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르 트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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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omi 2008. 5. 8. 21:45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에 대해서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적 진리를 결정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양성의 통일성, 예정론 등의 중요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동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에 관한 진리를 보수하며 그 진리를 보존해 온 것이다. 그 노고가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특별히 많은 교회회의와 신조와 신앙고백의 작성과정 중에서 많은 논란으로 얼룩진 "예정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프랑스를 제외한 전(全)유럽의 교회들이 모여 정립한 "도르트 신조"는 세계적인 칼빈총회의 결정체정체이며, 꽃이라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의 모임의 원인은 비록 알미니안주의의 항변에 대한 반항변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일부분만 핵심 사안으로 다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이며, 바른 구원관을 정립해 놓은 중요 교리이기도하다.


(1) 도르트회의 이전까지의 화란의 역사적 배경.


① 정치·사회적배경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겔트족, 게르만족이 살았던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는 400년가량이 지난 뒤에 로마가 위태로워지자 이 땅에서 물러나고, 이곳은 임자 없는 땅이 되고 여기저기 여러 다른 부족들이 옛날처럼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의 왕래가 잦지 않아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프랑크 왕국이 이 땅 네덜란드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프랑크가 여기까지 신경 쓸 형편이 아니어서 네덜란드 지방의 여러 부족들은 사실상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을 유럽의 제일 강대국으로 이끌고 이슬람 세력이 서유럽에 뻗는 것을 막은 카알대제(프랑스어로 샤를르마뉴)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 지방에도 자신의 신하나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을 지배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816년 카알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자녀들이 세력다툼을 하는 동안, 네델란드 각 지방은 왕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프랑크 왕국은 몇 개의 나라로 갈라졌고(프랑스, 도이칠란트 등), 네덜란드도 후에 남부(벨기에)는 프랑스에, 북부는 도이칠란트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나 도이칠란트가 허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1300년대까지 무역과 공업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발전한 네델란드를 누르고 막대한 세금을 요구하게 되고, 무역까지 간섭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심 지역이었던 플란더즈 상인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무역국이었던 영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100년 전쟁, 1337-1453). 이렇게 하여 네덜란드가 영국 편의 입장에 서서 싸웠는데, 프랑스 안에서도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 영국과 한편을 든 지방이 있었다. 그곳은 부르고뉴 지방이었는데, 부르고뉴는 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와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1369년 부르고뉴의 필립 왕과 플란더즈의 왕위 계승자인 마아가렛 공주가 결혼하여, 플란더즈 지방은 부르고뉴와 합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부르고뉴 왕족이 네덜란드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후에 부르고뉴의 왕 필립왕이 세상을 떠나자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며 왕위 계승자인 마라아가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로써 부르고뉴는 물론 네덜란드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막시밀리안 12세의 손자 카알 5세(1500-1558)가 황제의 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의 종교개혁의 바람이 책을 많이 읽는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 네덜란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동안 네덜란드에 대하여 관용 정책을 폈던 카알 5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종교재판의 절차를 이용해 신교도들을 처형하였다. 이러다가 나이 들어 쇠약해진 카알 5세는 황제의 위를 에스파니아의 왕으로 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여왕의 남편이면서 아들인 필립 2세(1527-1598)에게 넘겨주었다. 필립 2세는 더욱 악한 정책으로 네덜란드 각 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독립에 눈을 뜬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은 그 힘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필립 2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프랑스와 임시 휴전이 이루어짐으로, 그 전쟁에 동원했던 에스파니아 군대를 네덜란드로 보내,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더욱 그들을 격분시킨 것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신교를 믿으려는 그들의 뜻과는 반대로 네덜란드 교회를 더욱 엄격한 카톨릭으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1566년 우상파괴폭동 등 독립의 운동이 강화되자, 필립2세는 '지옥의 사자'라는 별명이 붙은 '알바장군(1567-1573년 네덜란드 통치)'과 수천 명의 에스파니아 군대를 네덜란드에 보내 무자비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포정책에 따라 세 독립 지도자 중 호론과 에그문드는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 오렌지공 윌리암(William of Orange, 1533-1584)은 네덜란드를 빠져나가 1568년 자주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였다(1648년까지 80년간의 독립전쟁). 결국 견디다 못한 카톨릭을 믿는 남부 10주(남부 네덜란드, 現 벨기에)는 무릎을 꿇고 (1579년), 홀란드주를 비롯한 북부 7주(州, 독립정부-現, 네덜란드)는 끝까지 전쟁을 계속하였다.


독립전쟁을 이끌던 지도자 윌리암은 1584년 델프트란 곳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리스'(Maurice, 7주 연합의 최고 행정관이면서 군사 사령관)와 정치가인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neveldt)가 뒤를 이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이처럼 에스파니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던 네덜란드는 에스파니아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고, 1609년 두 나라는 휴전이 이루어졌다.


1609년 휴전이 체결되자 두 지도자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지하였고, 홀랜드 주(州)를 지배하고 있던 올덴바르네벨트는 지방 자치제를 원하였다. 신학적으로 올덴바르네벨트는 항변파를 지지했고, 모리스는 반항변파를 지지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격화되자 올덴바르네벨트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방 민병대를 소집하자 모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체포했다(도르트회의 직후에 그는 반역죄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가 체포된 상황에서 역사적인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② 종교적 배경


a. 종교개혁 이전 배경


네델란드는 프랑크 왕국에 의해 카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프랑크 왕국은 알프스 북쪽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카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지만, 잘못된 가르침과 우상 숭배 등의 미신적 의식(儀式)의 숭배로 말미암아 그 내용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1517년 이후의 종교개혁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종교개혁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개혁운동을 추진했던 대표적인 기수는 베긴(Beguines)선교회와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이라는 것이었다. 베긴은 남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검소하고, 경건된 삶을 추구하고 공동생활을 선호하였으며,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데 전력하였다. '공동생활단'도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신비로운 명상의 삶을 가르쳤으며 이의 영향으로 후대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17)의 명상록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왔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고 학문연구를 강조하였고 그 중 고전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였다. 베젤 간스포르트(Wessel Gansfort)와 에라스무스(Erasmus)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죄를 민첩하게 간파하였고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항의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당시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써 로테르담(Rotterdam)출신의 에라스무스를 들 수 있는데 그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평이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찬'에 잘 기록되어있다.


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 입장에 대한 비평적 견해가 간스포르트와 요한네스 루이스브리크(Johannes Ruysbroeck)에 의해 일찍이 표명되었다. 간스포르트는 성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반드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됨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의 무오성과 교회회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면죄부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종교 이처럼 개혁의 열기가 있기 이전에 이미 화란에서는 순교가 있었고, 미신적 의식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b. 종교개혁의 시작


네덜란드 개신교를 이야기하자면, 칼빈주의가 이 나라에 대표적 교파이기는 하지만, 먼저 소개된 것은 루터의 사상이었다. 매우 일찍이 루터의 저작들이 네덜란드에 도입되어 두루 읽혀졌다. 즉 루터의 가르침은 어거스틴 수도사에 의해 가르쳐졌으며,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에 속한 두 사람인 헨드릭 부스(Hendrik Voes)와 요한 반 에센(Johan van Essen)이, 그들의 열정적인 열심 때문에 화형 당하였으며 그들은 신앙 때문에 죽은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처럼 로마카톨릭교회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점차 많은 추종자를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개신교 그룹 가운데서 루터의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성찬 배척론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성찬배척론자들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재 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으며, 다만 성찬은 "거룩한 교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성찬 배척론자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코넬리스 호엔(Cornelis Hoen)을 들 수 있으며, 그의 성례관은 스위스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그는 곧 위협을 받고, 이단자로 정죄 되었으며, 급기야는 1526년에 교수형과 화형을 합친 형벌을 받고 죽음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렇듯 루터주의와 성찬배척론자들은 로마 교황의 보낸 종교재판관에 의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계속 선포하기 위하여, 새로운 설교자들은 성밖의 광야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성례배척론자들의 활동 이후에는, 재침례주의자들이 그들의 바톤을 이어받아 네덜란드에서 종교개혁운동의 중요한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임박한 전천년왕국설을 지지하면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던 재침례주의자들로서, 신자들간의 평등을 외치고 신자들 간의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면서 초대 기독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였다.165)


재침례주의자들은 수십년 동안 많은 네덜란드인의 열정적이며, 광란적이라고 할 만큼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과격한 침례주의자들의 아성인 뮌스터(Munster)가 함락되자 그들의 활동은 거의 사라져 갔다.


이렇듯 루터교, 성례배척론자, 그리고 재침례운동이 몰락의 길을 걷자 이제는 칼빈주의가 로마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박해가 심하자 칼빈주의자들은 해외에 망명하였으나 칼빈주의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형태의 개신교에 대해서 극심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칼빈주의 교회(1548-1550)는 국내가 아닌 국외에 세워지게 되었다.


즉 런던, 엠덴(Emden),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ort am Main), 그리고 팔라티네이트에 네덜란드 칼빈주의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폴란드 출신의 귀족이자 위대한 조직가인 요한네스 라스코(Johannes a Lasco)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1553년 메리가 왕위에 등극하자 영국 내의 네덜란드 교회는 대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엠덴이 화란의 새로운 칼빈주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엠덴에서 성경 전권이 1562년에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560년 디르키누스(Dyrkinus)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1571년에 총회가 엠덴에서 개최되었을 때, 엠덴총회는 화란 개혁교회의 조직 체계와 예배 의식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즉 장로교회적 교회정치제도가 채택되었고, 구교에서 볼 수 있었던 위계 계층적 교직제도를 거부하였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주안에서 형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총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서로 분리 하였지만은, 목사가 다른 직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총회는 개혁교회의 신조적 선언인 벨기에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이 총회는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의 일치를 도모하려는 과거의 시도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그리고 엠덴에서 있었던 또 다른 논쟁거리는 비칼빈주의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칼로서, 어떤 사람들은 각인의 양심에 따라 어떤 종파를 선택하든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엠덴 총회는 신학적, 교회적인 문제만 다루지 않고, 실제적인 생활에 관한 문제도 역시 취급하였다.


한편 소수이기는 하였으나 칼빈주의자들은 대(對) 에스파니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스페인군을 내몰은 지역(북부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는 공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7주(州)의 독립 정부의 후원과 인가 받게 되었다. 이처럼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독립정부의 호의적 태도에 적지 않게 힘입어 1570년 이후 화란 개혁교회는 성장을 하게 되었고 더욱 그 체계를 견고하게 다져 나갔다.


(2) 도르트 신조의 독특성


a. 신학적 배경


그러나 1609년 휴전이 성립되기 전, 개혁교회는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예정교리에 '타락전 선택설'을 첨가했던 베자에게 배웠으며,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된 후, 그는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 참여한 바 있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계승자로 1603년에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라이덴은 오렌지공 윌리암이 1575년에 세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개혁주의 대학교였다.


교회는 그 대학교의 확고한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사상가 더크 쿠른헤르트(D. V. zoon Koornheert)는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설'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검사하라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요청을 알미니우스가 받았는데, 오히려 알미니우스가 그 내용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 은총과 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부인하고, 원죄교리를 약화시켰으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와 공개적인 논쟁을 하였는데, 사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최대의 적수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불붙어 가자 그는 정부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공적으로 논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처럼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와의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하므로써 잠시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은 17세기 초엽에 철저히 분석 당했고 그의 주요 저서는 대부분이 출판을 금지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소시니주의자도 펠라기우스주의자의 관점도 아니었지만, 고백적인 개혁교회 정통신앙과는 달랐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타락전 예정설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려 한다고 우려했다. 계속해서 그는 기독교 생활에서 믿음과 성결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칼빈주의 신학의 몇 가지 요소들이 도덕을 와해시킨다고 우려했다.


그의 저서인 '예정론의 순서와 형태에 관한 윌림암 퍼킨스의 논문에 대한 고찰'(1602년 작품)에서 그는 선택에 관한 퍼킨스의 견해에 비칼빈주의적인 접근방식을 보였다. 그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 특별한, 효력 있는 은총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미니우스의 죽음은 교회 내에서 분출한 논쟁을 잠시 연기시켰을 뿐이다.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용인받기 위해 단호하게 싸워나갔다.


그후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aert)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희합을 가지고 탄원서 즉 항변서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홀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그들은 (당시 화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벨직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항변서의 입장을 따르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교회에 청원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은 세계가 생기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불변한 목적을 가지시고……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이 신앙과 신앙의 순종 안에서 이 은혜를 통하여 마지막까지 견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신자들을 …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대로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예지예정'이란 표현은 피했지만,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그들의 저술 속에 나타나듯이 '예지에 입각한 예정'이다).


b) …그리스도 예수는 …자기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과 죄의 용서를 성취하셨다. 그러나 …믿는 사람 이외에는 죄의 이 용서를 실제로 받을 수 없다. ….


c) 사람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상태에 처하여…구원하는 은혜도 갖지 못했고 또한 자기의 자유의지의 힘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며, 이해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뜻하는 일과 …참으로 선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며 생각하며 뜻하며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필요하니… 요15장 5절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d) 하나님의 이 은혜는 ……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협력하는 은혜 없이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 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와 운동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작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 (사도행전 7장)


e)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영생을 받는 사람은 사탄과 죄와 세상과 또 자기 자신들의 육에 대항하여 싸워서 승리를 얻는 충분한 힘을 얻는다. 이것은 언제나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를 통해서 …요한복음 10:28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태만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의 처음 시작을 다시 저버리거나, 이 악한 세상으로 되돌아가거나, …은혜를 무효로 돌릴 수 있느냐의 가부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설득하여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가르칠 수 있기 전에 성서적으로 더 독특하게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구성된 알미니안 신학은 칼빈주의신학에서 조명해 볼 때,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의 재현이다. 알미니우스는 예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덕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준비시키는 은혜 덕에 믿고, 결과적 은혜 덕에 견인케 될 이들이라고 하나님이 예지하신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리고 믿지 않고 견인하지 못할 이들은 심판하시려는 신적 작정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도 알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와는 다르게) 구원을 이루는 데는 신적은혜가 필요하다는 것과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변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추종자들도 위의 작성된 『항론서』제3조와 4조를 통하여 그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점차 사람을 그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절대적 결정권자가 되게끔 하였다.


그렇지만 이 "항변서"를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널리 가르치고자 하며, 이 이론을 구원의 이론으로서 충분하다고 보고서 그 이상으로 높이거나 그 이하로 낮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향으로 후에 도르트회의 전의 몇몇 칼빈주의 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알미니우스와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으며 또한 몇몇 도시에서 칼빈주의 자들이 항편파 설교자가 있는 교회에서 탈퇴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1615년에 일부 목사들은 비밀교회회의를 조직할 것과 국가 주도의 교회에서 탈퇴하는 문제를 놓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7년 윌리암의 아들 왕 모리가 공개적으로 위텐보가르트가 설교자로 있는 하구에서의 궁정교회에서 예배보기를 거절함으로써 반 항변파인 칼빈주의를 찬동하고 나섰을 때에 사회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그래서 홀란드는 정치가인 올덴바르네벨트, 나머지는 모리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618년 8월 29일 마우리스가 올덴바르네벨트를 체포하자 항변파의 원리를 주장하던 여러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에서 도피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모리스가 확고한 통제권을 장악하자 국가의회는 작년에 포고했던 칙령을 즉시 시행하여 전국교회회의가 1618년 11월에 도르트에서 열리게 하였던 것이다.



b. 도르트 신조의 신학적 가치


우리는 신조의 역사와 가치를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도르트 신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정신을 잃어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르트 총회처럼 비(非)개혁교회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한 신조의 역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신조들도 나름대로 각 시대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신앙의 입장을 표명하기는 했어도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대외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개혁교회의 신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당시의 총회가 이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또한 정치적인 입장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우리가 도르트 신조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개혁신앙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인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非)개혁신앙을 주장했던 자들은 당시의 지역에서 목회를 할 수 없도록 파면을 하고 또한 국가 위정자들은 이들은 감금하는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 도르트 신조의 마지막 선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도르트 신경은 벨기에 교회에서 논쟁되어 왔던 다섯 조항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얼마 동안 말썽을 일으켰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모든 진리와 공의와 은혜를 거스린 채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로 현혹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잘못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이상과 같은 터무니 없는 주장, 즉 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 더 나아가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 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조의 역사는 단순히 신앙의 내용만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곳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신조를 채택하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개혁교회라고 했을 때 개혁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우선적으로 제시되었던 것이 예배와 정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앙과 다른 비(非)개혁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포용하지 않고 반드시 이단으로 정죄하고 또한 이단으로 정죄되면 교회의 교제에서 축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입장까지 표명하지 않으면 반드시 비(非)개혁 신앙의 무리들에 의해서 교회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 교회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신을 도르트 총회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문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개혁교회의 신조 채택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이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동시에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 위에서 말한 잘못된 사람들의 중상 모략으로부터가 아니요 또한 옛날이나 지금의 가르치는 자가 정직하지 못하게 인용했다든지 또는 전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곡해해서 인용하는 등의 사사로운 표현으로부터도 아니요, 교회들의 공적인 신앙고백, 즉 종교회의의 모든 교회가 다같이 찬성하여 확정지음으로 정통교리로서 선포한 것에서부터 판단해 주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위의 선언문을 보게 되면 역사적 개혁파교회라는 것은 어떤 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신앙을 이어서 초대교회의 신앙과 어거스틴과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에 이르기까지 신조를 통해서 성경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교회가 참된 역사적 개혁파교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개혁교회에서 채택하는 신조의 채택정신은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신조를 확립하며 또한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조의 내용들을 소중하게 이어 받고 그 교리적 내용을 세워가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도적 신앙과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조들과는 상관없이 단지 현재 시대의 요구나 문화적 바람으로 채택하는 신조는 역사적 개혁파의 신앙적 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도르트 신조에서는 비(非)개혁신앙의 교리적인 입장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인 것이다. 즉 다른 신앙고백서들은 이단의 무리를 전체적으로 또는 큰 주제를 따라서 그 내용을 정죄하고 있는데 도르트 신조에서는 문장 하나 하나, 그리고 단어 하나에 있어서 까지 참된 성경의 의미 바르지 못한 성경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취급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개혁교회에서 신조를 채택할 때 그 정신이란 대충 타협하고 또한 혼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라도 철저하게 성경의 의미를 살피는 정신임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르트 총회의 참석자들이 항론파가 제시한 내용들을 단어 하나에서까지 문제를 지적하면서 살펴 들어가는 그 신학적 깊이에 놀랄 수밖에 없다.


c. 도르트 신조 배경 및 진행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전국 교회회의에서 공정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역적인 개인 문제가 투쟁을 야기시켰다는 항변파의 주장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재판절차의 공정성을 보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그 교회회의 정식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럽 전역에 있는 개혁교회들로부터 대표들을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각국 대표단이 구성되어 105인이 참석한 세계적인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파견된 대표위원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18인의 정치위원과 게더란드, 남 홀란드, 북 홀란드, 절렌드, 위트레히트, 프리슬란드, 오베리셀 그로닝엔, 드렌테, 및 다른 지역 교회회의에서 목사 37인과 장로 19인이 파견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신학교수 대표단은 요한네스 폴리안더,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 안토니우스 티시우스, 아토니우스 왈라에우스 및 시브란두스 루베르투스의 5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국제대표단은 영국(5인), 팔라티네이트(Pfalz, 3인), 헷센(Hessen, 4인), 낫산(Nassan, 브레멘(Bremen, 3인), 엠덴(Emden, 2인), 독일어 사용권 스위스(취리히 1인, 베른 2인, 바젤 1인, 샤프하우젠 1인), 제네바(2인)에서 파견되었으며,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도 초청장을 보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대표단이 오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영국과 분리되어 초청 받지 못했다. 제임스 왕은 뒤늦게 스코틀랜드인 한 사람을 대표단에 추가했지만, 그는 월터 발컨컬(Walter Balcanqual)인데, 영국교회 소속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구성된 도로트회의는 칼빈주의교회가 이전에 개최해 본 적이 없는 유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총회적인 성격을 띤 교회회의인 것이다.


이 회의의 진행은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29일까지 6개월간 지속된 회의였다. 6개월간 154회의 공식회의를 가졌으며, 화란의 대표들은 교회문제와 관련하여 추가로 22회의 회합을 가졌다. 모든 경비는 국가에서 책임졌는데 10만 길더(guider) 이상이나 들었다 . 회의는 공개로 진행되어 방청객이 많았고, 회의의 회장이나 서기는 모두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선출되었다.174) 회의 진행은 1618년 11월 12일 모든 대표자들이 도르트에 도착, 13일부터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교회회의의 기본임무는 항변파의 견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 달아나지 않은 항편파 지도자들은 교회회의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밝히도록 소환되었다. 따라서 항론파들이 1618년 12월 6일에 도착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대변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를 통해 교회회의의 진행을 연기시키고 대표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이용했다. 나중에는 그들이 한달 이상 그들이 거부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교회회의의 의장인 요한네스 보겔만(Johannes Bogerman)은 항변파들을 해임하고 그들이 쓴 저서를 근거로 결정내릴 것을 선언했다.


각양각색의 대표자들 각 자는 알미니우스 교리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작성했고 더 저명한 대표자로 구성된 위원회는 채택된 도르트 교회의 법령의 최종 형태를 준비했다. 따라서 항변파에 대한 법령, 즉 4개의 조항이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1619년 5월 6일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항변파의 3조항은 4조항과의 관계에서만 오류가 있기 때문에 교회 법은 교리의 3,4조항을 하나로 묶었다.


이 법령이 완성됨에 따라 1619년 5월 9일 폐회하고, 당일 외국 대표자는 출국하였다. 그러나 화란인은 1586년이래 전국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은 까닭에 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다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의 결과 이후 향변파의 정치적인 지도자 올덴바로네벨트는 참수형을 당하였고, 당시의 정치가요, 법률가요, 알미니안 신학자였던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종신형을 살게 되고, 200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은 파면 당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는 국교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참된 종교(칼빈주의 기독교)"를 옹호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참석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개혁교회는 뒤에 도르트신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620년 알레(Alais)의 23차 총회와 1623년 사렌톤(Charenton)의 24차 총회는 돌트대회의 결정을 모든 목사들에게 주지시켰다.


이와 같이 개혁교회에서 실시되었던 회의를 필립샤프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準) 세계교회의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식이나 경건함에서 사도시대 이후 어떠한 회의보다 뛰어났다"


스위스 교회의 큰 별이었던 Breiting은 화란 대표들의 지식과 역량의 풍부함에 놀라서 마치 회의에 늘 성령께서 임재해 계신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도 도르트 회의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리고 팔라티네이트의 대표로 참석했던 Scultetus는 자기가 도르트 총회의 대표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회의를 말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지극히 거룩한 총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 카톨릭 역사가였던 Paolo Sarpi까지도 도르트를 극찬했고, 한 세기가 지난 뒤, 뛰어난 화란의 사학자 캄펜기우스 비트링가(Campegius Vitringa)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많은 지식이 한 곳에 모인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트렌트 회의도 이렇지 못했다"


d. 도르트 신조의 교리적 독특성


이 신조의 내용은 4개의 조항아래 93개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59개항은 반항변파의 입장을 기술한 것이고, 34개항은 항변파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다.


도르트 신조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


제 1 장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 하여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마땅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둔 채 멸망받아 죄값으로 형벌을 받도록 하실 수도 있는 분이신데, 이는 사도의 다음의 말과 같은 것이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제 2 장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 3:16).


제 3 장


  인간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주시는데, 이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이 부름을 받아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


제 4 장


  하나님의 진노는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이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시키심에서 구원을 받고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제 5 장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서, 다음의 말씀과 같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빌 1:29).


제 6 장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결정)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 15:18). "모든 일을 그 마음이 완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마음 문을 열게 하여 믿도록 하시며, 반면에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사악함과 고집대로 내버려 두사 심판을 받게 하신다. 다 멸망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자비롭고 의로우신 택함과 유기의 작정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사악하고 범죄하여 요동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멸망 가운데 빠지게 하지만 거룩하고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로 도우시는 것이다.

 

제 7 장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는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 8 장

 

  이 선택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하나의 동일한 작정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구약과 신약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성경에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기쁘긴 뜻과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노래하게 하였다. 또한 구원과 구원의 길을 찬양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셨음을 보여주고 있다(엡 1:4-5, 2:10).

 

제 9 장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을 받아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에 순종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등의 순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원인)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선택받음으로 인하여 믿음과 거룩함과 그 밖의 구원의 은사를 얻게 되어 결국은 그 열매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하셨다는 사도의 말과 같다.

 

제 10 장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세우신 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범죄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기꺼이 얼마를 뽑아서 자기에게 속한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인데 이는 기록된 다음의 말씀과 같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제 11 장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시며 불변하시며 전지(全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므로 그가 행하신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또한 택함 받은 자는 버림받거나 그 수가 감소될 수도 없는 것이다.

 

제 12 장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정도와 그 방법은 다양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 불변한 택정함의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오묘한 일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바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잘 지켜 나감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런 경외심, 죄에 대한 거룩한 탄식, 그리고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갈증 등이다.

 

제 13 장

 

  이 선택을 잘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깊은 자비로우심을 경외하며,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또한 이 선택의 교리를 이해할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킴으로써 나태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지만 선택받은 자로의 행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 제멋대로 게으른 행위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있게 된다.

 

제 14 장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인한 이 선택의 가르침이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졌듯이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간과 장소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일이 진지하고 경건한 가운데에서 특별히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높으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길을 완전히 깨달아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북돋우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제 15 장

 

  특별히 우리에게 설명이 요구되는 것은 이 영원하고도 값없이 주신 은혜로운 택하심에 관해서 이다. 이는 거룩한 성경에 나타난 증거로서, 모든 인간이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 얼마가 택함을 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자비로우신 그 불변하는 사랑에서 제외되어 스스로 파멸에 빠져 구원의 믿음과 회개하는 은총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여 끝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지은 모든 죄악으로 인한 결과이다. 이것이 징벌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결코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요(이런 생각은 가장 불평스런 태도인데)  다만 하나님께서는 무섭고 맹렬하신 의로운 재판자시오 보응자이심을 선언해 줄 뿐이다.

 

제 16 장

 

  그리스도 안에서 산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화평한 마음과 충성스런 순종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적극적이지는 못하나 택한 자들 속에서 은혜로 역사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이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버림받을까 하는 공포심이나 또는 그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이를 행하되 풍성한 은혜를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사망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거룩함과 온전한 신앙에 이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르침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조차 꺽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이 유기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이 세상과 육체의 쾌락에 방임해 두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형벌이 있음을 가르칠 뿐이다.

 

제 17 장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자녀들이 택함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창 17:7; 행 2:39; 고전 7:14).

 

제 18 장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5). 또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둘째 교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의 구속

 

제 1 장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운 분이시다. 그의 공의로우심은(그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셨듯이) 그의 무한한 엄위에 어긋난 우리의 죄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의 육과 영혼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징벌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가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 징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제 2 장

 

  따라서 우리 인간 자신 속에서 보상을 만드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보증으로 주심으로 그의 놀라운 자비를 기꺼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은 바 되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보상으로 희생되었다.

 

제 3 장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유일하며 가장 완전한 희생이며 죄에 대한 보상이요 온 세상의 죄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죽음이다.

 

제 4 장

 

  이 죽음이 무한한 가치와 존엄이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내놓으신 그 분은 온전한 거룩함을 가지신 실제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일하게 영원하며 무한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본질이 우리를 위한 구세주로서의 필수적인 자격을 갖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분의 거룩함이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 5 장

 

  더욱이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이 약속은 누구에나 똑같이 온 세계에 선포되고 알려져야 하며,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제 6 장

 

  복음에 의하여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회개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불신앙 가운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이 모자라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제 7 장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진실하게 믿음으로 죄와 파멸에서 구원받게 된 것은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요 결코 그들의 어떠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 8 장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택함받은 자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뜻과 목적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자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 선물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주시기 위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피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확증하셔서 모든 사람과 족속과 민족, 즉 영원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토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구원의 능력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해 주셨다. 따라서 믿기 전과 후에 지은 모든 죄악들을 그것이 원죄이든 실제적인 죄이든간에 깨끗케 해주시며, 세상 끝날까지 점이나 흠 없이 신실하게 보존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그 영광을 즐거워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제 9 장

 

  택함받은 자에게 이 영원한 사랑을 베푸신 뜻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으며 그 모든 사람의 권세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어갈 것이다. 따라서 정한 시간이 이르면 택함 받은 성도는 한 곳에 모이게 될 것이며, 그 곳에는 성도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피로 그 기초를 이루는 교회로 충만할 것이다. 그 곳에서는 변함없는 사랑과 주님을 구세주로(이 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신 분으로 믿는 자의 신랑이 되시는데) 섬기는 성도들이 모여서 영원히 그의 영광을 찬미할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교리: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의 회심, 그리고 회심 후의 태도

 

제 1 장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 그를 지으신 이에 대한 참된 구원의 지식과 영적인 일들에 관한 추구가 있었다. 즉 그의 마음과 의지는 의롭고 순결했으며 전인격은 성결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은 유혹과 자유 의지로 인해 하나님을 거역하여 이 특별한 은사들을 빼앗겼으며, 그로 인해 사악한 마음과 비참한 어두움과 헛됨과 잘못된 판단력을 가지고 악하고 불순종하며 마음과 의지는 완악해지고 감정이 불결해져 버린 것이었다.

 

제 2 장

 

  인간은 타락한 후에 자녀를 낳았고 타락한 조상에게서 또한 타락한 후손들이 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 이것은 마치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하나의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 보건대 사악한 본성이 유전된 것이다.

 

제 3 장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 속에서 잉태되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선행을 할수 없고 죄악에 빠져서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생하는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올 수도 없고 하나님께로 오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 죄악에서 새롭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제 4 장

 

  그러나 인간에게는 타락한 후에도 희미한 자연의 빛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자연의 사물에 관하여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문제에 과하여 약간의 지식이 있음으로 외부적인 행위를 통하여 도덕과 선에 관한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연의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상태에서 하나님에 관한 구원의 지식에로, 또한 참 회심에로 이끌어가게는 하지만, 이 자연의 사물 속에서 올바르게 사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갖가지 면에서 이 빛을 전적으로 오염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결코 변명할 수 없는 행위를 통하여 불의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제 5 장

 

  이와 동일한 빛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선별된 유대인 모세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이 십계명이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인간을 치유하거나 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하지 않지만, 죄의 심각성과 그 죄악 속의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육신의 연약함으로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이 율법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제 6 장

 

  그러므로 자연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화목의 말씀 내지 화목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써 행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은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 구약이나 신약 아래 있는 어느 누구든지 이 소식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구원하셨다.

 

제 7 장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스러운 뜻을 구약 시대에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계시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여러 민족들간의 구별이 없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어 있다. 이 구별은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거나 이 자연의 빛을 더욱 잘 사용해서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따라서 반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심을 받은 그들은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한 사랑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되,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의심하여 낮추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제 8 장

 

  진실하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복음에 의해 부름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그 말씀 안에서 참되고 진실하게 선언하셨는데, 즉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로 나와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다.

 

제 9 장

 

  말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이 잘못되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하시고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그 인간 자체에 잘못이 있다. 부름을 받았을 때에 어떤 이는 급박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며, 또 어떤 이들은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을 당할 때는 곧 넘어지고, 다른 이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다(마 13장).

 

제 10 장

 

  그러나 복음에 의한 부름에 순종하여 돌이킨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이 자유 의지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돌이킴이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은혜를 스스로 이룬 것으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려는 (마치 펠라기우스의 이단들이 교만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그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돌이키게 하심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 주시고 하늘나라와 연결해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빛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 주시고 하늘나라와 연결해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빛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인도해 내주신 하나님을 찬양케 하며, 성경 여러 곳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대로 오직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제 11 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속에서 기쁘신 선을 이루시며 참 회개를 이루실 때 그들에게 외적으로 복음이 선포되도록 하여 성령으로 강하게 역사하사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며 분별토록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하는 영으로서 사람의 깊은 곳에까지 임하셔서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마음의 할례를 이루시며 죽었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악하고 불순종하고 완악한 마음을 선하게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힘과 능력을 주셔서 마치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제 12 장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생케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복음을 외침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가장 능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기쁘고 놀라우며 신비스럽고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듯이 이 중생의 능력은 창조나 죽음에서의 부활 등에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놀라운 일은 분명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으로 중생케 함으로 실제적인 믿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또한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뿐만 아니라 이 효력의 결과는 그 자체로 활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함이 옳은 것이다.

 

제 13 장

 

  신자들에게 성령의 사역의 움직임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일이 신자로 하여금 구세주를 믿고 사랑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다.

 

제 14 장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자기의 뜻을 따라 받거나 거부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도의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이 믿음은 인간에게 내려진 것이요, 인간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며 영접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게 할 능력이나 힘을 제시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의지를 정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뜻이나 행위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시듯이 믿을 의지도 주시고 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이다.

 

제 15 장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인간에게 주실 때에 그 어떤 책임이 있으신 것은 아니다. 보상에 대한 기초로서의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빚지실 수가 있는가? 죄와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무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원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다. 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이 영적인 선물과는 관계없이 그 스스로의 상태에 만족하든지 도는 위급함을 못 느낀 채 영생의 선물이 아닌 세상의 소유물로 헛된 자랑을 하게 되든지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입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변화된 삶을 사는 성도들에 관하여 우리는 사도들의 본을 받아서 가장 훌륭한 태도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의 깊은 비밀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가 남보다 유별난 것처럼 교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16 장

 

  그러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또한 인류에게 번진 죄악이 인간의 본성조차 빼앗아간 것은 아니고 파멸과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처럼 이 중생의 은혜는 인간을 무감각한 사물로 여기거나 인간의 의지나 그 본성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소생키 시고 치료하며 바르게 해주고, 동시에 그 은혜에 힘있게 따르도록 해주며, 전에는 역적인 반역과 저항이 가득 찬 곳에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참되고 영적인 의지로는 이 타락에서 재생할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고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다.

 

제 17 장

 

  우리에게 생을 불어넣어 주시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인도하심에는 무한한 자비와 선하심으로 택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그의 가르침의 길이 있는데, 중생케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은 복음(말씀)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중생케 하는 씨앗으로, 또한 영혼의 양식으로 정해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따르는 사도들과 선생들이 하나님의 이 은혜에 관하여 가르치되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인간의 교만을 없애도록 교훈하고, 또한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이에게는 거룩한 복음의 훈계를 따라 성례를 지켜나가고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도록 명한 것과 같이 오늘날도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은 그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인간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란 교훈을 통해 내려지기 때문이며 우리가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면 할수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분명해져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더욱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원의 열매와 효력에 있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영원토록 있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교리: 성도의 견인(堅忍)

 

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개혁신학연구소에서 펌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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