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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낙스의 정부론 / 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baromi 2008. 7. 21. 08:54

낙스의 정부론

 

낙스가 개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하였다. 그녀는 왕권 신수설에 근거하여 절대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낙스가 진행시켜 법제화된 가톨릭 미사 금지를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낙스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에 오자마자 왕궁의 홀리루드 하우스(Holyrood house)에서 미사를 드렸다.

 

낙스에게는 한 번의 미사가 만 명의 군대가 침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낙스는 곧 여왕의 미사 행위를 설교로 규탄했다. 여왕과 종교 개혁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왕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러나 성격에 안정이 없었고, 확신에 찬 남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프랑스 궁중에서 음모와 술수를 자연스럽게 배워 왔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스는 여왕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왕이 가톨릭 의식으로 단리(Henry Darnley)와 재혼하려 할 때 낙스는 이를 공격했다(1563). 여왕은 분에 떨며 눈물을 흘리며 낙스에게 말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이제 나는 복수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낙스는 연소한 여왕을 설득시키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여왕의 결혼이 당신[낙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은 당신이 이 공화국에서 무엇인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왕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작이나 남작이나 귀족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

단리가 살해되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개신교식으로 다시 결혼하였다. 보스웰은 단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때 낙스는 메리 여왕의 퇴위와 처형을 주장하였다.

[오, 하나님, 자기 남편을 살해한 잔악한 살인자의 힘과 오만을 꺾으시옵소서. 그녀의 편당과 교묘한 술책을 파하시고, 바로 당신이야말로 지혜 있는 자를 그 지혜 가운데서, 오만한 자들을 그들 스스로의 악독한 생각 가운데서, 영원한 혼란 가운데로 내려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주여, 진실로 당신을 경외하는 심령으로 당신을 부르게 하시며, 바로 이러한 가운데서 자라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싸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올바르게 이 모든 싸움들을 마치고,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 안에서 우리 생애를 마치게 하시옵소서.]

낙스가 단순히 여성 통치자가 싫어서 이런 강경책을 말했을까?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낙스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하였다. 그 위에, 통치자가 가톨릭 군주로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다.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가톨릭을 국교로 하여 개신교를 탄압하고 스페인 왕과 결혼한 후 곧 사망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잘못된 정책으로 비슷한 사건이 경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낙스는 구약 특히 예레미야를 기초로 하여 독재하는 군왕이나, 우상 숭배를 주장하는 통치자에 대해 무력 항쟁을 인정하였다. 칼빈은 귀족층에 의한 질서 정연한 법적 저항을 인정하였지만, 낙스는 귀족층이나 하부 통치 계급이 독재자에 대하여 수수 방관할 때는 평민들도 개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개혁에는 군왕의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사형 집행까지도 포함시켰다. 낙스는 칼빈보다 훨씬 더 과격한 혁명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쓴 “두번째 나팔소리의 개요”를 보면 군주 저항론자인 낙스의 위치가 선명해진다.

1. 국왕은 단순히 왕가에서 탄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다스릴 수는 없다. 이보다 하위에 있는 재판관들을 선거하도록 한 하나님의 법이 또한 왕들의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2.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왕국내에서는 공개적 우상 숭배자들을 공직에 임명할 수 없다.

3. 하나님과 그의 자명한 진리를 거슬러 폭군들에게의 복종과 그의 위치를 계속 유지코자 하는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

4. 만약 국민들이 잘 모르고 우상 숭배자를 통치자로 선출하였을 경우,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를 선출한 이들은 다시 그 지위를 박탈하고 처벌할 수 있다.

낙스가 이렇게 강경하게 발언한 이유는 개신교도에 대한 군왕들의 핍박이 참고 견딜 만한 수준을 넘어섰고, 오직 혁명만이 자유스럽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는 변화의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낙스는 1555년 대륙의 아우그스부르크 평화 조약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국가의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 군주의 신앙에 달려 있었다. 한 지역 군주가 가톨릭 교도라면 그 지역에 속한 모든 백성은 의무적으로 가톨릭 교도가 되어야 했다.

신성 로마제국은 이 원리 밑에서 종교 분쟁을 종식시켰다. 낙스를 포함한 칼빈주의자들은 종교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지 군주의 선택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제 유럽의 거의 모든 제국내에서 칼빈주의자가 된다면, 순교를 각오해야만 했다.

낙스의 강경한 정부론은 그의 계약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낙스는 국민이 통치자에게 복종할 의무(군주와 신하와의 “계약” 관계)가 있듯이, 통치자도 하나님이 세우신 신의 법(군주와 하나님의 “계약” 관계)을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군주가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는 백성은 불법을 자행하는 군주를 과감히 제거해야 마땅하다.
낙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따라서 폐하께서는 과연 국민들이 폐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또한 상호 계약에 의한 폐하의 의무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다름아닌 하나님 안에서 폐하께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폐하는 그들 앞에서 법을 지키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로부터 봉역(奉役)을 원하시며, 그들은 폐하에게서 모든 악인들로부터의 보호와 방어를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여왕 폐하, 당신께서 그들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신다면······어찌 그들로부터 온전한 순종을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두렵건대 여왕 폐하,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낙스의 “계약 사상”에 기초한 정부론은 프랑스의 위그노 항쟁과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존 밀턴은 영국왕 찰스 1세의 사형 판결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낙스의 사상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낙스의 저항으로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퇴위되어 스코틀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1568).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의 왕위 찬탈 모의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그때 그녀의 나이 45세였다(1587).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주어졌고, 제임스 6세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이어 영국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한다.

낙스는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스틸링에서 즉위할 때 소년 왕 요아스(왕하 12장)에 관해 설교하였다.

1567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낙스는 의회의 개회 설교를 하고 그 의회가 “앞으로 모든 왕들은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의무화하고 아울러 교회 모임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입법 조항을 지켜 보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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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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