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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고경태 박사(광신대, 개혁주의 사상)

baromi 2008. 3. 25. 08:57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고경태 박사(광신대, 개혁주의 사상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의 신학 곧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confessiones ecclesiae reformatae)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즉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칼빈이 저술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 나타난 신학 체계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 이해를 근거해서 신학을 한다. 물론 고대 교회의 교의가 기본 진리가 된다.1)

  개혁교회는 종교개혁교회이므로 루터교회와 함께 종교개혁의 기본원리를 인정한다. 즉 루터교회가 중생(regeneratio) 혹은 이신칭의 교리를 실질적 원리로 삼아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았다. 개혁교회 또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조항임으로 루터교회와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중생과 칭의만을 강조하는 루터교회와는 달리 성화를 강조하며, 믿음의 진보를 목표로 한다. 루터교회는 칭의에서 시작해서 칭의에 머물지만, 개혁교회는 성화 곧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는 성도의 삶에서 윤리가 합당한 강조와 존경을 받는다.

  종교개혁은 루터신학과 개혁신학이 공히 ‘성경’을 강조하였다. 성경이 신학의 원리와 근거이다. 성경의 강조는 중세 로마 교회의 교황권에 대한 강조를 대치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므로 성경의 권위는 신적 권위로 강조되었다. 모든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믿음의 내용도 다 성경에서 도출하고 성경대로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신학의 형식적 원리가 된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매임으로 신학하는 것을 원리로 삼는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일을 자기 경륜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예정 교리가 부각되어 개혁신학의 특징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숙명론적인 신적 주권 이해는 개혁신학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개혁신학에서 성경을 이해함에서 ‘언약 사상’이 강조되었다. 개혁 신학이 주장하는 언약은 영원한 언약, 즉 삼위 하나님의 협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일을 하실 때에도 언제나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이루셨다. 즉 언약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이다. 개혁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별하여  이해하였다. 그러나 서철원은 첫언약(하나님의 백성됨의 약정)과 새언약(첫 언약의 회복과 완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이해라고 개혁 신학 고백의 재논의를 주장한다.2)

 개혁신학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전적 부패’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이해로 주장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또한 창조 사역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구원의 과정에 인간의 능력이나 보충이 전혀 불가능하다. 이러한 개혁신학의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주장은 로마교회, 알미니안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개혁신학은 칭의와 성화 모두에서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즉 구원의 성취와 적용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어 은혜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과 연결이 된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해서는 기독교강요 3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연합에 대한 다른 표현은 ‘성령의 띠’. 로마서의 표현으로 ‘접붙힘’등으로 제시된다. 구원이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하는 근본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목표로 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은 또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 성령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백성들이 교제하게 된다.

  개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됨의 한계를 명백히 제시한다. 이러한 이해는 칼케돈 신경(451년)에서 주장된 성육신한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음을 따른 것이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근본전제이다.3)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는 피조물이 신이 되거나 신화되는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죽음 후의 영화 또한 신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의 강조는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며, 넘어설 수 없음에서 오는 넘어섬이 일어난다.

  개혁신학에서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생을 사시는 것이 아니다(발트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신다. 성육신 또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표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전도의 목적을 말씀하시지만, 말기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일만 하신다.

 개혁신학은 ‘성화’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율법이 자리를 잡는다. 즉 율법이 구원을 길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규범으로 역사한다. 개혁신학은 율법이 생활의 규범으로 합당한 자리를 잡는다. 루터신학에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갖지만,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이다.

  개혁신학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강조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영역에서 주이시므로 그가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왕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것은 그의 법이 교회와 사회의 법이 됨으로 이루어진다. 이 일을 위해 모든 영역을 복음화하고 말씀의 권세 아래 두기 위해 노력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 주석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강조된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은 중립적 혹은 적대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문화 활동을 적극 권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문화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선포된 말씀에 강조를 둔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길은 선포된 말씀으로 가능하다. 교회의 창설도 오순절 성령 강림과 동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확장되어져 갔다. 중세 로마 교회가 무의미한 미사 집행으로 천년동안 백성을 우민화시켰다. 개혁교회는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함으로 교회의 표지가 된다.

 

 

 

 

 

 고경태 박사(광신대, 개혁주의 사상)

 1.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


     많은 사람들은 ‘주의(主義, ism)’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다. ‘주의’는 일상적으로 고형화된 의미를 제시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대원리 중 하나인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로 본다면 ‘개혁주의’라는 단어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작금에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개혁주의와 병행하여 “개혁신학”을 필두로 “개혁신앙”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Reformed를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개혁된 신학”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개혁주의는 어떤 신학자의 사상에 고착된 사상은 아니며, 사상을 답습하는 것도 아니다.


   (1) 개혁주의 역사적 개괄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으로 고대신학, 중세신학, 종교개혁신학, 근, 현대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은 루터의 신학과 칼빈이 신학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는 르네상스와 쌍벽을 이룬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공히 중세로마교회의 전횡에 저항하는 것이다. 중세로마교회는 천년동안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지만 덕을 쌓지 못함으로 민중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했다. 로마 교회의 부패는 정신세계의 자유를 선언하는 르네상스와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는 종교개혁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교회의 권위에 항거하여 형성된 사조가 세계의 근본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순수 신앙을 회복하게 위한 처절한 항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여전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중세로마교회의 꿈인 세계 통치를 추구하고 있다.

  

   (2) 개혁파 신학은 편협한 신학인가?


   개혁파 신학은 많은 기독교 분파들로부터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완전한 교파나 사람이 없을 것인데 개혁파가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편협하지 않다는 교만 혹은 거짓에 있는 것이다. 이 땅위에 완전한 사상이나 사람은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편협하지 않는 사상은 없다. 정도의 차이를 갖고서 편협성을 논의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개혁파를 편협한 신학으로 평가하고 공격하는 것은 개혁파는 고대 교회의 신학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의 신조를 그대로 인정하고 여전히 동일한 신앙으로 인정한다. 그 맥락에서 성경의 시대 또한 동일한 인간 존재로 규정한다. 즉 죄로 인해서 죽음이 변함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견지하게 때문이다.

  혹 개혁파 신학이 편협하다면 그 편협한 신학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편협한 신학을 알지도 못하면서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는 형국이다. 개혁파의 후예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신앙의 소명을 충실히 견지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은 양심과 영생을 두고 하는 것이지, 이성과 감정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무엇도 전체를 알 수 없는 이성의 한계, 공간의 제약, 시간의 제약 속에서 편협하지 않는 사상이 어디 있는가?


  개혁파 신학은 절대로 편협하지 않다. 그 심오함은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탐구하는 신비의 학문이다. 이성의 심오함이 없다고 평가될지는 모르지만 영생의 신비가 있다. 영생의 신비를 탐구하고 경탄하는 이성의 신비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개혁파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핍박받았다. 개혁파 신학과 교회는 영적,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인 전투로 말미암아 형성된 고난에 근거한다. 네델란드에서 로마 교회와 전투, 영국에서 국교회에 의한 핍박, 프랑스 위그노 대학살 등은 개혁파의 험난한 여정을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선배들의 여정을 현재 후배들도 걸음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믿음의 순례는 천로역정의 순례자처럼 역경 속에서 영원한 나라의 영광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역동적 신앙의 모습은 모든 세계의 문명, 문화를 새로운 세계정신에 부합되게 하였다. 기술과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파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에 근거한다. 주께서 믿는 자에게 환란과 복을 겸하여서 주심으로 겸손이 주를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


  (3)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파의 중요한 표지는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이다. 이것이 마치 교회가 날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개혁은 불변의 진리를 전제한다. 그 불변의 진리는 삼위일체 교의(325년, 381년)와 기독론 양성 교의(451년)이다. 개혁파 사상의 원천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산출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 이해를 근본으로 모든 교리가 구성된다. 이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신학, 교회의 제도들은 과감히 개혁되어야 한다. 중세로마교회가 이 교의에 부합되지 않는 제도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을 한 것이다. 이 시대에도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작금에 장로 제도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개혁파 교회 제도에서 장로 제도는 다른 교파와 다르게 강조된 직제이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장로 제도의 문제성이 발견됨으로 장로 제도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개혁파의 선배들이 장로 제도를 결정했을 때에는 성경에 준거해서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제도를 변경하려면 다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제도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상황적 문제나 모순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개혁의 연속에 부합되지 않는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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