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효과적 이단대처는 교회 본질 회복 | |
심창섭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특별기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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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정의, 판정기준, 발생원인, 특징 그리고 대책에 대한 연구 심창섭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1. 이단의 정의 서양교회사에서는 보편적으로 이단을 지칭할 때 ‘heresy'(이단)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거짓 교리를 주장하고 반교회적인 행위로 인해 전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집단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리들이다. 종파(sect)는 신앙적인 일부 소수집단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만 교회사적으로는 편협한 주장에 치우쳐 형성된 무리들을 말한다. 16세기 재세례파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분파(schism)는 주로 교회의 행정체제나 제도를 달리하면서 형성된 분리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무리들이다. 숭배자파(cult)는 우상숭배나 이방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킨 숭배나 예배형식을 갖춘 소수집단이다. 또 정통교리(orthodox)를 왜곡하거나 부인하여 변질시키는 다색적사이비교파(hetrodoxy)도 이단으로 들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이단들의 부류는 개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정의한 것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이단들은 혼합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서양교회사에서 이단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된 헤러시(heresy)라는 용어는 원래 좋고 나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중성적인 의미로 종파나 무리를 가르킬 때 성경에서 사용되었다(행 5:15, 15:5). 그러나 교회 내부의 분파(schism)나 분열(division)을 조장하는 편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고전 11:19). 또 부정한 죄를 범한 자들을 지적할 때(갈 5:20)와 스스로 선택하여 다양한 형태의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는 이단적인 성격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딛 3:10). 바울은 이단이라는 이 용어를 주로 교회를 해하는 무리들을 칭할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 후로 초대교회의 교부시대에서도 이단을 규정할 때 이 단어(heresy)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교부들 가운데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였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tyr)도 말시온이나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나 터툴리안(Tertullian)도 마찬가지였다. 이단(heresy)이라는 이 단어는 이후로 서양교회사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2. 이단 판정의 기준 이단들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인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들의 가르침이 정통이요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가르침이 정통이며 진리인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단을 정의할 때는 성경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주의할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을 때 한 개인의 판단이나 신학적인 견해가 이단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공적인 교회의 대표기관인 노회나 총회의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공적으로 이단이라 규정되어질 때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이다. 부언하면 이단을 정의할 때는 공교회의 판단이 최정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공교회의 판단이 잘못돼 이단으로 규정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논자가 주장하는 것은 공교회가 최후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그 판단이 바로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상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은 공교회가 성경과 위배되는 이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이단이라고 규정짓게 될 때 이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정통과 이단, 이단과 사이비를 구분하는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기독교란 결국 성경을 바르게 믿는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단들의 유혹에 대항하여 성경외에 다른 복음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의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앞서 언급한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맥락에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부인하고 이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ldT다. “이들은 거짓 이야기꾼들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속이는 자들이다.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를 거절하는 식으로, 그리고 율법에 대해 말하면서도 율법을 거슬리는 말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숭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곤나을 부인하고 그의 부활을 믿지 아니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지지 않는 존재로 소개하고 그리스도가 잉태되지 아니했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존재함을 인정치 아니한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아들을 단순한 인간이며, 성부, 성자, 성령을 동일한 품격(person)으로 본다. 그들은 창조는 하나님의 작품인데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상한 다른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언하지만 기독교의 정통 가르침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이단을 규정할 때는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밝혀야 한다. 교인적인 편견이라 교파적입 선입관 등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권적인 정치 권력의 횡포는 특별히 작용해서는 안된다. 공교회가 이단을 규정할 때는 반드시 공교회의 절차를 거쳐 성경적인 가르침이 기준이 되어 이단이 결정되어야 한다. 3. 이단의 발생원인 “첫째, 성경의 예언된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이단들은 일어나고 횡행한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들을 분석해보면 ‘병든 사회의 병든 종교의 합작품’이 바로 사이비 신흥 이단 종교의 발생원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사회학적인 분석의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단과 같은 신흥종교는 “사회구조적인 결함과 기성종교의 기능상의 문제졈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의 발생원인은 사회적인 원인과 교회내의 원인이 합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단 발생의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은 미국의 대표적인 이단들인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챤사이언스의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규명될 것이다. 이런 이단들이 발생한 19세기의 미국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의 시대였다. 19세기초에 미국은 경제 불황을 맞게 된다. 은행들의 도산이 속출하고 사회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사회적인 불안이 가중될 때 몰몬교와 안식교 등이 발생하였다. 크리스챤사이언스와 여호와 증인의 발생도 이와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1850년을 전후하여 미국은 많은 공산품들이 발명되었고 농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스런 발전은 일시적이었다. 1861년~1865년에 발생한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미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국토와 국론이 양분되었고, 흑백간의 차별을 넘어서 백인들간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사랑을 외쳤던 백인 그리스도인들도 양키와 딕시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런 전쟁의 혼란으로 미국은 대경제적인 불황에 빠졌다. 심지어 1873년 경에는 은화 1불을 발행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빈곤을 겪게 되었다. 미국 중서부의 중심 산업도시였던 시카고와 오하이오의 도시들에는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노동쟁의를 위해 노동기사단이 조직되었다. 1885년에는 무려 60만명의 철도쟁의가 파업을 주도하였다. 중단할 줄 모르는 사회적인 불안의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1887년 농민봉기, 1893년 경제파탄,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등 미국사회에는 이 세기에 출렁이는 파도와 같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19세기 미국의 정칟사회적인 혼란은 교회의 분리와 무관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1830년부터 남북전쟁 때까지 미국의 교회는 분열의 시기였다. 미국의 전 교파가 분열의 시기를 맞이했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구파와 신파로 갈라섰다. 프린스턴신학교에 맞서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와 예일대학교의 신학부가 신학적으로 크게 대립하였다. 감독교회 안에서도 분쟁이 일어났다. 스코취-아이리쉬와 영국과의 싸움이었다. 루터교회는 독일교회파와 미국화주의와의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미국화의 반대를 주도한 보수 루터파는 결국 세인트루이스에 콘콜디아 신학교를 세웠다. 종교적인 분쟁은 개신교와 로마천주교 사이에도 발생하였다. 건국 초지에 로마 천주교인들의 숫자는 많지 아니했으나 아일랜드의 감자흉년으로 1845년~1846년 사이에 아일랜드의 천주교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천주교도들이 내란에 실패하여 1830년~1848년 사이에 미국에 많이 유입되었다. 천주교 내의 잉글랜드 주교파와 휴스 주교파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20년 사이에 6배가 증가하였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개신교도들이 천주교 반대운동을 결성하여 1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Know Nothing Party)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신구교간의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특별히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의 교파들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어 분열을 초래하였고, 정신적 도덕적으로 미국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혼란한 시기를 틈타서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크리스챤사이언스와 같은 이단적인 종파들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흥종교들의 발생배경의 경우와 유사하다. 전도관, 통일교 등 무수한 유사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일어난 한국교회의 상황이야말로 이단들이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사회, 종교적인 최적의 상황이었다. 1882년 개신교가 이 땅에 복음의 씨를 심은 후에 한국은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불안정과 경제적인 고통이 지속된 역사였다. 36년간의 일제의 압제 하에서 고통당한 민족사, 해방을 맞이했으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당한 6.25 동족상잔의 비극, 남한만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이 이루어졌으나 부정과 부패로 일관된 사회적인 혼란의 시대, 그리고 이를 틈타 일어난 쿠데타와 군사독재 하에서의 혼란한 정세, 경제개발 제일주의의 정책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대혼란, 지속적으로 불안을 가져온 북한의 도발 위험, 대학생들의 데모와 노동자들의 시위, 경제성장주의가 가져온 사회적인 가치의 전도, 가정파괴, 도덕성의 저하 등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변화가 한 세기 동안에 이루어졌다. 거기다가 교회는 성장과 더불어 개신교 역사상 가장 많은 교파를 양산시킬 정도로 분파운동이 발생하였고 교회도 물량 주의에 물들었으며 교권주의와 교단정치가 판을 치는, 일반 정치 현장을 방불케하는 교단 총회들이 득실거리게 됐다. 축복신앙이 민간신앙과 접목하면서 경건하고 건실한 인격적인 성경중심의 신앙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사이비 무속신앙이 기독교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부흥신앙이 되어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무분별한 주관적인 성령운동이 주도하는 은사중심의 신앙이 열기를 가하면서 조용한 인격적인 신앙이 맥을 못추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휘말려 너도나도 성령체험과 열정적 신앙을 무분별하게 추구하면서 극단적인 계시론과 신비적인 체험을 기준으로 정통교회의 가르침을 이탈한 이단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사회적인 대혼란과 교회의 비정상적인 기능의 합작품으로 이단이라는 병리현상이 교계에 나타난 것이다. 노길명 교수는 신흥종교는 건전한 사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잘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종교적인 결함이 또한 신흥종교의 발생원인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인 병리현상은 기성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물량주의, 업적주의, 개인주의, 경쟁주의, 권위주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극심한 분열주의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에서 찌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기는커녕 실망시키는 역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성종교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 눌린 자에게 친근한 종교가 아니라 맘모스화된 중산측 중심의 종교로 변화하면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힘없는 자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 것이 또한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신흥 종교를 택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흥종교의 발생에는 사회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종교의 병리현상이 바로 이단들의 발생 근거지가 됨을 주장하며서 노 교수는 기성종교를 향한 의미있는 제언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종교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한다면, 민중의 고통과 한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한다면, 기성종교 내에서도 인간회복과 사회정의가 실현된다면, 그리고 기성종교가 병든 사회의 병든 종교로 변질되지 않는다면, 또한 기성종교 내에서도 권력이나 위세, 경제적인 부, 교육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이 자리 잡을 터전이 마련되어 있다면, 고통받고 억눌린 자들이 굳이 이단, 사이비 종교 등으로 불리는 신흥종교를 찾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흥종교의 산모는 기성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신흥 종교의 발생에 대해 기성종교가 맡아야 할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성종교는 신흥종교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냉엄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살아 있는 종교’, ‘역동성이 있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5. 이단의 대처방안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복음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영적인 세력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믿음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저하되고 진리에 나태하며 도덕성에 회의하게 되면 반드시 유혹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특히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자녀를 유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유혹하는 자에 의해 일어나는 이단들의 발생을 대처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대처방안을 제시하는 바이다. 현재의 이단대처 방안은 중세교회처럼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적, 지식적, 도덕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대처 방안이 보다 본질적인 방어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방어책의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교회지도자들의 역할과 교회(교인)의 역할로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총회와 교단 차원의 대책에 대해 논하려 한다. 1)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첫째,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도 교인들도 이단들에 대한 지식이 미약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단들이 교인들에게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접근할 때 교인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잃게 되고 흔들리게 된다. 교인들을 진리와 구원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 먼저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확실하게 겸비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들은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물론 좋은 방어책이고 최선의 방법일 수가 있다. 이단들은 설득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내가 알고서 대하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고 거두절미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이단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인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일회용의 가르침이 아니라 평소에 목회자들이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며 이단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본다. 셋째, 목회자들은 이단을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교인들이 이러한 무분별한 체험중심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감시하고 지도해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목회자 자신들이 이러한 집회를 유도하면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여 유혹하는 자의 간계에 넘어가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계시체험이나 성령체험을 경험한다는 이들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 중심의 인격적인 건전한 영성과 믿음에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며 또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넷째, 목회자들은 윤리적인 삶과 경건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거기에는 다른 비결이 없다. “금식과 기도, 말씀, 봉사, 교제, 희생, 정결, 근검절약(단순한 삶), 찬양, 예배 등의 영성훈련 외에 주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면 된다. 다섯째 목회자들은 정확한 이단들에 대한 정보, 확보와 알림에 노력해야 한다. 여섯째,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교리교육을 시키고 성경을 분변하여 이해하는 말씀교육을 시켜야 한다. 2)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근대교회의 이단들도 급변하는 사회의 변화와 혼돈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교회가 분열을 하며 확고한 성경의 가르침에 서 있지 못할 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단의 발생을 근절하기 위한 최선책은 바로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이단 발생의 요소들인 정치, 사회, 문화 등을 간접적인 원인들로 볼 수 있지만 직접적 요소는 교회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병규 박사는 <이단진단과 대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단, 사이비 분파 발생 요인들 중 대단히 중요한 것은 곧 ‘기존 기독교회들이 기독교 본연의 모습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연의 모습의 상실은 곧 이단들의 발흥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단들의 발생이 교회의 본질의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면 이단의 대처는 바로 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본질 회복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였다. 그러면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있지만 그것은 죽은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말씀따로 행동따로 믿는 풍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생리로 자리 잡혀 말씀이 선포되어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단들은 교주의 말을 죽으라고 맹종한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이라도 교주가 한 해석이라면 목숨을 걸고 맹신한다. 그러나 기성교인들은 다르다. 성경말씀이 그들의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지 아니한다. 입으로는 고백하고 머리로는 학습되지만 가슴은 냉랭하고 손발은 꽁꽁 묶여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송장들이 걸어다니는 것과도 같다. 이단들이 보면 정말로 측은히 여겨져서 영혼을 구원시키고 싶은 사람들이다. 교회는 말씀의 권능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말씀을 통해 경험하는 역사로 인해 생동력 있는 활기찬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언제라도 우리 가운데 이단과 같은 이리떼들이 넘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본질회복은 성도의 교제를 통한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성 회복을 의미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나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이때의 공동체는 오순절 날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120명 정도의 성도들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300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3000명 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조한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여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서 이제는 대적자로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서 한우리가 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하고 함께 녹아지고 어울려 생명체를 이룬 성도의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제도화된 교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기계적인 교인 서로간의 관계형성으로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교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함께 있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인격적인 교제가 메말라 버린 현대교회는 이단들 앞에 무능한 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교회의 본질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사랑의 실천하는 모습을 갖는 것이다. 기존교회의 스트레오 타입의 신앙에 비해 이단들은 너무나 사랑의 띠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것을 알게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여 형제, 자매와 같이 교인들이 친밀감의 유대를 가지게 되면 이단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인 전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경건한 삶을 추구한다면 이단들이 도리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확실히 믿고 지키는 본연의 의무를 갖고 있다. 성도들은 진리의 깨달음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인 기도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경고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바울은 성도의 영적 생명이 기도와 말씀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성도느느 그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들에 대한 대처는 목회자들의 전용물이 절대 아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 깨어 있어 성경의 진리말씀에 굳게 서 교회를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들도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익히고 비판적인 이론들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적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 무방비한 상태에서 이단들에 노출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3) 교단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 교단 차원의 무분별한 목회자 배출을 개혁해야 한다. 둘째, 교단총회는 무분별하게 타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사를 영입해서는 안된다. 셋째, 교단총회는 이단 연구나 대책을 위한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즉 교단 산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들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와 대책의 강구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단들은 교묘하며 악을 행하는 데 지혜롭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교회는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양무리들을 이리떼들로부터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교단이 총체적으로 이 사역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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