 손에 선행하는 사람이란 방패를 듭니다. “오 나는 선행을 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렇게 존경받는다오.” 그들은 이처럼 그럴듯한 찬사로 치장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지자가 말한대로 그들을 그들의 심판주에게로 보내야 합니다. 이사야는 “화 있을진저, 죄악을 땅에 파묻는 너희여, 너희가 누군지 사람들이 잘 모를때 너희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여길지 모르나, 심판주는 너희가 누군지를 입증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7 이것이 선지자의 본을 따라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3. 의사와 판관이신 하나님 ; 죄를 드러내는 자는 치유하시고, 감추는 자는 심판하심
그러나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의 마음을 개혁시키리라는 것을 깨달아 압시다. 그는 성도들과 악인들의 마음을 각각 달리 감찰하십니다.8 의사가 사람의 병을 검진하는 것은 그를 치료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가 환자의 뇌가 손상되었음을 안다는 것은 그의 머리를 쪼개기 위함이 아니며, 그가 사람의 폐가 망가졌음을 안다는 것은 그의 내장을 잘라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그를 치료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판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행악자의 악을 조사하는 것은 그를 사형집행인의 손에 넘기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의사처럼 우리를 검진하여 우리를 도우나, 반대로 악인은 조사하여 정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가 우리를 치료하시도록 합시다.
어떻게 우리를 치료하도록 허용할까요? 성 바울은 교리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논쟁하고 책망하며 가르치고 교정하는” 것입니다.9 그럴 때, 우리가 어두움에 있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외 광명으로 읽혀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검진받도록 허용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인도함을 따를 때, 그는 우리를 앞으로 빼내시며, 우리 마음을 밝게 해서 우리가 기꺼이 그를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다시 빚으실(=개혁하실)때, 그는 의사의 직책을 사용하셔서 이 거짓을 진리로 바꾸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특성을 지니고 다닌다면, 우리가 그의 형상을 갖고 우리 마음을 온전한 순종가운데서 그에게 드릴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하루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 동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들으러올 때, 하나님께서 이 검진을 다시 하신다고 생각합시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에게서 자신의 작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반나절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미가,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모두 치워버린다해도, 그것을 즉각 다시 만드는 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밀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간시간 개혁하시는 일이 필요하며, 따라서 이 가르침에 따라 훈련하는 법을 배웁시다. 빗나간 자들에 대해서 말하면, 어쨌든 그들도 결국 조사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극제를 주실 때 이미 그 일을 시작하시며, 누군가 그들을 훈계하면 그들은 이를 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조사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다시 빚으시는 것과는 달리, 온 세상에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과는 달리 악인들은 온갖 수치를 향해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그것을 선택합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의 수치를 그에게 드러내어야하며 , 그때 하나님은 그것을 덮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악의를 감추길 원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셔야하는데, 이는 그가 세상의 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자고새의 교훈 -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라
그는 각각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신다고 덧붙입니다. 사실 그는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감찰할 자 누구인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길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와야하며, 그러면 우리의 공상이나 척도에 따라 정죄되지 않으나, 가르침을 거절하는 자는 누구든지 계산을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처리하지 않았던 자들을 조치하실 것을 입증하는 예를 덧붙입니다 .11 그는 자신의 의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부를 쌓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고 말하는데, 마치 자고새가 낳지 않은 것을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고새가 다른 둥지에서 훔친 알을 품어 새끼가 되면, 이 새끼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찾을 줄 알며 알들을 훔친(훔쳐 품었던) 이 자고새를 버립니다. 사실 이런 교활함이 자고새들에게 있거나, 아니면 그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알을 잃어버리고서는 다른 알들을 훔치러 갑니다. 그런데 새끼들에게도 그들을 훔쳐 품은 자고새를 버리고 그들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교활함이 있습니다. 자고새가 자신이 품어 낳은 새끼들로 인해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때, 새끼들은 그를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악인들은 그들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재산으로 즐길 생각을 갖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몹시 번민한 뒤 자고새에게서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재산은 자신이 정당하게 획득되지 않았음을 알고서 그들에게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선지자가 보여준 것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과 피조물을 신뢰하는 잘못을 저지르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그 영에 다른 것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모범을 봅니다. 물론 재산을 가진 자들이 이런 광적인 탐심을 품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대로 재물에 빠져 그것에 신뢰를 두는 자들은 결국 속은 자신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 작은 자고새들을 통해서 그가 미물들에게 영을 주사 사람의 어리석음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길 원했습니다. 비록 어머니를 따르는 것이 짐승들의 본성이지만, 그래도 알에게 있는 이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경을 넓히고 이곳저곳에서 가득 긁어모으는 자들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런 교활함을 짐승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이 꽤 부자같이 보이긴 하나, 하남님은 땅이, 비록 땅에게 지각이 없지만, 그 땅을 잘못 차지한 자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으기 위해 방탕하는 것을 피조물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물론 피조물이 잠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즉시 한조각의 땅이 사라지고 이어서 다른 조각이 사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주제는 좀더 다뤄질 필요가 있으나, 당분간 우리의 마음이 악에서 깨끗해지기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만 그 처방을 찾는 법을 배웁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병을 치료할 줄 아는 이가 그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우리는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며, 그에게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빚으사 우리가 그의 자녀임을 평생 증거하고 그를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그에게 매달려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 그가 우리를 성령으로 채우사 우리가 그에게 나아가 우리의 기도를 드리게 해달라고 합시다. 이제 그 기도를 드리오니 , “하늘 아버지시여….”
이 설교는 1549년 7월 24일(수)에 행해진 것이다.
본문에 붙여진 소제목은 원문에 없는 것이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말씀」의 편집 구성상 첨가한 것이다.
주(註)
1. 한글개역은 ‘거짓.’ 칼뱅은 조금 뒤에 이 말을 악의(malice)와 병행 사용한다.
2. 계 20:12 참고.
3. 사 29:15.
4. 엡 5:9.
5 고전 4:4
6. 잠 16:2 참고. 무게의 중심을 바꾼다는 말.
7. 사 29:15 참고.
8. 「기독교강요」III, iV, 31참고.
9. 딤후 4:2 참고.
10. 의와 진실.
11. 렘 17:11
12. 칼뱅은 본문의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이와 같이 전통적인 입장에 선다. 그러나 10년 뒤에 쓴 주석에서는(예레미야 주석 출판 연대는 1563년이다) 우화적 표현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는 아마도 자연사가들의 글들을 읽은 듯, “아이스토텔레스나 플리니우스도 그들이 자고새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것(=성질)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썼다(CO, XXXVIII, co1.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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