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서 벗어난 자들
예레미야 18:17-18
I.서론
어제 우리는 바른 길에서 이탈하면 곧 헛디디고 절뚝거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에는 결코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잘못이 거짓 선지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에게서 유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며,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해 처벌받게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때 온 세상은 파멸되고 만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따라서 땅이 황폐해지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놀라서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II.환난 날에 등을 돌리신다면
이제 우리 주님은 보다 큰 위협을 첨가하시며 "그들을 남풍으로 쫓아내리라'1고 말씀하십니다. 남풍이란 폭풍우를 의미합니다. 특히 유대 지방에서는 남풍이 뇌우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자들을 남풍으로 쫓아내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처별을 가중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절정에 달한 그들의 악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가 재난의 날에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그들의 악에는 아무런 치유책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점입니다. 이는 내가 말했듯이 악의 절정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봅니다. '주님, 주께서 우리를 잊으시고 이런 고통에 내버려두기를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주님. 주께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 내버려두기를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주님, 주께서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시기를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시 13:1-2) 그러므로 신자들이 모든 고통가운데서 갖는 마지막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긍휼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봐 주실 것을 비는 기도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부탁하는 즉시 우리를 돕는 이 값없는 은혜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가 아니라, 성경에는 이런 식의 화법이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무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과 그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달리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의 눈을 내게로 돌리소서"(시 25:16)라고 기록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말하는 즉시 그분은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의 등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17절 상반절의 숨은 뜻). 이는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자기를 돕는 자를 찾으러 가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입니다(한 걸음 더 나아간 적용).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바라봐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화해도 합당치 않으며, 그가 우리를 벌하지 않고 (우리가 제 10장에서 본 것처럼)2 오히려 부성애로 우리를 끝까지 추적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을 헛디딜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의 뜻에서 좌로나 우로나 이탈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왜냐하면 만일 그럴 경우 우리는 그가 여기서 선포하는 처벌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로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시면,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인도를 받는 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기대하지 맙시다.
III.교황제도의 인위성
1.부패한 낙원 예루살렘
이제 선지자는 덧붙이기를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은 자들이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즉 "오라, 우리가 예레미야에 대해 모종의 꾀를 내자. 왜냐고? 그것은 우리에게 성전이 있고 제사장들이 있으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자들의 모략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세하기 때문에, 즉 우리에게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과 지혜로운 자들과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우리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중상모략과 조롱으로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의 말은 결코 듣지 말자"'(18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 유대, 특히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야 했던 예루살렘에 어떤 부패가 있었는지를 봅니다. 그곳에서는 마치 낙원에서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악에 빠져 있으며, 일반 백성만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심지어 선지자들까지 악에 빠져 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부패뿐이었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2.성경적 제도와 인간의 욕심
그렇지만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그들 사이에 무슨 의심이 있을 경우 제사장에게 묻고 그가 결정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며,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처벌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신 17:8-13 참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내 뜻을 물으라. 그가 네게 말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신 18:18 참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제사장들)가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음모했다고 기록된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시대에 모든 것이 부패되었음을 볼 때 그것은 마귀가 커다란 무질서를 야기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점에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아무리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들여보내 포도원을 망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부패로 인해 뒤집어집니다. 인간이 부패할 경우 그는 끔적한 짐승이 되어 즉시 모든 것을 뒤집어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성상 사악하고 부패해 있음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정하신 것들을 파괴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해달라고 그에게 기도합시다. 이것이 첫째로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나아가, 우리가 또한 경고 받는 것은 설령 오늘날 선지자시대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일을 본다 하더라도 결코 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실족하는 연약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 교황, 추기경들, 주교들,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모든 사제들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의 가르침이 좋지 않다고 여기는 연약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것에 동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교황과 대제사장을 비교할 때, 대제사장이 교황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교황이 스스로 '모든 교회의 전체 주교"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칭호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까? 그리고 교황이 그의 전임자들에게서 이런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선량했던 로마의 주교들이 있었고 이들은 교황이 적그리스도임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해서,3 우리는 이미 이 반도들이 사형 언도를 받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으로 레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음을 봅니다(신 10:8). 교황제도의 모든 사제들은 그들의 신분과 소명을 어떤 규례에 두고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주교들이 자신들을 임명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제로 임명될 때 무슨 말을 듣습니까? "자,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4 라는 말을 듣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직무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행할 수 있는 권위를 하나님에서나 사람에게서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희생제사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가증된 것일 뿐이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대 교회(=구약)의 직분자들과 교황 교회의 직분자들을 비교할 때, 고대 율법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갖고 그들의 직무를 행했음을 발견합니다(민수기 18장 참고). 반대로 교황제도의 사제들에게는 그들이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어떤 구절도 없으며, 오히려 아무런 권위도 없이 이 직무를 찬탈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제사장 신분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이 나머지 사람들과 음모를 꾸며 예레미야를 치려고 작당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였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게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등의 제아무리 위대한 칭호를 갖다 댄다 하더라도 결코 놀라지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사이에서 그 말씀에 순복시킬 권위를 갖습니다. 설령 온 세상이 그 말씀에 반대한다 해도 말입니다.
IV.가톨릭의 완고함.
1.타락한 지도자에 대한 대응 -거룩한 불복종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제사장에게는 순종하라고 명하시고, 지금 교황에게는 순종하지 말라고 명하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말라기 제2장에서 그 답을 끌어올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자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론과 내 언약을 세우면서,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그 입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율법을 구할 것이기에 그의 입은 내 율법을 선포하기 위해 있을 것' 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와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너희의 얼굴에 똥을 칠하고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게 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내 명령을 따라서 내 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말2:2-9). 요컨대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 않았다고 책망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내 말을 알리고 화평과 정직 가운데서 나와 동행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을 악행에서 돌이키며 그들의 입술은 지식을 지키며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게 아무 것도 아니며 그들이 스스로 들어와 찬탈하고 있는 이 신분에 그들을 임명하였음을 밝히고,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사장이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설명하는 것에 주의하기를 원했습니다. 제사장에게는 자기 좋은 대로 율법을 명할 권위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질문 받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율법에 마치 매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고안물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백히 율법과 교리 [즉. 말씀의 진리],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선지자들에게서 배운 것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제사장들이 제일 먼저 타락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켜 예레미야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것이 본 구절에 대한 담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를 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분을 남용한 그들을 거절할 수 있으며, 그들은 순종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며 거짓말쟁이요 도적이며 미혹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가톨릭이 사용하는 증거 구절들
이점에서 우리는 신명기의 구절(신 17:8-13)을 인용하여 대제사장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황파의 무지를 봅니다. 이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제사장) 하나님의 가르침을 선포할 때 그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으로 돌아갑시다.(그럴 경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지만, 그가 [= 대제사장] 사탄의 가르침을 선포한다면,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기는 커녕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얼굴에 똥칠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그에게(대제사장) 주시는 권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논쟁으로 들어가 보면, 교황파가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방패로 내세우기를 원하는 것이 즉시 뒤집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말라기의 이 구절을 그들에게 내세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납득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즉시 논쟁하지 않으면 그들은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와 같은 구절들을 내세웁니다. 그들은 그들의 고해성사를 인정하기 위해서 "너를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씀을 주장합니다. 성자(聖者)의 기도를 인정하기 원할 때 그들은 "이로 인하여 모든 성자가 주께 기도할 것이다"(Pro hac orbit ad teomnis sanctus)7 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후대하면 그들은 "우리가 교회다"라고 밖에는 말할 줄 모릅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들을 봅시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악한 원수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교황은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교회다. 그리고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8절). 다시 말해 "우리가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사장의 권위가 있으며, 우리가 지혜자들과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신중함(신중한 결정)이 우리 수중에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패배했습니다. 오늘날 교황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성경을 주장하면, 그들은 즉시 그들이 교회이며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어쨌든 만일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종이었다면, 교황은 예레미야 시절에 오류를 범했던 자들의 무리와 결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3.다수의 횡포 -구조악
예레미야에게 반대했던 자가 하나만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려는 듯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이는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절). 교황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공의회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로 말하면 내가 대제사장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네가 실패하지 않도록 너를 위해 기도했노라'(눅 22:32)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 교황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 우리가 모여 마음속으로 꾀를 생각해내자." 누구를 대적하려고요? 예레미야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자신이 교회의 머리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교회에] 침입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요 모든 제사장 제도는 그(=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율법에 그의 규례를 갖고 있으나(레 10:9-11 겔 44:23-24 참고), 교황제도의 사제 법규들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교황이나 주교들이 사제들을 임명할 때, 그들은 "내가 너희에게 교리를 가지고 다닐 권위를 주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가서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려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황제도에 속한 모든 사제들과 교황의 공의회들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니, 그들의 소명은 악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역할, 즉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것을 찬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가면(=허위)들을 볼 때, 그리고 주교관을 쓴 당나귀들이 제아무리 많다 해도 놀라지 맙시다. 설령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은그 에게 속한 자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4.공의회 -당나귀들의 모임
이제 교황과 그쪽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입증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취하는 방어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교황은 "공의회, 공의회!"라는 말 외에 다른 것을 갖지 않습니다. 오!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모인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모여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이름으로 어떻게요? 그의 말씀이 한가운데 있고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서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로 그곳(공의회)에 무절제한 욕망에 빠져 하나님이나 성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밖에 없다면, 그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일까요? 어린아이들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황이 "나는 대사제이며 교회의 우두머리다. 바로 내가 맺고 푸는 권세를 가졌고, 바로 내가 낙원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런 위선에 놀라지 맙시다. 오! 이 모든 것에 놀라서는 안 되며, 분명히 우리는 오늘날 사태가 어떤지를 봅니다. 어떤 공의회가 열릴 경우, 우리는 그곳에 있는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그리스도에 권위에 대한] 한 다발의 희롱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주교관의 당나귀들을 볼 것인데 한쪽에는 한 타스 반(18명)이 있고 다른 쪽에는 두 타스가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8 거기서 명령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규례는 이렇습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지켜져야 하는 바, 이는 성령이 그 가운데서 주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양식을 보십시오. 그들은 피둥피둥한 당나귀들이요 주정뱅이들이며. 그들 중에는 난봉꾼들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화나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모든 방탕에 빠져 있음을 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든 교회의 분쟁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가 예레미야 선지자를 대적하여 사악한 기획을 만들어 냈음을 우리가 본다면, 이제는 교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행할 수 있음을 압시다.
5.말씀의 남용
물론 그들(=유대인들)이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메시지를 선포하며, 이 척도에 따라 처신하고 그들의 것을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훌륭한 모습일 것입니다. "지혜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경솔함으로 무언가를 전혀 기획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실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 모든 점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반대하는 증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직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인데 그들은 정반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혜자와 선지자의 직무는 문제가 되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든 것을 이처럼 부패시켰을 때 하나님 앞에서 유죄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자신을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교황이 있다면, 그는 성경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조롱과 수치로 장난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의 대사제라고 주장한다면, 그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주장하는 위임에 정반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그가 사악하고 추악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황제도의 주교들도 마찬가지이며, 그들의 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들이 박사가 되기 전에 학사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의 모든 신성모독을 토해낼 권위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칭호는 그들이 그것을 남용할 때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 바울이 말하듯이 "교사(=박사)는 모든 교훈으로 가르쳐야"(딤후 4:2-5 참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반대의 것을 행할 때, 그들은 틀림없이 변명할 것입니다. 그들이 여기서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제들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말씀한다면, 그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사장들은 폭군적 권세를 세우기 원하면서,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율법에서 돌아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진리를 입증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하나님이 사악한 발람을 통하여 행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민 23:7-11).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급히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고통 가운데 두셨고 그는 억지로 진리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6.가르치는 자는 먼저 학생이어야
이제 결론을 말하기 위해 말라기의 구절로 갑시다. 즉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그때 그들은 모든 권위를 상실하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만 지배하시길 원하시며 모두가 그것에 따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임명되는 자는 먼저 학생이 되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제사장은 주의 사자(使者)이기에 그의 입술은 지식을 지키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 할 것인데,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서 걸려 넘어지게 했다. 따라서 나도 너희를 모든 백성에게 별시와 천대를 당하게 했다. 이는 너희가 내 계명에 따라 내 도를 지키지 않고 사람들을 편애했기 때문이다"(말 2:7-9)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언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 지혜자에게서 모략이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말하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하나님이 너희에게서 그의 율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이시리라!"(겔 7:26) 그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기세 등등하는 동안 에스겔은 이렇게 그들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V.언제나 동일한 마귀의 수법
이제 그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악의와 잔인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자"(18절)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심사숙고 끝에 무언가를 결정하고는, "이것은 백성을 파괴하기만을 구하는 자의 목을 자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혀로 그를 억압함으로써 그를 침묵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이 이어서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이 말은 비록 예레미야가 그들을 설복시킨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그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잘 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꿋꿋하게 버티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동일한 일을 봅니다. 사실 교황파가 공의회를 개최하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면,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들의 결정이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들을 거스르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그들은] "이 이단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수당한 당나귀들이 있는 세계 공의회에서,9 그들은 연옥이 있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교황이 하나님의 교회의 으뜸 인물임을 결정했습니다. 미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대신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세례시 그들이 행하는 모든 희롱이 선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서는 안되고 일부분은 성모 마리아와 성자들에게 두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위해 그들(=마리아와 성자들)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각자가 마음대로 [성자들 가운데서] 변호자와 수호자로 삼을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정된다면 ‥‥‥이런 이단들을 아직도 참아야 합니까? 화형, 화형에 해당됩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혀로 우리를 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혀를 자르는 것 외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이것이, 예레미야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신자들을 대적하여 획책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자신을 변모시키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할 때마다 완고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할 때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두 개 내지는 두개 반 10 의 공의회 -하나는 트렌트에, 다른 하나는 볼로냐에- 를 열려 합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소집해서 선지자들이 듣고 성경이 공포한 것을 명령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야망을 갖습니다. 즉 "누구도 우리의 신분을 조금도 축소시키지 못하도록 주의하자. 그리고 누구도 그것에 해를 끼치게 놓아두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뻔뻔한 이들입니다. 최소한 무슨 핑계라도 대야 하는데,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만일 우리가 논쟁으로 들어가면, 너희는 이런 저런 점에서 실패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저런 식으로 실패할 수 있었다'라는 말로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꿋꿋해야 하며 결론적으로 이전보다 더욱 조잡하고 지독한 미신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꿋꿋이 버티자! 그래서 비록 성경이 온 세상에 퍼지고 모두가 우리의 뻔뻔함을 안다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듣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뻔뻔함이 명백히 보이는 이유입니다
VI. 결론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교황파의 이 말들을 들으면서 실족케 되는 연약한 자들이 있다면, 예레미야의 이 구절로 위로하고 그 당시 성경이 가졌던 것과 같은 권위가 오늘날에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는 폭정이 유지되는 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그런 뻔뻔한 악인들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데 주의합시다. 그들의 모든 획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신분에 임명하셨음을 인식하면서, 주의하여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직분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행해야 하고, 또한 모든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악인들이 모두를 파멸시키기 위해 비밀 집회를 갖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획책에 맞서 그의 교회를 유지시키시리라는 것을 확신합시다.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인식하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우리가 완고하게 버티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허무셔서 오직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만을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런 식으로 그의 율법에 끝까지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이 율법에 굳건히 서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따라서 우리가 진실로 그의 백성임을 사람들이 알도록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받되, 우리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고 꿋꿋하게 그것에 머물러서 그가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이 은혜를 베푸시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가 이 은혜를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게도 베푸시기를...
주(註)
1. 칼뱅은 제네바의 기후에 맞춰 동풍대신 남풍으로 쓰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남풍과 동풍이 모두 사막에서 오는 바람이다.
2. 렘 10:24 설교로 지금은 분실되어 없다.
3. 칼뱅은 그레고리 대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 교황은 "전체 주교"라는 칭호를 신랄하게 공격했고, 이것을 세속적이고 신성모독적 칭호로 여겼으며, 그것을 술책으로 얻은 자를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여겼다. Cf. Gregoire le Grand, "Epistolae", V, 21; VII, 33, in J.P.Migne,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221 volumes, Paris-Montrouge, 1844-1864), LXXVII. cols 749,891.
4. 마 28:19-20 참고. 사제의 서품식 때 설교가 사제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은 되지만 첫째 임무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 순서는 희생 봉헌, 축도, 사회, 설교, 세례이다 사제의 으뜸가는 직무는 단연 희생제사권이다.
5.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는 성령을 모든 법규와 권면의 인도자 및 통솔자로 삼고 있기 때문에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오류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CO,V,col.381).
6. 마 8:4 가톨릭 신학자들은 실제로 이 구절을 들어 고해성사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주장한다(Pierre Lombard, "Sententiarum libriquoatuor", IV, xviii, 6) 칼뱅은 [기독교강요](IIIl, iv, 4)에서 이에 대해 논박한다.
7. 시 32:6 라틴어 원문은 불가타 역(시 31:6)에서 인용된 것임. 개역 성경은 모든 성도의 개념으로 "경건한 자"라고 번역되었다.
8. 양쪽을 합한 42명은 명백히 트렌트 공의회 두 번째 회기(1546년 1월 7일)에 참석한 숫자와 상응한다.
9. 칼뱅은 피렌체 제17차 공의회(1438-1445)와 특별히 1439년에 이뤄진 교서 "Laetentur coeli"(하늘이 기뻐하리라)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연옥 교리가 결정되고 교황 우위권이 강조되었다.
10. 트렌트 공의회에 대한 칼뱅의 실랄한 풍자. 1545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는 볼로냐로 장소를 옮겨(1547) 1549년에 휴회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참석자들이 로마에 가 있었다. 그 후 회의는 1562년에 다시 속회되어 1563년에 폐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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