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르 트 신조

[스크랩] 도르트 신경의 예정론에 관련한 이해 /김병훈교수님

baromi 2008. 5. 8. 21:45

도르트 신경의 예정론에 관련한 이해 2007-05-09 14:23:37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1618-19년에 있었던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알미니우스의 교훈을 따랐던 항론파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결정한 이후에,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패커(J. I. Packer)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어느 한 편에 서는 일을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대척을 이루는 별개의 신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J. I. Packer, "Arminianisms," in Through Christ's Word: A Festschrift for P. E. Hughes, ed. W. Robert Godfrey and Jesse L. Boyd III (Phillipsburg, N.J.: P & R, 1985), p. 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셀(Alan, P. F. Sell)은 알미니안 항론파(Arminian Remonstants)가 역사적으로 화란 개혁신학의 전통 안에서 파생되었음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칼빈주의 개혁신학에 대한 화란 개혁파의 주류 해석과는 구별이 되는 또 하나의 개혁신학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Alan P. F. Sell, 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Eugene OR: Wipf & Stock Publishers, 1998; previously published by H. E. Walter Ltd., 1982), p. 5.
실제로 알미니우스는 자신이 로마 교황에게 돈으로 회유를 받아 천주교회로 돌아갈 것이며, 또 학생들에게 예수회의 수아레츠(Franciscus Suάrez)의 책을 읽도록 추천하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해명을 하는 글 가운데서 자신은 성경의 교훈과 화란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서(1561)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결코 가르친 적이 없다고 자신을 변호하였다. 팔라틴(Palatine) 영(領)의 선제후 프레데릭 4세가 헤이그에 보냈던 대사, 히볼리투스 아 콜리부스(Hippolytus ὰ Collibus)에게 자신에 대한 소문들을 해명한 이후에 그 내용을 글로 보낸 편지 가운데서 알미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가 단연코 말씀을 드리건데 저는 교회에서이건 대학에서이건 우리의 생각과 말의 유일한 규칙인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한 신성한 성경에 위배되거나, ...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어긋나는 그 어떤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Arminius, A Letter addressed to Hippolytus a Collibus in The Works of Arminius II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1), p. 690; Carl Bang, Arminius: A Study in the Dutch Reformation (Eugene OR: Wipf & Stock Publishers, 1998; first edi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71), p. 295.
만일 알미니우스의 말한 바대로 자신의 주장이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교훈과 일치된다면, 알미니안주의는 16세기 개혁파의 고백신학을 공유하면서, 16세기 후반부터 스콜라신학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분화된 개혁파의 한 부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가 판단한 대로, 알미니우스가 16세기 개혁파 신앙과 어긋난다면 그의 신학은 역사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서 태동이 되었으나 신학체계에 있어서 개혁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칼 뱅스(Carl Bangs)는 알미니우스를 개혁파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볼 여러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결국 알미니우스가 역사적으로 개혁파 진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뱅스가 말하는 대로 알미니우스는 재침례파가 아니고 소시니안파도 아니며 펠라기우스파도 아니고 숨겨진 천주교파(crypto-Roman Catholic)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적으로 예수회의 몰리니우스 등의 천주교파의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혁파도 아닌 것이다. Carl Bangs, "Arminius as a Reformed Theologian," i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Heritage Hall Lecture, 1960-70, edited by John H.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3), pp. 209-22.

  본 논고는 알미니안주의를 개혁파의 한 부류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일 전자가 옳다면 그것은 개혁신학이 칼빈을 비롯한 16세기 초기 개혁주의자들의 신학과 16세기 중반 이후의 개혁주의 스콜라 정통신학 사이에 신학적 불연속성이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 되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초기 개혁주의 신학과 후기 개혁주의 스콜라신학이 단지 방법론의 차이를 가질 뿐이며, 교리 상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이 멀러(Richard A. Muller)에 의하여 주지의 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Richard A. Muller, Post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4 v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7-2002)을 볼 것.
본 논고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항론파의 주장에 담겨 있는 알미니안의 신학이 16세기 칼빈의 신학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후의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도르트 신경의 분석을 통하여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도르트 신경이 스콜라신학 방법론에 따라 기술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르트 총회는 신경을 기술함에 있어서 대학과 학자들 사이에서 사용이 되었던 스콜라적(scholasticus) 방법을 따르기 보다는. 교회에서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중적’(popularis)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즉 도르트 총회는 가급적 ‘주장과 반론’,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구별 및 사용’, ‘네 가지로 구별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의 이용’, ‘형식논리상의 삼단논법을 이용한 합리적 논증,’ 그리고 ‘분석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논증’ 등의 스콜라적 기술 방식을 피하고, 일반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상의 언어로 개념을 풀어 기술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날드 신네마(Donald Sinnema)가 잘 밝히고 있듯이, 도르트 총회에 참석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스콜라 신학 방법론에 익숙한 사람들이며, 도르트 총회가 금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스콜라적 방법론이었을 뿐, 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의 스콜라적 방법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도르트 신경은 형식적으로는 대중적인 기술 방식을 따라서 기술되고 있으나 그것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의 내용은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사고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항론파가 이미 알미니우스를 좇아 스콜라적 방법론에 따른 신학적 결론을 전제로 하면서 개혁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까닭에 항론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양상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본문에서 도르트 신경을 강설하는 가운데 제시될 것이다. Donald Sinnema, "Reformed Scholasticism and the Synod of Dort (1618-19)," in John Calvin's Institutes: His Opus Magnum by Proceedings of the Second Soutn African Congress for Calvin Research, July 31-August 3, 1984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1986), pp. 467-506을 참조할 것.

  도르트 신경을 통해서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차이점을 잘 분별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교리사적 논쟁을 살피는 것을 넘어서 21세기 초의 지금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우선 두 신학은 여전히 배타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관계로써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 칼빈주의는 오늘날 현대 서구사회의 문화에 있어서 단지 과거에 속한 신학적 전통일 뿐, 더 이상 가치가 있는 신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칼빈주의자들의 탄식이 있다. 그 까닭은 칼빈주의의 주요 교리들, 예를 들어, 원죄와 전적 부패, 자신의 구원과 관련한 인간의 무능력 및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대적 의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예정과 통치 등의 교리들이 정치적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와 같은 현대 세속 사회의 가치와 충돌이 되기 때문이며,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서 조차도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에 따라서 인간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는 공로의 개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7-18. 실제로 미국의 교인들이 믿는 바를 조사한 한 통계에 따르면, 응답자의 82퍼센트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으며, 응답자의 56퍼센트는 이 격언이 성경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Brian A. Gerrish, "Sovereign Grace: Is Reformed Theology Obsolete?," Interpretation 57(2003), p. 56. 게리쉬는 이 통계를 What Americans Believe (Glendale, CA: the Barna Research Group, 1991)에서 인용하였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난 20세기에 웨슬레의 알미니안 신학과 오순절 신학이 지배적으로 활동하였던 미국 복음주의 영역에서 신학의 경쟁에서 패배를 하고 사라진 듯한 칼빈주의가 최근에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회복하며 다시 출판문화와 교육의 현장에 재등장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경계의 소리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그 까닭이 미국 복음주의가 구도자 중심의 피상적인 신학에 머물렀으며, 그 결과가 하나님이 더 이상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교인들의 요구를 충족하여 주는 “우주의 멋진 사환(cosmic bell boy)”으로 전락되었고, 또 성경은 한낱 자기 실현을 위한 조언의 책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복음주의의 세속화의 영향에 있다고 분석한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복음주의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영적인 메마름에서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해방감을 칼빈주의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분석한다.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칼빈주의의 영향력의 회복의 증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남부침례교단(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 개혁주의 신학을 오늘날의 교회의 세속화의 대한 치료의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침례교 지도자들은 오늘날의 인간 중심적인 교회의 영적 무력성과 도덕적 해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알미니안 신학에서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염려한다. 이들은 또 젊은 칼빈주의자인 몰러(Albert Mohler)가 미국 남부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 총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개혁주의 신학으로 재무장시킨 사례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 가운데 인기를 크게 끌고 있는 기독교 팝 밴드인 캐드몬즈 콜(Caedmon's Call)이 공개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확신을 표방하고 있음을 지목한다. 다른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칼빈주의의 회복이 세속화되어버린 교회의 치유책이라는 판단에 맞서서 침례교회가 칼빈주의를 완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사회에서 똥더미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풀러(Andrew Fuller)의 견해를 인용하여 칼빈주의로 신학적 경향이 계속되는 것을 경계한 에스텝(William R. Estep)의 주장을 대비시키고 있다. Jerry L. Walls and Joseph R. Dongell, Why I Am Not a Calvinis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13-17. 미국남부침례교단 총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하여서는 Ernest C. Reisinger and D. Matthew Allen, A Quiet Revolution: A Chronicle of Beginnings of Reformation in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Cape Coral, Fl.: Founders, 2000)을 볼 것. 풀러의 소리는 William R. Estep, "Doctrines Lead to 'Dunghill' Prof Warns," <http://www.founders.org/FJ29/article1.html.>을 볼 것.

  최근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에서는 칼빈주의만이 그 영향력을 다시 높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주의의 부흥과는 정반대로 칼빈주의는 물론 알미니안주의의 신학과도 어긋나는 소위 말하는 개방신론(open theism) 혹은 자유의지신론(freewill theism)이라는 신학 사조가 상당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개방신론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시간의 역사를 작정, 또는 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발생에 따라서 시간 안의 모든 일을 경험하시므로 어떤 미래의 일도 하나님께 미확정적으로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유라는 개념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개방신론자(open theism)들의 주장을 알기 위하여서는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fo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N: Review and Herald Pub. Association, 1980); idem., God's Forekonwledge and Man's Free Will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5); Gregory A. Boyd, God of the Possible: A Biblical Introduction to the Open Veiw of God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등을 볼 것이며, 개방신론을 여러 관점에서 제시한 책으로, C. Pinnock, R. Rice, J. Sanders, W. Hasker and D. Basinger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5)을 살펴보거나;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학자들의 동일 주제에 대한 논문을 모아 놓은 책으로, Clark H. Pinnock, ed., The Grace of God and the Will of Man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89)와 James K. Beilby and Paul R. Eddy, Divine Foreknowledge: Four View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을 살피면 개방신론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개혁주의관점에서의 비평을 보기 원하면, Bruce A. Ware, God's Lesser Glory: The Diminished God of Open Theism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0)과 John M. Frame, 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1)을 볼 것. 개방신론에 대한 약간의 소개를 받을 수 있는 한국어 논문을 위하여서는 송인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신학정론 23(2005/11): 77-113을 참조할 것.
개방신론의 논의가 활발히 나타나는 가운데, 개방신론과는 달리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전통적인 신관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적 예정과 인간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논의들을 환기시키는 움직임들도 주목을 끌만큼 충분히 개진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IVP에서 출판된 Why I Am Not a Calvinist와 Why I Am Not an Arminian의 두 책 이외에 Dave Hunt and James White가 각각 알미나안주의와 칼빈주의 관점에서 14개의 관련된 주제를 설명하고 비판을 한 Debating Calvinism: Five Points, Two Views (Sisters, OR: Multnomah Publishers, 2004)를 볼 것.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배타적인 선택의 신학들로 여기지 않고 두 신학들을 조화하여 제 3의 신학적 관점을 제안한 책들로 C. Gordon Olson, Beyond Calvinism and Arminianism (Cedar Knolls, NJ: Global Gospel Ministries, Inc., 2002); Norman Geisler, Chosen But Free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1999, 2001)을 볼 것. 가이슬러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평을 위하여서는 James R. White, Potter's Freedom (Amityville, NY: Calvary Press Publishing, 2000)을 볼 것.

  오늘날에도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 토론은 여러 가지 형식과 필요를 따라서 계속되고 있으며, 또 개방신론이 16-17세기의 소시니안주의와 유사한 주장으로 알미니안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개혁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개방신론이 그 사상의 역사적 뿌리를 소시니안주의에 두고 있음에 대해서는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lated by George Musgrave Giger, edited by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2), loc. 3, q. 12, p. 208. 튜레틴은 이 곳에서 소시니우스가 “하나님은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경의 어떤 근거나 구절들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지와 같은 지식은 결단코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음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 도르트 신경에 나타난 개혁주의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이해를 도모하고, 이로써 개혁주의의 신학의 이유들을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한 본 논고의 연구범위는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과 도르트 총회의 반박 결정문을 살피는 것으로 제한할 것이며, 논의를 위하여 필요할 경우 항론파의 다른 주장들과 이에 대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문들을 참고로 하도록 한다.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소위 “튤립(TULIP)”으로 알려진 칼빈주의 5대 강령은 논문의 전개에 따라서 약간의 설명이 뒤따라 나오겠지만, ‘튤립’(TULIP)으로 표지되는 칼빈주의 5대 신앙강령이란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가리켜 말한다.
1609년 알미니우스가 죽은 후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하여 1610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제출한 5대 신앙 강령에 대응하여 만들어졌다. 실제로 도르트 신경의 이름을 살피면 ‘영국, 독일, 프랑스 개혁교회들의 많은 탁월한 신학자들의 참여와 함께 1618년과 1619년에 도르트에서 열렸던 화란 개혁교회의 국가 총회가 화란 교회들 안에서 논쟁이 되었던 다섯 가지 교리 사항에 대해 내린 결정’(Judicium Synodi Nationalis Reformatarum Ecclesiarum Belgicarum, Habitae Dordrechti Anno MDCXVIII et MDCXIX. Cui plurimi insignes Theologi Reformatarum Ecclesiarum Magnae Britanniae, Germaniae, Galliae, interfuerunt, de Quinque Doctrinae Capitibus in Ecclesiis Belgicis Controversis)으로 되어 있어, 도르트 신경의 5대 신앙 강령은 항론파의 5개 조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p. 550-79에 도르트 신경의 라틴어 전문이 실려 있음을 참조할 것.
알미니안주의자들의 5대 신앙강령은 ‘항론서’(Articuli Remonstrantia)로 불리웠고, 이에 따라서 그들은 ‘항론파’로 불리웠다. 도르트 총회는 그들의 ‘항론서’가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회기 중에 그들에게 ‘항론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보충적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1618년 12월에 31차와 34차 회기에 항론파들은 ‘항론파들의 견해들’(Sententia Remonstrantium)이라는 해명서를 제출하였다. 도르트 총회와 관련한 역사적, 신학적 상황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Thomas Scott, tr. The Articles of the Synod of Dort and Its Rejection of Errors with the History of Events Which Made Way for that Synod (Utica, NY: Press of William Williams, 1831); idem., with an Introductory Essay by Samuel Miller, The Articles of Synod of Dort (Philadelphia, PA: Presbyterian Board of Publsication, 1856);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reprinted 1990);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Grand Rapids, MI: Reformed Fellowship, Inc., 1968);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Grand Rapids, MI: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80) 등을 참조할 것.
항론파들은 당시에 널리 주장되고 있던 개혁신학에 대해 자신들의 신앙을 해명하기 위하여 정리하여 제출한 다섯 가지 신앙 항목들은 이와 같다.
  첫째 항목은 예정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인간의 믿음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이것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조건적 선택설’을 주장한다. 둘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와 각각의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할 의도로 죽으셨던 것이며,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는 ‘보편 속죄설’을 주장한다. 셋째 항목은 구원받는 신앙과 관련한 것으로,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복음에 대하여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 셋째 항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과 동일한 것 같으나, 이 항목은 다음의 넷째 항목과 연결지어 이해하여야 한다. 실제로 항론파들은 1618년에 제출한 ‘항론파들의 견해들’(Sententia Remonstrantium)이라는 해명서에서 앞서 제출한 항론서의 셋째 항목과 넷째 항목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한다.
넷째 항목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으로, 앞의 셋째 항목에서 말한 거듭남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먼저 선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한다. 끝으로 다섯째 항목은 성도의 견인과 관련한 것으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신앙으로 합당한 반응을 한 자들이 계속하여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바라고 합당히 반응을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조건적 견인설’을 주장한다. 이상의 항론파의 주장들을 자세히 알기 원하면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p. 545-549: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p. 111-22;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10-14, 103-109;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p. 207-09, 221-229를 참조할 것. 특별히 뒤의 두 책들은 1610년의 ‘항론서’에 더하여 1618년의 ‘항론파들의 견해들’의 해명서를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신앙 항목들 가운데 본 논고의 중심 주제인 첫째 항목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소리를 직접 옮기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있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        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리라”는         말씀과 또 이와 일치하는 다른 몇 구절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변치 않는 작정에 따라,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타락하여 죄에 빠진 인류들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이 아들을 믿으며,         동일한 은혜를 통해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 나아가는 자들을, 그        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반대        로 완악하며 믿지 않는 자들을 죄와 진노 아래에 남아 있도록 하시고, 그리스도에        게서 소외된 그런 자로 정죄하기로 정하셨다. "Deus aeterno et immutabili decreto in Christo Jesu Filio suo, ante jacta mundi fundamenta, statuit ex genere humano in peccatum prolapso, eos in Christo, propter Christum, et per Christum salvare, qui per gratiam Spiritus Sancti in eundem Filium suum credituri, inque ea ipsa eandem gratiam, usque ad finem essent perseveraturi; contra vero contumacio et incredulos, sub peccato et ira relinquere et condemnare, tanquam a Christo alienos; juxta verbum Evangelii Joh. iii. 36: 'Qui credit in Filium, habet vitam aeternam, qui vero Filio non obtemperat, non videbit vitam, sed ira Dei manet super ipsum.' Cui alia quoque Scripturae dicta respondent."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이하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로 표기), pp. 544-45에서 인용함. 이하의 항론파의 주장들이나 도르트 신경의 영문 번역을 참조하기 위하여서는 주)15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들을 살필 것.


항론파의 ‘예정’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기로 작정하셨다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대상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견지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반면에 유기의 예정 또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대상은 믿음을 거부한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항론파가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하여 거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이나 유기의 예정을 하실 때에 그 대상을 죄인들 가운데서 결정하시는 것이지, 타락전 선택설이 말하는 바처럼 ‘창조되어질 가능적(creabilis) 존재자이며 타락할 가능적(labilis)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론파는 예정에 대한 진술 가운데 “타락하여 죄에 빠진 인류들 가운데”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항론파들의 주장은 개혁파의 또 다른 견해인 ‘타락후 선택설’과는 일치하는 것인가? 개혁파의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은 하나님께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타락을 하도록 허용을 하심으로써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는 작정을 하셨다고 믿는다. 곧 ‘타락후 선택설’에서의 선택의 대상은 ‘창조되어진(creatus) 자이면서 타락한(lapsus) 자’이다. Richard A. Muller, s.v. "supra lapsum"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p. 292.
선택의 대상에 관련하여서 항론파들은 개혁파의 ‘타락후 선택설’과 견해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론파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이거니와 ‘타락후 선택설’도 또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1618년에 제출한 해명서(Sententia Remonstrantium)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어떤 이는 영원        한 생명을 주지 않으시기로 거부하시는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이들을 창조하고자         하시는 작정보다 앞서서 하신 것이 아니며, 자신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 또는 자신        의 절대적 능력과 통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서,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항론서’ 1 항에 대해 ‘항론파의 해명서’는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해명을 하는데, 그 중 첫 번째 항목임. "Deus non decrevit quemquam ad vitam aeternam eligere, aut ab eadem reprobare ordine prius, quam eundem creare decreverit, citra ullius oboedientiae vel inoboedientiae antecedentis intuitum, pro beneplacito suo, ad demonstrandam gloriam misericordiae et iustitiae suae, vel potestatis et dominii absoluti." Acta Synodi Nationalis, in nomine Domini nostri Iesu Christi (Hanoviae: Impensis Egenolphi Emmelii, 1620), p. 159; J. 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Amsterdam, Netherland: Uitgegeven, 1940), p. 283. 영역을 위하여서는 Peter Y. De Jong, ed.,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 p. 222을 참조할 것.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는 화란어 본의 영역을 제공하고 있음.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1항)

항론파는 그들의 해명서에서 자신들이 개혁파 견해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은, ‘타락전 선택설’과는 달리, 창조의 작정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며, 개혁파가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면서 예정의 대상이 ‘창조되고 타락하기 이전의’ 존재인가 아니면 ‘창조되었고 타락한 이후’의 존재인가의 토론을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이전’과 ‘이후’는 시간 역사 안에서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의 논리적 순서일 뿐이며 작정의 영원성을 전제하는 것임을 유의할 것.  
다른 하나는,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 ‘타락후 선택설’과 달리,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만’ 예정하신 것이 아니며, 시간 영역 안에서의 인간의 반응을 ‘미리 보시고’ 예정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서 그 근거를 자신의 작정의 영원성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시간성에 두고 있다는 것이 항론파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의 핵심이며, 개혁파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초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항론파는 ‘항론서’ 제 1항에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이 아들을 믿으며, 동일한 은혜를 통해,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 나아가는 자들을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죄인의 순종 여부에 대한 고려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기 위하여 항론파 해명서는 선택과 유기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의 구원과 멸망에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의도되어진 결과의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자신들의 최종적인 결과에         유효적이며 필연적으로 처하도록 이끄는 그와 같은 수단들이 바로 그 작정[결과의         작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Cum decretum Dei de cuiusque hominis tum salute tum exitio, non sit decretum finis absolute intenti, sequitur neque eidem decreto subordinata esse media talia, per quae ad finem destinatum tum electi tum reprobi efficaciter atque inevitabiliter perduca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2;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3.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2항)

항론파가 말하는 바는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이 각 사람의 운명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작정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결정짓는 데에 관련한 구원의 수단들도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차이가 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순종 여부를 보시고 작정을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작정이 개혁파들의 예정론처럼 각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의미에서의 결과의 작정이지 않으며, 또한 구원의 수단도 이와 같은 결과의 작정에 따라서 종속되어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서도 살핀 바와 같이 항론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하나님의 작정과 대비하여 이러한 주장을 확장하여 나간다.

        ...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지 선택을 실행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또한 선택의 작정의         근거이다. 어떤 이들이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며 믿음 안에서 견인        을 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받았기 때문        이 아니다. 다른 어떤 이들이 타락한 상태에 남게 되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주어        지지 않으며, 그들이 부르심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유효적으로 받지 못하게 되고,         강퍅하여지며, 저주를 받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유기를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 Christus Mediator non est solum executor Electionis, sed ipsius decreti Electionis fundamentum: quod alii efficaciter vocantur, iustificantur, in fide perseverant, glorificantur, causa non est, quod absolute ad vitam aeternam sint electi neque quod alii in lapsu deserantur, Christus iis non detur, prorsus non aut inefficaciter vocentur, indurentur, damnentur, causa non est, quod a salute aeterna absolute sint reprobati."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3항)

그리스도가 선택의 실행뿐만 아니라 선택의 작정의 근거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마치 ‘항론서’ 1항에서 하나님의 작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바와 같이,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이 선택의 근거와 원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두고 있다고 비판하는 항론파들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을 연결시킴으로써, 항론파들은 개혁파의 ‘타락전 선택설’의 예정론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 있는 작정에 둘 뿐이라는 비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Robert A. Peterson and Michael D. Williams, Why I Am Not an Arminian, p. 113.
요컨대 어떤 이가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일이 영원한 절대적 선택의 작정을 받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어떤 이가 타락한 상태로 남아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영원한 절대적 유기의 작정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도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지 못하도록 이미 영원히 작정이 되었다는 이유로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유기되는 것인가? 항론파는 각 개인들의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이 없이, 대부분에 이르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모든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배제된 채 타락의 상태에 있도록 작정하시        지 않았다. "Deus non decrevit sine intervenientibus peccatis actualibus multo maximam partem hominum ab omnis spe salutis seclusam in lapsu relinquere." Acta Synodi Nationalis, p. 159;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3.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4항)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소망에서 끊어진 채 멸망의 상태에 있도록 예정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실제적인 죄들의 개입과 관련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항론파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대상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영원성 안에서 ‘창조될 것이며 타락할 가능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창조되었으며 타락한 존재자’들임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택 또는 유기의 근거가 인간의 순종 또는 불순종에 있음을 명백히 한다.
  결국 항론파가 하나님의 예정의 근거는 인간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 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이루어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항론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모든 죄인들에게 열려져 있는 보편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도록 작정을 하셨다. 이         작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        시고, 사람들에게 믿음에 이르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수단들을 하나님        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실행하여 주기로 작        정을 하셨다. 그렇지만 어떤 절대적인 작정에 따라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오직 선        택한 자들에게만 주시고,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그들에게만 믿음을 부여 하시고,         이들만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 안에서 견인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적은 어떤 식으로도 결코 없으시다. "Deus ordinavit, ut Christus sit propitiatio pro totius mundi peccatis et vi istius decreti statuit credentes in ipsum iustificare et salvare hominibusque media ad fidem necessaria et sufficientia administrare ea ratione, quam novit suam sapientiam et iustitiam decere. Nequaquam autem destinavit ex vi decreti absoluti solis electis Christum Mediatorem dare eosdemque solos per vocationem efficacem fide donare, iustificare, in fide conservare ac glorificar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5항)

항론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이란 먼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상을 죄인인 모든 보편적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기로 하는 작정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반응을 하기에 필요로 하는 모든 수단들을 제공하기로 작정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자들을 미리 정하여 이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중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이들에게만 믿음의 은사를 주고 견인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혁파의 하나님의 작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항론파는 생각한다.
  결국 항론파는 하나님의 작정의 이해에 있어서 단순히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작정의 내용에 있어서도 개혁파와 분명한 이견을 주장한다. 따라서 항론파는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히 한다.

        어떤 누구도 어떤 선행하는 절대적 작정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        부를 당하거나 또는 이를 위해 충분한 수단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를 당하지 않는        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부르심과 성령님의 모든 은사들은 모든 이들을 구        원에 이르도록 하기에 유익하며, 또 그들이 이러한 은사들을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를 멸망으로 돌리지 않는 한, 이것들은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이 된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저주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나 원인인 불신앙, 불경건, 그리고 죄들을 범하        도록 예정이 되지 않았다. "Nec a vita aeterna nec a mediis ad eam sufficientibus ullus reiectus est absoluto aliquo antecedaneo decreto, sic ut meritum Christi, vocatio omniaque dona Spiritus prodesse ad salutem omnibus possint et re vera prosint, nisi ea ipsi in exitium sibi eorundem abusu vertant; ad incredulitatem autem, impietatem et peccata, tamquam media et causas damnationis, nemo destinatus es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6항)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 안에서, 미리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기로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필요하며 충분한 은사를 부여하시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항론파는 인간이 이러한 은사를 소홀히하거나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따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후에, 이어서 항론파는 ‘항론서’ 1항에 대한 첫 번째 해명 항목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것, 곧 “선행하는 어떤 순종이나 불순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는 표현을 통해 의도하였던 바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은, 선택에 있어서 미리 요구되는 전제 조건으로서, 예        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견인에 대한 고려를 통해 결정이 되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고려와 또 참된 믿음의 견인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Electio singularium personarum peremptoria est, ex consideratione fidei in Iesum Christum et perseverantia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fidei et perseverantiae in vera fide, tamquam conditionis in eligendo praerequisita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3;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4.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7항)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거부당하는 것은 어떤 선행하는 불신앙과 또 불신앙        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고려함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선행하는 불신        앙과 또 불신앙에 계속 머무르는 것에 대한 고려도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Reprobatio a vita aeterna facta est secundum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non autem citra considerationem antecedaneae infidelitatis et perseverantiae in infidelitate."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p. 223-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항        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8항)

항론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의 반응이 하나님의 작정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서 그 개개인의 선택 또는 유기의 작정을 하신다고 말함으로써 개혁파의 예정에 대한 비판을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예정론에 대한 항론파의 비판의 초점은 단지 작정의 대상이 죄인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신론 상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항론서’의 제 1항인 예정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는 마지막으로 예정에 대한 논의를 유아의 경우에 관련하여 전개함으로 끝을 맺는다. 항론파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인간의 믿음의 반응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신자들은 아직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유아의 상태에 있는 그들의 자식이 구원의 예정을 받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항론파의 이해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지만, 항론파는 유아의 구원을 오히려 인정한다.

        신자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이므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도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 세상을 떠날 경우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자신들        의 인격 안에서 실제적인 죄를 범하기 이전 유아기에 이 세상을 떠나는 신자의 어        떤 특정한 자녀들이, 거룩한 세례의 씻음과 그들을 위한 교회의 기도가 그들의 구        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정도로, 유기된 자들의 수에 결코 포함이 되지 않        는다. "Omnes fidelium liberi sunt in Christo sanctificati; ita ut nullus eorum ante usum rationis ex hac vita decedens pereat. Nequaquam autem in reprobatorum numero censentur etiam nonnulli fidelium liberi, in infantia sua ante ullum actuale peccatum in propria persona commissum ex hac vita discedentes, adeo ut nec baptismi lavacrum sacrum, nec preces Ecclesiae ipsis ullo modo ad salutem prodesse possint."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9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의 어떤 자녀도, 유아의 상태로         살고 있을 때에, 절대적인 작정에 의하여 유기된 자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        지 않는다. "Nulli fidelium liberi baptizati in nomine Patris, Filli et Spiritus Sancti in infantiae suae statu viventes absoluto decreto reprobatis adscribuntur." Acta Synodi Nationalis, p. 160; De Nederlandsche Belijdenisgeschriften, p. 284. 영역: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p. 224; The Vocie of Our Fathers, p. 105.    
(‘항론서’ 1 항에 대한 항론파의 해명서 10항)

항론파는 자신들은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는 물론, 유아의 상태에 있는 신자의 자녀가 아직은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의 상태이므로, 어떤 선택과 유기의 예정의 조건을 갖추기 전이지만, 교회의 거룩한 세례와 기도가 그들의 구원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될 정도로,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유기된 자들의 수에 포함된다고 생각지 않음을 주장한다. 예정론의 논의의 끝에 유아에 관련한 논의를 덧붙임으로써, 항론파는 만일 개혁파의 주장대로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이라면, 신자의 자녀들 가운데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어떤 자녀들은 유기의 작정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자극한다. 호머 훅스마(Homer Hoeksema)는 항론파가 유아의 예정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일종의 개혁파를 향한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항론파가 논의의 초점을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자녀에 대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있는지를 밝히고, 이에 따라서 개혁파의 예정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혁파의 예정론은 유아기에 사망한 신자의 어떤 자녀를 멸망의 저주 아래에 놓고 있는데 그래도 그것을 받겠는가라는 식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Homer C. Hoeksema, The Vocie of Our Fathers, pp. 278-79.
항론파의 주장도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믿음의 반응이라는 조건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항론파의 논리에서도 유아의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신자의 자녀의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가 유기가 될 근거가 되는 불신앙이라는 조건이 없는 반면에, 개혁파의 경우는 하나님의 작정에 유기의 근거가 있으므로 유기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는 논리로 항론파는 개혁파의 예정론에 대해 반감을 도모한다.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지금까지 살펴본 항론파의 예정에 관한 견해, 곧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반응에 의해 조건화 된다거나, 또는 인간의 반응보다 후행적이라는 항론파의 이해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알미니우스는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개혁파의 교리는 16세기 개혁파 교회의 주요 신앙고백들과 어긋나며, 오히려 자신의 신학이 이것들과 일치한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알미니우스는, 1608년에 제출한 “견해의 선언”(Declaratio sententiae)에서, 벨직 신앙고백서(1561)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관한 14항의 한 대목과 ‘선택’에 관한 16항의 한 대목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translated by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reprinted), p. 622.


        ...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속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므로써,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에          빠졌으며, 그 결과 사망과 저주에 놓이게 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 14항 가운        데)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에 지 드 브레(Guy de Brès)가 플랑드르(Flanders)와 네덜란드(the Netherlands)의 교회를 위하여 불어로 작성한 것으로 1571년 엠덴(Emden) 개혁총회와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에서 채택이 되었다. 라틴어역은 판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불어판을 참고로 소개한다. "... mais s'est volontairement assujetti au péché, et par conséquent à mort et à malédiction, en prétant l'oreille à la parole du diable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398.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며 불변하는 계획 안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떤         고려가 없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순전한 선하심에 따라서, 선택        하신 자들을 저주로부터 끌어내시어 구원하심으로써 긍휼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외의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빠져버린 타락과 파        멸 가운데 내버려 두심으로써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 (벨직 신앙고백        서, 16항 가운데) "... Dieu s'est démontré ... miséricordieux, en retirant et sauvant de cette perdition ceux qu'en son conseil éternel et immuable il a élus et choisis par sa pure bonté en Jésus-Christ notre Seigneur, sans aucun égard de leurs oeuvres; juste, en laissant les autres en leur ruine et trébuchement où ils se sont précipités ..."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p. 491. 같은 쪽에 있는 영역을 함께 참조할 것.


알미니우스는 해석하기를 벨직 신앙고백서가 14항에서 인간의 범죄가 ‘의지적으로’(volontairement) 행하여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선행한 어떤 예정이라는 작정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음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과는 어긋난다고 하였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16항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며, 그 외의 사람들을 파멸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는 고백이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지를 않는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우스 생각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 안에서 선택의 대상과 관련한 아무런 내용도 없이 선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선택하였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용하여 이렇게 논증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아담 안에서 멸망을 당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        이 아니라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의 은사를 받은 자들        에게만 주어진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알미니우스는 그의 글에서 위의 인용과 같이 이것을 풀어서 제시하고 있다: [영역] "Salvation through Christ is not given [restored] to all them who had perished in Adam, but to those only who are ingrafted into Christ by true faith and who embraces his benefits." James Arminius, 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 of Arminius I.3.vi in The Works of Arminius vol. 1, pp. 622-23. 이하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n Works, 1로 줄여씀.


누가 구원을 받는가?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가 아닌가? 알미니우스는 여기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구원에 이르도록 절대적 의미에서 예정하셨음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나오는 자를 그의 작정 안에서 구원받는 신자로 간주하셨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4문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의 시작 날부터 끝 날까지 온 인류 가운데서 자신의 영과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을 받은, 참된 신앙 안에서 함께 일치하는, 한         무리[교회]를 자신에게로 거두고 모으는 것을 믿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4        문답) 알미니우스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영역] "I believe that,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 world, the Son of God out of the entire race of mankind does by his word and Spirit gather or collect unto himself a company chosen unto eternal life and agreeing together in the true faith."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알미니우스는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을 받은”과 “참된 신앙 안에서 일치하는”의 두 수식은 서로 병행하는 구절이며, 뒤의 구절이 앞의 구절에 종속되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한다. 따라서 개혁파의 주장과는 달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영원한 작정에 의해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옳다고 알미니우스는 주장을 한다. 만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개혁파의 주장과 같은 취지를 말하고자 했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의 말씀과 영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선택을 받은 한 무리로 하여금 참된 신앙을 믿고 함께 그 신앙에 일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로 불러 모으신다”고 고백했을 것이라고 알미니우스는 풀이한다.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3.vi. in Works, 1, p. 623.

  이처럼 자신의 신학이 초기 개혁파 신앙고백과 결코 어긋남이 없으며, 오히려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주장이 개혁파 신앙고백과 어긋난다고 주장을 한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응을 미리 고려하시고 이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신론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예지예정’이라는 자신의 예정론 이해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이를 근거로 ‘타락전 선택설’은 물론 ‘타락후 선택설’도 또한 비판한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견해의 선언”(Declaratio sententiae)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예정론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작정을 넷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죄인의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중보자로, 구속자로, 구주로, 제사장으로, 또 왕으로 임명하시는 작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심으로서 죄를 멸하시고, 친히 순종하심으로써 잃었던 구원을         획득하시며, 자신의 공로로 그것을 전달하신다. "The First absolute decree of God concerning the salvation of sinful man, is that by which he decreed to appoint his Son Jesus Christ for a Mediator, Redeemer, Saviour, Priest and King, who might destroy sin by his own death, might by his obedience obtain the salvation which had been lost, and might communicate it by his own virtu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 in Works, 1, p. 653.


예정과 관련한 하나님의 첫 번째 작정으로 알미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을 언급한다. 즉 예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의 근거로 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일정한 수의 특정한 개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작정이다.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in The Grace of God, the Bondage of the Will vol. 2, Thomas R. Schreiner and Bruce A. Ware, ed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257.


        하나님의 두 번째 정확하며 절대적인 작정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        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호의로 받아들이기로 한 작정이며, 끝        까지 견디며 인내한 참회자들과 신자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한 작정이다. 그러        나 모든 회개치 않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죄 가운데 그리고 진노 아래 내버려         두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소외된 자로 저주하기로 한 작정이다. "The second precise and absolute decree of God, is that in which he decreed to receive into favour those who repent and believe, and, in Christ, for His sake and through Him, to effect the salvation of such penitents and believers as preserved to the end; but to leave in sin and under wrath all impenitent persons and unbelievers, and to damn, them as aliens from Christ."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 in Works, 1, p. 653.


알미니우스가 생각하는 예정에 관련한 하나님의 두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작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을 구원할 것인가와 관련한 작정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작정은 그리스도와 관련한 복음 자체의 작정이고, 두 번째 작정은 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작정이다. 이 약속 또한 모든 죄인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이 되는 일반적인 작정이다.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하나님의 세 번째 작정은 회개와 믿음에 필요한 수단들을 충분하며 유효적인 방식        으로 실행하시는 작정이며, (1) 그의 긍휼함과 엄격함에 모두 잘 적합하며 어울리        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일치하며, 또 (2) 그의 지혜가 정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채택하고 그것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일치하도록 집        행하시는 작정이다. "The third divine decree is that by which God decreed to administer in a sufficient and efficacious manner the means which were necessary for repentance and faith; and to have such administration instituted (1) according to the Divine Wisdom, by which God knows what is proper and becoming both to his mercy and his severity, and (2) according to Divine Justice, by which He is prepared to adopt whatever his wisdom may prescribe and to put in execution."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ii in Works, 1, p. 653.


알미니우스에게 있어서 세 번째 작정은, 앞선 두 작정들과 함께, 인간의 반응에 앞서서 그 반응의 결과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먼저 작정하시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에 의한 작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첫 번째 작정에 따른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여 졌을 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에 빠진 인간이 두 번째 작정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수단들을 실행하여 주기로 작정을 하신다. 여기서 알미니우스가 말하는 구원에 필요한 수단들이란 믿음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축복된 것들을 망라하여 말하지만, 가장 고유하고도 적절한 수단은 말씀과 성령을 말한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V.i-xv in Works, II, pp. 226-230;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LI.i-ix in Works, II, pp. 394-395; Richard A. Muller,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58.


        이제 네 번째 작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저주하시는         작정이다. 이 작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예지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행 은총        (preventing grace)을 통해, 회심과 믿음에 알맞으며 적합한, 앞서 언급한, 수단들        을 실행하는 것에 따라서, 믿을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후행 은총(subsequent         grace)을 통해 끝까지 견딜 자가 누구인지를 자신의 예지로 영원부터 아셨다. 그리        고 같은 방식으로 누가 믿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지 않을 것인지를 자신의         예지로 아셨다. "To these succeeds the Fourth decree, by which God decreed to save and damn certain particular persons. This decree has its foundation in the foreknowledge of God, by which he knew from all eternity those individuals who would, through his preventing grace, believe, and, through his subsequent grace would persevere, - according to the before-described administration of those means which are suitable and proper for conversion and faith; and, by which foreknowledge, he likewise knew those who would not believe and persevere." Arminius, Declaration of Sentiments, I.5.iv in Works, 1, pp. 653-54.  


알미니우스는 네 번째 작정에 이르러 특정한 개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설명한다. 결국 앞의 세 작정들은 모두 네 번째 작정을 위한 조건들을 위한 작정들인 셈이다. 그런데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은 이 네 번째 작정의 근거를 자신의 의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에 둔다. 곧 세 번째 작정에서 결정하였던 믿음의 수단들, 곧 은혜를 공급하였을 때에 개개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를 미리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떤 개인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의 수단을 공급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믿도록 자신의 의지 안에서 작정을 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의 수단을 공급하고 그 개인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를 자신의 예지로 알뿐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작정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신론에서 구원을 위한 조건을 먼저 작정하는 ‘선행적 의지’(voluntas Dei antecedens)와 그 조건에 따라 개개인의 예정을 작정하는 ‘후행적 의지’(voluntas Dei consequens), 또는 개개인의 반응에 상관이 없이 작정하는 ‘절대적 의지’(voluntas Dei absolutiva)와 개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예지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반응에 따라 작정하는 ‘각각의 의지’(voluntas Dei respectiva)의 구별을 한다. 즉 알미니우스가 개혁파의 예정론을 거부한 것은 그가 인간의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에 대해서 개혁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중세 스콜라 신학과 개혁파 스콜라 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표준적인 두 구별을 인정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일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가능태(potentia)의 지식으로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 또는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 또는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 또는 ‘불확정된 지식’(scientia in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진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 in Works, II, p. 123; idem,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ix in Works, II, p. 342. 모든 가능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 단순지성의 지식(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이라 불리는 까닭은 이 지식이 여러 가지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성되어 있지 않은 순일한(simple) 하나님의 지성에 의한 지식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태를 완전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알기 때문이며, 또 본성의 지식(scientia naturalis)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며, 끝으로 불확정의 지식(scientia indefinita)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은 아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현실태로 확정이 되기 이전의 미확정 상태에 있는 가능태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p. 151.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현실태(actus)의 지식으로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 또는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 또는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 또는 ‘확정된 지식’(scientia definita)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발생하도록 함으로써 나타날 일이나 상황에 대한 지식으로써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한 지식이다. Ibid.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발생하도록 정하신 것을 미리 보시는 지식이므로 이상의 지식(scientia visionis)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지식이므로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임의로 정하신 것에 대한 지식이므로 임의의 지식(scientia voluntaria)이라 하며, 끝으로 하나님께서 의지하신 일은 일어나도록 확정이 된 것이므로 확정의 지식(scientia definita)이라고 불리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2;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4;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8 reprinted), p. 72-75.
개혁파는 이 두 종류의 지식이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다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전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일과 상황에 대해 아시며, 또 후자에 의하여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하시는 일과 상화에 대해 아시면, 모든 가능한 경우에 속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 어떤 일과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자인 수아레츠(Franciscus Suάrez)와 몰리나(Luis de Molina)의 영향을 입어 제 3의 범주로 ‘중간지식’(scientia media)을 설정한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155-57; idem., "Grace, Election, and Contingent Choice: Arminius's Gambit and the Reformed Response," p. 265.


        스콜라 학자들은 덧붙여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하나는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지식이        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지식이며, 세 번째 지식은 중간[media]지식이라고 말한        다. (1)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며 가능한 모든 것을 아        는 지식이며, (2) 자유로운 지식은 다른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다. (3) 중간지식은         “만일 이 일이 일어나면, 저 일이 일어날 것이다”를 아는 지식이다.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보다 선행하며,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        로운 활동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마지막도 또한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보        다 앞서지만, 그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가정적인 조건에 따라서(hypothetically) 이         활동으로부터 발생할 것임을 안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IV.xliii in Works, II, pp. 123-24.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arbitrium)의 자유에 따라 결정되는 일에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중간지식을 말한다. "The middle or intermediate [kind of] knowledge ought to intervene in things which depend on the liberty of created [arbitrii] choice or pleasure."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VII.xii in Works, II, p. 342.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일에 대해서는 그 일이 있을 것임을 단지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서만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됨으로써 아는 지식, 곧 절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이루어질 때에 이것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일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비로소 아는 상대적 혹은 가정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아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그 일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하여 현실화의 여부가 결정이 되는 것이므로, 모든 가능한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어떤 것, 곧 인간에 의하여 현실화되는 일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 156.
  
  그렇다면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에게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일이나 상황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며, 어떤 유한한 존재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존재를 받아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Arminius, Seventy-Nine Private Disputations, XIV.v in Works, II, p. 336.
알미니우스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중간지식의 범주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작정하심에 있어서 개개의 피조물의 원인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작정을 실현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자유선택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동주사역(concursus divinus)은] 행동을 낳는 데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개체를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제 1 원인이며 중심 존재에 의하지         아니하면 어떤 개체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주사역은 하나님께서         제 2 원인 혹은 하부 원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피        조물의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그렇게 됨으로        써 하나의 동일한 완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결과가 하나님과 피조물에 의        하여 동시에 나타날 수가 있게 된다. Arminius, Twenty-Five Public Disputations, X.ix in Works, II, p. 183.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섭리활동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활동을 낳는 원인자로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록 영향을 끼치실 뿐이라고 알미니우스는 생각한다. 결국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으로 작용을 하실 수는 없으며,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을 미리 아는 하나님의 중간지식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역사할 따름인 것이다. Richard A. Muller,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pp. 251-56.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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