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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세계관을 고개 들게 하라 /최태연

baromi 2008. 3. 14. 12:30

기독교 세계관을 고개 들게 하라!

 
 
                                                                                           최태연 (천안대 교수, 기독교철학)
 
지난 달 「복상」2월호에 실린 박총 님의 글 "기독교 세계관을 확뜯어 고쳐라!"는 마치 조용했던 기독교 세계관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효과를 준 것 같다. 박총 님의 글은 기독교 세계관에 공감했고, 지금도 계속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항상 이런 글이 나오고 나서야 뒷북치게 되는 나 역시 "40대 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하는 세대에 속해있기에 공감이전에 충격이 더한 것 같다. 박총 님의 재미있고 화려한 글쓰기에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사실 어느 정도 예고되었던 비판의 목소리를 개인적으로 미리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이 전혀 리콜이 필요 없다고 강변하거나 화려한 수사를 곁들인 말싸움으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다. 다만 박총 님의 '변두리 묵상'에서 지적된 문제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아끼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고 믿기에 하나하나 차분히 음미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변두리 묵상'에 관하여 묵상하기
본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 변두리와 중심은 없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중심이고 우리는 모두 변두리이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에는 중심이 있고 변두리가 있다. 사회 한가운데를 차지한 중심은 막강하고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변두리는 힘이 없다. 이러한 상황의 구도로부터 중심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변두리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분리된다. 중심을 차지한 이들이 삶의 방향과 태도를 선택해야만 할 때, 먼저 변두리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중심의 윤리성이 담보되고 스스로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 방금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변두리'에서 '중심'을 향해 한 외침이 들렸다면, 그 외침에 설령 파열음이 섞였다고 해도 중심은 그 음성을 경청해야 한다.
성경은 이런 변두리의 외침을 "돌들이 부르짖는다"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선 말하지 못하는 돌들도 우리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시대의 변두리 사람인 예수님도 역시 변두리 출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중심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던가? 변두리의 나사렛 예수를 거부했던 중심 예루살렘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중심은 끊임없이 변두리와 소통하며 배워야 한다. 나는 이런 중심의 겸손함이 변두리와 중심이 소통하기 위한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변두리와 중심, 양자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같은 변두리임을 확인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원론'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잘 알고있는 미들톤과 왈쉬(Middleton & Walsh),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 올리버 바클리(Oliver Barklay), 알버트 월터스(Al Wolters), 그리고 양승훈 교수의 책은 기독교 세계관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책에 압축해서 담고있는 입문서였다. 비록 그 가운데는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원리뿐만 아니라, 정치와 이데올로기, 경제와 문화, 학문과 교육, 결혼과 성, 노동과 직업, 과학과 기술, 역사와 윤리에 이르는 각론을 다루는 책도 있었지만, 입문서라는 한계 때문에 피상적인 언급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기독교 세계관 교육은 주로 이런 책들을 교재로 하여 기독교 세계관의 골격을 이해시키는데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가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원론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듣는데 일조 했던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창설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사상이나 이론적 뒷받침을 했던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의 철학이 깊이 있게 논의되거나 비판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번역 수준에서 정체되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20년 동안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각 분야의 발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윤실을 대표로 하는 기독교 시민운동은 말할 나위도 없고 기독교학문연구소(기학연)를 모체로 하여 기독경영연구원과 기독교사연합과 기독교대안교육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기학연 내에서도 경제학, 교육학, 과학, 문학, 역사학 분과의 연구세미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최근에는 청년연구모임(기청연)이 발족되었다. 모든 학문 분야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결실을 맺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험난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터전은 한국교회이다. 교회에서 안주하고 있는 많은 기독 학자와 전문가, 학생들을 불러내어 함께 동역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문영역 별로 장기적인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일, 여기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철학의 지평융합? : 모더니즘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
나는 현재의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modernism)에 포로 되어있다는 박총 님의 주장에 일면 공감하면서도 반론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분명히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근대 계몽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근대 학문의 방법을 역이용했다. 카이퍼는 신학의 백과사전적 체계화를 시도했고 도예베르트는 칸트(Kant)와 신칸트주의(Neo-Kantism) 및 후설(Husserl)의 철학에서 그의 개념들을 이끌어 냈다. 이들 설립자들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은 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세속화된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서술하는데 논리적이고 명제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원적인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와 욕구라고 하면서 두 세기에 걸쳐 서구의 정신계를 지배했던 모더니즘의 독주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한편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을 일부 인정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쪽과 다른 한편은 그들이 제기한 문제를 궤변에 불과하다고 보고 아예 무시하거나 모더니즘의 학문방식을 견지하는 쪽이다. 북미의 '기독교 학문' 논의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예베르트의 후예를 자처하는 캐나다의 기독교학문연구소(ICS)의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화를 지속하는가 하면, 미국의 칼빈대학(Calvin College) 출신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대화에 회의적인 것 같다.
 
박총 님뿐만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21세기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은 오히려 이러한 다양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도예베르트의 초월적 이성비판은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이성비판과 놀라우리만큼 맥을 같이 한다. 도예베르트가 모든 이론적 사유의 기원에는 그 이론체계를 넘어서는 신앙적 선택이 있다고 간파한 것이나 서양철학의 근원에 놓여있는 형이상학적 원리가 단지 협약이나 자의적 규칙에 불과하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비교해보면 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개념사용이나 서술의 스타일에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와 방법을 모두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학문의 주류는 모더니즘이다. 기독교학문이 학문과 문화세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논리와 명제를 사용하는 학문에서 더욱 성공적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칼빈대학 출신의 기독교 학자들인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kolas Wolterstorff), 죠지 마스덴(George Marsden), 리차드 마우(Richard Mouw) 등은 이런 전략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동시에 나는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알라스대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스탠리 그랜츠(Stanley Granz) 같은 포스트모던 스타일을 지향하는 기독교 학자도 나오기를 바란다. 중요한 점은 어떤 방법이든지 그 방법의 근원에 놓여있는 신념이 유한하고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생각인 것처럼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도 마땅히 비판이 대상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박총 님의 문제제기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 볼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서술하기: 명제냐, 내러티브냐?
박총 님의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명제주의의 한계와 부작용을 내러티브(이야기)로 극복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명제주의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요, 유일한 대안이 내러티브(narrative)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데도 단서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작가에게조차 개념적이고 명제적 사고는 필수불가결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사고능력을 추방한다면 결과는 문명의 마비로 되돌아 올 것이다.
 
나는 감히 박총 님이 '인지-명제적' 쓰여진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추상화하는 명제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사고를 구체화하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활짝 열자!"는 박총 님의 의도에 공감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부분의 글쓰기는 내러티브로 되어있지 않은가!
 
한편 모더니즘은 모두 '명제주의'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내러티브'라는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모더니즘에도 나름대로 풍부한 이야기들이 있고 리꾀르(Paul Ricoeur) 같이 은유와 이야기를 철학의 주제로 삼거나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처럼 시적 상상력을 강조한 과학철학자도 있다. 우리의 크리스챤 서사문학도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절필한 김승옥은 그렇다 치고 『야훼의 밤』의 조성기나 『에녹행전』의 김성일, 『에릭 직톤의 초상』의 이승우, 『적자생존』의 고성우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학자에 속하는 폴 마샬(Paul Marshall)도 최근의『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Heaven Is Not My Home)에서 기독작가들이 쓴 환타지 소설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왕국 이야기』(The Cronicles of Narnia)나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J.R. Tolkien)이 쓴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은 직접 하나님과 구세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는 주장이다. 아닌게 아니라, 마샬의 책 자체도 <상어와 함께 헤엄치기>, <즐거운 하루 저녁> 등 그가 필리핀과 수단과 민스크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경험했던 내러티브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가까이만 해도 이 땅의 유교전통에 맞서『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고 이야기하는 김경일 교수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 세계관을 포스트모던 내러티브로 담을 수 있을까? 그것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20세기 초반의 제임스 조이스(James Joice)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어 1950 년대에 활짝 핀 부조리문학의 전통을 잇는 198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 문학은 우리에게 삶의 또 다른 모습을 이해시켜 주고 있다. 사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주체의 불안과 기승전결이라는 고전적 플롯의 해체, 이런 형식 속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모습은 다름 아닌 죄인인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가? 문제는 포스트모던한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을 어떤 세계관을 가진 작가가 그려내는가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회복하여 제대로 된 소설과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매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과 실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처음부터 단순한 지식체계의 성립보다는, 삶 한가운데서의 실천을 목적으로 해왔다. 카이퍼에게 기독교는 '삶의 사실(fact of life)이었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수행하는 인생관(lifeview)이었다. 도예베르트도 세계관은 그 구체적 충만함 때문에 이론적 체계가 아니며, 오히려 삶의 구체적인 정황에 열려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만일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하나의 이론운동이나 학술활동으로 제한했다면 반성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이런 연유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반드시 기독 시민(정치)운동이나 환경운동, 기독경영인과 직장인운동, 기독교사와 학교운동, 기독 예술과 대중문화활동 같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주로 배출해야 할 사람은 조용한 학자가 아니라, 각 전문 분야에서 "치열한 삶"을 살면서 "기독인의 세계관을 삶으로 녹여낸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생겨난다 해도 저절로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수준높은 '내러티브'가 창작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작가 조성기의 말처럼 신앙인의 "삶을 녹여내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남기는데 생애를 건 사람들을 많이 키워내는 일이 필요하다.
 
'기독교 세계관' 인가, '개혁주의 세계관' 인가?
박총 님의 지적대로 여태까지 배워온 기독교 세계관은 화란 개혁교회에서 일어난 '신칼빈주의'(Neo-Calvinism)라는 신학운동의 산물이다. 다만 이 운동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먼저 썼을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관을 '개혁주의 세계관'(Reformed Worldview)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성경적 세계관(Biblical Worldview)' 또는 본래적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에 속하는 하나의 가지일 뿐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든지, 살림의 세계관이든지, 오순절 교회의 세계관이든지,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기 위해서는 공통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 세계관 내의 공통점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차이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 말씀대로 어떤 기독교 세계관이든지 과거의 기독교 전통들과 연결되어 있고 각각의 세계관들은 현재의 상황에 응답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개혁주의 세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칼빈-카이퍼로 이어지는 특정한 전통과 접맥되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세계관은 개혁교회 신자들만의 것은 아닐 수 있다.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능력,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세상 속에서 신자들의 책임,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역사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재세례파 전통에 서있는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나 WCC의 인도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igin)도 개혁주의 세계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살아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되려면 오늘의 역사와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 19세기의 화란 개혁교회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성립된 개혁주의 세계관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적용되고 생동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한국에서 개혁주의 세계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최태연
천안대학교 교수이며 기학연 실행위원이다.
E-Mail: chrisoph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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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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